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로 푼 내 인생의 '장학퀴즈'… 이제야 활짝 웃는 법 배웠죠
림프종양으로 9번 항암치료…나는 밤마다 울었지만 아내는 눈물 보인 적 없어
퇴원 후 친구들 만나러 갈때 내 손으로 셔츠 단추 다 채우고 스스로가 대견해 울어
"아나운서는 '言語運士'… '아나테이너(아나운서+엔터테이너)'를 가장 싫어해"
'B세포 미만성 악성 림프종양'. 암(癌)이었다. 의사가 말했다. "롱 텀(long term)으로 가겠습니다. 쉽게 나을 병 아니니 마음의 준비를 하십시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그런데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왜, 지금, 나여야 할까. 지나온 삶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구순의 노부모를 떠올리자 심장이 비틀어지는 듯 아팠다. 화가 났다.
차인태(67). 90년 한국 방송사가 낳은 대한민국 대표 아나운서. 방송 사상 최장수 기록을 세운 '장학퀴즈'를 17년2개월 동안 진행하며 70~80년대를 풍미했던 문화 아이콘. 육영수 여사·박정희 대통령 장례식 중계부터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실황, 미스코리아 선발대회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눈이 집중된 TV 브라운관 안에서 완벽한 표준말, 중저음의 맑은 음색, 빈틈없는 몸가짐으로 대중의 신뢰를 한몸에 얻었던 방송인.
정치권의 끊임없는 러브콜을 받으면서도 꿈쩍하지 않아 '벽창우(碧昌牛)'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고집 세고 충직한 사내였지만 암이라는 병마 앞에선 그도 어쩌지 못했다. "밤이면 그렇게 눈물이 나데요. 허허로움, 견디기 힘든 외로움이 매일매일 지속되었지요."
2년에 가까운 항암치료를 끝내고 20년 만에 브라운관(OBS '명불허전')으로 돌아온 차인태 전 아나운서를 만났다. 18일, 봄비 내리는 정동길을 산보하던 그는 초록물 막 오르기 시작한 나무들을 무연히 바라봤다. "이 녹색이, 아니 갓 올라오는 저 연둣빛 새순이 가장 그리웠어요. 대지의 물을 빨아올리는 저 생명력…." 완치는 아니어서 3개월에 한번씩 병원에 가야 하지만 "지금이 생애 가장 감사한 시간"이라고 차인태는 말했다.
- ▲ 모처럼 걷는 덕수궁 뒷담길에 개나리가 활짝 피었다. 봄비를 머금어 더욱 선명한 나무들의 연둣빛 새순을 차인태는 감동 어린 눈빛으로 바라봤다.“ 100%는 아니겠지만, 병상에 있으면서 욕심을 많이 버리게 된 것 같아요. 소망도, 계획도 아주 소박해졌지요.”그는 자동차를 스스로 운전해 광화문까지 온 것, 5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해낸 것에 대해 아이처럼 기뻐했다. / 이태경 기자 ecaro@chosun.com
―2009년 암 진단을 받았다. 림프종양이라면 림프절, 림프관에 생기는 암이란 뜻인가.
"우리 몸 300~400군데에 생길 수 있는 암이라고 하더라. 심장 빼고 어디에든, 누구에게든 생긴다."
―평소 특별한 증세를 느끼셨나.
"감기를 석 달 넘게 앓았다. 약 먹고 주사 맞아 낫는 듯했는데 갑자기 고열이 오르고 숨쉬기도 힘들어지더라. 일단 급성폐렴으로 진단됐고, 입원해 보름 동안 검사만 받았다. 폐렴 증세가 호전되지 않자 협진이 시작됐다. 호흡기내과, 심장내과, 내분비내과를 거쳐 종양내과로 갔는데 거기서 (종양이) 발견됐다. 폐와 심장 사이 꽈리 모양으로 퍼져 있었다."
―암은 더 이상 절망적인 질병이 아니지 않은가.
"막상 내 일로 닥치니 무섭고 인정하기 어렵더라.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좋은 주치의를 만나 투병할 수 있었다. 주사나 약으로는 치료에 한계가 있다, 환자의 의지가 가장 중요하니 힘을 내시라며 용기를 북돋워주더라."
―항암치료를 9차에 걸쳐 진행했다.
