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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정의가 일본 총리 되는 날

하마사 2011. 4. 21. 10:20

 

박정훈 기사기획 에디터

일본의 쓰나미 비극은 역설적이게도 손정의(소프트뱅크 사장)라는 새로운 스타를 탄생시켰다. 언론조차 제대로 실상을 전하지 않는 일본 특유의 '침묵 카르텔' 속에서 그는 거침없는 직설화법으로 정부의 무능을 고발하고 관료주의를 공격했다. 좌충우돌하는 그의 모습에 일본 대중은 열광했다.


지금까지 손정의는 IT혁명을 이끄는 비즈니스 리더일 뿐이었다. 이번 사태를 통해 그는 대중적 이슈를 주도하는 사회 리더로 재탄생했다. 그는 행정 편의만 따지는 관료에게 "바보"라며 직격탄을 날렸고, 일반 대중이 느꼈을 분노를 가감 없이 쏟아냈다. 그가 사재(私財) 100억엔을 구호금으로 내놓자 일본 네티즌들은 "손 마사요시(손정의의 일본 이름)를 총리로!"를 외쳤다.

며칠 전 서울을 다녀간 한 일본인 교수는 "손정의의 인기가 대단하다"고 전했다. 리더십 위기를 겪고 있는 일본엔 손정의처럼 기존 질서에 묶이지 않은 혁신적 리더가 절실하다. 그가 한국계임을 알고 있는 우리로서도 기분 좋은 소식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손정의 총리'는 공상 속 얘기에 불과하다. 본인에게 정치 생각이 있는지를 떠나 일본 정치·사회의 구조가 그렇게 돼있다. 일본은 세계에서도 드문 폐쇄 사회다. 글로벌 시대에 '순혈(純血)주의'를 고집하는 일본 사회가 한국계(系)에 권력을 준다는 것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재일(在日) 한국인에 대한 일본 사회의 거부감은 생각 이상으로 뿌리 깊다. 손정의도 어린 시절 돌까지 맞아가며 차별받던 기억을 갖고 있다. 한국계 3세 손정의는 35세에 귀화할 때까지 한국 국적을 유지했고, 한국 성(姓)을 그대로 고수하고 있다.

일본에서 한국계의 활약상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역도산과 장훈 같은 스포츠 영웅이 있었고, 롯데의 신격호나 '파친코왕(王)' 한창우, 도쿄대 교수 강상중, 작가 유미리를 비롯한 수많은 한국계가 활약 중이다. 예능·스포츠 분야는 한국계 없이 성립 조차 안 된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러나 실력보다 '배경'이 중요한 정치권만큼은 한국계의 진출이 꽉 막혀 있다. 유일한 예외가 1990년대 활약했던 한국계 2세 중의원 아라이 쇼케이(新井將敬) 정도다. 그는 촉망받던 유망주였으나 선거 때마다 '조센진(朝鮮人)'이란 비방에 시달려야 했다. 결국 그는 불법 정치자금 수사를 받던 도중 자살이라는 비극적인 결말을 선택했다. 50세, 한창때였다.

일본 정치는 파벌 역학에 따라 막후에서 권력이 결정되는 폐쇄적 시스템이다. 아무리 대중적 지지가 높아도 다수 파벌의 추대를 받지 못하면 총리가 될 수 없다. 손정의처럼 정치권 밖에서 경력을 쌓은 외부 인재는 아예 끼어들 여지가 없다.

손정의 본인이 정치에 관심을 내비친 일은 한 번도 없다. 다만 그의 최종 목표가 돈이 아닌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는 4년 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부(富)는 도구일 뿐"이라고 했다.

그가 롤 모델로 삼는 인물은 에도(江戶)시대 말기의 혁명가 사카모토 료마(1836~ 67)다. 료마에게 매료된 이유에 대해 손정의는 "이상(理想)을 위해 목숨 바쳐 혁명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53세 손정의는 이미 일본 최고의 부자에 올랐다. 이제 그의 시선은 비즈니스를 넘어 일본의 사회 변혁에 꽂혀 있는 듯하다.

미국은 흑인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일본에선 언제쯤 한국계 총리가 나올 수 있을까. 지금 일본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일본이 리더십 위기를 극복하는 날은 요원해 보이기만 하다.

-조선일보, 2011/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