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도록 힘들었지만… 아들 성공이 내겐 백만달러의 가치"
"의사 아버지, 주말이면 응급실서 60시간 연속 일해 생활비 벌어"
父親 최영수 박사… 6·25때 군의관으로 참전
한국서 첫 인공심폐기 이용, 심장수술 성공한 외과의사
"자식들 꿈 이루게 해주자"는 일념으로 1970년 美 이민
몸 부서져라 일한 아버지
한때 美생활 회의 들었지만… 돌아갈수도 돌아갈데도 없어
오직 아내와 네 아이 위해… 다시 뛸 수 밖에 없었다
타이거 대디·가시고기 사랑
미국行 결심한 뒤부터… 英단어 100개 외워라 하고
매일밤 직접 시험 쳐 확인… 제대로 못외우면 불호령
일 많이 하면 돈버는 나라 미국
한국의 의사 타이틀 떼고… 42세에 美 인턴으로 재출발
병원 열고 비정규직 일하며… 50代까지 스리잡 뛰어
'열심' 그 아버지에 그 자식
바이올린 전공한 여동생은 6세부터 하루 12시간 연습
화학회사 CEO인 누나도 새벽 3시까지 안 자고 일해… 형도 아버지 정신으로 성공
- 한국 군의관 시절의 옷을 입은 최명근 교수의 아버지 최영수 박사. 미국에서 은퇴한 후인 75세 때 모습이다. / 최영수 박사 제공
지난 5월 하버드대 의대 호흡기내과 최명근(54·미국 이름 어거스틴) 교수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미국 최고의 병원으로 꼽히는 뉴욕 프레스비테리언 병원―와일 코넬 의료센터의 스티븐 코윈 CEO(최고경영자)가 웃으며 말했다. "닥터 최, 뉴욕에서 살 준비 됐습니까?" 그는 최 교수가 뉴욕 와일 코넬 의대 의학과 학과장 겸 와일 코넬 의료센터의 의료 총괄(physician―in―chief)에 선임됐다는 소식을 알렸다. 와일 코넬 의료 센터의 의료진은 약 1700명이다. 최 교수가 의료 총괄을 맡게 됐다는 것은 그가 미국 최대 병원의 최고위직 의사에 올랐음을 뜻했다. 최 교수는 8월 1일부터 새 병원에서 일할 예정이다. 한국인이 아이비리그(미 동부 명문대) 병원의 의료 총괄을 맡기는 처음이다.
전화를 끊은 최 교수는 미 서부 캘리포니아주(州) 발렌시아에 사는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어 소식을 알렸다.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아버지는 비로소 아들에게 축하 인사를 했다. "잘했다, 잘했어. 네가 잘되는 걸 보니 내가 미국에 오길 참 잘했어…." 여든을 한참 넘긴 아버지가 울먹이고 있었다.
최명근 교수의 아버지 최영수(85) 박사는 한국의 흉부외과 의사 출신이다. 1965년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이민했다. 서울의 한 병원에서 지난달 말 만난 최명근 교수는 "우리 아버지는 우는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나이가 드시니 이모셔널(감성적)해지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명근 교수는 농도가 옅은 일산화탄소를 몸 안에 넣으면 세포를 보호하는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를 과학저널 네이처에 2000년 게재했고, 2011년엔 호암상을 받았다. 그의 부인인 하버드대 의대 메리 최(최은희) 교수 역시 저명한 의사고 대학생인 최 교수의 두 아들(저스틴, 알렉산더)도 의대를 택했다. 최영수 박사에서 최명근 교수를 거쳐 손자까지, '3대째 의사 집안'이다.
최 교수의 이번 성과는 '아메리칸 드림'의 눈부신 성공기로 여겨진다. 그는 자신의 성공 뒤에 한국에서의 영광을 뒤로하고 오로지 자식을 위해 혹독한 타지 생활을 버틴 아버지 최영수 박사가 있었다고 했다. 서울대 의대를 졸업하고 6·25전쟁 때부터 군의관으로 일했던 최영수 박사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인공심폐기를 이용한 심장수술을 1962년 성공시켜 큰 주목을 받았다. 그는 명성을 떨쳤지만 사남매에게 더 큰 꿈을 펼치게 해주고 싶다며 1965년 미련 없이 한국을 떠났다. 최명근 교수가 여섯 살 때였다.
