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배려의 행복

하마사 2011. 5. 25. 20:47

본문: 룻 2:14-23

찬송: 499장

제목: 배려의 행복

목표: 배려하는 행복을 누리며 살게한다.

 

 

(예화)

아주 옛날에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노인이 살았습니다. 어느 날 밤길을 거닐던 그 노인이 한손엔 등불을 들고 가고 있었습니다. 그 모습을 목격한 한 젊은이가 물었습니다.

"할아버지는 장님이면서 등불은 왜 들고 다니시는 거예요?"

노인은 밝은 미소를 띠며 짧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을 위해서요."

이 노인처럼 배려는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입니다.

 

요즘 자라나는 아이들을 보면서 상대방을 배려할 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희 아이들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맛있는 것이 있으면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가 모두 먹습니다. 자기 편리한 대로 행동하고 다음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합니다. 사회가 급변하면서 자기 챙기기도 바쁘니 상대방을 배려할 마음의 여유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인도고아원 및 선교센터 후원을 위한 여전도회주최 바자회가 24일부터 진행 중에 있습니다. 우리 자신의 이익을 위한 바자회가 아닙니다. 남을 배려하기 위한 바자회입니다. 이익금을 인도의 고아들과 선교센터를 후원하기 위하여 땀 흘려 봉사하는 행사입니다. 배려는 우리를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세 사람 나오미, 보아스, 룻이 서로를 배려함으로 얻는 행복을 살펴보면서 우리들도 함께 배려의 행복을 누리기를 소원합니다.

 

행복을 위한 배려는

 

1. 제공하는 배려(14-17)

 

14-17절,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15] 롯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하여 가로되 그로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16] 또 그를 위하여 줌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로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쯤 되는지라”

 

룻기의 배경을 잠시 말씀드리면 유다 땅 베들레헴에 살고 있던 나오미 부부와 두 아들이 그 땅에 흉년이 들자 모압 땅으로 피난하여 살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은 죽고 두 명의 모압 며느리와 함께 보호자 없이 남게 되었습니다. 나오미는 고향 인 베들레헴으로 돌아가기로 결심을 하고 두 자부에게 말하자 오르바는 모압에 남고 룻은 자기의 고향을 버리고 시어머니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갔습니다. 룻은 베들레헴에 정착해 살면서 보아스와 결혼을 하여 후에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될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족보에 이름을 올리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이삭을 줍고 있는 룻에게 관심을 보이며 일군들이 먹는 식사자리에 초대했습니다. 그리고 룻이 배불리 먹도록 음식을 제공했으며 일군들에게 이삭을 일부로 줌에서 조금씩 뽑아버려서 이삭을 많이 주울 수 있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룻을 돕고자 하는 보아스의 따뜻한 배려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미 룻에 대하여 듣고 있었습니다. 남편을 잃고 고향을 떠나와서 시어머니인 나오미에게 효도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보아스는 룻이 시모를 모시고 살 수 있도록 자기 밭에서 이삭을 계속 주우라고 하며 이삭줍기할 자리를 제공해주었습니다.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자리도 제공해주었습니다. 먹을 것이 풍부하고 배부른 사람에게는 작은 배려에 불과하지만 베들레헴에 자기자리가 없는 룻에게는 엄청난 힘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자리를 제공하는 배려가 중요합니다. 누구나 살아갈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장소의 개념뿐만 아니라 위치와 역할의 개념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룻은 자기 자리가 없었습니다. 자리가 없는 사람이 얼마나 불쌍합니까? 나라를 잃고 떠도는 난민들이 있습니다. 탈북자들이 있습니다. 집도 없고 생활터전이 없는 사람들의 고충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자리, 어머니의 자리, 남편과 아내의 자리, 자녀의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자기자리를 못 찾을 때 방황하게 되고 흔들리게 됩니다. 집안에서 가장이 자기 자리를 잡아야 가정이 건강합니다. 아버지의 자리를 어머니가 빼앗거나 어머니 자리를 무시하면 문제가 생깁니다. 역할의 혼돈이 오면 가정이 어지러워집니다. 자기 자리가 없는 가정은 불행합니다. 가족들이 자기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서로 도와주어야 합니다. 자기자리가 있을 때 행복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장사할 때도 자리가 중요합니다. 어떤 자리는 물건이 잘 팔리지만 안 팔리는 자리도 있습니다. 그래서 자리 값이 있고 권리금이 있습니다. 바자회 할 때도 어느 정도 관련이 있을 듯합니다. 그렇다고 서로 좋은 자리를 차지하여 수익금을 많이 올리려고 다투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봉사를 할 때도 자리가 있어야 합니다. 봉사할 자리를 만들어주는 배려가 중요합니다. 봉사를 하고 싶어도 몰라서 못하는 사람이 있고 봉사하면서 자기자리를 잡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자기들끼리만 똘똘 뭉쳐서 다른 사람의 자리를 끼워주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자리를 만들어주고 끼워주는 것은 사람을 살리고 정착시키는 아주 중요한 배려입니다.

