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을 설보다 큰 민족 명절로 꼽는 이가 많지만 어린 날 추억으로 치자면 설이 훨씬 더 신났다. 설이 아이들에게 각별했던 건 세배라는 행사와 함께 횡재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동네 세배 순례까지 하고 나면 주머니가 모처럼 두둑해졌다. 그런 아이들을 노려 구멍가게들은 '뽑기'를 잔뜩 들여놓았다. 아이들에게 설은 '폭음탄'도 눈깔사탕도 구슬도 장난감도 큰맘 먹고 사는 날이었다. 만화방에서 만화도 실컷 볼 수 있었다.
▶설날에 친척 집을 돌아다니며 세뱃돈을 챙기던 때가 어느덧 삼십 몇 년 전 추억이 됐다. 이제 설은 내 지갑이 집안 아이들 앞에서 시나브로 홀쭉해지는 날이다. 그나마 두 딸이 친척들에게서 받아오니 다행이다. 설에 빳빳한 새 돈이 풀리는 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엊그제 한국은행 지하 금고에서 꺼낸 현금 다발 사진이 신문마다 실렸다. 현금 수송 차량 한 대를 1만원짜리로 꽉 채우면 15억원쯤 된다고 한다. 그래도 새 돈은 언제나 모자란다.
▶지난해 세뱃돈은 보통 초등학생 1만원, 중학생 2만원, 고등학생 3만원이었다고 한다. 얼마 전 어느 인터넷 쇼핑몰이 설문 조사를 했더니 "올해는 예년보다 세뱃돈을 줄이겠다"거나 "아예 주지 않겠다"는 답이 절반을 넘었다. 설을 손꼽아 기다리던 아이들 가슴에도 경기 침체의 찬바람이 불어닥칠 모양이다. 초등학생에겐 5000~1만원을 주겠다는 답이 40%로 가장 많았다. 지난해 '1만원'이 일년 새 또 추락한 셈이다. 중·고생 세뱃돈으론 1만~3만원이 45%를 차지했다.
▶호주머니가 가벼워진 어른들이 1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세뱃돈 고민을 해결하는 이색 상품도 나왔다. 인터넷에서 짐바브웨 100조달러짜리 지폐가 4000원에 거래된다. 2009년 발행됐다가 곧바로 통용이 중단된 지폐다. 옛 유고연방이 1993년 찍었던 5000억달러짜리는 8000원에 살 수 있다. 이런 지폐를 사가는 사람은 대개 세뱃돈인 양 주려는 어른이라고 한다.
▶아이들은 지폐에 줄줄이 늘어선 동그라미에 눈이 휘둥그레질 것이다.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하다 뒤늦게 어른의 장난기를 깨닫곤 한바탕 웃음판이 벌어지리라. 형편이 어려워 우리 돈으로 소박한 세뱃돈을 준다고 부끄러워할 일은 아니다.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어깨를 두드려주라. 세월이 흘러 그 아이들이 되돌아볼 행복의 추억이 된다. 세뱃돈을 주고받는 사람끼리 맺은 인연(因緣)의 가치엔 오랜 역사가 담겨 있다. 거기엔 동그라미를 붙이고 붙여도 끝이 없지 않은가.
-조선일보 만물상, 20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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