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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대처 전 영국총리

하마사 2013. 4. 9. 15:43

 

[영국病 고치고, 공산주의 무너뜨린 대처 前 英총리 별세]
처칠처럼 國葬 대상이지만 "그렇게 하지마라" 유언 남겨… 故 다이애나 빈 수준 장례식

철의 여인이 끝내 쓰러졌다. 8일 오전(현지 시각) 마거릿 대처(87) 전 영국 총리가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대변인 로드 벨은 이날 "(대처의 자녀) 마크와 캐럴은 어머니가 평화롭게 숨졌다고 말했다"고 발표했다.

영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서 11년 반 동안 영국을 이끈 마거릿 대처 전 총리가 8일 오전(현지 시각) 뇌졸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진은 1983년 5월 런던에서 보수당 기자회견에 참석한 대처 전 총리가 발언하는 모습. /AP 뉴시스
대처는 최근 몇 년간 치매에 시달리며 외부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았다. 대처(애칭 '매기·Maggie')는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 이후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꼽힌다. 1979년 영국 역사상 첫 여성 총리에 당선된 후 1990년까지 11년 반 동안 다우닝가 10번지(총리 관저)를 지키며 파업과 과도한 복지 혜택 등 '영국병'에 시달리던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특히 그는 외교 무대에서 미국의 로널드 레이건과 협력해 공산주의를 무너뜨렸다는 평가를 받는다.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는 "대처는 단순히 이 나라를 통치한 것이 아니라 구원했다"고 애도했다. 장례식은 런던의 세인트 폴 대성당에서 치러진다. 영국 정부는 대처 총리의 유언에 따라 장례식을 국장(國葬)으로 치르지는 않지만, 과거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모친과 다이애나 왕세자빈 장례 때와 같은 수준에서 준비키로 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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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화상 주인 아버지
정치행사에 딸 데리고 다니며 어릴적부터 질문·토론 연습
-억만장자 사업가 남편
재정 지원과 전폭적인 외조 "아내는 보스, 난 그림자 남편"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가 1975년 2월 보수당 대표 1차 경선에서 130표를 얻어 1위를 한 뒤 남편 데니스 대처로부터 뺨에 축하의 입맞춤을 받고 있다. /AP 뉴시스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정치인으로서의 삶은 그의 아버지와 남편을 빼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대처는 어렸을 때 아버지에게 정치인의 기본 자질을 배웠다. 그랜섬의 잡화상 주인이었던 아버지 알프레드 로버츠는 향후 그랜섬 시장이 된 인물로 지역 정치에 활발히 참여했다.

그는 가난한 집안 사정 때문에 중학교를 마치지 못했지만, 딸은 지역 명문 여자 학교에 보냈다. 집엔 신문과 책이 쌓여 있었다. 그는 정치 행사나 강연에 딸을 데리고 다니면서 대처가 직접 질문을 하고 토론을 하도록 독려했다.

남편 데니스 대처(1915~2003)는 부인이 정치인이 되는 데 필요한 디딤돌을 마련해줬다. 대처는 1949년 다트포드의 보수당 후보로 정치에 발을 들여놓았을 당시 한 행사에서 10세 연상의 억만장자 사업가 데니스와 처음 만났다. 이혼남이었던 데니스는 대처의 선거 운동을 적극적으로 돕다가 1951년 그와 결혼했다.

대처는 데니스를 만나기 전 변호사가 되기 위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화학 관련 회사에서 일했다. 하지만 결혼 후 남편의 재정적인 지원과 전폭적인 외조 덕분에 쌍둥이를 낳고도 변호사와 정치인으로 일할 수 있었다. 데니스는 영국 첫 여성 총리의 남편으로서 공식 정치에 관여하지 않고도 아내의 정치 활동에 조언과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으로 평가받는다.

