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태(鬼胎)라는 말 너무 독하고 품위없어… 희태라고 안한 게 얼마나 다행인지…"
대변인들 공부 좀 해라
요즘 대변인이란 사람들
머리 숙이고 읽기에만 급급
골프를 많이 쳐서 그런가?
박인비도 헤드업하는데…
3부작 논평 등 화제
1991년 수서택지비리 터져
野 3곳서 대규모 집회 열자
'보라매집회는 보람 없었고
여의도는 여의치 않았고
부산은 부산만 떨고…'
후배에 기분좋은 일격도
한 토론회서 국정조사 관련
'국회 쌍권총 차는 격' 했더니
'서부劇서 쌍권총 차고나오면
모두가 좋아하고
악당만 두려워한다' 반박당해
"우리 당이 무소속 의원을 영입한 것을 이유로 그들을 원상 회복시키지 않으면 개원을 못하겠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국민회의가 수십 명의 민주당 의원을 영입한 것부터 원상 회복시킨 뒤에 그런 주장을 해야 하지 않는가. 세상에 이런 웃기는 이야기가 있다. '자기의 여자관계는 로맨스고, 남의 여자관계는 스캔들'이라고."
박 의원의 발언에 여당 의원들은 일제히 "잘한다"며 환호했고 야당 의원들은 고함으로 맞대응했다. 이날 모두 24명의 의원들이 날 선 공방을 주고받았는데, 다음 날 대부분의 신문은 박 의원의 발언을 제목으로 뽑았다.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스캔들.' 이 말이 유행한 것은 이때부터다.
1988년 12월부터 약 4년 동안 여당이었던 민정당과 민자당의 대변인을 지낸 박희태 전 국회의장(75)을 지난 17일 오후 서울 서초구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홍익표 민주당 전 원내대변인의 '귀태(鬼胎·태어나지 않았어야 할 사람)' 발언에 이은 이해찬 의원의 '당신' 발언으로 정국이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박 전 의장은 제헌절 행사에 참석하고 막 사무실로 돌아왔다고 했다. "요새 워낙 말들이 너무 험해서 명대변인이었던 의장님을 찾았다"고 말하자 "치!" 하고 코웃음을 치고 소파에 털썩 몸을 쏟았다. "국회가 요새만 시끄러웠나. 탄생 이후 여태까지 다 시끄러웠지. 그래도 예전엔 위트가 살아 있었어요. 요즘은 그냥 말을 갖다가 아주 막말을… 그것도 아주 강한 말을 해야 말을 잘한다고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 제헌절인 17일 서울 서초구 ‘변호사 박희태 법률사무소’에서 만난 박희태 전 국회의장은 “요즘 대변인들은 골프를 많이 쳐서 그런가 고개를 푹 숙이고 출력해온 A4용지를 읽기에 급급하다”며 “세계 최고 박인비도 헤드업 하는 시대인데”라고 말했다. 그는 기자에게 “박지성, 박찬호, 박인비 다음은 박희태냐?”라며 웃었다. 앞의 세 박씨는 최근 Why?와 인터뷰한 사람들이다. / 김연정 객원기자
◇명대변인 '위트의 시대'를 그리워하다
박희태 전 의장은 4년3개월 동안 대변인직에 있으면서 '촌철살인의 명대변인'으로 불렸다. 그는 비판할 일이 있으면 중국 고사(故事)를 인용했고, 서운한 일이 있으면 시조를 읊어 표현하고 말았다. 박 전 의장은 "20년 전은 지금보다 훨씬 사사생생(死死生生·죽기 아니면 살기)했지만 그래도 위트와 유머가 살아 있는 '위트의 시대'였다"며 예전의 이야기들을 하나씩 풀어냈다.
그는 1991년 2월 수서 택지 특혜 분양사건에 대해 논평하며 중국의 학자 허유(許由)가 더러운 말을 들었을 때 물에 귀를 씻었다는 세이(洗耳) 고사를 인용했다. "국민 여러분, 오늘 저질적인 유언비어를 들었으면 귀를 씻기 바랍니다." 한나라당이 집권에 실패하고 야당이던 1999년엔 동료 의원이 여당으로 당적을 옮기자 논평 대신 시조를 한 수 읊었다. "까마귀 눈비 맞아 희는 듯 검노매라." 까마귀가 흰 눈을 맞아도 속은 여전히 검다는 얘기인데, 당적을 옮긴 옛 동료도 그 속은 그대로일 것이라는 생각을 담았다.
서부 영화도 토론의 '소품'으로 쓰였다. 1988년 한 토론회에서 국정조사를 발동할 수 있는 조건에 대해 박 전 의장은 "상임위 의결만으로 국정조사가 되면 본회의 국정조사권 외에 또 다른 조사기관을 두게 되는 꼴이므로 국회가 쌍권총을 차는 격이다"고 말했다. 그러자 반대 토론에 나선 통일민주당 김광일 의원이 반박했다. "서부극에서 쌍권총을 차고 나오면 모두 좋아하고 오직 두려워하는 사람은 악당일 뿐이죠." 박 전 의장은 그 상황을 '불의의 일격'을 당한 때로 회상했다. "나 한 방 먹은 이야기지. 학교(서울대 법대) 한 해 후배에게 제대로 당했지 뭐야. 하하하."