"림프종양은 보통 6차까지 한다는데, 내 경우 면역력이 많이 떨어져 있어서 10차까지 갈 수도 있다고 했다. 3차, 4차가 고비였던 것 같다. 혈압이 60에 40까지 떨어졌으니까. 중환자실로 격리돼 그 해 크리스마스를 맞았다. 사람이 이렇게 서서히 가라앉는구나, 이렇게 떠나는구나 싶더라. 그러면서도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순명할 수밖에 없지 않나, 오히려 담담해지더라."
―항암치료는 길고도 고통스러운 자신과의 싸움이다.
"입맛을 완전히 잃어버린 게 제일 힘들었다. 김치찌개에 대한 레서피가 머리엔 들어 있는데 막상 입에 떠넣으면 무슨 맛인지 모르겠더라. 그래도 먹어야 했다. 먹지 않으면 면역력이 떨어지고, 면역력이 떨어지면 백혈구 수치가 떨어지니까. 세면장이라도 내 발로 걸어가려면 먹어야 했다."
―통증도 많이 느끼셨을 것 같다.
"통증보다도 잠을 자지 못하는 게 괴로웠다. 작가들이 '긴 밤을 하얗게 뜬눈으로 지새운다'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게 얼마나 현학적이고 관념적이고 사치스러운 표현인지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너무 고통스러우면 당직 레지던트에게 수면제를 부탁해 4~5시간 숙면을 취했다."
―부인(이선희 전 경원대 미대 교수)께서 많이 울었겠다.
"내가 울었지. 집사람은 한번도 내 앞에서 눈물 보인 적이 없다. 허둥대거나 초조해하지 않고 중심을 잡아주더라. 한창 힘들고 아플 때는 딸들이 병실에 들어와도 눈을 맞추지 않았다. 연약해진 아버지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 지나고 보니 암환자 최고의 우군은 가족이더라. 특히 배우자가 흔들리면 안 된다. 있을 수 있는 극한의 상태를 머릿속으로 그려볼 순 있겠지만 그 마음이 환자에게 전해져서는 안 되니까. 주위의 눈빛 하나, 말 한마디, 냄새에도 민감한 환자에게는 부지불식간 허물없이 오가는 표현들이 다 상처가 된다."
―냉정하리만치 반듯하고 완고한 이미지로 차인태 아나운서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항암 투병'은 굉장히 낯선 소식이었다.
"방송인, 공직자, 교수로 내가 지금까지 누려왔던 것, 주변에서 받은 대접, 제3자들이 떠올리는 나의 이미지는 벌거벗은 내 실제 모습과 달리 과장되었거나 분에 넘치는 것이었다. 나 또한 자연 앞에 얼마나 하잘것없는 인간인가. 퇴원하고 나서 친구들 만나러 나가는데 내 손으로 와이셔츠 단추를 모두 채우고 나서 울었다. 야, 차인태! 니가 와이셔츠 단추를 혼자 채웠어. 칭찬하면서 울었다."
◆지만씨, 장학퀴즈에 출연할 뻔
차인태는 1944년 평안북도 벽동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월남, 경주 월성초등학교와 휘문고, 연세대 성악과를 졸업했다. 방송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대학 시절 연세교육방송국(YBS) 학생 아나운서로 활동하면서부터. 그 인연으로 69년 MBC에 입사했고, 4년 만에 '장학퀴즈'를 통해 '국민 아나운서'급 인기를 누렸다. 제주 MBC 사장을 끝으로 방송 현업에서 물러났고, 경기대 교수로 정년퇴임했다. 차인태는 스스로를 '실패를 거듭한 2등 인생'이었다고 회고했다. "의사 아버지가 한국전쟁 때 군의관으로 징집된 뒤 외할머니가 날품을 팔아 대가족의 생계를 꾸렸을 만큼 가난했지요.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까지 한 번도 1차 시험에 붙어본 적이 없어요. 날미역 위를 걷듯 미끄러지고 떨어졌죠. 사회에 나와보니 온통 학연·지연으로 서로 밀고 끌어주는데 실향민이었던 나는 의지할 데가 없었습니다."
