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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직 목사 탄생 110·소천 12주년 예배… “한국교회 부흥·연합, 다시 한경직 목사다”

하마사 2012. 4. 30. 14:06


19일은 한국 교회사의 거목으로 추앙받는 한경직(1902∼2000·사진) 영락교회 목사가 소천한 지 12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영락교회는 지난 18일 한 목사 탄생 110주년 및 소천 12주년 기념예배를 드리고 전도와 교육, 봉사의 조화를 강조하면서 청렴·고결한 목회자의 모델을 보여준 한 목사의 삶을 기념했다. 2012년 한국교회에 다시 ‘한경직’이 요청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시 복음주의 운동, 교회부흥 비전 꿈꾸라=한 목사는 한국 복음주의 운동사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이다. 한국교회에서 복음주의 운동이 무대에 오른 것은 1973년 빌리 그레이엄의 서울 전도집회 이후부터다. 이때를 기점으로 성경공부와 전도, 기도의 열기가 무르익었으며, 해외 선교사 파송이 줄을 이었다.

한 목사는 73년 대회는 물론 엑스플로 74대회를 진두지휘하고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초대 이사장을 맡는 등 복음주의 저변 확대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그는 1945년 이북실향민과 함께 베다니교회(영락교회 전신)를 세우고 대형교회의 모델과 가능성을 제시했다. 복음적인 목회철학과 비전, 설교는 조용기 곽선희 김삼환 목사 등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김선도 광림교회 원로목사는 “한국교회는 모세처럼 교계를 이끌며 부흥시킨 한 목사의 정신을 어떻게 이어받을 수 있을까 깊이 고민해야 한다”면서 “영락교회가 한국교회의 씨앗이 된 것처럼 우리도 선한 목자가 되어 풍성한 생명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시 전도 교육 봉사, 연합운동 균형 갖추라=한 목사는 ‘교회가 서면 열심히 전도해 새로운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 특히 교회가 서는 곳에 교육기관이 설립돼야 하며, 가난하고 헐벗은 이웃을 돌보는 사회사업기관이 있어야 한다’(‘영락교회 35년사’, 1983)는 강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의 나라사랑 정신은 오산학교 시절 이승훈 조만식 선생의 가르침에서 기인했다. 그것은 신사참배 거부운동과 기독교사회민주당 창당(1945년) 등으로 나타났다. 고아들을 위한 보린원을 비롯 모자원, 경로원, 농아인교회 등을 세우고 한국전쟁 당시 기독교구국회를 조직해 신앙집회를 개최했다.

교육자로서 영락중·고교, 영락여자신학교 등을 세웠으며, 기독교선명회(현 월드비전)을 창설해 전쟁과 재난, 기아에 시달리는 이들을 보듬었다. 예장 통합 총회장(1955년)과 한국기독교100주년 기념사업회 총재(1982년)를 맡았으며,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발족(1989년)시키고 사랑의쌀나누기운동(1990년)을 전개했다. 이런 공로로 종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템플턴상(1992년)을 수상한다.

림인식 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이사장(노량진교회 원로목사)은 “한 목사님은 위기극복의 강력한 원동력이자 연합운동의 중추적 역할을 하시면서 한국교회와 사회에 절대적 영향을 끼치셨다”면서 “민족을 복음으로 살려야 한다는 한 목사님의 정신을 교회가 절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국민일보, 2012/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