또한 배고픈 사람에게는 음식이 필요합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음식을 제공해주었습니다. 먹어야 살 수 있습니다. 이삭을 주워 근근이 살아가는 룻에게는 음식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시어머니와 둘이서 먹고 살아가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일단 먹어야 미래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 가장 우선적인 배려는 의식주 문제입니다. 육체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의식주문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먹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도 중요한 배려입니다.

몇 년 전 인도에서 기독교인들이 힌두교도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어 고아들이 생겼습니다. 우리교회는 고아들의 의식주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아원을 설립하고 여전도회 주최 바자회를 통해 얻은 수익금으로 물품과 옷을 보내고 있으며 선교센터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물질을 제공하는 배려입니다. 보아스가 룻에게 했던 동일한 배려입니다. 자리와 물질을 제공해 주는 배려입니다.

그런데 배려는 단 한번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추수가 끝날 때까지 자기 밭에서 이삭을 주우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일군들에게 일부러 이삭을 흘려주라고 했습니다. 지속적으로 배려해주었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권사님이 이런 배려를 하고 계십니다. 매월 몽골선교비를 후원하고 있으며 그 선교비로 몽골의 신학생들을 양육하고 있습니다. 지속적으로 물질을 제공하며 후원한 결과 신학교를 졸업하고 현지에서 목회자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보람된 사역입니까? 제공하는 배려는 행복을 가져옵니다. 제공하는 사람과 제공받는 사람 모두를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자회를 기쁨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사도행전 20:35절에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말씀하셨습니다. 줄 수 있는 것이 복이고 감사한 일입니다. 받고 사는 것보다 주며 살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복입니까? 바자회를 하느라 수고하고 애쓰지만 그 수익금으로 인도의 고아원과 선교센터를 후원할 수 있는 것이 감사의 조건임을 깨닫고 감사와 기쁨으로 감당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바자회뿐만 아니라 생활 속에서도 보아스처럼 자리와 물질을 제공하는 배려를 통해 나도 행복하고 남들도 행복하게 만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동행하는 배려(18-19)

 

18-19절, “ 그것을 가지고 성읍에 들어가서 시모에게 그 주운 것을 보이고 그 배불리 먹고 남긴 것을 내어 시모에게 드리매 [19] 시모가 그에게 이르되 오늘 어디서 주웠느냐 어디서 일을 하였느냐 너를 돌아본 자에게 복이 있기를 원하노라 룻이 누구에게서 일한 것을 시모에게 알게 하여 가로되 오늘 일하게 한 사람의 이름은 보아스니이다.”

 

 

보아스는 룻에게 자리와 물질을 제공하는 배려를 했지만 룻은 나오미에게 동행하는 배려를 했습니다. 나오미는 불행한 여인이었습니다. 베들레헴에서 기근이 들어 살지 못하게 되자 고향을 떠나 모압 땅으로 피난 갈 정도로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그나마 모압 땅에서 잘 살았으면 좋았을 것인데 그곳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는 어려움을 겪고 다시 고향땅으로 돌아가는 외롭고 비통한 여인이었습니다. 모압 땅에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함께 해줄 사람이 없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아픔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입니다.

