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일어나라

하마사 2011. 4. 4. 06:30

 

본문: 욘 1:1-12

찬송: 268장

제목: 일어나라

목표: 안일함에서 일어나 책임을 깨닫고 사명을 감당케 한다.

 

   

아침에 아이들을 잠에서 깨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두 아들은 겨우 일어나 세수만하고 밥도 먹지 않고 학교에 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유치원에 다니는 딸도 깨워서 유치원 차에 태워 보내는 것이 어려워 제가 출근하면서 유치원에 데려다 줄 때도 있습니다. 깨워도 못 일어났으면서 늦게 깨웠다고 오히려 엄마에게 짜증을 낼 때도 있습니다.

머물러 있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재미있는 텔레비전 프로를 볼 때나 컴퓨터에서 게임을 하다가 일어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편안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 위해서는 의지와 결단력이 있어야 합니다.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나이가 들수록 변화를 싫어하거나 두려워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나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던 요나에게 하나님은 일어나 이방 땅 니느웨성에 가서 심판의 말씀을 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안주하던 이스라엘 땅에서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일어나라는 말씀은 단순히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물론 문자적 의미로도 사용되지만 단호한 결단을 촉구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특별한 결단을 요구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의 결단을 촉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일 수 있습니다.

 

 

1. 사명을 위해 일어나야 합니다(2).

2절,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그 악독이 내 앞에 상달하였음이니라 하시니라.”

 

요나는 엘리사의 죽음과 아모스선지자의 사역 사이에 40년 동안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한 선지자로 여로보암 2세 때 예언활동을 했으며 요엘과 아모스와 동시대 인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요나에게 악으로 만연한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고 니느웨 사람들을 회개시켜 구원하도록 사명을 주셨습니다. 대제국 앗수르가 일어나는 시기에 하나님은 요나를 통해 악에 물든 그들을 구원하기 원하셨습니다. 악한 백성들이 그냥 죽도록 버려두어도 되는 데 말입니다. 우리는 흔히 범죄하고 주변 사람들에게 손해를 끼치는 사람들은 마땅히 심판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니느웨가 아닌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요나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 했던 이유는 자기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앗수르가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들이고 심판을 면한다면 그 영향이 이스라엘에게 미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족속이 구원을 받고 복을 받기를 원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가 하나님의 긍휼을 얻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몇 차례 앗수르에게 위협을 받았고 예후가 통치하던 주전 841년에는 앗수르에게 조공을 바쳤습니다. 요나는 이런 니느웨의 멸망을 기대했습니다.

요나는 사명을 회피하고 도망쳤습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피해 달아났습니다.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후에 계속 하나님의 낯을 피하려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에서 도망치려 합니다.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가려고 욥바로 내려갔습니다. 다시스로 가면 하나님의 낯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범죄와 불순종은 내려가는 길입니다. ‘내려간다’는 말이 본문에 두 번 쓰였는데, 3절의 ‘욥바로 내려갔더니’와 5절의 ‘요나는 배 밑층에 내려가서 누워 깊이 잠이 든지라’에 사용되었습니다. 이 표현은 사명을 회피하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자기를 숨기고 도망하려던 요나가 얼마나 비참한 자리로 내려갔는지를 우회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표현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요나는 바다에 던져졌고 스올에 까지 내려가는 비극적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사자를 피하면 곰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사명이 주어질 때 회피하면 더 큰 어려움이 주어질 수 있습니다. 회피하지 말고 직면해야 합니다. 고난이 주어질 때 피하지 말고 딛고 넘어가야 합니다. 니느웨로 가는 것은 고달픈 여정입니다. 생명을 거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죽어가는 영혼이 득실거리는 세상인 니느웨로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선교의 일터는 세상입니다.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땅 끝은 우리가 가기 싫어하는 곳입니다. 만나기 싫은 사람들입니다. 요나에게 니느웨가 땅 끝이었습니다. 그는 선택받지 못한 이방사람들이 구원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에게 니느웨는 어디이고 누구입니까? 지리적으로 북한이거나 일본일수도 있습니다. 감정이 좋지 않은 지역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는 사람입니다. 절대로 구원받으면 안된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천국에 들어간다면 천국에 들어가고 싶지 않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우리에게도 니느웨는 있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 니느웨로 가라고 하십니다. 악독으로 신음하며 파멸을 기다리고 있는 니느웨 사람들에게 일어나 복음을 들고 가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한 니느웨로 가야 합니다. 복음을 외치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합니다. 복음을 듣지 못해 영적으로 죽어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세계에 흩어진 미전도종족을 비롯하여 이 땅에도 복음을 듣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은 요나의 복음을 듣고 왕으로부터 온 백성이 회개하여 심판을 면했습니다.

