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막 11:12-24
찬송: 344장
제목: 그대로 되리라
목표: 기도응답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한다.
어제가 어린이날이었습니다. 저는 가브리엘찬양대원들과 남이섬을 다녀왔습니다. 어린이날에 어른들은 바쁘고 피곤합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는 어른들의 모습이 행복하기도 했지만 오후에는 지쳐보였습니다. 그런데도 한 초등학생이 이런 시를 썼습니다. '엄마는 나를 예뻐하고, 냉장고는 내게 먹을 거를 주고, 강아지는 나와 놀아주는데, 아빠는 왜 있는지 모르겠다.' 아빠는 쓸모없는 존재로 변해버린 현실을 잘 반영하는 시라 할 수 있습니다. 슬픈 아버지의 현주소입니다.
아이들이 원하는 대로 다 들어주면 행복할까요? 아이들은 행복할지 몰라도 부모들은 힘듭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원하고 바라는 대로 모든 것이 이루어진다면 좋은 점도 있겠지만 문제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입니다. 죄의 본성으로 인해 선한 것만이 아닌 악한 것들을 바라게 될 것이고 그 결과 선보다는 악이 만연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악한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께 기도하고 응답받는 것은 은혜이고 축복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소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의 행복을 지속하는 것도 소원이고 지금보다 더 좋게 되기를 바라는 것도 소원입니다.
저도 소원이 있습니다. 우리교회가 분쟁을 그치고 아름답게 회복되고 성장하기를 바라는 소원이 있습니다. 한국교회가 실추된 이미지를 벗어나 바른 영적 리더십을 가지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실현시켜 가기를 소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가정적으로는 자녀들이 믿음 안에서 바르게 잘 자라 하나님의 나라와 이 땅을 위해 유익하고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인물들이 되기를 소원하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원의 이면에는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는 말도 됩니다. 소원을 가진다는 것은 결핍이 있다는 뜻입니다. 결핍이 생기면 그것을 채우려는 욕구가 생기고 그 욕구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면 중독현상이 생깁니다. 알콜중독, 마약중독, 인터넷중독, 도박중독, 게임중독 등 많은 중독현상이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무언가 채워지지 않은 삶의 결핍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결핍을 좋은 방향으로 선용하면 행복과 성공의 요인이 될 수 있습니다. 결핍이 오히려 감사의 조건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세르비아출신의 테니스 세계 랭킹 2위 조코비치는 5월 2일 끝난 세르비아오픈 테니스대회에서 우승하며 올 시즌 27연승 기록을 달리고 있습니다. 세르비아 언론은 조코비치의 성공을 놓고 "젊은이에게는 풍요보다 결핍이 더욱 많은 것을 준다"는 말을 합니다. 그만큼 그의 어린 시절은 어려웠습니다. 조코비치의 소년 시절인 1990년대 세르비아는 인종 분쟁이 한창이었고, 베오그라드에는 수시로 나토군의 폭탄이 떨어졌습니다. 베오그라드는 '전 세계 도시 중에서 가장 여러 번 폐허가 된 곳'이라는 수식어가 붙습니다. 당연히 제대로 된 테니스 코트가 있을 리 없었습니다. 물을 뺀 수영장에서 테니스 훈련을 했는데 공간이 너무 좁아서 단식만 치를 수 있는 환경이었습니다. 그런 열악한 상황속에서 훈련하여 오늘의 세계적인 테니스스타가 되었습니다. 결핍이 오히려 간절한 소원을 품게 하였고 최선을 다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기에 결핍이 없으신 분입니다. 그러나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와 같은 결핍을 경험하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체험하셨습니다. 너무나 인간적인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배가 고프셨습니다. 마음이 아플 때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성전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을 보시고 화를 내셨습니다. 우리와 감정이 소통하는 예수님의 인간적인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배고픔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계시다가 근처에 있는 베다니로 오셨을 때 배가 고프셨습니다. 멀리서 잎사귀가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가까이 가셔서 열매를 기대하셨는데 없었습니다. 사람이 배가 고프면 신경질적이 됩니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식사시간이 되어 시장할 때는 상사에게 결재서류를 가지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결재받기가 까다롭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인간적인 예수님도 시장하셨기 때문에 조금 화가 나셨을 것입니다. 나무에게 저주를 하시며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실망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기대한 나무에 열매가 없을 때 화가 나셨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필요한 열매를 제공하지 못하는 나무는 이렇듯 책망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이 자녀로 삼아주시고 열매를 기대하고 계시는데 원하시는 열매를 맺지 못할 때 예수님의 마음에 실망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기대하시는 열매는 우리들이 감당하지 못할 큰 것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는 무화과 열매를 맺기만 하면 됩니다. 무화과나무에게 사과나 오렌지를 기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 다가가실 때는 무화과 열매를 기대하고 가신 것입니다. 자신의 열매를 맺으면 됩니다. 예수님이 다가오신다고 긴장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내가 맺은 무화과 열매 중에 예수님이 마음에 드시는 것으로 몇 개를 따서 드실 것입니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는 잎만 무성하고 예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은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용서해주시고 구원해주신 은혜의 주님이십니다. 무한한 사랑으로 감싸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주님은 심판의 주인이십니다. 재림하실 때 주님은 심판주로 오십니다. 무화과 열매 이야기는 심판의 주님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열매가 없으므로 책망하고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성전 안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사람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상과 비둘기를 파는 사람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셨습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의분이 최고조에 달하는 모습입니다. 지금까지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따뜻한 친구가 되어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셨던 예수님의 이미지와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입니다. 만민이 기도해야 할 하나님의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사람들을 심하게 질책하셨습니다.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어야 할 성전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오히려 사람들에게 해악을 끼치는 강도의 소굴로 변해버린 성전을 바라보며 울분을 참으실 수 없었습니다. 잎만 무성하고 열매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성전의 모습에 의분이 생기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가 속한 오늘날의 한국교회는 어떻습니까? 무성한 잎만 자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인들의 숫자만 자랑하며 안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열매로 하나님과 이웃에게 유익을 주지 못하고 잎만 무성하여 열매를 기대하고 오는 사람들에게 실망만 안겨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밖에서 보기에는 잎이 무성하여 좋은 열매가 많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주지만 막상 제공할 열매가 없는 무익한 무화과나무가 바로 우리는 아닌지요?