외로움과 고독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사람들이 왜 자살합니까? 세상에 자기 혼자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죽지 않습니다. 그 사람 때문에라도 죽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모든 관계가 단절되고 혼자 남았을 때 살아갈 의욕이 상실되어 자살하는 것입니다. 나오미는 살 의욕이 없어졌습니다. 누구를 위해 살아가겠습니까? 고향땅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려고 결심한 것은 희망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방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그곳에 살 이유가 없어졌습니다. 모압 땅은 상실과 고통의 땅이었습니다. 자기에게서 모든 것을 빼앗아간 야속한 땅이었습니다. 미련없이 떠날 수 있었습니다. 단지 과부가 된 두 자부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나오미는 자부들을 불러서 그들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자기 혼자 떠날 것을 이야기했습니다. 두 자부에게 자기를 따라오지 말고 고향과 친정식구들과 친구들이 있는 모압 땅에 그대로 살라고 했습니다. 오르바는 나오미의 말대로 모압에 머물렀습니다.

그러나 룻은 끝까지 시어머니를 따라나섰습니다. 고향과 친정을 뒤로하고 남편도 없이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려고 끝까지 동행했습니다. 그리고 단호한 결단의 고백을 했습니다.

“나로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유숙하시는 곳에 나도 유숙하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장사될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와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 1:16-17).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과 동행하는 것은 인기가 있습니다. 이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북한의 김정일이 중국을 방문 중에 있는데 매스컴은 누가 동행했느냐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처음에 그의 아들 김정은이 동행 했다고 했다가 정정했습니다. 권력자의 옆에 누가 있느냐는 이처럼 관심의 대상이 됩니다. 권력의 공유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력의 자리에 있을 때 동행하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권력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언젠가 끝이 있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힘을 의지하고 사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권력을 잃고 낙향하면 주변의 사람들이 서서히 떠나게 됩니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던 사람들은 매정하게 떠납니다. 이처럼 사람은 의지의 대상이 아닙니다. 세상의 힘은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편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3-4)

 

솔직히 룻에게는 나오미와 함께 할 이유가 없었습니다. 나오미는 전혀 이익을 줄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남편은 죽었고 돈도 없습니다. 이방 땅에 와서 살면서 인맥도 없습니다. 나이도 늙었습니다. 무능력자가 되어 인생의 패배자로 모압 땅을 떠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외롭고 힘든 길을 걸어가는 나오미와 그 길을 함께 걸어가기로 결심하고 동행했습니다. 이것은 자기의 삶 전체를 드려 시어머니를 배려하는 것입니다. 룻은 자기가 말한 대로 나오미의 고향 베들레헴으로 와서 나오미와 함께 했습니다.

 

밭에 나가 이삭을 주워 나오미에게 음식을 봉양했습니다. 시어머니와 다정하게 대화를 했습니다.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말씀해드렸습니다. 허리를 굽혀 이삭을 줍느라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힘들고 피곤하면 말하기도 싫습니다. 음식은 싸와서 드렸다고 해도 다정하게 그날의 일들을 소상하게 말씀드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저도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하고 집에 들어갈 때면 어떤 이야기라도 하기 싫을 때가 있습니다. 집에 있는 사람은 궁금해도 밖에서 일하고 지칠 때는 말하는 것도 힘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룻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외롭고 불쌍한 시어머니를 배려하는 마음으로 시간을 나누고 삶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동행하는 배려 즉 함께 하는 배려의 모습입니다.

나오미와 룻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집니까? 아버지가 딸의 손을 잡고 걸어가는 다정한 그림을 상상해보십시오. 이보다 더 아름다운 동행의 그림이 있습니다.

(예화)

모래위의 발자국이란 작자 미상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밤에 한 사람이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꿈속에서 예수님과 함께 해변을 따라서 걷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하늘을 스크린 삼아 그의 지나온 삶의 순간들이 영화처럼 펼쳐졌습니다. 모래 위에는 두 사람의 발자국이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그의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주님의 발자국이었습니다. 그는 모래 위에 길게 펼쳐진 발자국을 보다가 어느 순간부터 오직 한 사람의 발자국만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는 그 때가 그의 삶에서 가장 절망적이고 가장 슬펐던 순간이었음을 알았습니다. 그는 항의하듯이 주님께 물어보았습니다.

