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뇌과학자 최원규교수, '조국을 위하여' 3代

하마사 2013. 7. 26. 16:30

할아버지는 臨政 멤버였던 독립투사 최창식 선생
아버지는 '중화학공업 청사진' 만든 최영화 박사
아들 데니스 崔교수, KIST 뇌과학연구소장 맡아

노벨상 후보로 꼽히는 세계적 腦과학자 "나의 뿌리인 한국에 기여하게 돼 영광"
祖母인 故김원경 여사는 3·1운동 직후 여성 대표로 밀파, 임정 참사 지낸 독립운동가

데니스 최 사진

할아버지는 조국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아버지는 중화학공업 개발의 청사진을 만들어 '한강의 기적' 초석(礎石)을 놓았다. 그 아들은 이제 한국의 미래를 먹여 살릴 뇌과학 연구를 지휘한다.

지난 22일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뇌과학연구소장으로 부임한 데니스 최(Dennis W. Choi·59 한국명 최원규·사진) 미 뉴욕주립대(SUNY) 스토니브룩 의대 교수 일가의 3대(代)에 걸친 조국에 대한 헌신(獻身)이 화제가 되고 있다.

데니스 최 교수는 노벨상 수상자 선정 때마다 유력한 후보로 꼽히는 세계적 뇌신경과학자다. 하버드대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던 1977년엔 신경안정제인 '벤조다이아제핀'의 약리 작용을 세계 최초로 규명했다. 25세 때 하버드대에서 의학과 약리학 두 분야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미국립보건원(NIH)과 국립뇌과학재단 등이 최고 과학자에게 주는 상을 휩쓸었고, 1997년에는 호암상을 받았다. 데니스 최 교수는 뇌과학연구소장으로 부임하면서 "나의 뿌리인 한국에 대해 많이 배우고 헌신할 기회"라고 말했다.

최 교수의 할아버지는 임시의정원 초대 의원을 지낸 독립투사 최창식(崔昌植·1892~1957) 선생이다. 최 선생은 일제 치하에서 황성신문 기자와 오성학교 교사를 지냈고, 학생들에게 한국사를 가르쳤다는 죄목으로 옥살이를 했다.

(왼쪽 사진)1919년 10월 11일 촬영한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원년 요인들의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셋째가 데니스 최 교수의 조부인 최창식(흰 점선) 선생이다. 맨 오른 쪽은 조모인 김원경 여사이며, 바로 뒤에 김구 선생이 서 있다. 오른쪽에서 넷째 사람은 안창호 선생이다. (오른쪽 사진)데니스 최 박사의 부친인 최영화 박사가 작성해 1970년 대통령에게 보고한‘한국기계공업 육성 방향 연구조사 보고서’.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육성의 초안이 됐다. /한국이민역사연구소·인터넷규장각 제공
(왼쪽 사진)1919년 10월 11일 촬영한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 원년 요인들의 기념사진. 앞줄 왼쪽에서 셋째가 데니스 최 교수의 조부인 최창식(흰 점선) 선생이다. 맨 오른 쪽은 조모인 김원경 여사이며, 바로 뒤에 김구 선생이 서 있다. 오른쪽에서 넷째 사람은 안창호 선생이다. (오른쪽 사진)데니스 최 박사의 부친인 최영화 박사가 작성해 1970년 대통령에게 보고한‘한국기계공업 육성 방향 연구조사 보고서’. 우리나라 중화학공업 육성의 초안이 됐다. /한국이민역사연구소·인터넷규장각 제공

   

조부(祖父)인 최창식 선생은 3·1운동 이후 상하이로 망명해 임시정부를 탄생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 내무위원장, 법무총장 등으로 활동하다가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돼 3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가 됐다. 광복 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1957년 만주에서 생을 마감했다.

