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사회만들기' 공동 대표 민계식 前 현대重 회장
특허 300건, 조선업 35년 산 증인
"독자적 기술 개발, 세계
일등 되자"
회사지원 없이 홀로 개발 '힘센엔진'… 쿠바 지폐도안 사용될 정도로 유명
惡筆탓에 교수 대신 기업인의
길로
1978년 귀국 후 대우조선에 둥지
김우중 회장에 기술 강조했다 퇴짜… 나중에 "네말 들을 걸" 후회하더라
6·25
발발, 4번의 死線
부친이 군의감인 '군인가족'… 서울 함락후 반동분자 낙인
북한군에 학살장 끌려갔다… 미군機 덕에 간신히
도망
마라토너 될 뻔
19세에 서울마라톤 출전… 2시간23분48초 7위 기록
대표 발탁 선수촌 들어갔다… 아버지에게 들켜
끌려나와
다섯살때 '만인평등' 교육받아
경성제대 출신 의사 아버지
'Man is born equal…' 적어… 목에
걸어주고 달달 외게 해
대우서 현대로 간 이유는
정주영 회장이 새벽 6시에… 직접 집으로 찾아와 감읍…
늘 "우리가 왜
못해, 해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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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 광화문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 선 민계식. 그를 조선공학으로 이끈 것이 이순신의 ‘난중일기’였다. 35년간 기술로 극일(克日)의 꿈을 이룬 그는 이제 ‘불합리한 시스템과 의식을 고쳐 선진국을 만들자’는 시민운동을 시작했다. / 김연정 객원기자
민계식(71)의 형제는 원래 8남매였다. 6·25 때 참전한 맏형이 전사하면서 7남매(4남3녀)가 됐다. 아버지는 군의감으로,
둘째·셋째·넷째 형 역시 장교로 6·25에 참전했다. 민계식은 ROTC 장교로 월남에 갔다. 1.8㎏의 미숙아로 태어난 그의 맏아들은 야생마처럼
성장해 지금 지구 상 최강의 집단, 미 해병대 중령으로 복무 중이다.
민계식 형제는 모두 경기고-서울대를 나왔다. 누나 3명은 모두
경기여고-이화여대를 졸업했다. 그의 인생 항로가 조선업으로 정리된 것은 이순신의 '난중일기'를 읽은 다음이었다. 서울대 조선공학과 1학년 때인
1961년, 그는 전설의 마라토너 아베베 비킬라가 참가한 서울 마라톤대회에 출전해 2시23분48초로 7위를 했다. 그 자리에서 발탁돼
태릉선수촌에 입촌했으나, 아버지한테 들켜 일주일 만에 퇴촌했다.
지금도 민계식은 미국 금속노조로부터 2년마다 노조위원장 투표용지를
받는다. 미국 버클리대 유학 시절, 아들 병원비와 학비 마련을 위해 금속노조에 가입해 부두 노동자, 대륙횡단 트레일러 기사를 한 경력 때문이다.
석사 취득 후 그는 미국 방산업체에서 학비를 벌어 MIT 박사가 됐다.
귀국한 민계식은 '김우중의 대우'를 거쳐 '정주영의 현대'에
인생을 바쳤다. 울산 현대중공업에서 일한 22년 동안 그는 매일 새벽 2~3시까지 새 기술을 찾고 신사업을 구상했다. 일주일에 1~2번은 밤을
새웠고, 오전 6시 30분 중역회의가 열리는 구내식당으로 직행했다. 그때 별명이 '최후의 퇴근자'다. IMF 위기 때인 1998년, 금융위기였던
2008년에는 월급을 단 한푼도 받지 않았다. 그동안 그는 특허 300개를 얻었고 발전기 엔진의 대명사인 '힘센 엔진'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매일 울산 조선소 방파제 위를 10㎞씩 뛰었다. 그의 분(分)당 심박수는 40. '산소 탱크' 박지성과 이봉주 수준이다.
