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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길선주와 한국적 성령운동의 소명

하마사 2012. 7. 7. 18:43

 

▲ 길선주 목사

 

7. 길선주와 한국적 성령운동의 소명

 

1). 조선신학

비로소 1907년 평양의 대 부흥회에서 목사 길선주를 통해, 이스라엘 하나님의 셰키나는 사무엘, 이사야, 예레미야 그리고 에세네파의 영성과 한반도 영성사를 관통하던 유불선儒彿仙 사상을 하나로 융합해내고 있었다. 당시 길선주 역시 동학의 시대적 세례를 피해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길선주가 구체적으로 동학에 입문하거나, 적극적으로 접근한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그의 성장 지역이 동학의 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평양 근처였고, 특히 야은 길재 선생의 19대 후손이라는 유가儒家적 긍지가 그를 당시 조선 사회에서 정신적 엘리트로 자처하게 하는 기반이 되고 있었을 터이니, 아무래도 하층민 속으로 파고들던 동학東學의 대중운동보다는 좀더 '고매한 방법'의 개인적 선도仙道수련을 택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는 한국교회에 입산入山수련, 혹은 입산기도라는 특이한 형태의 수련방식을 도입하게 되는데, 이는 유럽의 수도사들이 벌이던 수도원 운동과는 약간 차이를 둔다. 길선주의 그것은 사회적 현장 속에서 역사적 구성원으로 강렬한 역동성을 발휘하는 영적 에너지를 취하고자 하는 방편적 입산이었기에 그렇다. 오히려 엘리야 등 히브리 예언자들의 그것이나, 또 최수운으로 대표되는 한국 전통적 영성수련에 가깝다.

따라서, 길선주가 28세 되던 1897년경 예수교로 개종하고, 몇 년 후 1907년 조선장로교 평양신학교 제1회 졸업생으로서 한국 초대목사 7인 중의 1명으로 취임하면서도, 그의 내면에는 유불선 통합적 사류思流와 동학농민봉기를 통해 보게 되었던 강렬한 대중 결집의 에너지가 기독교적으로 새롭게 융합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길선주의 신학을 이른바 조선신학朝鮮神學이라 칭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길선주가 이스라엘 하나님의 셰키나에 기초하여 중국의 홍수전과 동학의 최제우를 넘어서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로는 가히 천재적이었다 싶을 정도로 길선주는 조선기독교회의 한복판을 관통하며 동서양 종교영성 융합에 나름대로 성공하고 있었다. 이는 물론 당시에 길선주의 독창적 사상결집을 제어할 만큼의 동양사상적 식견을 갖춘 서양선교사나 해외 유학파 조선인 신학그룹이 형성되기 이전이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2). 예루살렘, 안디옥, 그리고 한반도

사도행전은 2장 1-4절에서 오순절 마가 다락방에서 시작된 성령강림과 대 부흥의 역사를 우리에게 전한다. 그리고 사도 바울이 본격적으로 안디옥에 자리를 잡고 알렉산드리아 필로의 사상적 기초에 입각한 바울 자신의 나사렛 예수 와 로고스를 헬라지역에 정력적으로 전파하기 이전까지의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단편적 흔적들을 나름대로 보여준다.

 

과연 바울의 헬레니즘적 기독교사상이 아니었으면, 역사적 초대교회는 그 생존을 보장받지 못했을까? 필자는 단연코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이미 그 당시 세계는 로마, 파르티아, 쿠샨, 그리고 서한西漢이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문명적 벨트를 이루며, 동서간 무역로가 번창할 만큼 국제적 안정을 이루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그 국제적 세력 균형은 AD.200년 전후, 파르티아의 멸망, 쿠샨제국의 해체, 그리고 서한의 붕괴가 시작될 때까지 안정적으로 지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세계사의 중심부에 섰던 바울의 헬라 편향적 기독교론은 이미 파르티아와 쿠샨 그리고 서한의 제 국민들에게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편향적 지역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일례로, 훗날 예수회 신부들이 중국 전교傳敎를 시도할 때, 그들은 중국의 전통적 사상을 중국인에게 새로 배워야만 했으며, 그것을 다시 로마 교황청에 보고하는 것도 그다지 쉬운 일이 아니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면서도 예수회 신부들의 유럽적 신학은 결국 중국의 민중들 속으로 파고들지 못했다. 오히려 민중이 다가선 것은 예수회의 로고스적 관념보다는 홍수전의 셰키나적 에너지였다.

 

바울이 유브라테스를 건너 바빌론 유대공동체를 찾아 나서지 못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필시 그의 심상心想적 한계에 기인한다. 예수의 영이 바울로 하여금 로마로 가라 하신 것은 바울이 상대적으로 로마문화에 적합했다는 사실과 더불어, 역으로 그가 바빌로니아 유대공동체에는 그다지 어울리지 않던 인물이었다는 추론을 이끌어 내준다. 로마제국의 영토는 당시 세계 대륙의 서쪽 끝에 있었고, 오히려 메소포타미아에 형성된 파르티아 제국이야말로 대륙 동방으로의 진출을 가능케 하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그 중심부에 당시 바빌로니아 유대공동체가 견실히 보존되어 있었다.

 

이것이 당시 세계문화권의 상황이었기에 새로운 영적 에너지는 마니와 무함마드의 경우에서처럼 반복적으로 동방에서 분출되고 있었다. 서방교회와 그리스 정교회 반대편 동쪽 아라비아 사막에서 예언자 무함마드의 이슬람이 대표적으로 자신들의 역사적 사명을 터득 분출해 내고 있었고, 길선주 이후 한국기독교회를 점차 서구적 해외 유학파가 장악해들던 1950년대 무렵, 헬레니즘 토양 반대편 동양사상 토대 위에서 통일교회 창시자 문선명이 자신의 사명감을 피력 분출해내고 있다. 이 역사적 현상을 명확히 직시하지 못한다면, 세계기독교회는 이슬람과 통일교회라는 비非서구적 종교운동들이 왜 탈 기독교적 입장을 보였는지 그 이유를 결코 읽어내지 못할 것이다. 이제 새 천년은 동서양 영성이 통합적으로 융화되고 있는 한반도에서, 그리스도 예수를 중심으로 분출되는 히브리 영성적 본류의 섭리를 기다리고 있다. (2004, ho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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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30년대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부흥사로 성령운동을 벌이다 이단시비에 휘말려 목사직에서 파면되었던 고(故) 이용도 목사가 복권됐다. 지난해 기독교대한감리회 23차 총회에서 그의 명예회복과 복권조치가 결의된 것이 금년 3월 9일 제19차 서울연회에서의 자격심사과정을 거처 전격 추인된 것이다. 서울연회는 '이용도 목사의 성령운동이 과거 신비주의를 지나치게 강조한 측면이 있으나, 오늘날 그와 같은 맥락의 오순절성령운동이 보편화되고 있는 상황하에서, 이목사의 성령운동을 이단시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발표했다. 이목사의 복권은 감리교뿐 아니라 전체 한국교회에 의미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의 체험적이고 신비주의적인 성령운동에 대한 비판이 일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복권된 것은 그의 신학에 대한 무죄선고를 의미한다. 또, 그 동안 진행됐던 그의 신앙운동에 대한 논의가 일단락 된 것은 물론, 오순절 성령운동의 은사적인 특징이 현실적으로 이단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번 복권조치로 인해 이목사의 신앙에 대한 새로운 조명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1999.3.13 국민일보)

 

 

출처 : Joyful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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