―차인태, 하면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2악장의 메인 테마, '장학퀴즈'의 그 시그널 송을 연상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만큼 차인태는 장학퀴즈의 전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3년 2월 18일 첫 방송을 할 때만 해도 예상 못 한 일이다. 나도 MC를 맡기 싫었을 정도이니. 일개 고등학생들의 퀴즈 경연 아닌가. 그런데 이게 폭발했다. 녹화가 있는 매주 토요일 정동 MBC 공개홀 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방송국 수위아저씨들은 빗자루를 거꾸로 들고 방청객들 줄 세우느라 법석을 떨었고, 기마경찰이 출동해 교통정리를 했다."
―자서전 '흔적'(FKI미디어)을 읽어보니 박정희 대통령의 아들 지만씨도 장학퀴즈에 출연할 뻔했다고 쓰여 있더라.
"육 여사 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육 여사가 지시했을 리는 없고 아랫사람들이 (지만이에게)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어 그랬던 것 같다. 문제는 명색이 대통령 아들인데 꼴찌를 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문제 몇 개를 미리 알려줄 수 있느냐는 거지. 참으로 난관 아닌가. 그래서 제작진이 비슷한 또래의 '3김' 아들들도 함께 출연시키자는 묘안을 냈다. 성사되면 방송사에 길이 남을 일이니까. 그러자 청와대에서 없던 일로 하자고 하더라."
―흥행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게 방송의 생리 아닌가.
"천만에. 미리 답을 알려주는 것은 프로그램 존폐와 직결된 일이다. 장학퀴즈의 생명은 문제에 대한 철저한 보안이었다. 단독 스폰서였던 선경그룹(현 SK) 오너 아들도 출연했는데 절대 그런 일 없었다. 그랬다간 내가 사표를 냈을 거다."
―송승환, 이규형, 김광진 등 장학퀴즈 출신 스타들이 많다. '수람'이라는 모임도 있고. 가장 기억에 남는 출연자는 누구일까.
"이름은 모르겠고, 경상도에서 올라온 친구가 있었다. '조엄이라는 사람이 일본에서 들여온 식물로…' 하는 게 문제였다. 정답이 '고구마'인데, 그 친구 벨을 삑 누르더니 '고메'라고 하더라. 내가 월남해 경주에서 살았기 때문에 '고메'가 '고구마'의 사투리란 걸 알았지만 정답으로 처리할 순 없었다. 대신 한 번의 기회를 더 줬다. '정답은 세 글자입니다!' 그랬더니 이 친구, '물고메'라고 하더라."
―'장학퀴즈'로 하루아침에 스타 아나운서가 되었으니 이름값 좀 치르셨겠다.
"내가 결혼식 사회를 본 부부만 족히 2000쌍은 될 거다. 돈 꿔달라, 병원 수술비 대달라, 딸의 신랑감 찾아달라는 분도 계셨고, 정신질환이 있는 어떤 여성이 나랑 정분이 났다고 남편한테 말해서 검찰에 불려간 적도 있다.(웃음)"
- ▲ 1981년 차인태 아나운서의 모습. 3분짜리 뉴스를 맡아도 수백번씩 연습한 뒤 마이크 앞에 섰던 연습벌레였다. / FKI미디어 제공
◆연습벌레가 아름다운 날개를 갖는다
―장학퀴즈 말고도 '별이 빛나는 밤에' 같은 라디오 프로도 하셨다.
"아나운서 10년차일 때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차인태 이름 들어간 프로그램만 14개였다. 살인적이었지. 아이들 잠잘 때 집 나와서 서울시경국장이 발급한 야간통행증 가지고 자정 넘어 퇴근하니 집사람 볼 면목이 없었다."
―김동건, 변웅전씨와는 라이벌 관계였을까.
"나이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두 분 다 선배고, 최고의 아나운서였다. 나야 늘 배우는 입장이었지 한 번도 경쟁자라고 생각해본 적 없다."
―'흔적'에 보니 장두원 '장학퀴즈' 초대 프로듀서가 '차인태만큼 다방면에 다양한 지식을 갖춘 이는 보지 못했다, 상식이 풍부했고 책을 아주 많이 읽었다, 웃음이 터질 만한 상황인데도 늘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진행을 해서 인기가 아주 많았다'고 썼더라. '완벽'에 가까웠다는 차인태의 능력은 타고난 것인가.