최명근 교수를 만나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그의 성공기만큼, 아버지의 희생담을 들어야 할 것 같았다. 지난달 말 미국에 전화를 걸어 아들 이야기를 꺼내자 아버지 최영수 박사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작은 아이가 학교 때부터 아주 열심히 했어요. 그래서 의대(루이빌대)를 나오고 나서 존스홉킨스·예일·하버드에서 다 일하고 이번엔 코넬대를 가게 된 거예요. 아비로서는 대학 보내고 장가까지 보내준 것뿐이에요. 내가 한 게 아무것도 없어요. 하여간에… 아들은 그렇고 내 과거사를 좀 들어보려우?"
◇"새끼들이라도 미국서 꿈 이루게 해주자"
- 지난달 말 서울의 한 병원에서 만난 하버드대 의대 최명근 교수는“미국에 이민 간 후 아버지가 쉴 새 없이 일하던 모습에서‘열심의 힘’을 배웠다”고 말했다. 최명근 교수는 8월부터 미국에서 가장 큰 병원인 뉴욕 프레스비테리언 병원-와일 코넬 의료 센터의 의료 총괄을 맡아 1700명의 의료진을 지휘한다. 연구에도 힘쓰는 최 교수는 2001년 저농도 일산화탄소가 인체의 세포를 보호한다는 연구 결과를 네이처에 실었다. / 김연정 객원기자
"그때 샌프란시스코에 와서 처음 미국이란 데를 보았단 말이야. 배 타고 항구에 오는데 버얼건 다리 밑으로 지나가. '골든 게이트 브리지(금문교)'라나 뭐라나 그래. 안개가 걷히고 도시가 보이는데, 어마어마한 게 완전 '그림의 떡'이야. '이야… 이게 미국이구나. 여기서 공부하다 죽었으면 좋겠다' 싶었지."
그는 1960년 미국에서 심장 수술을 배워오라는 명(命)을 받고 같은 병원에서 다시 6개월을 연수했다.
한국으로 돌아온 최 박사는 서른네 살이던 1962년 인공심폐기를 이용한 심장 수술을 처음으로 성공시켰다. '군 의학계에 개가(凱歌)' 같은 제목을 달고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의사 중 하나가 된 그였지만 한국이란 나라에서 희망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정권은 불안했고 틈만 나면 '이북에서 쳐들어온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그는 "나라가 엉망진창이었다. 한국에서 아이 넷을 공부시켜 무사히 기를 자신이 없었다"고 했다.
무엇보다 살아남기 위해 모두가 '나쁜 짓'을 해야 하는 상황이 싫었다. "나쁜 짓이란 뭐냐. 군대 병원의 나쁜 짓이라는 건 하나는 약 팔아먹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병이 없는 걸 병이 있다고 제대를 시키는 것이었지. 난 사람을 그렇게 만드는 가난이 너무 싫었어요. 당시 군의관 월급은 열흘 정도 쓰고 나면 다 떨어질 정도로 박했거든." 그는 "'에라, 모르겠다'는 마음으로 미국행(行)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나도 미국에만 있었으면 하버드도 가고 어디든 다 갈 수 있었을 텐데 싶은 아쉬움도 있었지. '아새끼들(아이들)'이라도 내가 못 한 걸 이루게 해주자,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그는 미국으로 바로 가는 대신 말레이시아행을 택했다. 말레이시아 정부가 한국에 의사 파견을 요청해왔고 최 박사는 1965년 이에 자원했다. 말레이시아는 한때 영국 식민지여서 영어 쓰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영어 공부를 시킬 수가 있었다. 아이들은 천주교에서 운영하는 영어 초등학교에 다녔다. 아버지는 말레이시아 정부 소속 의사로 일하면서 미국 영주권을 따려고 미국 의사 면허 시험을 공부했다.
그는 세 번을 떨어진 끝에 간신히 미국 의사 시험에 붙었다. 이를 토대로 한국을 떠난 지 5년 만에 미국 영주권을 얻었다. 그 사이 아내는 말 안 통하고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 힘겨워했고 한국을 그리워했다. '아이들을 위해 참으라'는 말로 설득했다.
