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스페인 국민은 지난해 유럽연합(EU)과 국제통화기금(IMF)으로부터 은행권 구제금융을 받았을 때보다 더 큰 절망에 빠진 듯하다. 얼마
전 유럽 축구 클럽 대항전인 챔피언스리그 4강전에서 FC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가 나란히 탈락했기 때문이다. 두 클럽은 스페인의 자존심이다.
이 팀들이 다른 나라도 아닌 독일의 바이에른 뮌헨과 도르트문트에 무참히 패했다.
경제가 고꾸라지면서 스페인은 독일로부터 '남유럽의
환자'라는 비아냥거림을 들었다. 그 굴욕을 축구장에서 풀어냈다. 3년 전 월드컵 4강전에서 독일을 꺾었고, 스페인 리그(프리메라리가)가 독일
리그(분데스리가)보다 강하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유럽 경제를 손아귀에 쥔 독일이 축구마저 지배하는 상황이
됐다.
눈여겨볼 건 독일 축구의 성공 방정식이다. 독일 클럽엔 메시와 호나우두 같은 초특급 스타가 드물다. 대신 알짜배기 선수를
영입하고 조직력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택했다. 포지션별 '히든 챔피언'을 골라낸 것이다. 4강에서 맞붙어 승리한 도르트문트의 선수 1인당 평균
연봉은 약 270만달러(30억원)로 레알 마드리드 740만달러(81억원)의 3분의 1 수준이다. 독일 축구 클럽이 무조건 돈을 아끼는 것은
아니다. 유소년 축구에만 한 해 1000억원 이상을 투자했다. 독일 축구는 강한 체력과 힘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스타일에 스페인식의 '짧은
패스'를 접목하는 전술적 유연성도 보였다.
스포츠 경기의 의외성을 감안하면 이번 경기 결과만으로 독일 축구가 스페인보다 우월해졌다고
주장하는 건 성급할 수 있다. 하지만 독일 특유의 실용주의·현실주의가 축구에서도 성공적으로 발현했다는 평가는 내릴 만하다.
독일의
정치·경제도 축구와 비슷하다. 독일 경제는 정보통신(IT)과 명품처럼 겉보기에 화려한 첨단산업은 별로 없다. 대신 기계·화학 등 기초 산업의
경쟁력이 탄탄하다. 뛰어난 기술력을 가진 중소기업 '히든 챔피언'이 많고, 이를 뒷받침할 인재를 길러내는 직업 교육도 발달해
있다.
독일의 실용주의는 정치에서도 나타난다. 긴축 등을 내세워 자국의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면서도 외교 무대에선 목소리를 낮춰
이웃한 프랑스·영국을 자극하지 않는다. 앙겔라 메르켈 총리는 '왕관을 쓰지 않은 여왕'이라 불릴 만큼 막강한 영향력을 가졌지만, 협상장에서
상대를 윽박지르는 경우가 드물다. 대신 끈기를 가지고 기다려 상대가 제풀에 두 손 들게 한다. 2005년 총리가 된 직후엔 치열한 경쟁자였던
전임 슈뢰더 전 총리의 정책을 이어받는 결단과 융통성을 보였다. 그리고 국민에게 독일 중심의 유럽이라는 비전도 제시했다. 저명한 사회학자 울리히
벡은 이런 정치력을 평가해 메르켈에게 '메르키아벨리(Merkiavelli)'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메르켈과 현실주의 정치철학자 마키아벨리의
이름을 합친 말이다.
요즘 세계에서 가장 잘나간다는 독일의 성공 방정식을 풀다 보면 현실·실용주의, 인내심, 융통성, 비전 같은
단어를 만나게 된다. 단기적·과시적 성과의 유혹을 버리고 이런 단어를 잘 조합해 내는 것이 리더의 덕목일 것이다.
-조선일보, 20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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