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마 9:35-38
제목: 예수님의 선교봉사
목표: 예수님의 선교, 교육, 봉사의 사역을 실천하며 살게 한다.
오늘은 선교봉사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선교봉사라는 말은 예수님의 세 가지 사역을 의미합니다. ‘선’은 선교, ‘교’는 교육, 봉사를 합친 단어입니다.
교회의 본질을 다섯 가지로 말하면, 예배, 선교, 교육, 봉사, 교제라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사역입니다. 예수님은 전도, 교육, 봉사에 집중하셨습니다. 35절 한절에 세 가지 사역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선교봉사는
1. 두루 다니는 사역입니다.(35)
35절,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갈릴리 지역에서 주로 사역하셨습니다. 또한 예루살렘과 사마리아 지역을 가셨고 두로와 시돈지방까지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이 두루 다니면서 하신 사역은
1)전도(선교)입니다.(35절 중반절)
35절 중반절,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들을 구원하기 위해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생명구원이 가장 큰 사역이셨습니다.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기도를 하신 후에 갈릴리에 오셔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며 천국복음을 전파하셨습니다.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와 요한을 불러 제자를 삼으셨습니다. 또한 세관에 앉아있던 마태도 부르셨습니다. 생명 살리는 일을 위해 제자들을 택하여 도시와 마을을 다니시며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셨습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생명 살리는 일입니다. 생명을 살리지 못하는 교회는 목적을 상실한 교회입니다. 죄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려야 합니다. 이 땅에서 행복하게 살다가 영원한 천국에서 영생하며 살도록 하는 것이 전도의 목적입니다.
예수님은 두루 다니시면서 남녀노소, 신분고하를 불문하고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어린아이들이 예수님께 나오는 것을 용납하라 하시며 아이들을 안고 축복해주셨습니다. 청년도 만나주셨습니다. 부자청년을 만나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따를 것을 권면하기도 하셨습니다. 니고데모와 같은 관원을 만나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어부와 세리에게도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가나안 여인과 같은 이방인 여인과 사마리아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병든 자들과 소외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무리들이 예수님께 다른 지역으로 가지 말고 함께 있기를 청하였을 때 예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다른 동네들에서도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전하여야 하리니 나는 이 일을 위해 보내심을 받았노라 하시고 갈릴리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더라.”(눅 4:43-44)
예수님이 삭개오의 집에 함께 가셨을 때 삭개오가 자기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으며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다고 하자 예수님이 기뻐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9-10)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는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여러 장소에서,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전도하셨습니다.
<예화: 만원 엘리베이터>
얼마 전 사무실 건물 3층에 건강플라자가 들어왔습니다. 날마다 방문자가 증가합니다. 요즘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것보다 걷는 것이 빨라 5층을 걸어 오르기도 합니다. 1층에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만원이라는 빨간 문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문이 열리자 많은 분들이 나오셨습니다. 기다렸다 엘리베이터를 타면서 생각했습니다. 교회가 이렇게 부흥하면 얼마나 좋을까?
건강플라자 내부가 어떤지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오게 하는 것입니까? 건강에 좋은 효과가 있다는 소문이 났기 때문일 것입니다. 육체적인 건강에 대한 관심처럼 영적인 건강을 책임지는 교회에도 관심이 많아졌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아직도 예수님을 몰라서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잘못 알아서 교회에 부정적인 사람들도 있습니다. 알면서도 누군가 이끌어주는 사람이 없어 못 나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얼마 전 카자흐스탄에 36명의 단기개척선교사님들이 복음을 전하고 왔습니다. 예수님의 전도사역을 실천한 것입니다. 교회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생명의 역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속한 지역사회뿐 아니라 미전도종족과 세계를 향해 복음을 들고 나가야 합니다. 예수님이 복음전파를 위해 두루 다니셨듯이 복음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전해야 합니다.