2011년
12월 현대중공업을 떠난 그는 이번 학기에 대전 KAIST 해양시스템공학전공 교수로 부임해 대학원생을 가르치고 있다. 그런 그가 지난 3월
"룰을 무시하는 대한민국을 좌시할 수 없다"며 보수 시민단체 '선진사회만들기연대'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대한민국 보수(保守)의 모범이자 전형인
민계식. KAIST 연구실에서 그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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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이스트에서 강의도 - 카이스트에서 강의하고 있는 민계식. ‘해상풍력에너지’라는 대학원 과목이다. 그는 “경영을 하면서도 한순간도 연구를 손에서 놓지 않아 강의에 어려움은 없다”고 말했다. 미국 버클리와 MIT 유학 시절 노트도 강의 준비에 활용하고 있다. 그는 “당시 노트를 지금 보니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했나’ 하고 놀란다”며 웃었다. / 대전=신현종 기자
6·25 발발 사흘 만인 1950년 6월 28일 서울이 함락되자 그의 집 대문엔 '반동분자의 집'이란 커다란 글자가 적혔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서울 함락 전야에 식구들이 한강까지 갔다. 군의감 아버지는 육군본부에 계셨다. 막내인 내가 친척집에서 전화를 걸었다. '한강 건널까요' 하고 했더니 아버지는 '내일이면 국군이 평양까지 갈지도 모르는데 피란은 왜 가냐'고 했다. 다음 날 서울은 인민공화국이었다. 집 대문엔 '반동분자의 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육군본부를 따라 움직인 아버지를 빼고, 온 가족이 내무서로 잡혀갔다. 끌려간 곳에선 인민군이 구덩이를 파놓고 기관총으로 사람들을 갈기고 있었다. 그의 가족 차례가 됐다.
"그때 어머니가 총을 든 인민군 병사의 다리를 붙잡고 '죽이려면 날 죽여라'며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 순간 하늘 위로 '쌕쌕이'(미 전투기)가 날아와 기총소사를 시작했다. 모두 혼비백산한 틈에 도망가 목숨을 건졌다."
그는 "어머니는 내게 하느님"이라고 말했다.
9·28 서울 수복 전날에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 미아리 벽돌 공장으로 끌려간 민계식의 가족은 창고 7개 중에 7번째 창고에 갇혔다. "너 이 새끼, 간나새끼…"라는 인민군의 고함이 들려왔다. 첫 번째 창고에서부터 차례차례 목을 삽날로 밟아 사람들을 죽이며 인민군이 다가왔다. 죽음을 각오하던 순간, 쿵쿵 대포 소리가 들렸다. 국군의 포격 소리였다. 일순간 정적이 찾아왔다. 포격 소리에 놀란 인민군이 달아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전쟁 발발 후 서울 수복 전까지 불과 석 달 동안 그런 죽을 고비를 네 번 겪었다"고 말했다.
"대구로 피난을 갔을 때 학교에서 '내가 겪은 6·25' 발표 시간이 있었다. 그때 일을 얘기했더니 대구 아이들이 '서울내기 다마내기 거짓말한다'고 놀렸다. 그 일로 주먹다짐을 자주 했다."
◇대한민국 대표 '모범생 가족'
아버지 민영성은 의사였다. 경성제국대 의학부에 재학했을 때 학생 120명 중 조선인은 그를 비롯해 6명뿐이었다. 그런 그가 다섯 살 민계식에게 가르친 것이 '만인평등'이었다.
"아버지는'Man is born equal by nature(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평등하다)'란 구절을 써서 내 목에 걸어주시곤 달달 외게 했다. 그러곤 종종 '인간관계는 어떻게 해야지?'라고 물으셨다. 그때 'Man is born~' 하고 바로 읊어야지 안 그러면 야단을 들었다. '이 사회의 대부분은 다 너만큼 훌륭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셨다. '그 속에서 두각을 나타내려면 열심히 하는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가훈처럼 들려주셨다. 역시 목에 걸고 다니며 외우도록 한 영어 문장이 'Heaven helps those who help themselves(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였다."