자신을 '그림자 남편'이라고 부른 데니스는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가장 위대한 여성 중 한 명과 결혼했다"고 말했다. 언론 인터뷰에서는 아내를 "보스(The Boss)"라고 칭했다.대처는 "데니스 없이 나는 11년 이상 총리로 일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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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 前영국 총리, 치매 투병하다 뇌졸중으로 별세]
첫 여성 보수당 대표·총리, 11년 반 동안 총리 재임 기록

-"협상은 협잡이다"
1984년 전국광부노조 총파업, 원칙 지키며 끝내 항복 받아내
1981년 IRA 옥중 단식 투쟁… 10명 餓死에도 냉정하게 대처
-강인함 속 모성 리더십도
아르헨과 포클랜드 전쟁 때 我軍 전사자 가족 255명에 일일이 자필 위로 편지 보내

"나는 평생 전쟁을 벌이며 살았다." 마거릿 대처(87) 전 영국 총리(3선·1979~90년 재임)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회고했다. 그리고 "싸움에 나섰을 때는 이기기 위해 싸워야 한다"던 그녀답게 자신이 벌인 전쟁 대부분을 승리로 이끌었다.

대처는 잉글랜드 중부 소도시 그랜섬에서 잡화상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근면·검약·시장(市場)의 의미를 13세에 생계 때문에 학업을 그만둔 부친으로부터 일찍이 배웠다. 옥스퍼드대 화학과를 장학금을 받아 졸업했지만 정치에 뜻을 품었다. 열살 때 지방의회에서 선거 때 심부름을 했는데 "후보가 말을 붙일 때 짜릿했다"고 훗날 회고했다. 플라스틱 제조 공장, 식품 공장 연구원 등으로 일하다 1951년 지방의회 선거에서 낙선한 뒤 기업인 데니스 대처와 결혼해 1953년 남녀 쌍둥이를 낳았고 남편의 후원으로 이듬해 법정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34세에 하원에 진출해 1970~74년 교육부 장관을 지냈고, 1975년 영국 첫 여성 보수당 대표, 1979년 영국 첫 여성 총리가 됐다. 보수당 내 반대 세력에 밀려 퇴임하기까지 다우닝가 10번지에서 최장 기간인 11년반 동안 머물렀다.

총리 취임 후 첫 전쟁 상대는 '영국병'이었다. 영국은 1976년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은 뒤에도 고(高)실업률, 저(低)성장, 인플레이션의 늪에서 허우적거렸고 권력화한 노조가 이런 상황을 부추겼다.

대처는 경제적 자유주의와 도덕적 보수 이념에 기반한 '대처주의(Thatcherism)'로 영국병을 치유해갔다. '소득 내에서 생활해야 한다'고 어릴 적 받은 가르침대로 케인스식 자본주의를 비판해 '국가는 버는 것보다 더 많이 써서는 안 된다'는 '작은 정부론(論)'으로 일관했다.

전국광부노조가 1984년부터 1년간 총파업을 벌였지만 '협상은 협잡과 같은 말'이라며 끝내 항복을 받아냈다. 아일랜드공화국군(IRA) 단원들이 1981년 옥중 단식 투쟁을 벌여 10명이 아사하는 극한 상황에서도 타협 없이 냉혹하게 대처해 승리했다.

대처는 영국에서 1만3000㎞ 떨어진 포클랜드 영유권을 두고 아르헨티나와 1982년 봄 11주 동안 벌인 전쟁에서 승리해 용기·결단력·애국심으로 무장한 '전사 여왕(warrior Queen)'의 신화를 낳았다. 매기(애칭)는 아군 전사자 가족 255명에게 일일이 자필 위로 편지를 보내 감동을 줬다. 당시 희소한 여성 정치인을 바라보는 대중의 경계심을 더욱 진한 여성성·모성으로 정면 돌파한 것이다.

대처는 "우리의 목표는 노동당이 퍼뜨린 사회주의의 허상을 폭로·격파하는 것이다"고 말했다. '철의 여인(Iron Lady)'은 집권 3년 전인 1976년 소련의 한 신문이 대처에게 붙여준 별명이지만 훗날 이 철녀(鐵女)는 국내 사회주의 세력뿐 아니라 전 세계 사회주의를 혁파했다는 평을 받는다. 토니 블레어(노동당) 전 총리, 데이비드 캐머런(보수당) 총리 등 정치인들은 당적을 불문하고 대처리즘의 영향을 받은 '대처의 아이들'임을 자랑으로 여긴다.

대처는 국민에게 극단적 애증의 대상이다. 일 중독증과 남을 믿지 못하는 천성 때문에 열 살 연상의 남편만이 일생의 유일한 친구였고, '이 길밖에 없다'식의 독단 탓에 '티나(TINA·There Is No Alternative)' '얼굴에 페인트칠을 한 스크루지 여사' '아이들 우유 날치기'(1971년 초등학생 우유 무상 급식 중단 정책) '인종주의자'(1978년 관대한 이민법 반대)란 악담을 들었다.

