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봉목사
1900년 평남 강동군의 간리에서 출생한 이성봉목사는 6,7세 때 중화로 이사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신천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리고 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14세에 대동군 시족면 건지리로 이주해 비교적 오래동안 거주했다.
1927년 동양선교회에서 운영하는 경성성서학원을 졸업한 그는 3월 18일 이사회로부터 수원교회 개척을 임명받았다. 수원에 셋집을 얻어 4월 8일 부활주일에 첫 예배를 드린 그는 2년 8개월 만인 1930년 12월 25일 예배당 봉헌식을 가졌다.
교세는 장년 1백60여 명과 주일학생 2백여 명이었고 3개월 뒤인 1931년 3월 22일 연회에서 이사회로부터 목포교회로 파송받았다.
목포교회는 자그마한 셋방에 성도 40여 명이 있었다. 그는 목포교회에 부임한 지, 1년 뒤에 제4회 연회에서 목사안수 투표에 당선됐다. 이듬해 8월 헌당식을 갖고 호남지방회에서 회계, 인사부원, 교육부장 그리고 총회 대의원 목사대표를 역임했으며 제4회 호남지방회 회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36년 4월에 신의주로 파송돼 신의주 동부교회에 부임한 그는 이듬해 연건평 2백평의 2층 기와집으로 당시 성결교회에서 가장 큰 예배당을 건축했다?
그는 12월 19일 헌당예배를 드리고 9년 9개월 동안 3곳의 목회를 마치고 부흥사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1937년 12월 22일 신수정교회 집회부터 1939년 7월 11일 마지막 부흥회까지 1년 7개월 동안 4백일 이상 집회를 인도했다. 그러나 타교파에도 집회를 나가면서 1939년 이사회가 그의 집회를 성결교회에 국한하여 가을부터 영남지방으로 제한시켰다.
그리고 그를 휴직케 하고 일본에 보내 공부하도록 했다. 그러나 그는 공부보다 부흥집회에 열중하다가 귀국해 또 다시 부흥집회를 인도했다.
결국 공부는 안하고 부흥회만 다닌다는 이유로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든지 아니면 교단에서 나가서 자유롭게 부흥회를 인도하라며 권고 사직장이 날아오기도했다.
그는 사직하지 않고 만주 목회를 선택했다. 그의 만주행은 일제 신사참배에 대한 저항의 한 방편이었다.
그는 굴종하거나 순응했던 교회 지도부와는 달리 도피를 택했다.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했지만 소극적이나마 피신이라는 형태적 저항이었다.
그는 1941년 만주 봉천 중앙교회에 임명됐다. 그는 매일 새벽에 1백여 명의 성도와 기도하면서 건축을 마무리했다.
해방을 맞아 9월 15일 귀국한 그는 황해도와 평안남북도에 있는 18개 교회를 찾아다니며 무너진 예배당 수리비를 내어놓기도 했다.
1946년 38선을 남하해 초교파적으로 집회를 가졌으며 1만여 명이 모이기도 했고 때로는 10여 명이 모이는 등 한 교회에서 하루 세 번의 집회를 3∼5일 인도했다.
6.25전쟁은 그를 더욱 쉴 수 없게 했다. 그동안 초교파적으로 활동한 그는 성결교회 재건을 위해 전력했다. 1955년 4월 27일부터 1956년 3월 18일까지 11개월 동안 66개 교회에서 집회일수만 2백81일이었다.
성결교회 희년인 1957년 5월 15일에서 12월 29일까지 2백31일 동안 성결교회를 순회하면서 집회했으며
1958년 여름에는 제주도에서 초교파적으로 그리고
1959년 4월 2일부터 12월 7일까지 8개월 동안 미국을 순회하며 집회를 인도했다.
1961년 9월 23일부터 1963년 2월 17일까지 1일 1교회를 목표로 5백13일 동안 4백80교회에서 집회했다.
이후, 집필에 몰두한 그는 1965년 7월 23일 성결교회 합동총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한 뒤, 8월 2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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