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조간신문 머리기사에 42년간이나 리비아를 철권 통치하던 카다피 국가원수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올라있었다.
쿠테타로 집권하여 정적들을 숙청하고 수 십 년간 독재를 자행했던 그가 시민들의 봉기와 서방국가의 지원으로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는 소식이다.
그의 최후를 전하는 기사를 읽어보면 도로 밑의 배수관에 숨었다가 발견한 시민군들에게 목숨을 구걸했다고 한다.
42년 동안 리비아국민들을 압제했고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전투기를 동원하여 살상했던 그가 최후의 순간에 자기를 향해 총을 겨누는 시민군들에게 목숨을 구걸한 비굴한 독재자의 모습이었다.
독재자의 비참한 최후였다.
이라크를 독재했던 사담 후세인이나 테러로 수많은 목숨을 앗아갔던 빈 라덴의 최후도 비슷했다.
이들의 최후가 비참했지만 애석한 마음이 들지 않고 기쁜 이유는 왜 일까?
물론 그들을 추종하는 사람들 편에서는 안타까운 일이겠지만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사망을 기뻐할 것이다.
그들로 인해 무수한 생명들이 억압을 받다가 죽어갔기 때문이다.
생명의 가치는 동일하지만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 최후의 가치는 달라진다.
사망했을 때 많은 사람들이 슬퍼하며 안타까워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며 카다피의 죽음처럼 환호하고 기뻐하는 죽음이 있다.
카다피의 사망소식을 듣고 시민군들이 환호하며 총을 하늘로 쏘아 올리는 모습을 보았다.
어떻게 살았느냐가 중요하다.
사망소식을 듣고 마음으로 슬퍼하고 울어주는 사람들이 많으면 행복한 사람이다.
권력의 자리에서 내려올 때가 있음을 알아야 하지만 독재자들은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다고 착각하는 모양이다.
건재를 과시하며 자기는 다르다고 스스로 최면을 걸고 살아가는 북한의 김정일과 같은 독재자들이 있지만 언젠가 그도 내려올 때가 반드시 있을 것이다.
굶어 죽어가는 북한 동포들을 외면하면서 소수의 부귀영화에만 취해있는 북한 권력도 카다피의 교훈이 적용될 때가 있을 것이다.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심판을 알리는 시계는 어김없이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죽었을 때 축하하는 일은 잘못된 일이다.
더구나 목사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태도이다.
하지만 히틀러, 스탈린, 후세인, 빈 라덴, 폴 포트, 김일성, 카다피와 같은 사람들은 다르다.
전쟁을 일으켜서 무수한 생명을 앗아가거나 테러로 무고한 생명을 죽음으로 몰아넣거나 독재 권력으로 인간의 자유를 빼앗거나 학대하는 사람들의 죽음은 기뻐해도 좋을 것이다.
한 생명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하나님이시지만
수많은 목숨을 앗아가는 사람의 생명을 같은 생명의 가치로 평가하지는 않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죽음 이후의 심판의 무게도 달라지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