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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지성사 '多産의 상징' 원로 비평가 김윤식 교수

하마사 2013. 9. 11. 10:44

 

쓰려면 그 10배를 읽는다, 그게 글쓰기 윤리다

 

한국 지성사 '多産의 상징' 원로 비평가 김윤식 교수

2001년 은퇴 후 쓴 책 40여권, 지금까지 펴낸 책은 150권 넘어
나에게 읽기란 '생존을 위한 糧食', 젊을 땐 두더지처럼 도서관 뒤져… 식민지 사관 극복이 그때 숙제였지

읽지 않는 후배들 못마땅하냐고? 전혀, 우리에겐 우리의 필연이 그들에겐 그들의 필연이 있으니까
뒷방늙은이 훈계는 염치없는 거지, 나는 다만 내 일을 할 뿐이오

 

1년 전, 원로 비평가 김윤식(77)에게 육필 편지 한 장을 받았다. "강아지라도 길러야 하는 것인데, 그렇게 하지 못했소"라는 구절이 잊히지 않았다. 150권 넘는 저작으로 대표되는 한국 지성사 유례없는 다산(多産)의 상징. 그는 도쿄대 연구원 시절, 일본 근대 문예비평의 문을 연 문학평론가 에토 준(1932~1999)에게 "글쓰기란 무엇이냐"고 물었고, 세 살 위 동학(同學)은 "강아지를 길러보라"는 선문답을 했다. 에토 준은 강아지 키우는 시간을 제외하면, 자는 것, 먹는 것, 심지어 숨 쉬는 것까지 오직 글쓰기를 위해 썼던 사람. 그가 김윤식에게 한 말은 강아지 키우는 시간을 빼고는 더 글에 매진하라는 뜻으로 읽힌다. 하지만 김윤식은 에토 준의 충고를 거스르고, 자식은커녕 강아지조차 고사(固辭)하고 글만 파왔다. '읽다'와 '쓰다'의 주어로 그를 호칭하는 이유다.



최근 그는 '문학사의 라이벌 의식'(그린비)을 펴냈다. 새삼스럽지도 않다. 2001년 서울대 교수 정년 퇴임 후 쓴 책만도 40여권. 그보다는 이 혼신의 읽기·쓰기의 뿌리와, 지금 세대에게 줄 수 있는 교훈이 궁금했다. 입주 이후 30년째 살고 있다는 서울 서빙고동 아파트에는 노부부뿐이었다.

―(웃으며) 은퇴했다면서 왜 그리 많이 쓰시나.

"(웃지 않으며) 내 직업이 그거니까. 잘 할 수 있는 건 이것밖에 없으니까."

―선생에게 '읽다'의 의미는 뭔가.

"생존을 위한 양식(糧食). 우리 시대는 그러했소."

부산과 마산 사이, 경남 진영의 궁벽한 농촌에서 태어난 이 무뚝뚝한 비평가는 단답형을 선호한다. 고향과 유년 이야기를 그나마 조금 길게 풀어낸 시점은, "당신은 쓰는 게 목적이 아니라, 읽는 게 목적인 사람 같다"는 이야기를 꺼낸 뒤였다. 쓰기 위해서는 그 10배를 읽는다. 김윤식에게는 글 쓰는 사람의 윤리 같은 것이었다.

"집이 달랑 두 채 있는 곳이었소. 마을이라고 할 것도 없지. 강변 포플러숲, 그 안의 까마귀와 붕어, 메뚜기가 유일한 친구였으니까. 외로웠지. 나는 큰누이가 시집간 뒤 태어났소. 둘째 누이가 소학교에 다니기 시작하면서 밤이 되면 호롱불 밑에서 교과서를 봤소. 옆에서 훔쳐 보면서, 이런 세계가 있구나 싶었지."

농사를 짓던 아버지는 아들에게 교장선생님이 되라고 했다. 촌에서는 최고의 존경을 받는 직업이었다.