민족주의와 배타주의에서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민족 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백성에게 복음이 필요함을 깨닫고 시야를 넓혀 복음을 증거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기에 우리가 먼저 감당하는 것이 은혜입니다. 하나님이 우리교회에 주신 사명으로 믿고 미전도종족선교와 복음의 불모지인 지역과 이웃을 향해 복음을 감당하는 사명을 위해 모두가 힘차게 일어나야 합니다.

요나가 사명을 회피하면 일이 풀리지 않아야 되는데 오히려 일이 술술 풀렸습니다.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다시스로 가는 배가 없었거나 오랜 후에 있었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하고 돌이킬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마귀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할 때 즉시로 배를 준비해주고 하나님의 낯에서 멀리 도망치도록 만들어줍니다. 형통이 복이지만 때로는 저주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서 멀어지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불순종할 때 징계를 받는 것이 복입니다.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뜻과 반대의 길을 가면서도 징계가 없다면 저주입니다.

히 12:6-8,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니라 하였으니 [7]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비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신 8:5-6, “너는 사람이 그 아들을 징계함 같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징계하시는 줄 마음에 생각하고 [6]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켜 그 도를 행하며 그를 경외할지니라.”

사명을 외면하자마자 징계가 오지 않습니다. 바로 징계가 임하면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지만 오히려 일시적으로 형통하기 때문에 방심할 수 있습니다. 요나도 다시스로 가는 배 밑창에서 잠을 자며 평안한 항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일이 자기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되는 듯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순종해도 잘 되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이킬 시간을 주시고 기다리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갑자기 무서운 바람을 일으켜 배가 깨어질 지경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자연현상까지 동원하여 요나의 길을 막으시고 순종을 유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요나의 불순종은 함께 배를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까지 큰 피해를 안겨주었습니다. 요나는 죄의 대가를 지불했습니다. 다시스까지 가는 배삯을 지불했지만 돌려받지 못했습니다. 바다에 던져지고 물고기 배속에 들어갔습니다. 죄의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됩니다. 당장에 눈앞에 주어지는 징계가 보이지 않는다고 안심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회피하고 이탈하면 감당하기 어려운 일을 만나게 되고 그 대가를 지불해야만 합니다.

사명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회피하거나 불순종하지는 않습니까? 혹시 딴 길로 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런데도 모든 일이 형통하십니까? 교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랑의 하나님이 풍랑을 미루고 계심을 믿고 지금의 자리에서 일어나 사명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각자에게 사명은 다를 수 있습니다. 구역장 권찰, 교사, 친교부, 예배위원, 차량부, 찬양대, 이웃봉사실, 남녀선교회 임원 등 하나님이 주신 사명은 다양합니다. 사명의 크고 작음이나 사명의 귀천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를 따라 맡겨주신 사명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영적 안일함에서 일어나야 합니다(6)

6절, “선장이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자는 자여 어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 혹시 하나님이 우리를 생각하사 망하지 않게 하시리라 하니라.”

 

요나에게는 불순종과 더불어 영적 안일함이 문제였습니다. 배가 깨어질 위기에 처해 모든 사람들이 동분서주하고 있는 판국에 배 밑층에서 잠을 자고 있었으니 선장의 눈에 얼마나 한심하게 보였겠습니까? 누구도 잠을 잘 수 없는 상황, 더욱이 누구보다 영적으로 예민하게 깨어서 다른 이들이 처한 위기나 어려움을 돌아보고 그들의 잠든 영을 깨워야 할 선지자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에게 ‘자는 자여’라는 칭호를 듣고 있습니다. 자기 때문에 풍랑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없이 잠을 자고 있었으니 영적 안일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에 풍랑이 오는 원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불순종할 때 풍랑이 옵니다. 요나는 이스라엘의 원수이고 이방인들이 사는 니느웨 사람들이 죄로 인해 죽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스라엘에 복음을 전하기도 힘든데 왜 하필이면 니느웨로 가야한단 말인가? 교회도 어렵고 우리나라에도 복음을 다 전하지 못하는데 카자흐스탄, 인도, 중국까지 가서 선교를 해야 하는가? 그럴 듯하고 합리적인 말입니다. 그러나 풍랑에서 고생하지 않는 비결은 속히 우리의 생각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지금 당장 이해할 수 없더라도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것이 풍랑을 만나 고통당하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기도해야 할 사람이 기도하지 않을 때 풍랑이 옵니다. 기도해야 할 사람은 쉬지 말고 늘 기도해야 합니다. 세상일에 취해 기도를 멈추면 하나님은 풍랑을 일으켜 강제로 기도하게 하십니다. 기도해야 할 때 기도하지 않으면 요나처럼 더럽고 지저분하고 숨 막히는 고기배속에서 기도하게 됩니다. 그리고 성도가 기도하지 않으면 불신자에게 수치를 당합니다.