롬 10:13-15절입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성경은 좋은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의 발이 아름답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루 다니며 복음을 전할 때 그 발이 아름다운 발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두루 다니며 전도하셨듯이 전도하는 아름다운 발걸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이 두루 다니면서 하신 사역은
2)교육입니다.(35절 상반절)
35절 상반절, “예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사 그들의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가르치는 사역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가르치셨습니다. 회당뿐만 아니라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산과 들, 갈릴리 호수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셨습니다. 자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시며 올바른 삶의 방법을 가르치셨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을 교육시키셨습니다. 그리고 승천하시기전에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며 주님의 교훈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교육목표는 하나님 나라를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도록 가르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는 삶을 통해서 실천적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비유나 설명을 통해서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며 섬김을 실천하며 교육하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들을 변화시키는 새로운 가르침이었습니다. 유대인의 관원이었던 니고데모를 밤에 만나 말씀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정오에 물을 길러온 외로운 사마리아여인을 변화시켜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뛰어 들어가 예수님을 메시야로 전파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세금으로 사람들을 괴롭히던 세리장 삭개오를 변화시켜 새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귀신들렸던 막달라 마리아를 변화시켜 예수님을 위해 끝까지 헌신하는 여인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당시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율법을 가르쳤습니다. 율법으로 사람들을 주눅 들게 만들고 속박했습니다. 신앙생활의 기쁨이 없었고 자유가 없었습니다. 죄의식에 매여 살게 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복음으로 자유과 기쁨을 주셨습니다.
신앙교육을 통해 믿음이 계승될 수 있습니다.
<예화>
유대인의 전통적인 교육과 신앙을 그린 영화 ‘지붕 위의 바이올린’에 등장하는 어머니의 대사입니다.
“너희는 머리에 수건을 쓰고 기도하는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마라.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 민족과 동행한다는 징표다. 우리를 지켜주시는 하나님을 떠난 삶을 상상해 보라. 얼마나 허무한가. 하나님을 떠난 삶은 마치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인생이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앙과 전통을 자손 대대로 물려주기 위해 모든 열정을 쏟아 붓습니다. 유대인의 위대성은 바로 이런 신앙 교육에서 비롯됩니다. 바이올린을 지붕 위에서 멋지게 연주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평지에 안정된 자세로 버티고 서서 연주할 때 좋은 음악이 나옵니다. 인간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평지 위에 굳게 서서 인생을 살아갈 때 비로소 안정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삶은 비탈진 지붕 위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아버님이 교회출석과 봉사하는 훈련을 철저히 시키셨습니다. 중학생 때부터 저녁예배에 참석하게 하셨고 겨울에는 교회에 일찍 가서 톱밥난로 피우는 봉사를 하게 하셨습니다. 억지로 할 때도 많았지만 돌이켜보면 그런 교육과 훈련을 통해 목사가 될 수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제가 할머니와 부모님으로부터 신앙교육 받았듯이 저희 자녀들에게도 가르치려 하지만 잘 따르지 않아 마음이 아플 때가 많이 있습니다.
어제까지 교회학교 여름성경학교와 중고등부 수련회가 은혜 중에 마쳤습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신앙교육입니다. 교회학교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자녀들의 신앙교육과 더불어 기독교 학교 교육을 통하여 예수님의 정신을 교육하고 실천하여 이 사회가 정직하고 바른 사회, 행복한 사회가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바른 삶의 길을 실천하고 교육하셨습니다. 참된 행복의 길을 제시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며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이 두루 다니면서 하신 사역은
3)봉사입니다.(35 하반절)
35절 하반절,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라.”
예수님은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면서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는 봉사를 하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중풍병자, 맹인, 청각장애인, 혈루병 앓는 여인, 귀신들린 사람, 간질병자, 나병환자, 열병걸린 사람, 말 못하는 사람, 손 마른 사람, 수종병자, 38년 된 병자, 나사로와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과 같은 죽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무력하게 하고 절망하게 만드는 많은 병과 약함에서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많은 현대인은 질병을 가지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질병뿐만 아니라 스트레스성 질환, 우울증, 불안증, 강박증과 같은 정신질환을 가지고 있습니다. 영적으로도 많은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통계자료>
연합뉴스 2012년 11월 23일자에 의하면 우리나라 국민이 일생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을 질병에 시달리면서 보낸다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보건사회연구원이 내놓은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여명 및 건강수명’ 보고서에 따르면 2009년에 태어난 신생아가 평생을 살면서 질병에 시달리는 기간이 8.04년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아이들의 평균 ’기대수명’(기대여명)은 80.67세, 질병 없이 사는 기간인 ’건강수명’은 평균 72.63세로 각각 추산됐습니다.
