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롱런의 비결] 39년간 '히트 만화 제조기' 만화가 허영만
만화공장 사장 대신 만화가 - 문하생 수십명 거느리다
잘나가는 화실 돌연 해체… "돈 덜 벌어도 작품성 추구"
끊임없이 배우고 관찰하고 - 작품 연재 들어가기 전
2~4년씩 '과외 수업'도 불사…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메모
①경쟁이 치열한 시장에서 ②개인의 실력과 노력으로 ③20년 이상 버틴 특A급 현역이 '롱런(Long Run)'의 주인공이다. 45년 드라마 쓴 김수현(70), 31년 야구감독 한 김성근(71)에 이어 39년 만화 그린 허영만(66)이 궁금했다. 왜 남들은 반짝하고 사라질 때 허영만은 롱런했을까? 수십년 지켜본 지기(知己)들에게 물었다.
1974년 '각시탈', 1994년 '비트', 1999년 '타짜', 2003년 '식객'. 허영만(66)이 그렸다. 그거 말곤 공통점이 없다. 주인공·소재·장르·독자층이 제각각이다. 전부 히트했고 드라마·영화·애니메이션·게임이 됐다. 이달 17일엔 영화 '미스터고'가 한·중(韓中) 동시 개봉했다. '제7구단'(1984년)이 원작이다.
1966년 1월 175㎝에 깡마른 19세 허영만이 이불 한 채 메고 서울역에 내렸다. 여수에서 서울까지 비둘기호 야간열차로 9시간 걸렸다. 고교 졸업장 받자마자 서울 금호동 사는 만화가 박문윤 문하에 들어가는 길이었다. 그해 서울엔 그런 문하생이 수백명이었다. 허영만은 뭐가 달랐을까?
47년 지켜본 박문윤(69)이 말했다. "그 친구는 뭘 하든 '필요 이상' 노력해요." 필요한 만큼 노력하는 사람은 흔하다. 필요한 것보다 더 노력해야 탁월해진다.
'필요 이상' 노력해라
박문윤도 22살 떠꺼머리총각이었다. 부모님 모시고 금호동 단독주택에 살았다. 그 집에 문하생 4명이 숙식했다. 마루에 다다미를 깔고 다 함께 먹고 자며 128쪽 만화책을 한 달에 두 권 그렸다. 문하생은 연필 밑그림을 지우는 '지우개질'부터 한다. 허영만은 처음부터 데생을 맡았다.
"워낙 잘 그렸어요. 뚱하고 고집이 셌지요. 속으론 항상 자기 만화 스토리를 생각했어요. 앞날을 내다보고 손익을 계산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몰입했어요. 완성도 높게 그리겠다는 근성이 있었어요."
'이끼'를 그린 윤태호(44). 1988년부터 2년간 허영만 문하생이었다. 허영만이 연재 원고 1회분(25~30쪽)을 그리면 참고서적이 20~30권 쌓였다. 취재 갔다 돌아와 화실 여직원에게 비닐봉투를 건네면 24~36컷 필름통이 도토리처럼 쏟아졌다. 윤태호가 속으로 '우리 선생님은 왜 이렇게 힘들게 살까' 했다. "두 가지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나도 유명해지려면 저렇게 고생해야 하나?' '근데 만화는 정말 재밌네.' 선생님보다 쉽게 그리는 사람 많았어요. 그분들 다 은퇴했어요."
다수와 거꾸로 가라
1980년대 전국 만홧가게가 3만곳이 넘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을 시작으로 장편 극(劇) 만화가 쏟아졌다. 만화가들이 문하생 수십명 거느리고 한달에 수십권씩 만화를 찍었다. 문하생이 200명 넘는 작가도 있었다. 중국으로 작업실을 옮기는 사람도 나왔다.
만화평론가 박인하(43)가 "화실이 아니라 공장에 가까웠다"고 했다. 배경 그리는 문하생도 '자동차 전문' '건물 전문'이 따로 있었다.