얼마 전에 직장친구들을 만났는데 믿음생활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를 위해 기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목사는 당연히 기도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최근에 직장에서 승진한 분이 있어 축하하기 위해 전화 통화했는데 더 잘되도록 기도해 달라고 했습니다. 신앙생활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절에 다닌다는 것입니다. 절에 다니면서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할 정도로 기도하면 좋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목사뿐이겠습니까? 불신자들도 당연히 그리스도인은 기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도가 몸에 배도록 습관화 되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 풍랑을 피할 수 있고 풍랑이 오더라도 이길 수 있습니다.

또한 잠자고 있을 때 풍랑이 옵니다. 세상의 안락한 잠에 취해있을 때 풍랑이 몰려옵니다.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육신의 쾌락에 빠져 있을 때 무서운 쓰나미가 닥칩니다. 삼손이 들릴라의 무릎을 베고 잠에 취해있을 때 머리털이 밀려 힘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있어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잠잘 때 마귀가 가라지를 밭에 뿌리고 가기 때문에 깨어있어서 마귀를 대적해야 합니다.

이외에도 영적으로 교만할 때 풍랑이 옵니다. 솔로몬이 죽고 아들 르호보암이 왕이 되었을 때 노인들의 지혜로운 충고를 무시하고 젊은 친구들의 말을 듣고 교만하고 포악하게 백성들에게 말하다가 나라가 둘로 나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물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믿음을 키우시기 위해 풍랑을 주시기도 합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 호수에서 배를 타고 갈 때 큰 광풍을 만나자 제자들은 두려워 떨며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예수님이 바람을 꾸짖으시며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말씀하자 바람이 그치고 잔잔해졌습니다. 그것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을 창조주요 자연계를 다스리시는 분으로 믿게 되었습니다.

풍랑이 오기 전에 영적 안일함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육신의 안일함에 안주하지 말아야 합니다. 태만과 안일이 사람을 망칩니다. 성경의 위인들의 공통점은 부지런하고 열심인 사람들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에게 일을 맡기지 않습니다. 모세를 부르실 때도 부지런히 양을 치고 있을 때였고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을 받을 때도 들에서 양을 치고 있을 때였습니다. 기드온이 사사로 부르심을 받을 때도 포도주틀에서 밀을 타작할 때였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로부터 부름을 받을 때도 열두겨리 소를 앞세우고 열심히 밭을 갈고 있을 때였습니다. 열심히 맡겨진 일을 부지런히 하고 있을 때 하나님은 부르시고 사명을 주셨습니다. 아기 예수님이 탄생할 때 제일 먼저 경배했던 사람들도 양을 치던 목동들이었습니다.

(예화)

조용한 섬나라 뉴질랜드에는 날지 못하는 새가 다섯 종류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섬에는 새의 천적이 되는 다른 동물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는 뱀들도 독이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새들은 굳이 공중으로 날아오를 필요가 없이 나뭇가지나 땅에서 지내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날개는 있어도 날지 못하는 새가 되었다고 합니다. 안일은 삶을 무기력하게 하지만 시련은 새를 날아오르도록 합니다.

칼을 숫돌에 갈지 않으면 날이 서지 않습니다. 거울도 닦지 않으면 사물을 선명하게 비출 수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단련되고 연마되지 않는다면 힘을 발휘할 수 없게 됩니다. 영적 안일과 무기력을 떨치고 일어나야 합니다.

 

 

3. 책임을 깨닫고 일어나야 합니다(12)

12절, “그가 대답하되 나를 들어 바다에 던지라 그리하면 바다가 너희를 위하여 잔잔하리라 너희가 이 큰 폭풍을 만난 것이 나의 연고인줄을 내가 아노라 하니라.”

 

배에 탔던 이들이 부르짖을 때 풍랑이 멈춘 것이 아니라 요나를 바다에 던져 넣었을 때 풍랑이 멎었습니다. 요나는 제비뽑기를 하여 본인이 뽑히고서야 풍랑의 원인이 자기 탓임을 깨닫고 바다에 던지라고 했습니다. 자기 책임을 인정했습니다. 책임을 지는 것은 크나큰 손해와 희생을 감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능하면 자신이 저지른 문제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습니다. 변명하고 책임을 회피하려하고 심지어 그것을 타인에게 뒤집어씌우는 일까지 저지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만 아니라 타인까지도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나는 풍랑의 책임이 자기 탓임을 인정하고 희생을 각오했습니다. 이처럼 자기가 희생할 때 풍랑이 멈추게 됩니다. 나하나 십자가지고 죽으면 많은 사람이 살 수 있습니다. 요나 한사람 희생이 됨으로 많은 이들이 살았습니다. 배에 탔던 사람들이 살았고 니느웨성의 백성들이 살았습니다. 희생이란 매일 자기를 죽이고 남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여러 사람이 잘되려면 내가 희생하면 됩니다. 옛사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산제물이 되면 다들 살게 됩니다. 롬 12:1,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제사로 드리라.”고 말씀했습니다. 한사람 희생으로 전체가 살 수 있습니다. 나하나 제물이 될 때 전부 사는 역사가 있습니다. 나하나 변화될 때 내 주위가 변화됩니다. 우리가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가정을 위해 희생의 제물이 되면 속한 공동체가 다시 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화)