이처럼 사람은 병과 가깝습니다. 예수님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병자들을 찾아가 삶의 고통을 공감해주면서 치료해주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육신적인 여러 질병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도 있었고 정신적으로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귀신이 들려 자신을 제어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안고 있던 그들에게 다가가 치유하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예화)전주 예수병원 의료선교사 설대위(데이비드 존 실)
설대위는 외과 수술로 명성을 날리던 미국 남부 뉴올리언스의 튜레인 의과대학을 수석졸업하고, 외과 의사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촉망받는 젊은 의사였지만 전쟁으로 폐허가 된 한국 땅을 찾아와 외과 수술의 진수를 선보였습니다. 우리나라 최초로 종양 진찰실을 개설했고, 국내에서 처음으로 암 등록 사업을 펼쳤습니다. 대한두경부학회를 창립하고 초대 회장을 역임했으며, 최신 방사선 암 치료법도 소개했습니다.
그는 정년퇴임을 하고 미국으로 돌아가서는 집에 '설대위'라는 문패를 달고 '한국인'으로 살았습니다. 20억원 상당의 최신형 암 치료기를 예수병원에 보내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정작 본인은 쌓아 놓은 재산이 없어 노년에 응급실 당직 의사를 하며 생활비를 벌었습니다. 말년에 치매를 앓았는데, 미국 병원 중환자실에서 한국말로 뭔가를 계속 말해 미국 의료진을 당황하게 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봉사사역을 본받아 살았던 훌륭한 의료선교사입니다.
예수님이 두루 다니면서 하신 사역은 전도(선교), 교육, 봉사입니다.
예수님의 선교봉사는
2. 불쌍히 여기는 사역입니다.(36)
36절,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
(예화)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의 삭발
미국의 부시 전 대통령의 대변인 격인 짐 맥그래스는 7월 24일 '41대 대통령이 자신의 비밀경호국 요원 아들인 패트릭(2)과의 연대감을 보여주기 위해 삭발했다'는 글과 함께 사진 한 장을 트위터에 올렸습니다.
맥그래스는 "패트릭이 백혈병 치료를 받고 있다. 그 후유증으로 머리카락을 잃었다"고 설명했습니다. 부시 전 대통령은 1953년 10월 당시 네 살이었던 딸 로빈을 백혈병으로 잃었던 경험이 있었습니다.
두 살 난 백혈병 아이를 위해 전직 대통령이 삭발한 뉴스는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잃은 딸을 생각하며 두 살 된 아이를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삭발했을 것입니다. 아이를 위한 따뜻한 마음이 감동을 주었습니다.
어떤 목적을 쟁취하기위해 단식투쟁하며 삭발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개인과 단체의 이익을 위해 삭발 투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행동입니다. 전직 대통령이 한 아이를 위해 삭발한 것으로도 사람들은 감동을 받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면서 사역을 하셨던 이유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하는 모습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마 14:14) 는 말씀처럼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셔서 병자들을 고쳐주셨습니다. 귀신들린 딸을 가진 가나안 여자도 예수님께 나아와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마 15:22)라고 기도하자 고쳐주십니다.
예수님이 우리를 목자없는 양과 같이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에 구원해주셨습니다. 벧전 2:10절입니다.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긍휼 즉 불쌍히 여기심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예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인성으로 들어가시면서 장례의 행렬 중에 오열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애통하고 처절한 울음이었습니다. 죽은 아들은 과부의 마지막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아들이 죽었으니 그 고통이 어떻겠습니까? 동네사람들 조차 울음을 달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가련한 어머니를 불쌍히 여기셔서 장례행렬을 멈추게 하고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가시면서 한 마을을 지나실 때 나병환자 열 명이 예수님을 만나 멀리서서 소리를 높여 외쳤습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예수님은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이 제사장에게 가다가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로 오천명을 먹이신 기적 역시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던 예수님의 마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큰 무리를 보시고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여러 가지로 가르치셨다고 성경이 기록하고 있습니다.(막 6:34) 목자 없는 양처럼 진리를 몰라 방황하는 무리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셔서 천국복음을 전파하시며 행복한 삶의 비결을 교육하시고 허기진 배를 채워주셨습니다.
