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인천 이후 4할 타자 왜 없나 '백인천 프로젝트'에 대한 그의 대답
"야구는 4할, 인생은 삼진… 다시 돌아간다면 부드럽게 중독되고 싶어"
1982년 '전설의 타율' 힘은…감독 겸 선수로 4할1푼2리
"4할 타율은 기량 문제 아닌 얼마나 중독됐느냐의 문제"
내가 외계인? 난 中毒人일뿐… 난 야구 소질 없는 사람
재능많은 이종범·장효조가 4할 못친 건 중독이 덜 된탓
나만큼 미친 선수는 이치로
가장 까다로웠던 투수?
박철순 보다 권영호, 그는 기합이 살아있었다
내게 홈런 맞자 분해하던 그 모습 아직도 선해
대한민국 수출1호 프로선수
경동고·농업銀 홈런타자, 19세에 장훈이 뛰던 일본팀에 스카우트 돼
일본 2군시절 혈서까지…
'1군 못 올라가면 죽어도 한국 안돌아간다' 日記, 지금 봐도 난 참 독했다
야구 중독의 댓가는 인생
간통죄… 전 재산 날리고 뇌출혈·반신 불수 앓기도
아픔 컸지만 후회는 안해 "다시 태어나도 야구"
- 1982년 프로야구 원년의 자신을 끝으로 4할 타자가 사라진 현상을 두고 백인천은“그때의 나만큼 야구에 중독된 선수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는“4할은 기술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며“야구를 안 하면 죽을 것처럼 중독자가 돼야만 가능한 경지”라고 말했다 /이진한 기자
그때 백인천이 920g짜리 물푸레나무 배트를 들고 타격자세를 취했다. 사람이 달라보였다. 배트를 든 그에게선 기합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타석에 서면 현역시절 그의 전매특허인 직선 타구를 펑펑 날려보낼 것 같았다. 배트엔 유성펜으로 '首位打者(수위타자) 打率(타율) 0.412'라고 적혀 있었다. 프로야구 원년이던 1982년. MBC청룡 감독 겸 선수였던 그가 정규시즌 마지막 타석에서 안타를 친 방망이였다. 그가 마흔일 때였다. 지금은 야구 저술가로 성장한 한 소년의 어머니가 그해 개막전을 TV로 보다가 머리가 벗어진 백인천을 전두환으로 착각한 나머지 '저 사람은 시구(始球)했으면 됐지 뭘 경기까지 끼어들고 그러냐'고 했다는 에피소드가 있을 정도였다.
경기도 일산 자택으로 그를 찾아간 건 '백인천 프로젝트'라는 신간(新刊) 때문이었다. 31년 전 4할1푼2리를 기록한 백인천 이후 프로야구에서 4할 타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책은 KAIST 정재승 교수 등 58명이 모여 그 이유를 함께 분석하는 과정과 그 결론을 담아냈다. '4할 타자 미스터리'는 한국만의 현상은 아니다. 미 프로야구에선 1941년 테드 윌리엄스(Ted Williams·4할6리)를 끝으로 4할 타자가 사라졌고, 77년 역사의 일본 프로야구에선 4할의 문턱을 넘어선 타자가 아예 한명도 없었다.
4할 타자가 사라진 이유를 과학적 모델로 설명한 사람이 미국의 진화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였다. 테드 윌리엄스가 최후의 4할을 기록하던 해에 태어난 굴드는 진화론의 틀로 프로야구를 봤다. 그는 프로야구라는 하나의 생태계가 '진화적으로 안정화된다'는 가설을 내세웠다. '야구 선수들의 타격 능력이 갈수록 상향 평준화 돼 평균타율을 크게 웃도는 타자도, 크게 밑도는 타자도 사라진다'는 주장이었다.
'백인천 프로젝트'는 굴드의 가설을 한국에 적용해본 것이다. 30년치 KBO(한국야구위원회) 기록을 분석해봤더니 4할 타자가 사라진 대신 평균타율은 미세하지만 오히려 올랐고, 평균타율을 중심으로 타자들 간 편차는 줄었다는 걸 확인했다. 굴드의 가설은 한국서도 들어맞은 셈이다.