프랑스가 전쟁 중에 있을 때, 오른 팔에 총탄을 맞은 어느 병사가 육군 병원에서 수술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그의 한쪽 팔을 자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습니다. 군의관은 “안타까운 일입니다만 당신의 팔을 이제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 병사를 위로했습니다. 그때 그 병사는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이 팔을 조국에 바쳤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자신의 몸까지 바치기를 주저하지 않은 한 병사의 헌신을 본 군의관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런 정신을 가졌으면 프랑스 군대가 반드시 이기리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이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윈스턴 처어칠은 유명한 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이 조국 앞에 눈물과 땀과 피밖에 바칠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도 조국을 위하여 눈물과 땀과 피를 바치십시오.”

이 연설에 감동받은 영국 사람들은 목숨을 걸고 조국을 위해 싸우는 전쟁터에 자원 입대했습니다. 결국 영국은 위기를 극복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게 되었습니다.

 

풍랑은 대개 욕심과 죄악으로 인해 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 마음이 탐욕 때문에 전쟁과 다툼이 그칠 날이 없습니다. 이런 분쟁과 다툼을 멈추는 길은 그런 욕망을 바다에 빠뜨려 죽이는 길 밖에 없습니다. 내 욕심 내 고집 내 교만이 바다에 빠져 죽을 때 풍랑은 멈춥니다. 날마다 기도로 죽여야 합니다. 한번으로 부족합니다. 자꾸만 죽어야 합니다. 죽는다는 것은 희생과 봉사의 의미가 있습니다. 나 하나 십자가지면 많은 사람이 살고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요나가 바다에 빠져 큰 물고기 속에 들어가서 회개하고 다시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뜻이 이루어질 때 풍랑이 멎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먼저 살펴야합니다. 무조건 기도한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욕심과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부르짖어야 소용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환란의 파도는 멈추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길은 기도하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십니다. 때로는 주의 종을 통해서 때로는 부모님을 통해서 자식을 통해서도, 음성으로, 꿈으로, 여러 방법으로 가르쳐주시는데 문제는 순수하게 그 뜻을 순종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갈라집니다.

책임을 깨달은 요나는 물고기 배속에서 회개하고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환란이 올 때 기도해야 합니다. 약 5:13,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것이요”. 시 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요나는 물고기 배속 그 고통스러운 장소에서 회개하며 기도했습니다. 그 결과 그는 다시 살게 되었고 새로운 사명을 받았습니다. 니느웨 백성들이 사는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요나는 말씀에 근거해서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부르짖었습니다. 자기의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의 용서와 자비를 확신하며 감사하면서 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살려주시면 하나님을 위해서 충성하겠다고 서원하면서 간절하게 부르짖었습니다. 그는 다시 살았고 심판받을 니느웨 백성들을 살리는 위대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요나가 자기 때문에 풍랑이 일어났음을 인정하고 책임을 지고 바다에 던져졌을 때 풍랑이 멈추었듯이 오늘날 나라와 민족 앞에 닥치는 풍랑, 교회에 닥친 풍랑, 가정에 닥친 풍랑, 일터에 닥친 풍랑을 남의 탓으로 돌리면 해결점이 없습니다. 각자가 내 탓임을 인정하는 책임있는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책임을 직시할 때 희생과 헌신이 가능합니다.

먼저 우리들 각자가 하나님 앞에서 책임을 통감하고 희생을 각오하고 일어나야 합니다. 바다에 던져질 각오로 갑판에서 일어나 바다 쪽으로 나아가는 희생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몸을 던질 때 하나님이 물고기를 예비하여 살게 하셨듯이 자기뿐만 아니라 배안에 있는 사람들과 복음을 들은 모든 사람을 살리는 역사가 일어날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어떤 자리에 있습니까?

사명을 피해 도망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명에 불순종하지는 않습니까? 영적인 안일함에 빠져 깊은 잠에 취해 있지는 않습니까? 모든 풍랑의 책임이 나와는 상관없다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일어나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복음의 사명을 위해 일어나야 합니다.

영적인 안일함을 박차고 일어나야 합니다.

책임을 깨닫고 일어나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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