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사파 대부' 김영환이 말하는 종북 주사파]
"이석기의 경기동부, 진실을 마주대할 용기가 없는 것"
"北정보 이젠 다 알 수 있는데 탈북자가 거짓말한다고 궤변
수단방법 안 가리던 경기동부, 과거 행태 지금도 바뀌지 않아"
주사파 '대부'였던 김영환<사진>씨는 30일 인터뷰에서 통합진보당 일각을 포함한 국내 주사파 잔존 세력에 대해 "진실을 마주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이라고 안타까움을 표시했다. 그는 1992년 민혁당 창당을 주도한 후 1997년 민혁당을 해체할 때까지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과 함께 활동했었다.(그러나 이석기 의원은 민혁당 사건과의 관계를 일체 부인하며 '본인은 민혁당 사건에 대해 지문 한 점 남긴 적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이석기씨는 알았나.
"(민혁당이 점 조직이라) 직접 만나본 적은 없지만 내가 중앙위원장(서열 1위)이니까 당연히 알았다. 하영옥 중앙위원(서열 2위)이 그를 지도하는 구조였다."
―하영옥씨와 이석기씨(서열 5위)는 민혁당 해체에 반대하지 않았나.
"그들은 내가 변절했다고 주장했다. 민혁당 건설의 기초가 주체사상이고, 김일성과 김정일을 추종하는 것인데 만약 당신(김영환)이 이제 와서 반대한다면 당신이 탈퇴해야지, 왜 깽판을 치느냐는 취지였다."
―1999년 전향문을 쓸 때 '운동권 전반에 친북적인 분위기를 확산시켰다'는 점도 반성했는데, 당시 주사파는 우리 사회에 어느 정도 있었나.
"1980년대 말엔 핵심과 주변 동조자를 합쳐 주사파를 10만 정도로 봤다. 99년 말엔 많이 잡아도 1만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동구권 붕괴 등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어떤가.
"친북이란 용어는 구분해서 써야 한다. 김정일에 호감을 갖거나 북한에 우호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김대중·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늘었을 수 있지만 그런 태도와 민혁당 잔류파처럼 머리부터 발끝까지 종북 사상으로 무장한 것과는 차이가 엄청난 것이다. 그런 골수 주사파는 지금은 1000명도 채 되지 않을 것이다. 학생 운동 기반이 거의 붕괴했고 취업 등으로 운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주사파) 재생산 구조가 붕괴된 것이다. 지금 활동하는 사람은 40대와 30대 일부다."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그룹이 여전히 주사파라고 생각하나.
"직접 접촉해 본 적이 없어 그 사람들 생각이 어떻게 바뀌었는지는 모르겠다. 97년 당시 주사파이자 종북이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제가 직접 지도한 바다. 다만 지금 그 사람들의 행동 방식과 나오는 성명 등을 종합하면, (과거와) 크게 안 바뀐 것 아니냐는 추정을 하고 있다."
―통합진보당에 경선부정이 극심했던 데 대해 많은 국민들이 놀랐다.
"민혁당을 이끌면서 느낀 것은 그런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들이 경기동부의 특성인 것 같다. 이석기로부터 출발한 민혁당 인맥을 (저는) 그렇게 지칭한다. 민혁당 지도부는 경기동부적인 그런 특성을 존중해 줬고 이석기 등이 중앙위 결정을 충실히 따랐기 때문에 그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는데…."
―주사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우리가 주사파를 처음 만들고 확산하던 80년대 중·후반은 북한 정보가 극히 제한됐다. 그러나 지금은 탈북자만도 엄청나다. 탈북 학생의 10~20%는 좌파 성향이다. 또 북한 진실을 알려면 얼마든지 알 수 있는 상황이다. 탈북자들이 모두 거짓말한다고 주장할 수도 있지만 말도 안 되는 얘기다. 이석기 의원처럼 조직 관리를 오래한 사람은 사람 눈빛만 봐도 거짓말인 줄 안다. 결국 진실을 대할 수 있는 용기가 없는 것이다. 북한의 진실이 오랫동안 믿었던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면 오랫동안 자신을 지탱했던 지지대가 무너져 공황상태가 올 수 있으니까. 둘째는 기득권에 대한 집착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사회적 영향력이나 지위가 거기서 출발하는 것인데 그것이 잘못됐다고 인정하는 순간 기득권이 모두 무너지는 것이다."
-조선일보, 201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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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 무슨 활동 해왔나]
"北인권 제기할수록 개선돼… 北내부 민주화조직 지원 추진"
―1999년부터 14년째 북한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해왔는데….
"(뜸을 들이며) 저의 구체적인 활동 방법은 말씀드리기 곤란한 면이 있다. 그러나 활동 초기와 비교할 때 지금은 굉장히 많은 사람이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지원하거나 참여 의사를 밝히고 있다. 앞으로 네트워크를 얼마나 잘 만들어 나가느냐가 관건이다."