◇"품격은 사라지고 살벌함만 남았다"
무엇보다 그 무렵 대변인들의 말이 짧았다고 했다. 박 전 의장은 연단에 올라서서 한두 마디 하고 내려온 적도 많았다. 1991년 야당의 거듭된 집회에 대한 '집회 3부작 논평'은 짧은 논평의 정점이었다. 1991년 수서지구 택지 분양 과정에서 비리 사건이 터지자 야당은 서울 보라매공원과 여의도, 부산에서 연거푸 규탄대회를 개최했다. 하지만 큰 바람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에 대해 박 전 의장은 "보라매 집회는 그야말로 보람 없는 대회였다" "여의도 집회는 여의치 않았다" "부산 집회는 부산만 떨었지 실속은 없었다"는 '한 줄 논평'을 발표했다.
황우일모(黃牛一毛)·구우일모(九牛一毛) 에피소드도 있다. 1992년 탁월한 논리와 달변으로 유명했던 김대중 전 대통령과 박희태 전 의장이 정면으로 맞붙었다.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폭로한 정치자금을 두고 야당은 여당의 자금 규모와 사용처를 공개하라고 요구했고, 여당은 김대중 전 대통령도 돈을 받았다고 반격했다. 김 전 대통령은 "기업으로부터 돈을 받았으나 그 규모는 여당에 비해 '황우일모'다"고 밝혔다. 이에 대해 박 전 의장은 "황우일모가 맞는지 구우일모가 맞는지 잘 모르지만 일모라도 받은 것이 사실이니 그 내용을 밝힌 뒤 남의 보따리를 풀라고 하는 것이 순서가 아니냐"고 맞받아쳤다. "황우일모란 게 '누런 소 한 마리의 털 하나'라는 뜻으로 굉장히 작은 거란 건데, 사자성어엔 '소 아홉 마리 중에 털 하나'란 뜻의 '구우일모'로 나와 있거든. 잘못 쓴 거니까 '쓰려면 제대로 써라' 이런 마음으로 에둘러서 말한 거지."
최근 "이해찬 의원이 '당신' 발언으로 여야가 직격탄 공방을 벌여 시끄럽다"고 하자 박 전 의장은 "그렇게 곧바로 받아치면 품격이 없다"고 했다. "알 듯 모를 듯해야지. '당신' 발언은 적나라하게 누가 누굴 가르치네, 배우네 마네… 그러면서 더 시끄러워졌어. 품격은 사라지고 살벌함만 남았지."
◇"촌철살인? 공짜로 얻어지는 줄 알아?"
그 외에도 '총체적 난국' '리모컨 국회' '정치 9단'과 같은 어록(語錄)을 남긴 박 전 의장은 어떻게 이런 말들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이게 공짜로 얻어지는 줄 알아? 다 좋은 사례를 많이 접하고 끊임없이 말을 다듬으면서 창의적으로 생각한 덕분이지. 소질도 좀 있는 것 같고, 하하. 외국의 유머나 위트를 벤치마킹하는 건데, 그냥 베끼는 게 아냐. 비슷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치고 나갈 수 있도록 좋은 선례를 검토하는 거지."
박 전 의장은 한쪽 눈이 보이지 않았던 1930년대 일본 총리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의 이야기를 좋아한다고 했다. "이누카이가 국회에 나와서 의원들 앞에서 설명을 했어. '오늘날 국제 정세를 두루 살펴볼 때 지금 이래이래 해야 한다'고 설명을 했는데, 갑자기 한 야당 의원이 벌떡 일어서서 이렇게 야유를 한 거야. '이보시오. 한쪽 눈밖에 없는데 살펴보기는 뭘 살펴본다는 겁니까.' 그랬더니 이누카이가 곧바로 받아쳤어. '예. 눈이 하나기 때문에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보입니다.' 어떻게 됐겠어? 야유한 국회의원이 완전히 KO 당했지. "
박 전 의장은 요즘 대변인들이 앵무새처럼 주어진 원고만 읽는다며 "읽기에 급급하면 그게 뭐 대변인인가, 공보관이지"라고 쓴소리를 했다. "공보관은 적어준 대로 읽는 사람이지만 대변인은 당의 의견이나 회의 결과를 전하면서 동시에 그것이 국민의 동의를 받도록 설득하는 사람이니까." 영상 시대의 대변인에게 필요한 자질은 TV를 통해 국민을 설득하는 능력인데, 요즘 대변인들은 별다른 아이디어 없이 주어진 원고지를 읽을 뿐이라 공감을 자아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대변인이 국민을 바라보고 이야기했으면 좋겠어. 이거 대변인이란 사람들이 말하는 게 아니라 읽기에 급급해가지고 머리를 탁 숙이고 있잖아. 그렇게 해가지고는 국민 설득이 안 돼. 골프들을 많이 쳐서 그런가…세계 최고 박인비도 헤드업하는 시대에, 하하."
박 전 의장은 "대변인은 우선 말이 짧아야 하지만 그 안에 품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귀태' 사건처럼 짧고 기억에 남으려고만 하다가 품위가 떨어지는 '사고'가 종종 난다는 것이다. "이번 문제 됐던 귀태, 너무 독하고 품위 없었어. 그런데 희태라고 안 한 게 얼마나 다행인가, 하하하."
박희태 어록
조어
-정치 9단
-총체적 난국
-10급짜리 반간지계
유행어
-자기가 부동산을 사면 투자고, 남이 사면 투기다.
-자기의 여자관계는 로맨스고, 남의 여자관계는 스캔들이다.
-고장난 유성기판.
-양복 입고 갓 쓰는 꼴
-조선일보, 2013/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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