◇호랑이 아버지 "단어 100개 외워라"
- 최영수 박사의 팔순을 기념해 2008년 모인 최 박사와 자녀들. 왼쪽부터 건축가이자 부동산 개발업자인 큰아들 태근, 바이올리니스트인 막내 딸 지희, 최영수 박사, 화학 회사를 성공적으로 경영하는 큰딸 인숙, 미국 대형 병원의 의료 총괄로 지난 5월 선임된 둘째 아들 명근씨. / 최영수 박사 제공
아들 최명근 교수는 말레이시아 시절의 아버지가 말 그대로 '호랑이 아버지'였다고 기억했다. 아버지는 엄했고 칭찬을 하는 법이 없었다. 그는 "아버지가 특별히 매를 들거나 하셨다기보다, 워낙 기본적으로 무뚝뚝하고 무서웠기 때문에 뜻을 따르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는 자녀들이 언젠가 미국에 도착하는 그날부터 미국인 못지않은 영어를 할 수 있기를 바랐다. 최 교수는 "아버지는 우리에게 매일 단어 100개씩을 외우라고 지시했다. 특히 누나와 형은 매일 저녁 아버지 앞에 앉아 단어 시험을 봐야 했다"고 말했다. 제대로 외우지 않으면 불호령이 떨어졌다. 집 밖에 도착한 아버지가 '내가 왔다'는 뜻으로 차의 경적을 '빵빵' 울리면 사남매는 방으로 뛰어들어가 책상 앞에 앉아 공부를 했다.
큰딸인 최인숙(미국 화학 회사 'HUR 케미컬' CEO)씨는 지난 4월 나온 최영수 박사의 자서전 '올라갈 때 못 본 꽃'에 실은 글에 이렇게 썼다. "아버지의 교육방법은 전형적 동양식으로 매우 엄격하셨다. 아버지는 열살 전후의 우리 남매를 모아놓고 매일 100개씩 영어 단어를 외우도록 하셨다. 아버지의 엄격한 성격을 잘 아는 우리는 꼼짝없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다. 그때는 거의 울다시피 외웠다."
아버지 최영수 박사는 "우리 동양 아이들은 머리가 다 좋지 않나. 열심히 영어만 배우면 미국 어디다 내놓아도 잘되리라는 걸 알았기에 그렇게 무섭게 시켰다"고 말했다. "한편으로는 내가 너무 냉랭하게 했나 싶어 마음에 걸리기도 해요. 그런데 내가 그렇게 자랐기 때문에 (아이들에게도) 그런 거지 어떻게 해요. 우리 어머니 아버지 모두 냉락(冷落)한 사람이었거든." 최 박사는 만주 용정(龍井·현재 중국 지린성 룽징)에서 자랐다. 그의 아버지 최준용씨는 개성상인 출신으로 만주에 정착해 운송업을 했다.
최 박사는 자서전에 이렇게 썼다. "내 기억 속의 아버지는 매우 강직하고 엄격하신 분이었다. 당신이 어릴 적 고향을 떠나와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처리하면서 자수성가하신 분이라 그랬는지 자식에 대해서도 유약한 모습을 용납하지 못했다. "
◇마흔둘 시작한 美 인턴, "창피했다"
- 왼쪽부터 루이빌 의대 4학년인 큰아들 저스틴(진웅), 최 교수, 신장 전문가인 부인 메리 최(최은희) 하 버드대 의대 교수, 보스턴대 4학년으로 의대 진학 예정인 작은아들 알렉산더(진성)씨. / 최명근 교수 제공
"말이 돼? 20년 동안 의사를 했는데, 이제 갓 대학 졸업한 스무살짜리들하고 같이 인턴을 해야 한다니! 남모르게 눈물도 흘리고 후회도 많이 했죠. 너무나 창피한 거야."
