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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년 된 따뜻한 빵집… ‘성심당’의 임영진 대표

하마사 2012. 5. 22. 17:22

 

"내 월급은 500만원… 눈앞에 보이는 것만 이익이 아니다"

‘리치몬드’ ‘뉴욕제과’ 문 닫아 명문 동네 빵집 모임 ‘한울회’ ‘성심당’ 매일 빵 1만개 팔아

그날 팔다 남은 빵 기부 傳統 “너희 아버진 좋은 일 해서 천당 갔을 건데 난 큰일 났다”

"지난 총선 때 박근혜 새누리당 비대위원장이 '감동 인물 찾기' 민생 투어 프로그램으로 여길 왔다. 내게 '제빵왕 김탁구의 모델이라고 들었다'고 해서 '아니다'고 답했다. '우리 당에서 가업(家業) 승계 세법을 이렇게 바꾸려고 한다'며 준비한 것을 말하더라. '우리 집은 아직 해당 없지만 고맙다'고 했다. 유명 정치인이 우리 빵집을 방문해준 것만 해도 감사할 일이지."

대전의 56년 된 빵집 '성심당' 대표 임영진(58)씨를 보면 '빵집 주인은 이렇게 생겨야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얼굴과 안경이 동글동글했고, 한참 듣다 보니 그 말투도 동글동글한 것 같았다.

"내가 빵집을 착하게 잘 운영하면 다른 사람들이 '아 이런 식으로 해도 성공하는구나. 나도 한 번 따라 해보자'고 용기를 낸다. 비록 작은 빵을 팔지만 세상을 밝게 바꾸는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성심당'의 명성은 56년간 날마다 팔다 남은 빵을 고아원과 양로원 등에 무료로 제공해온 데서 얻어진 것이다. 하루에 빵을 약 30만원, 한 달에 1000만원어치 기부한다. 아침마다 이런 단체에서 빵 상자를 실으러 온다.

"하루 지난 빵도 전자레인지에 넣으면 새 빵이 되고, 다음 날 반값에 할인하면 불티나게 팔린다. 당장 현찰로 들어온다. 솔직히 유혹을 느끼긴 했다. 하지만 우리 빵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기에 한 번도 멈춘 적이 없다."

임영진 대표는 “누구나 ‘잘살면 좋은 일 하겠다’고 하지만 지금 좋은 일 안 하면 못 한다”고 말했다. /신현종 기자 shin69@chosun.com

이 전통은 고향이 함흥인 그의 선친이 1·4후퇴 때 피란 내려와 대전역 앞에서 찐빵집을 열었던 1956년부터 시작됐다. 그날 못 판 찐빵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그냥 줬던 것이다.

"밀가루가 귀할 때라 다시 쪄서 팔면 됐다. 하지만 아버님은 남들을 돕기 위해 일부러 더 만들게 했다. 가게는 어머니가 맡아 했다. 아버님은 찐빵을 찔 줄도 몰랐다. 기술이나 재주가 없는 분이었다. 바깥을 돌며 오직 남 돕는 일만 했다."

―당시 찐빵집도 어려웠을 텐데.

"판잣집이었다. 하지만 '전쟁통에 피란 못 나왔으면 죽었을지 모른다. 덤으로 사는 삶인데 봉사하면서 살겠다고 하느님께 약속했다'는 것이다. 갚아야 할 빚도 있는 형편에 아버님은 밀가루나 설탕 살 돈을 들고 나가 이웃들에게 담요나 옷가지도 사주고, 장례식을 못 치른 사람에게는 염(殮)도 해줬다."

―고생은 누가 하고 생색은 누가 낸다더니, 모친은 가만 있었나?

"그때 반대를 한 게 마음에 걸리셨는지, 어머니가 '너희 아버지는 좋은 일 해서 천당 갔을 건데 나는 큰일 났다'고 말씀하시더라."

―남을 돕는 것도 우선 자신이 여유가 있어야지,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하지 않는가?

"누구나 '잘살면 좋은 일 하겠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치고 좋은 일 못 하고 죽는다. 있든 없든 지금의 자리에서 시작해야 한다."

―빵을 팔아서 얼마나 남나?

"매출액 중에서 이익은 10%가 안 된다. 우리 빵 가격은 싸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나눠주고도 '성심당' 빵집은 3층짜리 건물이 두 개가 됐다.

"이 바닥이 좁으니 '좋은 일을 하는 빵집'이라는 소문이 났다. 영업적으로 도움을 받은 것이다. 광고 비용을 안 쓰고도 알려졌다. 대전 사람들이 '성심당은 우리의 문화'라고 좋아한다. 손님이 몰려오니까 유지가 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빵을 공짜로 준 게 아니다. 베풀면 백 배로 돌아온다. 눈앞에 보이는 것만 이익이 아니다."