47년 지켜본 박문윤(69)이 말했다. "그 친구는 뭘 하든 '필요 이상' 노력해요." 필요한 만큼 노력하는 사람은 흔하다. 필요한 것보다 더 노력해야 탁월해진다.
'필요 이상' 노력해라
박문윤도 22살 떠꺼머리총각이었다. 부모님 모시고 금호동 단독주택에 살았다. 그 집에 문하생 4명이 숙식했다. 마루에 다다미를 깔고 다 함께 먹고 자며 128쪽 만화책을 한 달에 두 권 그렸다. 문하생은 연필 밑그림을 지우는 '지우개질'부터 한다. 허영만은 처음부터 데생을 맡았다.
"워낙 잘 그렸어요. 뚱하고 고집이 셌지요. 속으론 항상 자기 만화 스토리를 생각했어요. 앞날을 내다보고 손익을 계산하는 게 아니라 그냥 몰입했어요. 완성도 높게 그리겠다는 근성이 있었어요."
'이끼'를 그린 윤태호(44). 1988년부터 2년간 허영만 문하생이었다. 허영만이 연재 원고 1회분(25~30쪽)을 그리면 참고서적이 20~30권 쌓였다. 취재 갔다 돌아와 화실 여직원에게 비닐봉투를 건네면 24~36컷 필름통이 도토리처럼 쏟아졌다. 윤태호가 속으로 '우리 선생님은 왜 이렇게 힘들게 살까' 했다. "두 가지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나도 유명해지려면 저렇게 고생해야 하나?' '근데 만화는 정말 재밌네.' 선생님보다 쉽게 그리는 사람 많았어요. 그분들 다 은퇴했어요."
다수와 거꾸로 가라
1980년대 전국 만홧가게가 3만곳이 넘었다. '공포의 외인구단'을 시작으로 장편 극(劇) 만화가 쏟아졌다. 만화가들이 문하생 수십명 거느리고 한달에 수십권씩 만화를 찍었다. 문하생이 200명 넘는 작가도 있었다. 중국으로 작업실을 옮기는 사람도 나왔다.
만화평론가 박인하(43)가 "화실이 아니라 공장에 가까웠다"고 했다. 배경 그리는 문하생도 '자동차 전문' '건물 전문'이 따로 있었다.
'임꺽정'을 그린 이두호(70). 1990년대 초 허영만과 같은 잡지에 연재했다. 어느 날 잡지사가 "고료를 깎아달라"고 했다. 이두호는 "차라리 그만두겠다"고 거절했다. 이튿날 허영만이 전화를 걸어 "형, 나는 깎아주기로 했소" 했다. 이두호가 "솔직히 처음엔 불쾌했다"고 했다. 돈이 아니라 자존심 문제였다.
"근데 이유를 듣고 놀랐어요. '중간에 연재를 그만두면 작품 전체를 버리게 된다. 고료를 깎더라도 계속 연재하겠다'는 거예요. 제가 나이는 위지만 이 친구가 스승이구나 했어요."
만화가는 올빼미가 많다. 허영만은 아침형이다. 새벽 4시에 일어나 10시간 일하고 오후 3시 전에 화실을 뜬다. 윤태호가 "선생님을 보면서 뭐든 평생 하는 일은 '체력전'이라는 걸 알았다"고 했다. "30~40대도 한 달에 50~60쪽 그리면서 힘들어하는데 선생님은 '나 요즘 쉰다'고 할 때도 200쪽은 그려요."
총알을 쌓아라
허영만은 2002년 백두대간을 종주했다. 2009년 서해 굴업도부터 동해 독도까지 1650해리(3057㎞)를 요트로 일주했다. 10~20세 어린 청장년 12명을 지휘해 직접 배를 몰았다. 요트 이름이 '집단가출호'였다.