마거릿 대처(왼쪽) 당시 영국 총리가 1984년 12월 미 메릴랜드 주(州) 캠프 데이비드에서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이 운전하는 전동차를 타고 웃고 있다. /AP
대처는 인기를 의식해 할 말을 삼가는 정치인이 아니었다. "자신의 일을 직접 처리하기에 앞서 정부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엄정한 눈높이의 그녀를 서민이 더 증오했다. 자신보다 생일이 6개월 늦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도 냉랭한 관계를 지속했다. 여권운동가들과도 거리를 뒀다.

대처는 집권 기간을 늘릴수록 아집을 더했다. 노조·반군·외국군을 모두 무릎 꿇렸던 무적의 여인도 소속 당 의원들이 벌인 불신임 비밀투표로 재임 중 물러나야 했다.

대처는 2002년 뇌졸중을 겪고 다음 해 남편이 췌장암으로 떠난 뒤 치매로 투병해 왔다. 대처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 '철의 여인'은 치매에 걸린 대처의 모습을 묘사해 '노동당의 비열한 복수극'이란 비난을 받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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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 스케치와 각국 반응]
자택엔 추모 꽃·메모 쏟아져… 유럽 순방 캐머런 급거 귀국

'가장 위대한 영국의 지도자'.

대처 전 총리의 자택 밖에 놓인 메모엔 이렇게 쓰여 있었다. 8일 대처 전 총리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런던 최고급 주택가인 벨그레이비어에는 추모객들이 몰려 꽃과 메모를 갖다 놓았다.

이날 유럽 순방 중이던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마리아노 라호이 총리와 회담 도중 대처 전 총리의 부음을 들었다. 그는 곧바로 순방 일정을 중단하고 영국으로 돌아왔다. 캐머런 총리는 총리실 명의로 발표한 성명에서 "우리는 위대한 지도자, 위대한 총리, 위대한 영국인을 잃었다"고 말했다.

8일(현지 시각) 8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런던 자택에 그를 추모하는 꽃과 쪽지, 책 등이 놓여 있다. /뉴시스 로이터
노동당 소속으로 보수당인 대처의 정책을 계승해 '대처의 아들'이란 별명을 얻었던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는 "극소수 지도자들만이 한 나라의 정치 지형뿐 아니라 전 세계를 변화시킨다. 대처는 그런 지도자였다"고 말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이날 성명을 통해 "전 세계는 위대한 자유의 투사를 잃었고 미국은 진정한 친구를 잃었다"고 말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또 "대처는 우리 딸들에게 깨지 못할 '유리 천장'(여성의 고위직 진출을 막는 보이지 않는 장벽)은 없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대처와 동시대를 살았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은 자신의 인터넷 홈페이지에 "대처는 우리의 기억에, 역사에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독일의 마거릿 대처'로 불리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여성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라섬으로써 많은 여성들에게 선례를 남겼다"고 말했다. 영국 정부는 2008년 대처 전 총리의 장례식을 국장(國葬)으로 치르기로 결정했었다. 하지만 본인의 뜻에 따라 국장보다 한 단계 낮은 등급으로 진행하기로 했다. 영국에서 국장은 주로 왕족이 사망했을 때 치르며 20세기 이후 총리 중에는 윈스턴 처칠이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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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처의 말말말

 

8일 세상을 떠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는 생전에 가장 많은 명언(名言)을 남긴 정치인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그는 명쾌하고 도전적인 말로 사람의 내면을 울렸다.

그는 삶의 태도와 관련 "생각을 조심해라, 말이 된다. 말을 조심해라, 행동이 된다. 행동을 조심해라, 습관이 된다. 습관을 조심해라, 성격이 된다. 성격을 조심해라, 운명이 된다. 우리는 생각하는 대로 된다"고 했다. 대처 전 총리가 아버지로부터 전해 들은 얘기라고 한다. '철의 여인'이란 별명에 걸맞게 "진짜 중요한 일은 타협하지 않는다" "실패는 단지 더 현명하게 시작할 기회일 뿐이다" "나는 언제나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 세상 누구도 나를 굴복시킬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

그가 1987년 한 잡지 인터뷰에서 "개인과 가족은 있지만 사회? 그런 건 없다"고 언급한 것은 작은 정부와 민간의 자율·책임을 강조한 '대처리즘'을 바로 보여준 말로 꼽힌다. 당시 그는 "'내 문제는 정부가 해결해줘야 한다' '나는 집이 없다. 정부가 집을 마련해줘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은 자신의 문제를 사회에 전가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회? 그런 건 없다. 정부는 (사회가 아니라) 사람을 통해서만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사회책임론'을 반박한 것이다.