우리교회도 오랫동안의 분쟁으로 손가락질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바른 목적을 위한 정의로운 싸움이라 할지라도 세상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합니다. 교회가 맺어야 할 사랑과 화평의 열매를 기대하며 다가오려던 사람들에게 원하는 열매를 주지 못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 부분을 회개해야 합니다. 아무리 합리화를 해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가르치는 교회 안에서 서로 싸우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수용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인정하고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 교회가 맺어야 할 본질적인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위해 우리가 이렇게 하고 있는지도 알고 있습니다. 싸움의 정당성도 있습니다. 미래의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한 진통이고 아픔입니다.
한국교회는 요즈음 사회에 빛과 소금이 아니라 찬밥신세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물론 부정적인 면을 부각시키는 매스컴의 잘못도 있지만 우리 자신을 돌아보는 자기성찰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교단장이나 기독교단체장이 되기 위해 돈으로 표를 매수하며 서로를 헐뜯고 공격하는 세상의 선거를 방불케 합니다. 성직을 세습하기 위해 여러 가지 수단과 방법을 동원합니다. 은퇴할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직에서 물러나지 않으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공식적인 은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려 합니다. 교회 내에 폭력사태가 일어납니다. 목회자의 가족들이 교회 재정에 관련된 일에 종사하며 이익을 챙기려 합니다. 이 모든 문제의 근원에는 욕심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돈이 없으면 이런 욕심도 생기지 않고 싸움도 없어집니다. 과거에 예수님께 책망 받았던 예루살렘 성전의 모습이 오늘 우리 한국교회 속에도 그대로 재현되고 있습니다.
성전을 향한 예수님의 책망을 들은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회개하고 자신들을 돌아보기는커녕 오히려 예수님을 죽일 방법만을 꾀했습니다. 마음이 닫히면 예수님이 책망해도 듣지 않습니다. 고집과 자기 의로 뭉쳐진 사람들은 목사와 장로, 권사라도 고쳐지지 않습니다.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께 예배하고 기도하는 일을 제쳐놓고 성전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일이 바르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사야 56:7절 말씀 “내가 그를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는 성경말씀으로 깨우쳐주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 대신에 예수님을 죽일 모략을 생각하였습니다. 신앙생활의 연조와 직분을 자랑하지만 잎만 무성하고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와 같은 사람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교회 안에서 신앙의 연조를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직분을 자랑하지는 않습니까? 잎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매가 중요합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성전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신 후에 예수님은 예루살렘성 밖으로 나오셔서 일행과 더불어 아침에 길을 가실 때에 베드로가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마른 것을 보고 예수님께 알렸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일행들은 무화과나무가 마른 것이 신기했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 하신 줄 알았는데 그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 놀라웠던 것입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는 베드로와 무리들에게 ‘하나님을 믿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를 마르게 하는 이적을 행할 능력, 산을 들어 바다에 던질 만한 이적적 능력을 행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24절에서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음의 기도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고 기도하면 응답받습니다.
소원대로 그대로 되기 위해서는
1. 바르게 구해야 합니다.
야고보서 4:2~3절에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얻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는 말씀처럼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기도가 있습니다.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면 얻지 못합니다. 자기 생각에는 바르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이 보실 때 정욕으로 구하는 기도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응답이 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구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해야 응답받을 수 있습니다.
소원대로 그대로 되기 위해서는
2.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23절).