어느 날 아버지는 민계식을 불렀다. 놋그릇 뚜껑을 주면서 "이걸 저 앞에 가는 거지에게 갖다주라"고 말했다. 민계식은 "뚜껑을 왜 거지에게 갖다 줍니까?" 하고 물었다. 아버지는 "돈이 궁해서 그릇을 가져간 모양인데 뚜껑이 없으면 제값을 못 받으니 뚜껑까지 갖다 주거라" 하고 답했다. 민계식이 달려가 뚜껑을 건넸다. 거지가 펑펑 울었다.
민계식의 가정교사는 형이었다. 첫째가 둘째, 둘째가 셋째를 챙기는 방식이었다. 그를 챙긴 건 문학소년이던 넷째 형(한양대 불문과 민희식 전 교수)이었다. 훗날 서울대를 수석 입학한 넷째 형은 정말로 책을 사랑한 독서광이었다.
6·25 때 피란을 갔다가 폐허가 된 서울 집에 돌아왔을 때다. 넷째 형은 약탈을 당해 텅 빈 책장을 부여잡고 울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그깟 책 때문에 우느냐"며 형의 뺨을 때렸다.
"나는 다섯 살 때 한글을 뗐다. 똑똑해서가 아니라 넷째 형이 내가 3~4살 때부터 펜글씨 교본을 주고 익히게 했기 때문이다. 초등학생이 된 뒤에는 '내일 밤까지 독후감 써 와' 하며 '폭풍의 언덕', '제인 에어' 같은 책을 던져줬다. 그 나이에 고전이 재미가 있었겠나. 8살이나 많은 형이라 무서웠다. 억지로 읽었다. 그러면서 역사책을 접하게 되고 '역사를 알면 앞날을 예측할 수 있다'는 걸 깨쳤다."
넷째 형은 민계식을 독서광으로 만들었다. 그는 "울산에 있을 때 아무리 바빠도 매주 목요일 밤엔 반드시 역사와 리더십, 동·서양 고전을 통독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그가 읽은 책은 2400여권, 독서 일기가 두꺼운 파일로 9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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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내 마라톤 대회에서 달리고 있는 민계식. 그는 마라톤 풀코스도 매년 2~3차례 완주했다. / 조선일보 DB
그는 술과 골프를 안 한다. 9대조(祖)가 술로 인해 멸족할 위기를 겪은 뒤 금주를 가계(家戒)로 삼았기 때문이다. 골프는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일이 아니면 멀리하라"는 부친의 가르침을 따랐다. 스트레스는 오직 달리기로 풀었다.
민계식은 서울대를 졸업하고 미국 유학을
떠났다. 버클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밟을 때 시련이 찾아왔다. 첫아이가 1.8㎏ 미숙아로 태어난 것이다.
"소나타급 승용차가
1500달러 하던 시절에 병원비가 2만3000달러 나왔다. 빚을 갚기 위해 시급 70센트짜리 주유원부터 식당일, 깡통 공장 검사요원, 오클랜드
부두의 하역 인부로 일했다.
애리조나 투산시티에서 큰 냉동 트레일러를 몰고 샌프란시스코까지 2000㎞를 이틀 만에 주파하는 일도
했다."
그래도 그는 빚을 다 못 갚아 석사를 마친 뒤 미국 방산회사에 취직해 4년간 군함과 원자력 잠수함을 설계했다. 빚을
청산하고도 9000달러를 더 벌어 MIT 박사과정에 진학했다. 그렇게 키운 미숙아 아들이 지금 미 해병대 중령이다. 둘째 아들과 딸은 미국 대학
교수다.
"자식은 잘 기르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다. 다들 미국에 있는데 전화나 편지를 하면 늘 '아빠 사랑해'라고 한다. 아이들이
어릴 때 학교에서 존경하는 국내 인물란에 셋 다 '아버지'라고 써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로서 그걸로 성공한
것이다."
◇기술논문 280편, 특허 300건
1978년 귀국했을 때 모교 서울대에서
교수 자리를 제의했다. 하지만 그는 기업을 택했다.