미국에서 진료를 하려면 수련의를 마친 후 주(州)별로 제각각인 의사 면허 시험을 다시 봐야 했다. 최 박사는 1년 동안의 인턴을 거쳐 1972년 조지아·켄터키주에서 인정되는 의사 면허 시험에 합격했다. 한국 사람이 거의 없는 미국의 남부 지역이었지만 시험 일정이 가장 빠르다는 이유로 조지아·켄터키주를 택했다. 최 박사는 "그만큼 마음이 급했다. 힘들 때마다 개성 사람으로 만주에서 장사를 했던 아버지를 떠올렸다"고 했다. "아버지가 만주 살 때 그랬거든. '사나이 대장부가 고향을 한번 떠나왔으니 성공하기 전에는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말이야."
면허를 딴 그는 곧바로 돈벌이에 들어갔다. 조지아주 한 종합병원 응급실의 내과 의사로 6개월, 켄터키주에 있는 병원 내과 의사로 다시 6개월을 일했다. 미국 환자를 보는 일에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은 최 박사는 켄터키주 니콜라스빌이라는 작은 마을에 1973년 12월 병원을 냈다. 당시 니콜라스빌은 인구 약 6000명의 소도시였고 한국 사람은 거의 없었다. "워낙 시골이라서 미국 백인 의사들이 오려고 하지 않았어요. 미국인 의사들은 근무 환경 좋은 대도시에 몰려 있었고 왕진도 잘 안 왔거든. 딱 보니까 그 마을에 병원을 내면 독점적인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을 것 같더라고."
당시 최 박사의 개원 소식은 지역 신문에 사진과 함께 꽤 비중 있게 실릴 정도로 관심을 끌었다. 이 마을의 첫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 병원 사무실 운영에는 돈이 들었고 혼자 수입으로 여섯 가족이 생활하기는 빠듯했다. "그래서 닥치는 대로 일을 더 하기로 결심한 거예요. 일을 많이 하면 돈이 많이 생겨. 미국은 그런 나라거든."
◇60시간 연속 일하는 '이민자' 아버지
- 켄터키주의 작은 마을 니콜라스빌에서 최영수 박사가 병원을 열었다는 소식을 전한 1974년 1월 3일자 지역 신문 ‘제서민저널’.
최명근 교수는 30년 전을 떠올리면서 "우리 아버지 일하는 건 아무도 못 따라갈 것"이라고 했다. "주중엔 당신 병원에서 일해요. 그러다 주말이 되잖아요. 그러면 금요일 오후 7시에서 월요일 아침 7시까지 응급실 당직을 하는 거예요. 그걸 한 주, 한 달도 아니고 거의 10년 동안! 전에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렇게 일하는 사람은 없을 것 같아요."
밤에 출근하다가 눈길에 차가 미끄러지는 사고를 당한 적도 있었다. 밤낮으로 일하느라 피곤한 상태에서 운전하다 일어난 일이었다. 당시의 기억에 대해 최영수 박사는 "불행 중 다행으로 크게 다치지 않았지만 그 사고로 미국 생활에 회의를 갖게 됐다"고 했다. "왜 내가 밤잠을 자지도 못하며 이렇게까지 일을 해야만 하느냐는 거지. 그렇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갈 데도 없고…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런 슬픔이나 상념에 젖어 있을 시간조차 없었어요. 나만 바라보고 있는 아내와 네 아이를 위해, 마음을 다잡고 다시 뛰어야지 어떡해."
1978년, 3년 전 취업신청서를 넣어 둔 켄터키 재향군인병원에서 내과 의사로 일할 수 있게 됐다는 연락이 왔다. 연방 정부 기관으로 근무 환경이 좋기로 이름난 병원이었다. 그러나 최영수 박사는 정규직을 사양했다. 연방 기관에서 8시간 이상 일하는 정식 직원이 되면 다른 곳에서 일할 수 없다는 규정 때문이었다. 그는 하루 7시간씩만 재향군인병원에서 비정규직으로 일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의 병원과 응급실 일도 계속할 수가 있었다. 그는 주중엔 재향군인병원과 자신의 병원을 오가며 진료를 보았고 주말엔 응급실에서 계속 '60시간 연속 근무'를 했다. 이런 '스리잡' 생활을 1981년까지 이어갔다. 1981년부터는 재향군인병원에서만 일했지만 동료 의사들과 당직을 바꿔 누구보다도 긴 시간 근무했다.