그렇다면 백인천의 존재는 뭔가. 20년간 일본 프로야구에서 뛰었던 그는 선진문명에서 지구(한국 프로야구)를 찾아온 존재, 말하자면 '외계인'이었다는 것이다. 백인천은 그같은 분석에 동의를 할까. 기자가 찾아간 20일 그의 집 거실 탁자 위엔 마침 '백인천 프로젝트'가 놓여 있었다.
―책은 읽어봤나?
"대충은 훑어봤다."
―선수 간 실력 편차가 줄어 4할 타자라는 돌연변이가 사라졌다는 분석에 동의하나?
"4할은 기량, 기술의 문제가 아니다. 실력 외에 야구에 대한 집념, 사명감이 있어야 한다. 4할은 마음 자세의 문제다."
―책은 '1982년의 백인천은 당시 한국 프로야구에선 외계인 같은 존재'였다고 했는데.
"글쎄…. 외계인이었다기보다 당시 나는 중독자였다, 야구 중독자. 내 생각과 생활은 오직 야구뿐이었다. 가장 중요한 건 중독의 수준이 달랐다는 것이다."
◇"1982년 백인천은 야구중독자였을뿐"
―중독이란?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으면 못 사는 것. 마약중독자가 약을 안 하면 못 견디는 것처럼. 1982년 MBC 청룡 선수였던 유승안은 나를 보고 '미쳤다'고 했을 정도니까."
―그런 연습과 노력이라면 역대 타율 2위인 이종범(3할9푼3리·1994년 당시 해태), 3위인 장효조(3할8푼7리·1987년 당시 삼성)도 뒤지지 않을 텐데?
"장효조, 이종범은 소질만 보면 나보다 낫다. 그런데도 그들이 4할을 못 친 건 중독이 안 된 거다. 중독까지 못 갔다는 건 아마 자신들이 가장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러면 누가 중독자인가?
"스즈키 이치로(鈴木一朗·뉴욕 양키스). 그와 대화하면 싸늘한 기운이 느껴진다. 오로지 야구만 생각하는 기운이 매섭다. 이치로도 나처럼 재능이 없었지만, 연습을 통해 중독자가 됐다." 인터뷰 이틀 뒤 불혹의 이치로는 미·일 통산 4000 안타의 대기록을 세웠다.
―굳이 중독까지 가야 하는 이유는 뭔가?
"4할을 친다는 건 기술이나 실력만 갖고는 안 되는 일이다. 관건은 오히려 야구 외적인 '바이러스'다. 페이스를 망치게 하는 우연적인 사건, 그리고 술·여자·도박 같은 유혹들. 선수생활을 하다보면 99%는 그런 유혹에 빠지는 실수를 하게 마련이다. 거기서 U턴(유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 중독자는 유혹에 빠지더라도 금방 뿌리치고 U턴할 수 있다. 야구보다 재미있는 일이 없는 중독단계까지 가야하는 이유다."
- MBC청룡 감독 겸 선수로 뛰던 시절 타석에 선 백인천. /조선일보 DB
―유혹에서 U턴한 적 있나?
"나도 술·도박·여자에 다 빠져봤다. 일본에 있을 땐 좋아하는 여자를 만나려고 한밤에 서울~부산 간 거리를 차를 몰고 달려간 일도 있다. 싫다는 여자에게 죽자 살자 매달린 적도 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여자가 붙잡아도 칼같이 뿌리치고 야구로 돌아왔다."
그는 "한국에 돌아온 1982년 당시의 집중력은 일본에서 3할4푼을 쳤던 1979년보다 10% 이상 좋았다"고 했다. 백인천은 "나이 마흔이었지만 만약 일본에 있었다면 수위타자를 다퉜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한국 선수 중엔 중독자가 없나?
"중독 수준에 가더라도 그게 지속이 안되는 것 같다."
―그렇다면 앞으로 4할을 치는 선수가 나올 수 없다는 얘긴가?
"기록은 깨지는 법이다. 누가 중독자가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확실한 건 중독자가 되지 않으면 깰 수 없다는 것이다. 야구가 아닌 다른 분야에서 성공한 전문가들을 만나 이 얘기를 하면 오히려 더 잘 이해한다."
◇박철순보다 권영호가 더 까다로웠다
―1982년 4할을 쳐낸 야구 중독자 백인천에게도 힘겨운 상대가 있었나?
그해 최고의 투수는 단언컨대 OB의 박철순이었다. 미국 마이너리그를 경험한 박철순은 시즌 24승을 올렸다. 그 과정에서 이룬 22연승 기록은 백인천의 4할 타율과 함께 불멸의 기록으로 꼽힌다. 백인천이 꼽은 건 그러나 박철순이 아니었다.
