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2년 미국 선교사 새뮤얼 무어 가족이 한강 나루 양화진에 내렸다. 이들이 남대문까지 걸어왔을 땐 이미 성문이 닫혀 있었다. 어린 아들이 먼저 성벽 아래 개구멍으로 들어갔다. 부부는 6m 성벽에 로프를 걸고 넘어갔다. 무어는 지금 을지로1가, 곤당골에 터 잡고 백정과 천민에게 복음을 전했다. 양반·천민이 함께 예배를 보게 했고 고종에게 신분제 철폐를 탄원했다. '백정 해방의 아버지' 무어는 그리스도신문 사장이던 1906년 장티푸스로 숨져 양화진에 묻혔다.
▶이화학당 3대 학장 조세핀 페인은 기숙사 학생들을 먹이려고 날마다 가마 타고 나가 장을 봐왔다. 1905년 을사조약으로 나라가 외교권을 잃자 매일 오후 3시 전교생을 모아 주권 회복 기도회를 열었다. 학장에서 물러나서는 하루 수백 리를 걸으며 전도하다 1909년 해주에서 콜레라에 걸려 떠났다. 1890년 양화진 선교사 묘지에 처음 묻힌 존 헤런도 이질에 목숨을 잃었다. 평양 광성학교를 세운 윌리엄 홀은 환자에게서 발진티푸스가 옮아 세상을 떴다. 경신학교 교장 기포드는 이질로, 숭실대 설립자 베어드는 장티푸스로 숨졌다.
▶1910~20년대 호남에서 포교하던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가운데 67명이 말라리아를 비롯한 풍토병에 목숨을 앗겼다. 미국 본부가 귀환 명령을 내렸지만 선교사들은 떠나지 않았다. 대신 지리산 노고단에 휴양관을 짓기 시작했다. 전염병이 번지는 6~9월 깊은 산속으로 피해 성경을 번역하며 기운을 차렸다. 1940년대 56채에 이르던 휴양관은 6·25 때 파괴되고 예배당 벽체 일부만 남았다.
▶후배 선교사들이 그 뜻을 이어 60년대 지리산 왕시루봉에 휴양관을 세웠다. 미국·영국·호주·노르웨이 선교사들이 제각기 고향 건축양식에 아궁이와 온돌을 더해 지어서 건축학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한다. 그중에 남은 12채를 자기 돈 들여 관리해온 이가 얼마 전 한국인이 된 인요한 세브란스 외국인진료센터장이다. 그는 외증조부로부터 할아버지·아버지를 거쳐 117년 한국 사랑을 이어온 선교 집안 린튼가(家)의 4대손이다.
▶인요한은 아버지 휴 린튼이 휴양관에서 미국인들에게 후원금 보내달라는 편지를 종일 치고 있던 모습을 기억한다. 교리서를 제대로 못 외워 혼나기도 했다 한다. 교계는 휴양관이 문화재로 등록되기를 원하고 있다. 초기 개척 선교사들은 순수한 청교도 정신과 '복음의 빚진 자'라는 포교의 사명에 뜨거운 젊은이들이었다. 여선교사 페인은 마흔에 콜레라로 숨지며 말했다. "나는 최선을 다해 살았다"고. 무서운 풍토병에도 물러서지 않았던 그들의 용기와 열정이 지리산 휴양관에 살아 있다.
-조선일보 만물상, 2012/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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