"판서(板書) 공포 때문이었다. 내가 지독한 악필(惡筆)이다. 그 악필 때문에
기업을 택했고, 덕분에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가 처음 선택한 기업은 대우조선이었다. 그는 1979년부터
1990년까지 대우조선 기술담당 전무 겸 기술연구소장으로 일했다. 김우중 회장은 경기고 4년 선배였다. 그를 "인마"라고 부를 만큼 격 없이
대했다. 하지만 김우중은 기술 개발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기술 개발 책임자로서 김 회장에게 '독자 기술을 개발하고 핵심
역량을 키워야 한다, 우리 브랜드로 수출하고 애프터서비스를 강화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러자 김 회장은 '기술은 사오면 되는
것'이라고 답했다. '핵심 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이야기엔, '대마불사(大馬不死)야. (이것저것) 벌리면 돼'라고 일축했다. 후일 아드님
교통사고 때 문상을 갔더니 '네 말 들을 걸 그랬어'라고 후회하셨다."
1990년 4월 3일 새벽 6시 그의 인생이 바뀌었다.
라이벌 회사의 총수였던 정주영 회장이 예고 없이 그의 집에 들이닥쳤다. 48세 민계식은 75세 정주영 앞에 무릎을 꿇었다. 정 회장은 말했다.
"이제, 오시는 겁니다."
그날 민계식은 김우중 회장을 찾아갔다. "기술 개발 할 겁니까? 안 할 겁니까?" 대답은 역시
'노(No)'였다. 그는 사표를 내고 현대중공업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정주영 회장은 달랐다.
"우리가 뭘
해보겠다고 하면, 명예회장님은 '그거 일본 사람이 해? 서양 사람이 해?'라고 물으셨다. '그들이 합니다'라고 답하면, '그럼 우리가 왜 못
해? 해봐!'라고 말씀하셨다. '이런 걸 해보면 좋겠습니다' 하고 보고하면 '왜 좋아?', '얼마나 봐줘?' 하고 물어보셨다. 이유를 설명하고
'당장은 못 벌겠지만 한 3년쯤 되면 돈 벌 겁니다' 하면 '그래 3년 기회 줄게. 해봐'라고 하셨다.
상벌이 엄했다. 울산에 오실
때면 부사장급 이상 중역들을 일렬로 세워놓고 빙빙 돌다가 갑자기 누군가를 걷어차며 '집에 가서 애나 봐!'라고 할 때가 있었다. 나중에 보면 그
중역은 반드시 문제가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회사에 공이 많다는 사람들은 불러서 턱턱 주셨다."
민계식은 대우와 현대에 있으면서
기술논문 280편과 특허 300건을 남겼다. 그는 "그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발전용 중형 엔진인 힘센 엔진"이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에 부사장으로 와서 보니 독자 엔진이 없었다. 배 한 척당 3~4대 들어가는 발전용 중형 엔진을 3년 안에
국산화하겠다고 당시 사장한테 보고를 했다. 그런데 그는 '엽전들 주제에 무슨 엔진 개발을 한다고…. 미친 자식!'이라며 보고서를 패대기쳤다.
결국 공식 지원 없이 개발을 시작해 7년 만에 완성했다."
그러나 완성 직후 힘센 엔진은 사라질 뻔했다. 배를 파는 부서에서
"한국산 엔진을 쓰면 선주들이 배를 안 산다"며 장착을 거부한 것이다. 민계식은 뜻이 맞는 중역과 독일 최대 컨테이너 선사를 뚫었다. "우리 걸
6개월만 써보라. 그때도 괜찮으면 돈을 내고 마음에 안 들면 너희가 원하는 엔진으로 바꿔주겠다"고 말했다. 3개월 뒤 엔진 값을 모두 받아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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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쿠바의 10페소 지폐에는 ‘에너지 혁명(REVOLUCION ENERGETICA)’이란 문구와 함께 현대중공업이 수출한 이동용 발전기가 그려져 있다. 쿠바 전력의 35% 이상을 담당하는 이 발전기를 돌리는 것이 민계식이 개발한 ‘힘센엔진’이다. / 조선일보 DB
현대중공업 시절, 그는 20년 이상을 하루 3~4시간만 자고 일했다. 그는 "세계 1등이 되자는 강력한 이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불과 10여년 전 우리의 모토는 '일본 미쓰비시(三菱)를 따르자'였다. 스위스 IMD 평가에서 그 미쓰비시를 추월한 게 2008년부터다."