"박철순도 훌륭했다. 하지만 가장 까다로운 투수는 삼성의 권영호였다. 그를 상대로 홈런을 친 적이 있는데 홈런을 맞은 권영호가 송진 주머니를 패대기 치면서 분해하던 모습이 선하다. 그는 기합이 살아 있었다. 대부분의 투수는 내가 타석에 들어서 노려보면 눈을 피했다. 그는 타자의 허를 찌르고 약을 올리는 노련함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근성이 대단했다. 그를 상대로 타율이 좋지 않았다."
기합에서 그에게 밀리지 않는 투수가 한 명 더 있었다. "해태 김성한도 기죽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원년에 그는 투수와 1루수를 오갔는데 1루수를 설 때 내가 타석에 나서면 투수를 향해 '(백인천) 아무것도 아냐. 몸 쪽으로 확 찔러!'라며 소리쳤다. 내가 '야, 너 좀 조용히 해'라고 해야 할 정도였다."
―한국 투수들의 미세한 구세(くせ·습관)를 읽을 수 있었기 때문에 4할을 쳤다는 분석도 있다.
"구세를 읽는 건 물론 일본에선 기본이다. 그러나 구세를 알고 친다고 해서 모두 안타가 되는 건 아니다. 구세 덕분이라면 한국서 뛴 재일동포 타자들도 다 4할을 쳐야하는 것인가?"
―1982년 당시 한·일 프로야구의 격차를 인정하지 않는 것인가?
"기량의 차이보다 자세의 차이가 있었다. 스포츠는 솔직해야 성공한다. 자신을 속이면 성공하지 못한다. 배팅볼 1000개를 쳐야하는데 그걸 안 하고도 '했습니다'라고 하는 것과 '안 했습니다'하고 솔직히 인정하는 차이는 크다. 일본에서 배운 것이 솔직한 자세였다."
―4할 타율을 의식했나?
"시즌 마지막 경기가 있던 날 유백만 코치가 '감독님, 마지막 경기인데 오늘은 그냥 좀 쉬시죠'라고 나를 만류했다. 이유는 설명하지 않았다. 나는 '무슨 소리 하는 거야!'라며 일축한 뒤 출장해 안타를 쳐댔다. 전날까지 내 타율이 4할대에 간신히 턱걸이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날 무안타로 끝나면 4할이 깨질 수도 있었던 셈이다. 나는 전혀 의식하지 않고 있었는데 유 코치는 그걸 알고 나를 붙잡았던 것이다."
◇야구 중독자의 삶 후회는 안한다
1982년 당시 백인천을 재일동포라고 생각한 야구팬이 많았지만, 그는 대한민국 수출 1호 프로선수였다. 경동고와 농업은행 시절 홈런타자였던 그는 1962년 만 19세에 장훈이 뛰던 일본 도에이 플라이어스(현 닛폰햄 파이터스)에 스카우트됐다. 한·일 국교 정상화 전의 일이다. 한국에선 '돈에 팔려가는 매국노', 일본에선 '조센진'으로 불렸다. '실패할 것'이라는 지배적인 예상을 깨고 그는 일본 진출 1년 반 만에 1군에 올라, 그 뒤로 19년간 활약했다.
일본 프로야구 통산 1969경기 출전, 1831안타, 타율 2할7푼8리, 209홈런, 776타점, 212도루를 남겼다. 수위타자 한 번(3할1푼9리·1975년)을 포함, 3번 3할대를 기록했다. 그는 특히 삼진을 잘 안 당하는 걸로 유명했다. 통산 7040타석에서 삼진이 471개. 평균 15타석에 1개꼴이었다.
하지만 그는 장외의 삶에서는 큰 삼진을 잇따라 당했다. 프로야구 시즌 중 간통죄로 구속돼 이혼(1983년)하고, 모든 재산을 잃고 빈털터리가 됐다. 이듬해 현역에서도 퇴진했다. 지도자로 복귀해 1990년 LG트윈스를 우승시켰지만 1997년 여름 삼성 라이온즈 감독 때 잇따른 잡음 속에 뇌출혈로 쓰러져 좌반신 불수가 됐다. 현역시절 70㎏을 조금 넘던 그는 쓰러질 당시 96㎏이었다. 백인천은 "건강관리에 실패, 20㎏짜리 쌀푸대를 지고 다녔던 셈"이라고 말했다.