아들 최명근 교수는 "그런 아빠의 모습에서 '열심의 가치'를 배웠다. 우리 아버지가 그렇게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서 어릴 때부터 '노력해야 한다, 노력해야 한다'고 계속 결심했다"고 말했다. "우리 아버지는 말은 없었지만 행동으로 우리를 가르치고 있었어요. 저도 병원에서 남들보다 많은 시간을 일하고 주말 근무도 자처해서 하면서 좋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바이올린을 전공한 여동생은 여섯 살 때부터 하루 12시간씩 연습을 했어요. 사업을 하는 큰누나는 요즘도 종종 새벽 3시까지 잠을 잘 안 잡니다. 모두 아버지에게 배운 열심의 습관이지요."
사남매는 모두 미국에서 성공한 전문직 인사로 자리를 잡았다. 최 박사의 큰아들 태근(57·프란시스코)씨는 건축가이자 부동산 개발 전문가로 성공했다. 화학 공부를 한 큰딸 인숙(56·루시아)씨는 남편과 함께 세운 화학 회사 'HUR 케미컬'이 큰 성공을 거둬 갑부가 됐다. 최영수 박사는 "우리 딸 집이 무려 700만달러(약 80억1000만원)짜리"라고 자랑이 대단했다. 셋째 최명근 교수는 사남매 중 유일하게 의사의 길을 택해 미국과 한국에서 두루 인정받고 있다. 그는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내 가족은 내 삶의 중요한 버팀목"이라고 말한다. 막내 지희(48·애나)씨는 초등학교 때 줄리아드음대에 발탁돼 4년 만에 학사와 석사를 마친 후 성공한 음악가로 활동 중이다.
◇"나는 가시고기…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아이들이 미국에서의 성공을 굳혀가는 사이 최영수 박사의 몸에선 심장병과 암이 조용히 싹을 틔우고 있었다. 향수병에서 끝내 벗어나지 못하고 "한국 사람 많은 로스앤젤레스(LA)에라도 가서 삽시다"라고 조르던 아내는 젊은 시절부터 앓던 간염이 간경화로 악화해 1989년 세상을 떠났다. 최영수 박사는 이후 재혼해 22년째 지금의 부인 백진희씨와 살고 있다.
최 박사의 몸도 여러 군데가 망가졌다. 좁아진 관상동맥(심장의 근육에 산소·영양을 공급하는 동맥)을 넓히는 수술을 1988년, 2006년 두 차례 받았다. 그는 "'스리잡'을 뛸 때 너무 무리해서 심장이 망가진 것 같다"고 말했다. 2002년엔 두 번이나 수술대에 올랐다. 초기 직장암 진단을 받아 한 차례, 이후에 암세포가 남아 있는 것이 발견돼 다시 한 번 수술을 했다.
최영수 박사는 2001년 은퇴해선 한국인이 많은 캘리포니아주로 이사했다. 아직 정신이 또렷할 때 살아온 이야기를 남기고 싶어 지난 4월 자기 돈을 들여 자서전을 냈다. 그는 책에서 자신을 '가시고기'에 비유했다. "어린 자식들을 지키기 위하여 몇날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지키다가 끝내는 지쳐 새끼들이 있는 둥지 곁에서 죽고 마는 아빠 가시고기. 그러면 어린 가시고기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제 아버지의 몸을 뜯어 먹으며 자란다. 그러면서 앙상히 남은 아빠 가시고기의 뼈를 둥지 삼아 클 때까지 살아간다."
최영수 박사는 "괜찮다. 사람 사는 게 다 그렇다"며 웃었다. "그놈들이 돈 타면 나한테 백불(100달러)짜리 한 장 보내주는 줄 알아요? 안 보내줘. 왜 그런고 하니… 미국 생활이 그만큼 팍팍해서 그런 거지, 뭐. 나는 괜찮아요. 그까짓 백불, 난 그거 없어도 살아. 그렇지 않우? 난 명근이한테도 그래요. 네가 하버드에서도 일했고 코넬대 치프(의료 총괄) 됐으니까 나는 만족한다고. 그게 나한테는 백불 아니라 만불…아니야, 백만불의 가치가 있다고 그렇게 말이지."
-조선일보, 2013/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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