민계식은 미쓰비시가 현대중공업에 뒤진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직원 수 3만5000명. 현대중공업보다 1만명이 많다. 못 만드는 게 없는 기술을 가진 미쓰비시가 왜? 문득 떠오른 게 있었다.
"미쓰비시는 철저히 임기제다. 상무 2년-부사장 2년-사장 2년-상담역 2년씩이다. 2년 동안 뭘 할 수 있나. 결국은 무사안일, 현상유지다."
그는 "비실비실한 회사가 다시 일어나고, 잘되는 곳이 망하는 건 결국 한 사람 때문"이라고 말했다.
현대중공업에서 일하던 마지막 몇 년간 중국의 도전이 거셌다. 그는 장쩌민·리펑·후진타오를 모두 만났다. 처음 그들이 방문할 때는 "우리 회사가 좋은 회사라 오는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그들이 아주 날카로운 기술적인 질문을 하는 것을 보면서 조선 산업을 일으키려는 야심을 읽었다.
◇食·兵보다 중요한 信이 우리에겐 없다
현대중공업에서 나온 뒤, 그는 KAIST 강단에 섰다.
"몇 번 교수 제의가 올 때마다 '내가 무슨 강의를…' 하며 고사했다. 그러나 교수들이 산업계가 필요로 하는 것을 가르치지 못하는 걸 보고 내가 필요한 부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지난 3월부터 보수 시민단체인 '선진사회만들기연대' 공동대표를 맡았다.
"우리가 일본, 혹은 선진국을 추월하는 분야가 나오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세계에서 우리가 선진국 대접을 받는가? 연구개발과 기술만으로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현대중공업 사외이사인 조휘갑 이사장이 마침 '불합리한 의식과 시스템을 개혁해 선진국으로 가자'는 목표로 단체를 만든다고 해 의기투합했다. 그들은 "정부 돈은 절대 받지 말자"고 뜻을 모았다. 민계식도 1000만원을 냈다.
"어떤 나라가 선진국인가?"라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공자는 식(食)과 병(兵)과 신(信)을 국가 경영의 세 요체로 꼽고 셋 중 신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수제자인 안회가 '먹지 않으면 죽지 않느냐'고 물었다. 공자는 '사람은 어차피 한 번 죽지만 신이 없으면 사회가 아예 존립하지 못한다'고 했다. 내 나이 예순이 넘어서 그 말씀을 이해했다. 유대인은 돈을 꿔도 차용증을 안 쓴다. 신뢰가 있으면 모든 일이 빠르고 편해져 효율적이다. 지금 우리에겐 신이 없다."
민계식은 "경제 발전도 물론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것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선진국이 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는 보수단체들이 경제성장이라는 박정희 시대의 공(功)에만 초점을 맞추는 데엔 동의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세계 제일의 반공국가였던 대한민국이 종북국가가 돼버린 역설은 반공을 정권 유지에 악용한 결과"라고 말했다.
선진연대엔 전직 장·차관, 언론사 최고경영진 출신 등 명망가가 많다. 처음 활동은 회원들이 쓴 칼럼을 언론에 뿌리는 정도였다. 민계식은 "먼저 선진국이 뭔지 정의부터 하고 나서 분야별로 어떻게 언제까지 목표를 달성할지 스케줄을 짜서 실행하자"고 제안했다. 또 "우리 생각에 동조하는 젊은이들을 끌어들여 동력을 키우자"고 했다. "그랬더니 '그래? 그럼 당신이 한번 해봐'라는 뜻에서 대표를 맡긴 것 같다." 민계식은 "미국 해군연구소에 91세 현역이 있다. 지금도 논문을 쓴다. 그에 비하면 나는 젊다. 앞으로 할 일이 많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20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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