"그래서 교원양성소(서울대 국어교육과)에 갔소. 그런데 들어와 보니 대학이라서 학문을 한단 말이야. 선생도 선배도 없던 시절이었소. 자진 입대를 했지. 수색대였소. 제대하고 돌아와도 마찬가지야.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도서관 가는 일밖에 없었소. 두더지처럼, 제일 잘 할 수 있는 일은 '자료 뒤지기'였지. 예일 리뷰, 파르티잔 리뷰 등 미국 대학에서 나오는 계간지들이 1년 치씩 묶여 있었소. 서툰 영어 실력으로 사전 갖다 놓고 뒤졌지. 그때 정리한 노트 10권은 지금도 버리지 않았어요."

―그 '무차별 읽기'의 목적은.

"그때 우리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식민지 사관의 극복이었소."

지난해 펴낸 '내가 읽고 만난 일본'을 통해 그는 식민지 사관 극복의 여정을 800쪽으로 썼다. 10년 간격으로 1년씩 일본에 체류하며, 망국의 조선 유학생들이 일본에서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꼈는지를 다시 두더지처럼 뒤졌다. 한국 근대문학 연구는 결국 일본 근대문학 연구로 수렴된다는 사실을 목격했을 때의 열패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열패감을 극복해 한국 근대문학만의 정체성을 확보해야 한다는 당위. '한국근대사상사'와 '이광수와 그의 시대'는 그 노력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다음 달 와세다 대학 초청으로 특강을 하러 간다고 했다.

원로 비평가 김윤식에게‘읽다’와‘쓰다’는 타동사가 아니라 자동사다. 목적어‘무엇을’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읽고 쓰는 그 자체가 중요하다. 주장을 관철하기 위해서가 아닌 삶의 이유로서의 글쓰기다. /이진한 기자
―다시 일본행이다. 이번 강의의 주제는.

"제목은 '한국에서 외국 문학을 어떻게 수용했는가.' 난 이런 얘기를 하려 하오. (일제강점기) 경성제대 영문과에 사토 교수라고 있었어요. 그 사람이 정년을 마치고 일본 돌아가서 이런 얘기를 했소. '경성제대 영문과에는 조선의 수재들이 다 모여 있었다. 그 수재들이 외국 문학을 통해 민족의 해방과 자유를 염원했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사토의 직계 제자가 최재서(1908~1964)지. 지금 사람들이 보기에 최재서는 (조선문인협회 조직을 주도한) 친일파요. 그런데 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거지."

오랫동안 그는 '실증주의적 정신'을 대표하는 평론가였다. 문학에서도 인간의 내면보다 자료를 신뢰하는 실증적 연구와 학문적 엄정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번 책 '문학사의 라이벌 의식'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김윤식의 내면 속엔 까마귀와 메뚜기에로 되돌아가기 위한 지향성이 숨어 있어 틈만 나면 분출해 오르고자 했다."

―최근 쓴 책에는 고백적 문장이 많아졌다.

"사실이오. 유서의 일종이라고 보면 됩니다. 죽을 때가 됐잖소."

―그런데도 왜 그리 무리하느냐고 무례하게 묻는다면.

"배우니까. 내가 아직도 젊은 작가들의 문학 월평을 월간지에 쓰지 않소. 쓰려면 최소한 작품당 세 번씩은 읽어야 해. 월간지 두 개와 계간지 다섯 개를 빼놓지 않고 봅니다. 그러면서 요즘 젊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구나, 이런 공부를 했구나 알게 되지."

―하지만 요즘 젊은 후배들은 선생처럼 많이 읽지는 않는 것 같다. 못마땅하지는 않나.

"전혀. 우리에게는 우리의 필연이, 그들에게는 그들의 필연이 있소. 우리는 읽는 게 양식이었지만, 요즘 사람들은 다른 양식이 있겠지. 뒷방 늙은이가 관여하고 가르치는 건 염치 없는 일. 나는 다만 내 일을 할 뿐이오."

그는 다음 주제로 계간지 '문학과지성' '창작과비평' '세계의 문학'의 탄생과 그 의미를 쓰겠다고 했다. 읽고 쓸 주제를 이야기할 때 그의 표정이 드물게 밝아졌다. 지금 그의 나이는 77세, 기억할 만한 희수(喜壽)다.

 

어수웅기자 

 

- 조선일보, 2013/9/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