중국 허난성 정저우(鄭州)에 '제국안란(濟國安瀾)'이라고 새긴 비석이 있다. '나라를 구하고 물길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1938년 중일전쟁 때 국민당 정부 주석 장제스(蔣介石)가 황허(黃河) 제방 폭파를 기념해 세웠다. 그는 일본군을 막으려고 주민에게 알리지 않은 채 둑을 터뜨렸다. 강물이 8000㎢를 덮쳐 89만명이 죽고 1250만명이 집을 잃었다. 중국인들은 장제스를 비난할 때 이 사건을 자주 거론한다. 비문을 비꼬아 '제국엄란(濟國淹瀾)'이라 했다. '나라를 물에 잠기게 했다'는 손가락질이다.
▶장제스는 전쟁 셋을 치렀다. 군벌(軍閥)을 무너뜨린 '북벌'과 항일전쟁, 국공(國共)내전이다. 그는 두 전쟁을 이기고도 마지막 전쟁에 져 1949년 대만으로 쫓겨났다. 430만 정규 병력에 미국 원조까지 받은 그가 120만 마오쩌둥 군대에 패한 것은 군의 부패와 민심 이탈 때문이었다. 황허 제방 폭파로 경작지가 망가져 300만명이 굶어 죽을 때도 국민당 간부들은 재물 챙기느라 바빴다.
▶중국 교과서에 주구(走狗)·비적(匪敵)으로 묘사되던 장제스 평가가 개혁·개방 후 달라지기 시작했다. 80년대 중국은 저장성 펑화(奉化)에 있는 장제스 생가를 단장하고 문화혁명 때 파헤쳐진 장의 어머니 무덤도 복원했다. 2011년 사회과학원이 펴낸 36권짜리 '중화민국사(1911~49)'는 장제스 재평가의 상징이다. '장이 의무반고(義無反顧·정의를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나아감)를 외치며 대일 항전을 결정했다'고 썼다.
▶지난 7월 중국 사회과학원 원로 연구원 두 명이 쓴 '장제스 전기'가 벌써 110만부 팔렸다고 한다. 장제스를 40년 넘게 연구한 두 학자는 장제스 일기와 비밀에서 풀린 문서를 토대로 북벌과 항일전쟁 공적을 객관적으로 기술했다. 중국이 '비적'으로 욕하던 장제스를 껴안는 것은 대만과 이룰 '정치적 통일'을 염두에 두고 2300만 대만인의 민심을 얻으려는 작업이다. 통일의 날이 현실로 다가올수록 장제스를 마오쩌둥과 함께 20세기 전반을 빛낸 영웅으로 재평가하는 움직임이 활발해질 듯하다.
-조선일보, 2013/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