올 초 서울 홍익대 앞 명물이었던 '리치몬드 과자점'이 영업 부진으로 문을 닫았다. 서울 강남역 입구에서 38년간 자리를 지켜온 '뉴욕제과'도 이달 말 문을 닫는다. 하지만 '성심당'에서는 날마다 빵이 약 1만개 팔리고 있다. 하루 매출액은 약 2000만원. 단일 제과점으로는 가장 많은 빵 400종류가 진열된다. 시식할 수 있는 빵 조각이 크고, 빵을 끊임없이 내놓는 것도 이 빵집의 특징이다.

"맞은편 학원에 다니는 학생들이 쉬는 시간이면 쫙 몰려온다. 시식만 해도 배를 채운다. 공짜로 먹는다고 눈치 주지 않는다. 먹을 때까지 먹어라. 계속 썰어준다. 이게 성심당의 문화다. 재미있지 않은가."

이 골목에서는 동네 빵집의 '천적'인 파리바게뜨, 뚜레쥬르 등도 감히 도전하지 못한다. 한때 대단한 제과 브랜드였던 서울의 '뉴욕제과'가 여기에 지점을 냈다가 1년 만에 손들고 떠나갔다. 작년 말 대전 롯데백화점에서 영업 부진을 면치 못하던 '포숑'이 철수한 매장에 '성심당'이 들어갔다. 포숑의 매출액보다 10배를 더 팔고 있다.

"대전 롯데백화점 측에서 내게 입점 의사를 타진한 것은 '재벌가(家) 딸들이 빵집까지 한다'는 여론이 터져나오기 전이었다. 포숑은 하루 매상이 50만원에 불과했다. 적자가 누적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내게 상당히 좋은 조건을 제시했고, 임대료도 깎아줬다."

―'포숑'은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의 외손녀 장선윤씨가 운영해 여론의 눈총을 받은 바로 그 빵집이다.

"이미 빵집에서 철수하고 싶었는데, 그런 시점에 대통령까지 뭐라고 하니, 마치 울고 싶을 때 뺨을 때려준 격이었다. 사실 포숑 매장은 전국에 열 몇 개가 안 되고 아주 고급 빵집이다. 동네 빵집에는 전혀 영향을 주지 않는다. 파리바게뜨, 뚜레쥬르 등 대형 프랜차이즈 제과점이 공포스럽다."

―지방 도시 명문 빵집 주인끼리 모이는 '한울회'가 있다고 들었다.

"빵 기계 수입하는 분이 30년 전쯤 그런 모임을 주선했다. 두 달에 한 번 만나 제빵 기술을 교환한다. 제빵 기계와 재료를 공동 구매할 때도 있다."

―회원들은?

"최근 홍대 앞에서 문을 닫은 '리치몬드 과자점' '김영모 과자점' 인천의 '안스베이커리' 광주의 '궁전제과' 안동의 '맘모스제과' 천안의 '뚜쥬르 과자점'이 회원들이다. 바로 전에는 내가 회장을 했고, 지금은 안스베이커리가 회장이다. 전주의 '풍년제과' 서울 이화여대 앞의 '그린하우스' 마산의 '코아제과' 진해의 '백장미제과'는 문을 닫았다. 부산의 'B&C'는 주인이 바뀌어 모임에서 빠졌다. 현재 회원은 열다섯 명쯤 된다."

―'성심당'도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으니 프랜차이즈를 할 수도 있지 않나?

"우리는 고객을 상대로 영업한다. 100원짜리 빵을 99원에 팔아도 1원이 남는다. 프랜차이즈를 하면 대리점을 상대로 영업을 해야 한다. 대리점 마진을 줘야 하기 때문에 70원에 팔아야 한다. 70원짜리 빵은 지금과는 품질이 다른 빵이 된다."

―대형 프랜차이즈에 맞서 동네 빵집은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나?

"제빵 기술을 배우면 자기 빵가게를 차리는 게 꿈이다. 대형 프랜차이즈가 골목에 들어오면서 이런 꿈이 깨졌다. 하지만 우리 빵집은 이 친구들에게 희망이 됐다. '성심당처럼 하면 돼'라고. 우리 빵집에서 일한 직원들이 독립해 '성심당 출신'이라고 내걸고 있다."

―'성심당'처럼 어떻게 하면 된다는 뜻인가?