사진가 이정식(56)이 "허영만 친구들은 사회에서 만나면 각자 다른 당(黨)에 투표할 사람들"이라고 했다. 허영만이 맛집에서 어울리는 지인은 구본무(68) LG 회장부터 요리사·타짜·어부·목수·고층빌딩 유리창닦이까지 다양하다. 쉽게 모이기 어려운 괴짜들이 막걸리에 제철 별미 곁들여 번개 모임을 한다.
그는 취재와 메모로 계속 새로운 '총알'을 만든다. '식객' 연재 10년 동안 허영만은 스토리 작가 이호준(42)과 매달 두 차례 전국을 돌았다. 도축장이고 모내기하는 데고 안 가본 데가 없다. 다들 "그이 같은 메모광을 못 봤다"고 했다. "밥 먹다가" 메모하고(만화가 박문윤), "자다 일어나" 메모하고(김영사 대표 박은주), "배를 몰다" 메모했다(이정식).
이호준이 말했다. "선생님은 늘 '질질 끌면 뭐하냐' 해요. 옛날 명작 복간하자는 제안보다 신간 내자는 제안을 훨씬 반겨요."
영화 '타짜'를 감독한 최동훈(42)이 허영만과 요트를 탔다. 환갑 넘은 허영만이 쉴 새 없이 카메라로 요트의 세부(細部)를 찍었다. 최동훈이 "그 정도는 안 보고도 그리지 않느냐"고 묻자, "아니야, 이게 얼마나 신기하고 재밌니?" 했다. 최동훈이 말했다. "영화건 만화건 호기심이 있어야 끊임없이 '다음 작품'을 해요."
'과외' 받아라
허영만은 2006년부터 수요일 오후 7~10시를 '과외 시간'으로 못 박았다. 관상만화 '꼴' 연재에 앞서 4년간 역술인 신기원(74)과 마주 앉았다. 사제가 나란히 역술서 마의상서(麻衣相書)·유장상서(柳莊相書)를 읽었다. 실습 삼아 둘이 지하철 타고 돌아다니며 승객들 관상을 봤다. 신기원이 "허영만 실력이 평생 기른 제자 중 다섯째 안에 든다"고 했다.
한의학 만화 '동의보감'을 준비하느라 지난 2년간 한의사 셋에게 배웠다. 앞으로 5년 더 공부할 계획이다. 그를 가르친 황인태(50)가 말했다. "한번은 벽 거울을 보고 혼잣말하시데요. '아이고, 힘들다. 내가 이걸 할 수 있겠나.' 대가(大家)라고 좌절이 없는 게 아니지요. 그래도 끈덕지게 따라왔어요." 역술인과 한의사가 "허영만은 지각도 결석도 안 하는 제자"라 했다.
정점(頂點)이 오기 전에 던져라
허영만이 2004년 말했다. "신문 만화가로 잘나가던 박재동이 생판 모르는 애니메이션에 뛰어들 때 '대단하다'고 느꼈다. 한창때 과감히 팽개치는 사람이 멋지다." 허영만도 공장식 만화제작이 정점일 때 작가주의로 돌아섰다. '타짜'를 그리며 '식객'을 준비했고 '식객' 때 '동의보감' 과외를 받았다.
메가북스 마케팅실장 박성인(38)이 "바로 그 때문에 허영만이 한국 만화계에 새로운 활로를 뚫었다"고 했다. IMF 위기 이후, 만화방도 만화잡지도 크게 줄었다. 장편 만화가 설 자리를 잃었다. 동년배가 줄줄이 퇴장했다. 허영만은 '식객'으로 서점에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됐다.
김영사 대표 박은주(56)가 말했다. "허영만은 정보와 재미를 섞어 어른을 위한 교양 만화를 만들어냈어요. 얼마든지 인문학 단행본과 겨룰 수 있다고 봤어요." 김영사는 원래 권당 1만부만 팔려도 성공이라 생각했다. '식객'은 300만부 팔렸다.
-조선일보, 2013/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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