―타격왕 백인천은 경기장 밖에서는 결코 행복했다고 할 수는 없었다.
"야구 중독자로 산다는 건 야구와 가정생활 둘 다 잘할 수는 없다는 걸 뜻한다. 나 역시 중독의 대가로 이혼을 했다. 야구 중독과 행복한 가정생활은 병행할 수 없다. 후회는 하지 않지만 불행한 삶이었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겐 돌아가 의지할 동반자가 있었다. 그게 야구였다."
- 백인천이 1982년 프로야구 정규시즌 마지막 타석에서 사용했던 배트를 들어 보이고 있다. 그가 31년째 보관 중인 배트엔‘首位打者’(수위타자)라는 글씨와 함께, 타율 0.412, 홈런 19개, 타점 64라는 그해 성적이 적혀 있다. /이진한 기자
그는 과거 한 인터뷰에서 "절대 이혼만은 못한다던 아내와 헤어지기 위해 내 스스로 간통죄로 처벌받는 길을 택했다"고 한 적이 있다. 말하자면 인생에서 '자발적 삼진'을 택한 것인데, 그 대가로 그는 타격왕의 이미지에 큰 오점을 남겼고, 경제적으로도 힘든 처지가 됐다.
―중독의 보상은 스타가 되는 것인가?
"그것도 하나의 기쁨이자 보상이다. 하지만 스타가 되면 중독상태를 유지하기 더 어려워진다."
―행복도, 스타가 누리는 기쁨도 보장받지 못한다면 왜 굳이 중독자가 돼야하나?
"야구에 중독돼 본 사람만이 아는 쾌감이 있다. 야구는 다른 스포츠에는 없는 드라마틱한 순간들이 벌어진다. 홈런, 도루, 수비, 안타 등 상황마다 관중의 환호가 다르다. 경기 수도 많고 관중도 많다. 다른 운동은 야구만큼 중독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현역시절 일본 프로야구의 명포수였던 노무라 가쓰야(野村克也)씨는 나보다 여덟살 위다. 현역시절 그에게 '영감님, 언제 그만두실 거요?'라고 물은 적이 있다."
김성근 감독이 SK시절 선수들의 수준을 업그레이드시킨 'ID 야구메모'의 모델이 노무라 매뉴얼이다. 노무라는 야구를 읽는 눈을 가진 명포수이자 홈런타자였다. 그는 현역시절 타석에 들어선 타자에게 '너, 어젯밤에 좋았다며?' 같은 속삭임으로 정신을 흩뜨리는 걸로 악명 높았다. 백인천은 타석에 들어설 때 귀에 솜을 틀어막고 들어서 노무라를 웃긴 적도 있고, 그를 향해 소금을 뿌린 적도 있다.
"노무라씨는 '인천아, 야구는 자신이 그만두는 것 아니다. 구단에서 그만하라며 너를 자를 때까지 하는 거다. 홈런을 친 뒤 베이스를 돌 때의 쾌감은 오직 해본 사람만이 알기 때문이야'라고 했다."
―다시 태어나도 야구를 할 것인가?
"…. 다시 할 것 같다. 다시 한다면 아마도 더욱 중독자가 되려 할 것이다."
◇다시 야구하면 부드러운 중독자가 될 것
백인천은 독종이다. 1970년 긴테쓰와 경기 때 아웃코스로 빠진 볼에 스트라이크를 선언해, 자신을 삼진아웃 처리한 심판을 패대기쳐 난리가 난 적이 있다. 통산 데드볼이 57개로 역대 외국인 중 1위다. '타석의 타자는 절대 투수를 편하게 해줘서는 안된다'며 홈플레이트에 바짝 붙어섰기 때문이다. 1997년 여름 뇌출혈로 쓰러졌던 그는 며칠 만에 퇴원해 한낮 인적이 뜸한 남한산성을 찾아가 걸음마 연습을 했다. 무수히 넘어져 얼굴에 피가 났지만 결국 정상의 몸을 되찾았다.
―독하다. 타고난 것인가?
"어려서부터 유별났다. 한다면 하는 성질이어서 아버지, 어머니도 내게 함부로 말씀을 안 하셨다."
