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서 소년이 악당에게 쫓긴다. 소년이 가파른 산길을 뛰어오르다 그만 미끄러진다. 한쪽 신발이 벗겨져 데굴데굴 굴러가 버린다. 악당은 곧 소년을 덮칠 기세다. 그때 고무신 한짝이 스크린으로 날아든다. 객석에 있던 아이가 "야야, 이거 신고 퍼뜩 도망가래이" 하며 던진 고무신이다. 1950~60년대 시골 학교 운동장에서 영화를 틀어주던 시절에 종종 있던 일이다.
▶순진한 아이가 아닌 멀쩡한 어른도 영화를 현실로 착각하기 쉽다. 우리 뇌에는 거울 역할을 하는 신경세포가 있다. 관객은 이 신경세포를 통해 영화 주인공을 거울에 비친 자신으로 여기고 몰입하게 된다고 한다. 영화 '7번방의 선물'이 개봉 한 달도 안 돼 관객 700만명을 불러들였다. 설 연휴에만 163만명이 봤다는데 설날 그 물결에 휩쓸려 영화관에 갔다.
▶지적장애인 아빠가 일곱 살 딸을 홀로 키우다 살인범으로 몰려 갇힌다. 딸이 아빠의 7번 감방에 몰래 들어가 함께 지내며 울고 웃는 소동이 벌어진다. 아이가 감방 벽에 크레파스로 울긋불긋 그린 그림을 보며 같은 방 잡범들도 덩달아 착해진다. 결국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아빠를 향해 딸이 "아빠, 어디 가? 가지 마"라고 외치자 객석 여기저기서 흐느낀다. 다들 콧물 훌쩍이는 소리에 덩달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평론가들은 "이야기에 그럴듯함이 부족하다"고 지적한다. 경찰이 주인공을 범인으로 몰아가는 과정이 어설프고 눈물을 억지로 쥐어짠다는 느낌도 든다. 관객은 그런 평가에 아랑곳하지 않는다. 7번방 죄수들이 '바보 아빠'의 무죄를 입증하겠다고 나서자 관객은 고마워서 눈물을 흘린다. 끝내 진실을 외면한 경찰과 법원엔 이를 악문다. 딸이 커서 사법시험에 합격하자 관객은 희망을 품는다. 딸은 사법연수원 모의재판에서 죽은 아빠의 변호인으로 나선다.
▶딸이 아빠의 무죄 판결을 받아내는 순간 극장은 울음바다가 된다. 우리 고전 소설에 자주 오른 한풀이, 해원(解寃)의 모티프가 영화로 재연된 셈이다. '춘향전'에선 이몽룡이 암행어사가 돼 춘향을 구하고 변사또를 심판대에 세운다. '심청전'에선 왕비가 된 딸이 눈먼 아빠에게 빛을 되찾아주고 한(恨)을 푼다. '7번방의 선물'에선 딸이 법조인으로 자라 아빠의 누명을 벗겨준다. 아비의 혼을 위로하고 사법부의 눈을 뜨게 한 현대판 심청이다. 서양 비극에선 폭력으로 복수하는 결말이 많다. 한국인은 예나 지금이나 정의롭게 원한을 푸는 이야기에 더 카타르시스를 누리는 모양이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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