맹인 거지 바디매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여리고로 지나실 때 맹인이며 거지였던 바디매오가 길가에 앉았다가 예수님이 지나신다는 말을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습니다. 사람들이 잠잠하라고 꾸짖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더욱 크게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불러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질문하시고 그의 소원대로 눈을 뜨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목자 없는 양과 같은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들의 소원을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주셨습니다. 한 강도가 회개하며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라고 하자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며 그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살이 찢어지는 고통 속에서도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그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이 아니라 우주만물의 통치자 되시는 하나님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이 땅에 육신의 몸을 입고 오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으시며 죽어주셨습니다. 죄악을 범하는 우리를 오늘도 사랑으로 감싸주시며 용서해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선교봉사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의 선교봉사는
3. 기도하는 사역입니다.(37-38절)
37-38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38]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소서 하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선교봉사 사역을 하면서 추수할 것은 많지만 일군이 적어 마음이 안타까웠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어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교봉사 사역을 위해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사역은 기도로 시작해서 기도로 마쳤습니다.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40일 금식기도를 하셨습니다. 열두제자를 택하기 전에 철야기도를 하셨습니다. 새벽미명에 한 적한 곳을 택하여 새벽기도 하셨습니다.(막 1:35) 사역을 하시면서 습관을 따라 감람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눅 22:39-46)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병이어와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 전에 기도하셨습니다. 70인 전도대의 전도보고를 받고 기뻐하며 감사 기도하셨습니다.(눅 10:21-24) 십자가를 지기 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철야기도하시고 십자가 위에서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 기도의 모본을 보여주셨고 기도를 강조하셨습니다. 과부와 재판장의 비유를 통해 강권적인 기도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종말에 대해 예언하시면서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눅 21:36)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교봉사는 기도로 준비하고 기도로 마무리하셨습니다. 카자흐스탄 개척선교사님들이 카자흐스탄 선교를 떠나기 전에 저녁마다 기도로 준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땅을 두루 다니기 전에 기도했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기도했고 마치고 돌아와 기도로 마무리했습니다.
신앙생활하면서 기도가 중요하다는 것과 기도해야 하는 것은 누구나가 알고 있지만 기도를 하지는 않습니다. 문제가 있을 때는 기도하다가 해결되는 동시에 기도를 멈추는 사람이 있습니다. 쉬지 말고 기도하는 것이 그만큼 어렵습니다. 기도는 훈련이고 끈기이고 노동입니다.
강원도 태백에 있는 예수원에는 ‘노동하는 것이 기도요 기도가 노동이다”라는 글귀가 있습니다. 농부에게 노동의 대가가 있듯이 기도의 노동을 하면 기도의 열매가 있습니다.
사무엘이 사사에서 물러나면서 백성들에게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이라”(삼상 12:23) 하였습니다. 일생동안 기도하던 사무엘이 쉬지 않고 기도하겠다는 고백임과 동시에 기도 쉬는 것을 죄로 여겼다는 말입니다.
다니엘은 어떻습니까? 30일 동안 왕 외에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기도하면 사자굴에 던져지는 것을 알면서도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의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단 6:10) 성경은 기록합니다. 쉬지 않고 기도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순간에도 죽음을 각오하고 기도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 없이 고난을 이길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 선교봉사 할 수 없습니다. 기도 없이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기도를 쉬는 것은 영적인 호흡이 멎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의 선교봉사 사역은 기도의 연속이었습니다.
오늘은 선교봉사 주일입니다. 예수님의 선교봉사는 두루 다니는 사역이었습니다. 두루 다니며 전도하고 교육하고 봉사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교봉사는 불쌍히 여기는 사역이었습니다.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며 복음을 전파하고 진리를 가르치고 모든 병과 모든 병을 고치시는 봉사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선교봉사는 기도하는 사역이었습니다. 기도로 준비하고 시작하고 진행하며 마치는 기도의 연속이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선교봉사를 본받아 두루 다니면서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기도하며 선교하고 교육하고 봉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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