정치인 대처의 단면을 보여주는 명언도 적지 않다. 그는 "나는 장관들이 내가 말한 것을 수행하는 한 그들이 어떤 말을 쏟아내도 신경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포클랜드에서 외부의 적과 싸워야만 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내부의 적을 알고 있어야 한다. 내부의 적은 더 싸우기 어렵고 자유에 더 큰 위험이 된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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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鐵의 여인' 외로웠던 말년]
하루 4시간도 못자 - 불면의 밤을 달랜 위스키도 毒
수시로 남편사망 사실 잊어 - 딸이 "돌아가셨어요" 할때마다 "오! 그때 우리가 곁에 있었니?"
弱者엔 약했던 사람 - 英군함 피격되자 40분 눈물… 일반 직원엔 감기약도 챙겨줘

영국을 11년 반 동안 이끌었던 마거릿 대처 전 총리의 말년은 외로웠다. 대처는 1993년 뇌경색과 치매 조짐을 보였다. 그는 오랜 기간 잠을 하루 4시간도 못 잤는데 수면 부족이 그의 건강을 악화시켰을 것이라고 측근들은 말한다. 불면의 밤을 달랜 위스키도 독이었다. 딸 캐럴은 "2000년 모친의 기억력이 급격하게 나빠지고 말이 어눌해진 것을 알고 놀라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다"고 2008년 낸 자서전에서 고백했다. 대처는 이 같은 증세가 심해지자 2002년 5월 의사의 권유로 대중 강연을 중단했다고 가디언이 8일 전했다.

일생에 하나뿐인 친구였던 남편 데니스가 2003년 췌장암으로 사망한 뒤 대처의 심신은 끝없이 추락했다. 대처는 남편을 떠나보낸 사실을 무시로 망각했고, 딸이 비보(사망 소식)를 알려줄 때면 "(얘기를 처음 접한다는 듯) 오! 숨질 때 우리가 곁에 있었던가?"라고 되묻곤 했다.

대처는 자신의 마지막 나날을 런던 리츠호텔에서 보냈다. 지난해 12월 방광 수술을 받은 뒤 이 호텔에서 요양해왔다. 잡화상의 딸로 평생 검약으로 산 그가 왜 자택을 마다하고 주(週) 수천파운드 숙박료를 물며 5성급 호텔에 머물렀는지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다. 이 호텔은 2002년 대처가 남편과 금혼식(결혼 50주년) 기념 만찬을 했던 추억이 서린 곳이란 사실은 분명하다.

대처는 40분 내내 쉬지 않고 우는 모습을 측근에게 보인 적이 있다. 1982년 포클랜드 전쟁 당시 전장으로 향하던 영국 군함이 아르헨티나군의 공격을 받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다. 철녀(鐵女)의 눈물을 믿지 않는 반대파는 '정치꾼의 최루(催淚) 쇼'라고 했다. 대처는 총리 재임 중에도 남편과 쌍둥이 자녀의 아침을 챙기기 위해 빵을 사러 다녔다.

대처는 이런 모습마저 세인들의 열광과 혐오를 부른 양단(兩斷)의 정객이었고, 스스로도 "나는 합의형(consensus) 정치인이 아닌 확신형(conviction) 정치인이며, 대중을 따르지 않는다"고 공표했다.

대처는 강자에겐 강했지만 부하 직원과 약자에겐 몸을 낮추는 반전 매력이 있었다고 인디펜던트가 8일 전했다. 정책담당관이었던 퍼디난드 마운트는 "총리 관저에서 회의 도중 내가 코를 훌쩍이자 대처 총리가 계단을 뛰어올라가 약을 가져다줬다"고 회상했다.

 

-조선일보, 2013/4/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