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철규의 소통 리더십] 쏟아지는 대국민 사과… 상대 마음을 움직여라
누구에게 할 것인가 - 1차 피해자부터 파악해야
포스코에너지·남양유업, 승무원·대리점주 빠뜨려
누가 할 것인가 - 회사 명운 걸린 이슈라면 '최후·최고 카드' CEO 나서야
"최대 위기"라던 남양유업, 오너는 사과 현장 안 나타나
- ▲ 최철규 휴먼솔루션그룹(HSG) 대표
최근 3주간 국민의 관심을 끄는 사과(謝過)가 이어졌다. 포스코에너지, 남양유업, 청와대가 마치 바통 터치 하듯 연이어 대국민 사과문을 쏟아냈다. 하지만 이들의 사과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과했다'기보다는 '사고 쳤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는 듯하다. 사과를 통해 사고를 수습했다기보다는 일을 더 악화시켰다는 얘기다. 사과에도 품격이 있다. 어떻게 해야 진짜 사과를 통해 상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을까?
①사과할 대상부터 알아야 한다
사건이 터지면 위기에 빠진 조직은 '호떡집에 불난 상황'이 된다. 정신이 없다 보면 판단력도 흐려지고 사과해야 할 대상도 헷갈리게 된다. 포스코에너지, 남양유업이 그랬다. 두 회사는 각각 사건의 1차 피해자인 승무원, 대리점주에 대한 사과가 생략됐다.
윤창중 전 대변인의 성추행 문제와 관련해 청와대의 첫 번째 사과는 더 나빴다. 사과 대상이 '국민과 대통령'이었다. 이는 마치 포스코에너지가 "라면 상무 사건에 대해 포스코 회장님께 사과드린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얼마나 황당한가?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지나면서 청와대의 사과는 진화했다. 사과 대상이 '국민, 대통령'(1차 사과)에서 '국민, 동포 여학생과 부모님, 동포 여러분'(2차·3차 사과)으로 바뀌었다. 위기가 발생하면 가장 먼저 이 사건의 이해관계자부터 명확히 정의해야 한다.
②같은 말도 누가 하느냐가 중요하다
위기에 빠진 회사에선 임원 간의 '갑론을박'이 벌어진다. 'CEO가 직접 등장할 것이냐 아니냐'를 결정하기 위해서다. 대체로 'CEO는 우리 회사의 얼굴이니 방패막이로 써서는 안 된다'는 '충성파'의 주장이 승리할 때가 많다.
CEO의 등장 이슈는 사안의 중요성이라는 함수와 직결된다. 회사의 명운이 걸린 중요한 이슈라면 CEO가 등장하는 게 맞는다. 사람의 생명과 관련된 이슈 역시 최고 책임자가 직접 사과문을 발표해야 한다. 그래야만 사과의 진정성이 배가된다. 남양유업의 사과가 아쉬운 것은 이 대목이다. 회사가 스스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라고 밝혔음에도, 오너는 사과 현장에 등장하지 않았다. 포스코에너지는 더 심각하다. 공식 입장을 보면 사과의 주체가 포스코에너지㈜로 되어 있다. 사람이 아닌 법인이 말을 하는 이상한 모양새가 됐다. 그렇다면 대통령까지 등장한 청와대의 사과는 어떤가? 만약 첫 번째 사과가 제대로 됐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커지지 않았고, 굳이 '대통령'이라는 '최고, 최후의 카드'까지 꺼내 들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③거짓말은 목숨을 건 도박이다
사람은 누구나 위기에 몰리면 거짓말의 유혹에 빠지기 쉽다. 자신의 죄를 줄이는 데 도움되는 정보는 과장하게 되고, 불리한 정보는 축소하게 된다. 그러면 정보 왜곡이 시작된다. 하지만 위기 속 사과일수록 무조건 정직해야 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자신에게 불리한 모든 정보를 다 말할 필요는 없으나, 적어도 사실을 왜곡해선 안 된다. 적극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은 차라리 입을 다무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초래한다. 비록 거짓말로 밝혀지지 않더라도, 거짓말로 의심받는 순간부터 '모든 것'을 잃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이란 '신뢰'와 그나마 남아 있던 대중의 '동정심'이다. 거짓말은 필연적으로 진실 게임을 낳는다. 위기 상황의 진실 게임은 누가 승리하든 깊은 내상(內傷)을 남긴다. 사실, 대중은 진실 게임에서 누가 이겼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할 때가 많다. 단지 양측 모두 문제 있는 사람으로 인식할 뿐이다. 만약 당신의 사과문에 진실 게임의 요소가 들어 있다면 삭제하는 게 현명하다.
④사족(蛇足)은 진정성을 훼손한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2008년 종교 편향 문제에 대해 이렇게 사과했다. "본의는 아니겠지만 일부 공직자가 종교 편향에 대한 오해를 …(중략)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이 사과에는 필요없는 수식어가 있다. 바로 '본의는 아니겠지만'이란 여덟 글자다. 이남기 홍보수석의 사과문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이번 사건의 내용을 파악한 직후, 대통령께 보고 드렸고…." 여기에도 불필요한 말이 있다. '분명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이란 수식어다. 사과를 받는 상대도 사과를 하는 사람만큼이나 예민하다. 이런 수식어가 사과하는 사람의 잘못을 줄이려는 의도라는 의심을 품게 된다.
⑤그래서 평판 관리가 중요하다
평상시 그 사람(조직)의 평판에 따라 사과의 효과는 달라진다. 남양유업이 사과와 함께 상생 기금 500억원을 내놓겠다고 해도 여론의 반전이 없는 이유는 뭘까? 남양유업은 '폐쇄적 기업'이라는 평소의 부정적 이미지가 한몫했다.
윤창중 전 대변인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가 대변인 임명 당시부터 여야 모두가 적임자라고 인정할 정도로 호의적 평판을 얻고 있었다면? 대중은 그의 잘못에 대해 지금보다는 조금 더 관대했을지 모른다. '라면 상무' 사건이 포스코그룹 전체에 치명타를 입히지 않은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포스코는 구직자들이 가장 입사하고 싶은 회사 5위권에 항상 든다. 사회 공헌 활동에 적극적이고 좋은 기업 이미지를 갖고 있다는 게 세간의 평가다. '평판 관리(Reputation Management)'의 힘이다.
2004년 박근혜 당시 한나라당 대표가 DJ(김대중 전 대통령)를 찾았다. 그리고 말했다. "아버지 시절에 여러 가지로 피해를 보고 고생하신 데 대해 딸로서 사과 말씀 드립니다." DJ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박정희가 환생하여 내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아 기뻤다. 사과는 그가 했지만 정작 내가 구원을 받는 것 같았다." '사과'와 '용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행위다.
-조선일보, 2013/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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