23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현재시점이고 그 간구가 이루어지는 것은 미래 시점입니다. 즉 기도하고 구한 것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인데 하나님의 능력 안에서 이미 받은 것으로 믿는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내 눈 앞에는 아무것도 이루어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계속해서 믿음으로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좋은 것으로, 우리가 구한 것보다 항상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 예수님이 여리고를 지나실 때 길에서 만난 두 소경이 예수님께 기도하여 눈을 뜬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두 소경이 간절하게 부르짖으며 기도하자 예수님은 발걸음을 멈추시고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 그 때 그들의 대답이 “주여 우리 눈 뜨기를 원하나이다.”라고 즉시로 대답했습니다. 분명한 기도의 제목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 기도하면 눈을 뜰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을 부를 때 “주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자손이여”라고 했습니다. 소경들이 예수님을 다윗의 자손으로 불렀다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야로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다윗의 자손이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에 이스라엘을 외압에서 해방시키고 다윗 왕국을 회복시키기 위해 오실 메시야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두 소경은 육신의 눈은 멀었지만 다른 사람들이 육신의 눈으로 보지 못한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볼 수 있었습니다. 두 소경은 예수님이 소경의 눈을 밝게 하고, 귀머거리의 귀를 열며, 벙어리의 혀로 노래하게 하며, 죄인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실 메시야라는 사실과 기도하면 응답해주시는 분으로 믿었습니다. 이런 믿음을 보시고 저희의 눈을 만져서 고쳐주셨습니다. 확신하는 믿음이 중요합니다. 예수님이 고쳐주실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부르짖을 수 있었습니다. 결국 확신하는 기도가 그들의 눈을 뜨게 했습니다.
마가복음 9장에는 예수님과 세 명의 제자들이 변화산에 올라간 사이에 벙어리 귀신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가 제자들을 찾아와 병을 고쳐달라고 했지만 고치지 못했습니다. 그 아버지는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간청하자 예수님은 벙어리 되고 귀먹은 귀신들린 아들을 고쳐주셨습니다. 확신없이 기도하는 아버지의 믿음을 키우신 후에 아들의 질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결국 확신하는 기도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마태복음 9장에 12년 동안 혈루증 앓는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세상의 방법을 모두 동원해보았지만 고침받지 못한 여인은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예수님의 겉옷만 만져도 낫겠다는 믿음을 가지고 군중들의 틈을 비집고 겉옷을 잡았습니다. 그 때 놀라운 일이 생겼습니다. 예수님은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안심하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시니 여자가 그 시로 구원을 받으니라.”(마 9:22). 믿음이 여인의 병을 낫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는 믿음의 기도가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하며 기도하는 마음으로 옷 가에 손을 대었을 때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만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게 하시기를 간구하니 손을 대는 자는 다 나음을 얻으니라.”(마 14:36). 혈루증을 앓는 여인뿐만 아니라 그 여인과 같은 믿음을 가지고 옷 가에 손을 대는 사람은 다 고침을 받았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믿음만 있으면 됩니다. 때와 장소는 상관없습니다. 이스라엘과 한국의 장소가 문제가 아닙니다. 2000년 전과 오늘의 시간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믿음의 문제입니다. 확신하는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면 됩니다.
야고보서 1:6-8절 말씀입니다.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7]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한 일간지가 림프종양으로 아홉 번 항암치료를 받고 방송에 복귀한 차인태 아나운서와 인터뷰한 내용 중에 기도에 관한 글이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로 자기가 건강을 회복했고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다고 확신한다는 내용입니다.
“아직도 우리 집 아침 식사는 '맨손으로 삼팔선을 넘어온 월남 피란민으로…'로 시작되는 어머니의 식탁기도로 시작된다. 그 기도가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고 믿는다." 어머니의 기도대로 그대로 되었다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소원대로 되기 위해서는
3.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24).
24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기도하고 받은 줄로 믿으면 기다리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기다림이 얼마나 지루하고 힘듭니까? 그러나 기다림의 결과는 기쁨과 환희입니다.
백두산을 전문으로 촬영하는 산악사진가 안승일씨가 자신의 마음에 드는 백두산 사진을 찍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 마음에 담아둔 어떤 장면이 나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어떤 사진은 3년 만에, 어떤 것은 8년 만에 찍은 것도 있어요. 일출을 찍으려는데 마침 근처 하늘에 철새들이 줄지어 날고 있어요. 저 새들이 붉은 해를 가르면서 날아주면 멋있지 않겠나. 철새가 날아오는 계절에 새벽마다 몇 년이고 기다립니다. 무모한 짓이오.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텐트 생활을 하지요. 이런 기다림이 짜릿짜릿한 거죠.”
기도하며 기다리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하나님이 응답하실 줄 믿고 기다려야 합니다.
(예화)
어린이날에 남이섬에 간다고 지은이에게 미리 말했습니다. 남이섬에 갈 때 배도 탄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몇 일전부터 남이섬이 어디냐? 언제 가느냐? 배는 어떻게 타느냐? 등 여러 번 질문을 했습니다. 기다리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졌던 모양입니다. 날짜가 되면 분명히 아빠가 데리고 가는데 조바심이 생기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기도하고 조바심이 생기지는 않는지요? 기다림이 믿음입니다. 믿음이 있을 때 기다릴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처럼 열매가 없지는 않습니까? 기도하고 열매가 없어 고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소원대로 이루어지기를 원하십니까? 바르게 구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기도해야 합니다. 인내하며 기다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