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전념해야 할 일

하마사 2013. 8. 7. 13:57

 

본문: 딤전 4:12-13

제목: 전념해야 할 일

목표: 전념해야 할 것을 알고 열심을 다하자.

 

 

일을 할 때 목표설정, 계획, 진행 등 여러 필요한 것이 있지만 집중력이 성패를 좌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대부분은 집중력이 탁월한 사람입니다.

‘전념하라’는 ‘열중하라’는 뜻이 있습니다. 현재 능동태 명령형으로 사용되어 능동적으로 계속 몰두하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바둑기사가 바둑판 위에 바둑돌 하나를 놓을 때 집중하여 놓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은 바울사도가 믿음의 아들 디모데가 바울을 대신하여 에베소에서 목회를 잘 감당하기를 바라면서 기록한 목회서신입니다. 본문은 목회자뿐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전념해야 할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세 가지에 전념하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전념해야 할 일은

1. 읽는 일(13절)

13절,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바울은 로마감옥에서 풀려나 에베소를 방문할 때까지 성경 읽는 것과 설교하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이 중에 ‘읽는 것’은 ‘공중 앞에서 큰 소리로 낭독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헬라 문헌에서는 유언이나 청원서나 급보 또는 보고서 등을 읽는 것을 묘사하는 데 쓰였습니다. 또한 성경에서는 에스라 시대에 제사장들이 율법을 낭독하는 것이나 예수님께서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서를 읽던 것과 같은 표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단어는 공중 앞에서 성경을 읽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것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먼저 목회자가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설교를 할 수 있고 말씀으로 권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 경우를 예로 들면 부끄럽습니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데 전념하지 못합니다. 다른 부수적인 일들이 많으면 우선순위가 뒤로 밀립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가 일곱 집사들을 세웠던 이유가 여기에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였기에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받는 사람 일곱을 택했습니다.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리라”(행 6:4) 말하고 기도와 말씀 사역을 제외한 일을 일곱 집사에게 맡겼습니다.

말씀을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는 것이 목회자의 우선적인 사역입니다. 또한 성도들도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실천하면서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어 말씀 읽는 중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영적. 육체적 질병이 고침을 받고 죄인이 새사람으로 거듭나기도 합니다. 루터는 롬 1:17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읽고 종교개혁을 일으켜 오늘의 개신교를 탄생시켰습니다. 중세의 교부 어거스틴은 롬 13:14절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라는 말씀을 읽다가 탕자의 길을 정리하고 위대한 신학자가 되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칼빈은 이사야 53장을 읽고 감동을 받아 종교개혁을 완성하고 장로교의 창시자가 되었습니다. 리빙스턴은 행 16:31절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는 말씀에 은혜를 받고 아프리카 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했습니다. 이처럼 성경은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습니다.

 

2. 권하는 일(13절)

13절,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권하는 것’은 상담 등을 통해 연약한 자들과 시험에 빠진 자들을 격려하고 선도하는 것을 말합니다.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을 뜻합니다.

성도는 말씀으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권하는 일의 근거는 성경입니다. 목회자는 설교를 통해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할 수 있습니다. 교회에서 정죄하고 야단치는 것도 회개를 위해 때로는 필요하지만 권면하고 위로하는 사역을 통해 사람을 세워주어야 합니다. 현대인은 위로가 필요한 사람들입니다. 가정과 일터에서 지쳐 있는 사람들입니다. 경쟁사회에서 긴장하며 살기에 위로와 평안이 필요합니다. 물론 지나친 위로와 격려가 나약한 신앙인으로 만들 위험이 있지만, 그래도 교회는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람들은 마음의 안식처를 찾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습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또한 믿음이 약한 사람이나 시험에 빠져 허덕이는 사람에게는 말씀으로 권면하여 바른 길을 가도록 인도해야 합니다. 이런 일이 권하는 일입니다.

 

3. 가르치는 일(13절)

13절,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가르치는 것’은 주로 복음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것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목회자는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를 통해 성도들을 가르치고 세워갑니다. 바울이 없는 에베소교회를 디모데가 목회할 때 성경을 읽고 연구하여 말씀을 바르게 전하고 실천하도록 하라는 권면입니다.

설교는 목회자의 역할이지만 성경을 배우고 가르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교회학교 교사, 구역장, 권찰 등이 믿음이 약한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가르치기 위해서는 본을 보여야 합니다. 가르치는 일보다 오히려 실천하는 일이 더 어렵습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믿는 자에게 본을 보일 것을 강조합니다. 12절입니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어 어린 나이라고 업신여기지 못하도록 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는 믿음의 연조가 깊고 나이가 들어도 본을 보이지 못하면 업신여김을 받게 된다는 의미도 됩니다.

가르치는 자는 본이 되어야 하기에 참으로 어렵습니다. 목사님들이 왜 욕을 먹습니까? 설교한 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선생님들이 왜 욕을 먹습니까? 학생들에게 교육한대로 살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회 지도층이 본을 보이지 않을 때 국민들로부터 욕을 먹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을 알고 선생이 되지 말라.”(약 3:1)

하지만 사도바울은 자신 있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고전 11:1)고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하기 어려운 말이 “나를 본받으라.”는 말인 듯합니다. 자녀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있는 부모라면 행복한 사람입니다. 성도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목사라면 행복한 목사입니다. 구역식구들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수 있는 구역장 권찰이라면 행복한 구역장 권찰입니다.

   

사도바울은 디모데에게 많은 일들 중에 전념해야 할 일 세 가지를 당부했습니다. 읽는 일, 권하는 일, 가르치는 일입니다. 이런 일들의 근본은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으로 권면하고, 성경을 가르치고 실천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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