―야당은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면 북한 정권을 자극해서 역효과가 난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아주 단기적으로만 본다면 (북한의) 단속이 강화되거나 처형 대상이 확대되는 등 역효과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다른 나라 민주화 과정을 보면 외부 비판 등이 장기적으로 도움이 된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다. 북한 정치범 수용소는 외부에서 문제를 계속 제기할수록 그 숫자가 줄어드는 등의 효과가 있었다."
- 김영환 석방대책위원회의 최홍재 대변인(오른쪽) 등이 지난 6월 20일 서울 종로구 주한 중국대사관 측에 후진타오 주석에게 보내는 김씨 일행 석방 촉구 청원서를 전달하려 하고 있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이야기하기 굉장히 곤란한 부분이지만 북한 내부에서 민주화를 추구하는 조직이 있다면 지원한다는 방침이다. 실제 지원해온 게 있는지는 말하기 어렵다."
―김영환씨가 중국에서 당한 고문에 초점이 맞춰지다 보니 북한 인권문제가 희석되는 분위기인데….
"제가 가장 우려하는 부분이다. 북한 인권보다 중국 인권에 (초점이) 맞춰지는 것은 제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앞으로 북한 인권문제에 대해 우리 국민이 어떻게 해야 하나.
"무엇보다 많은 관심을 기울여주실 필요가 있다. 국민 중에는 북한에 대해 포기한 듯한 분이 많은 것 같다. '우리가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는 태도다. 그러나 북한이 붕괴하거나 붕괴 이외의 다른 형태로 커다란 변화가 오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력은 엄청나다. 북한을 포기하고서는 우리가 앞으로 나갈 수 없다."
―1999년 북한 민주화 운동을 시작한 이후 신변 위협은 없었나.
"신변 안전에 늘 주의하는 편이지만 아직 커다란 위협은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상황이 많이 바뀌었다."
-조선일보, 201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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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환이 만나본 김일성]
1991년 잠수정 타고 밀입북
"金, 1930년대 사고에 갇혀 실망 커 전향하는 계기됐다"
김영환<사진>씨는 1991년 북한 잠수정을 타고 밀입북해 김일성을 만났다. 그러나 김일성을 만났을 때의 실망감은 이후 김씨가 전향하는 데 주요 원인이 됐다고 한다.
―김일성은 어떤 인물이었나?
"김일성은 처음 만난 사람들한테 따뜻하게 대했고, 말도 활발하고 유창하게 잘했다. 다양한 화제를 활용해서 대화 분위기가 딱딱하지 않게 했다. 그러나 그와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1930년대식 사고에 갇혀 있구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같은 공산주의자라도 1930년대와 1990년대는 완전히 달라야 하는데 시대 변화에 따른 발전이 전혀 없었다. 특히 제가 (김일성에게) 꾸준히 질문을 던지며 이야기해본 결과, 김일성이 주체 철학에 대해선 제대로 모른다는 것을 알게 됐다. 북한에서 절대적인 주체 철학을 (김일성이 제대로) 모른다는 것은 지도자로서 기본적 성실성, 자격이 결여되지 않았나 생각했다."
―김일성을 몇 시간이나 만났나?
"당시 16일간 북에 있었다. 김일성을 처음 만났을 때는 3시간 반쯤, 두 번째는 두 시간쯤 대화했다."
― 아들에서 손자로 이어지는 북한 체제에 대한 평가는?
"사실 주사파로 과거 활동을 할 때 (세습 문제를) 해명하는 게 굉장히 까다로웠다. 제 입장에선 아들이라 물려주는 게 아니라 가장 뛰어나서 물려준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아들(김정일)도 가장 뛰어나고, 손자(김정은)도 가장 뛰어날 확률이 얼마나 되겠는가. 0.1%, 아니 0.01%도 안 될 것이다. (북한은) 봉건적 전제 왕조, 봉건적 사회주의 국가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주체 사상을 버리고 전향한 핵심 이유는 뭔가?
"결정적인 것은 동유럽의 붕괴였다. 특히 루마니아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처형되는 것을 보고 제가 받은 충격은 말할 수 없이 컸다. 마르크스식 계획경제, 프롤레타리아 독재 체제 등에 근본적인 회의를 갖게 됐다. 더구나 김일성을 만나 엄청 실망했고 (북한의) 주체 사상 이론가를 만난 뒤에도 엄청 실망했다. 이후 북한에 대한 기대를 접고 독자적으로 사상을 발전시켜보자는 생각을 했다. 민혁당을 처음 만들 때부터 종북(從北)주의와 마르크스주의 이 두 가지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민혁당의 압도적 분위기가 종북주의였다."
-조선일보, 2012/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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