“주님, 제가 주님을 따르면 항상 저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주님은 저와 동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제 삶의 가장 어려웠던 순간에는 한 사람의 발자국밖에 없는데 이것이 어찌된 일입니까? 제가 주님을 가장 필요로 할 때 왜 주님께서는 저를 떠나셨는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나의 소중한 아이야, 나는 결코 너를 떠난 적이 없었단다. 네가 고통과 환난을 당하는 시간에 모래 위에서 한 사람의 발자국만이 있는 것은 내가 너를 업고 갔기 때문이란다.”

 

어렵고 힘들 때 동행하는 배려가 정말 소중한 배려입니다. 룻은 나오미에게 동행하는 배려를 했습니다. 외롭게 인생길을 걸어가는 사람과 함께 하는 배려는 서로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아름다운 배려입니다. 세상에서는 가족이 가장 가까이 동행하는 배려자입니다. 가정의 달입니다. 가정이 소중합니다. 가족들을 소중히 여기고 서로 배려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룻과 같이 저와 여러분의 인생길에 끝까지 함께 하는 동행자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주님과 함께 라면 어떤 험난한 길도 넘어갈 힘이 생깁니다. 끝까지 동행해주시며 때로는 업고가 주시는 주님의 따뜻한 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3. 채워주는 배려(20-23)

 

20-23절, “나오미가 자부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복이 그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그가 생존한 자와 사망한 자에게 은혜 베풀기를 그치지 아니하도다. 나오미가 또 그에게 이르되 그 사람은 우리의 근족이니 우리 기업을 무를 자 중 하나이니라. [21] 모압 여인 룻이 가로되 그가 내게 또 이르기를 내 추수를 다 마치기까지 너는 내 소년들에게 가까이 있으라 하더이다. [22] 나오미가 자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너는 그 소녀들과 함께 나가고 다른 밭에서 사람을 만나지 아니하는 것이 좋으니라. [23] 이에 룻이 보아스의 소녀들에게 가까이 있어서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 시모와 함께 거하니라.”

 

나오미는 자기와 함께 해준 룻에게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는 배려를 했습니다. 룻은 남편을 잃은 사람입니다. 남편을 잃고 고향을 떠나 시모의 고향에 왔지만 외로웠습니다. 나오미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물질로 채워질 수 없고 시모와 함께 하는 것으로 채워질 수 없는 빈 공간이 남편이었습니다. 부부가 이처럼 소중합니다. 5월 21일이 부부의 날이었습니다. 둘이 하나되는 날이라고 하여 21일로 정했습니다. 부부는 둘이 남으로 만나 일생동안 하나의 몸으로 살아갑니다. 부부의 소중함을 알아야 합니다. 남편이 속을 썩이고 힘들게 해도 옆에 있을 때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둘이 한 몸을 이루다가 헤어질 때 가장 큰 고통을 느끼게 됩니다.

나오미는 이런 룻의 고통과 필요를 알았기에 룻과 보아스를 부부로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가장 필요한 것을 채워주려는 배려의 마음입니다. 보아스는 룻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었습니다. 보아스가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보아스만 있으면 음식과 물질은 저절로 풍성해집니다. 함께 있으면 행복할 수 있습니다. 룻의 부족함을 채워주고 일평생 사랑받으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실제로 룻은 보아스와 결혼하여 오벳을 낳았고 오벳은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를 낳았습니다. 결국 룻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으며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복을 누렸습니다.

보아스는 예수님을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궁핍한 가운데 처한 룻과 결혼하여 그녀를 구원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녀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었기 때문입니다.

 

음식과 물질의 충족만으로 행복할 수 없고

함께 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없으며

영혼의 빈 공간을 채워주는 신랑 되시는 예수님이 계실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번 바자회가 이런 배려의 자리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인도 고아원과 선교센터에 자리와 물질을 제공해주는 바자회, 외롭고 힘들게 살아가는 고아원 아이들에게 사랑으로 동행하는 바자회, 그리고 가장 소중한 예수님으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는 바자회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배려는

자리와 물질을 제공하는 배려입니다. 외롭게 혼자 걷는 사람과 동행하는 배려입니다. 그리고 가장 큰 배려는 예수님을 삶의 중심에 채워주는 배려입니다. 이런 배려자가 되시고 배려 받으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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