그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신발을 신은 채로 배재중학교 교장실에 쳐들어간 적도 있다. 그 학교 입학시험에 떨어진 그는 "내가 떨어질 리가 없다. 답안지를 좀 봐야겠다"며 요구했다고 한다. 1962년의 아시아선수권을 앞두고 발목 골절을 당하자, 휠체어에 앉은 채로 타격 연습을 했다.
―모두의 예상보다 일찍 1군에 올랐다.
"2군 시절 절망적이었다. 그 때 혈서로 쓴 일기를 지금도 갖고 있다. 손가락을 깨물어 먼저 내 이름 석자를 썼다. 그리고 '1군에 올라가지 않는다면 죽어도 한국에 돌아가지 않겠다'고 썼다. 지금 읽어도 '독하다'는 생각이 든다."
―야구를 대하는 당신의 태도는 미국의 4할 타자 타이콥(Ty Cobb), 테드 윌리엄스와 닮은 것 같다.
1905년 데뷔한 타이콥은 23년간 4할대 타율을 세 번이나 기록했다. 상대 선수들이 알아서 피할 만큼 냉혹한 투지로 유명했다. 테드 윌리엄스는 잠잘 때조차 방망이를 곁에 두고 틈만 나면 배트를 닦아 '타격에 미친 사나이'로 불렸다('타격의 과학'·김은식 번역 및 해제·이상).
"독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다. 이치로도 실력에 비해 인기가 없지 않나."
백인천은 경동중 2학년 때 선생님이 보던 '야큐카이(野球界)'라는 잡지를 봤다. 그때 표지인물이 일본 대학야구의 스타 나가시마 시게오(長嶋茂雄)였다. 그는 후일 일왕이 보는 앞에서 홈런을 치는 등 프로야구의 국민스타였지만, 백인천은 잡지 속 그를 보고 '그와 함께 야구를 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백인천은 "일본에서 만난 나가시마는 플레이의 모든 것이 멋있었다"고 말했다. 1972년 3월 29일 요미우리 자이언츠와 시범경기에서 백인천은 투런 홈런을 쳤다. 3루를 돌 때 요미우리 더그아웃에서 "나이스 홈런!" 소리가 들렸다. 그가 존경해 마지않던 나가시마였다. 그해 백인천은 생애 첫 3할 타율을 기록했다.
―야구인생의 유일한 영웅은 나가시마 시게오인가?
"그렇다. 존경하는 인물이다."
2004년 나가시마 시게오는 뇌경색으로 쓰러진다. 그 소식을 들은 백인천은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한다'는 편지와 함께 옥 매트를 일본으로 보냈다. 나가시마는 한국어로 '감사합니다'라고 쓴 답장을 보내왔다.
백인천은 열여덟살 이후 지금까지 한 번도 머리를 기른 적이 없다. 평생 스포츠 머리였다. 헤어스타일이 정해진 게 경동고 2학년 때였다.
대구 원정을 간 어느 날. 김일배 감독이 여관 자신의 방으로 백인천을 불렀다. 김 감독의 앞에는 소주 됫병과 김치가 놓여 있었다. 김 감독은 "인천이 너는 대한민국에서 충분히 1인자가 될 수 있다. 그 대신 누가 봐도 일류 선수가 됐다고 할 때까지 지금 내가 이야기하는 것을 꼭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첫째 머리를 기르지 말고, 둘째 술·담배를 하지 말고, 셋째 여자를 멀리하라'고 말했다. 백인천은 그 자리에서 스승이 주는 소주 두 사발을 얻어마시고 뻗어 버렸다. 그는 "다른 건 몰라도 그 뒤로 한번도 머리를 길러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선수로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스타였지만 감독으론 아쉬운 점이 많았다는 평가다.
백인천은 2002년 롯데 감독 시절 이대호 학대 논란 등으로 부산 팬들의 원성을 사다가 결국 이듬해 해임됐다.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간다면 옛날처럼 돌진하는 스타일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부드러운 중독자가 될 것이다. 그런 이치를 일찌감치 알 수 없다는 게 인생인 것을 어쩌겠나."
백인천은 "삶의 굴곡이 많았다. 하지만 야구에 정말 미쳐서 했더니 4할의 타율, 그리고 한·일 양국 수위타자에 오른 유일한 타자라는 기록이 남았다. 언제 깨질지 모르지만 그 기록은 나와 영원히 함께 갈 것"이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3/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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