1981년 작고한 할머니 김원경(金元慶) 여사 역시 3·1운동 직후 여성계 대표로 상하이에 밀파돼 애국부인회와 적십자 책임자이자 임시정부의 초대 참사를 지낸 여성 독립운동가였다. 최창식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미국으로 건너가 보스턴에서 생을 마쳤다. 김 여사가 중국에서 나올 때 가져온 최창식 선생의 유품인 병풍 뒷면에서 임시정부 자금 모금 비밀 장부가 발견돼 화제가 되기도 했다.

데니스 최 교수는 미국 미시간주(州)에서 태어났다. 최 교수가 KIST로 부임하자 가장 기뻐한 사람은 아버지 최영화(崔榮華·87) 박사였다. 최 박사는 한국인 최초의 MIT 기계공학 박사로, 학위를 딴 뒤 MIT와 터프츠대 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최영화 박사는 25일 통화에서 “늘 아들이 한국에서 일했으면 했다”며 “특히 내가 관여했던 KIST로 간다고 해서 정말 좋았다”고 말했다.

1960년대 박정희 대통령은 월남전 참전 대가의 하나로 미국 존슨 대통령에게 바텔연구소와 같은 종합 연구소 설립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바텔연구소 수석 연구원이던 최영화 박사는 KIST 설립을 직접 지원했다. 그는 또 KIST 초대 원장인 최형섭 박사와 함께 미국에 있는 한국인 과학자를 KIST로 유치하는 활동에도 참여했다.

특히 1970년 6월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에게 직접 중화학공업 육성의 중요성을 보고한 것도 최영화 박사였다. 최 박사는 우리 정부의 용역을 받고 KIST와 함께 중화학공업 육성 계획을 만들었다. 그가 청와대로 들어가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직접 설명한 ‘기계공업 육성 방안 연구 조사 보고서’는 한국 중화학공업 개발의 청사진이 됐다. 최 박사는 당시 “한국의 공업에 기계 소재, 중기계, 조선, 자동차, 농업 기계, 전기 기계의 6개 공장을 중점 육성해야 한다”고 박 대통령에게 역설했다고 했다. 이후 1970년대 초부터 중화학공업 개발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난 최영화 박사는 중국이 공산화되면서 부모와 생이별을 했다. 최 박사는 “저만 가까스로 미군과 일본으로 탈출했다”며 “부모님이 일본은 물론이고 중국 국적도 거부했기에 나중에 미국으로 갈 때는 무국적자였다”고 말했다. 최 박사는 “아버님 사후 어머니가 남동생과 홍콩을 통해 탈출해 미국에서 상봉했다”고 말했다.

데니스 최 교수 부자(父子)에게는 과학기술을 통한 경제 발전이라는 똑같은 DNA가 있다. 최 교수는 스탠퍼드대와 워싱턴 의대에서 교수로 있다가 2002년부터 5년간 세계적 제약사인 머크사 수석 부사장으로 신약 개발을 지휘했다. 그는 늘 “한국의 뇌연구가 발전하려면 ‘의학 연구를 통한 사회 발전’이라는 강력한 엔진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기초 연구의 실용화에 적극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는 것.

KIST는 데니스 최 교수 영입으로 스토니브룩대와 공동으로 하는 연구가 활발해지고 외국 유명 과학자 유치에도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뉴욕주립대의 4개 캠퍼스 중 하나로 출발한 스토니브룩대는 1957년 개교 이래 노벨상 수상자를 세 명 배출한 연구 중심 대학이다.

데니스 최 교수가 재직 중인 스토니브룩 의대는 뇌과학에 특화된 학교로, KIST 뇌과학연구소와는 치매 메커니즘 연구와 치매 진단 및 치료 분야에서 긴밀히 협력할 예정이다. 스토니브룩 의대 신경학과장과 신경과학연구소 이사를 겸직하는 데니스 최 교수는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연구를 할 예정이다.

최영화 박사는 “아들이 미국에서 태어나고 자라 우리말을 못해 걱정”이라며 “한국에 기여할 수 있도록 잘 도와달라”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3/7/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