"빵 맛에는 손맛도 있다. 파리바게뜨는 기계로 거의 완제품을 만들어와 빵 굽는 냄새를 풍겨야 하니 마지막 과정만 매장에서 굽는다. 반죽을 기계로 자르는 것과 손으로 잘라내는 것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반죽의 기포가 달라진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신선도다. 전날 만든 빵을 팔지 않는다. 이런 신뢰가 쌓이면 많이 팔리고, 회전이 빠르니 신선도가 보증된다. 선순환 구조다. 아무리 제빵 기술이 좋아도 안 팔리면 신선할 수가 없다."

―손님이 적으면 그때그때 적게 구울 수 있나?

"그날 반죽을 해놓았으면 그 양만큼 만들어야 된다. 발효가 계속 되고 있어 대여섯 시간을 넘길 수 없다. 1987년 6월 이 일대에서 시위가 많이 벌어졌다. 그러면 손님이 끊긴다. 하지만 만들어놓은 반죽으로 빵을 구워야 했다. 빵이 수천 개씩 남았다. 그 빵을 버릴 수가 없어 시위대에 몰래 줬다. 이 사실이 알려져 내가 조사를 받았다. 그때 빵집 문을 닫을 뻔했다. 주위에서 '원래 빵을 공짜로 제공해왔고 진압 경찰에게도 줬다'고 증언을 해줬다. 6·29 선언이 있고서야 벗어났다."

―빵 취향도 추세가 있나?

"어른들은 앙꼬와 크림빵을 좋아하고, 젊은 층은 파이와 페이스트리, 케이크를 좋아한다. 빵의 당도(糖度)는 점점 떨어진다."

그는 충남대 섬유공학과를 졸업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때만 해도 '성심당'은 아직 단층짜리 빵집에 불과했다.

"가업을 맡은 것은 내가 빵을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나는 밥을 먹는 사람이다. 빵은 억지로 먹을 뿐이다. 신제품을 개발하고 품평을 해야 하니까. 그렇게 신경 써서 빵을 먹고나면 소화가 안 된다. 대단한 사명감을 갖고서 한 것도 아니었다. 장남인 내가 안 하면 가게 문을 닫아야 했고, 집안의 생계 방편이 없었다."

지금의 '성심당'으로 키운 것은 순전히 그였다. 빵집에는 직원 160여명이 일한다. 전국에서 단일 빵집으로는 규모가 가장 크다.

"당시만 해도 케이크는 초를 켠 뒤 버터를 긁어내서 먹었다. 일본에 가보니 생크림 케이크가 유행하고 있었다. 젊은 시각으로 새로운 흐름을 빨리 받아들였다. 다양한 제빵 기술도 습득했다. 우리 집의 독창적인 '부추빵' '튀김소보루'는 마니아가 많다. 매장 인테리어도 고치고 조명은 할로겐으로 바꾸었다. 이벤트도 개발했다. 인근 백화점에서 우리 빵집에 이런 기법을 배우러 올 정도였다."

―악착같이 일해 가업을 일으켜야겠다고 마음먹었나?

"주위에 적(敵)을 안 만들고, 남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경쟁만 안 하면 적이 안 생긴다. 경쟁 대신에 남들에게 잘해주자고 마음먹었다. 성경에서 '모두가 좋아하는 일을 하소서'라는 구절을 좋아한다. 우리 빵집이 고객과 직원, 거래처에도 좋은 빵집이 되기를 원했다."

―장사하는데 그게 가능한가?

"나는 젊어서부터 '포콜라레(Focolare·벽난로)' 운동에 심취했다. 이탈리아 여인 키아라 루빅이 2차대전으로 폐허가 된 도시를 보고 실질적으로 이웃을 돕고 하느님의 사랑을 나누자고 한 것이다. 나눔과 공유의 정신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지 않겠나."

―자기 이익을 좇는 세상인데, 당장 일하는 직원들과도 이해가 다르지 않은가?

"우리 빵집의 매출과 이익은 다 투명하다. 이익이 얼마 나면 직원들이 자기 성과금까지 계산할 수 있다. 수익금 일부는 어려운 아프리카에 보낸다. 내 월급도 500만원으로 정해져있다."

―대표 월급이 500만원이라고 했나?

"돈 쓸 데가 많지 않다. 아내도 빵집에서 일하니까 월급을 받고 있다. 사실 은행 빚이 꽤 된다. 그 빚도 숫자에 불과하다. 죽을 때 갖고 갈 것도 아니고(웃음). 만약 내게 100억원이 더 있다고 해봐야 건물이 하나 더 있는 것이다. 그것 때문에 내 삶의 무엇이 달라지겠나. 없는 것이나 똑같은 것이다."

맞는 소리를 했는데도, 그가 독특하게 보였다. 대학 4학년인 아들은 학원에서 제빵 기술을 배우고 있다고 했다.

 

-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 사람, 2012/2/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