"나는 수줍음 많고 말수가 적은 아이였다. 그래서 노력을 많이 해야만 했다. 스포츠 중계를 할 땐 임택근 선배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중계방송 멘트를 받아적었다. 정확한 표준어 발음, 올바른 우리말 구사를 위해 선배 아나운서들의 방송 테이프를 필사하며 밤을 새웠고, 3분짜리 방송을 위해 수백번씩 연습했다. 연습벌레만이 아름다운 나비의 날개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믿었다."
―실향민, 2등 인생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었나?
"연고와 출신, 배경을 유난히 따지는 우리 사회에서 난 그 혜택을 받을 가능성이 없었다. 군대에서도 주요 보직엔 북쪽 출신이 없었던 시절이다. 그때 내 마음을 붙잡아준 말이 'now-here' 였다. 내가 서 있는 자리에서 스스로 벽돌을 쌓아올리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작은 일, 해도 빛이 안 날 것 같은 일까지 최선을 다했던 것 같다."
◆정치에 입문하지 않은 이유
―이승만 대통령을 제외하고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과 영부인을 모두 만났다는 특이한 기록을 갖고 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대통령이 누구인가.
"74년 육영수 여사 장례식 방송을 중계했다. 운구차량이 청와대 정문을 벗어날 즈음 대통령이 눈물을 훔치시더라. 이틀 뒤 내 자리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나, 박정희입니다. 차인태씨, 방송 잘 봤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박정희식 화법. 비서실도 거치지 않고 바로 전화하신 거다. 그 후로 몇 차례 만남을 통해 '인간 박정희'가 참 외로운 남자라는 걸 느꼈다. 그로부터 5년 뒤 나는 박 대통령의 영결식을 다시 중계해야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92년 대선을 앞두고 '발음 교정 과외'를 받았다더라.
"종이에 '쌀'이라고 써서 읽어보시라 했더니 '쌀'이라고 읽으시더라. 또 다른 종이에 '밥'이라고 써서 보여줬더니 '밥'이라고 읽고. 이제 '쌀밥'을 한 종이에 적어 보여 드렸다. '살밥'이라고 읽으시더라."
―방송인 출신의 정치인들이 여럿 배출됐다. 이번 보궐선거만 해도 엄기영, 최문순씨가 격돌한다. 차인태 또한 정치권이 탐을 내고도 남았을 브랜드였을 텐데.
"정일권 전 총리가 국회의장 하실 때 '꿈을 펼쳐보지 않겠는가' 하고 연락해오셨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프러포즈인 줄도 모르고 반응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AM→FM→흑백TV→컬러TV로의 급속한 방송계의 변화에 적응하기도 숨 가빴다. 한눈팔 시간이 없었다. 이후로 정권 바뀔 때마다 제안이 왔지만 모두 거절했다. 우선 내가 정치를 잘 모른다. 방송을 징검다리로 다른 꿈을 꾼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나는 아나운서, 방송인이라는 직업이 국회의원 못지않게 귀하고 중요한 소명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도 대장부라면 한 번쯤 풍운의 꿈을 꾸어볼 수 있지 않을까.
"'왜 정치 안 하느냐' 묻는 분들에게 '저는 지역구가 없습니다' 한다.(웃음) 평북 벽동이 고향이니까. 흔히 출세나 성공의 척도를 그쪽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누구나 그 길로 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사회가 좀 더 건강해지려면 어느 분야든 자기 길을 고집스럽게 걸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나는 '아나테이너'가 싫다
―'아나운서'라는 직종에 긍지와 자부심이 대단하시다.
"'언어운사(言語運士)'란 말을 내가 만들었다. 요즘은 외모와 순발력, 춤솜씨 같은 게 아나운서의 스펙처럼 돼 있는데, 아주 잘못됐다. 아나운서의 기본은 우리말에 대한 구사능력, 전달력이다. 언어의 파수꾼인 아나운서는 방송 언어에 관한 한 교사 같은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가수가 노래를 잘해야지 춤을 잘 추면 어떡하나.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아나테이너'다."
―아나운서들의 예능화를 반대하는 뜻으로 들린다.
"누구나 다 그쪽으로 쏠려서는 안 된다는 거지. 메인 잡(job)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 된다. 적어도 뉴스라든지 시사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아나운서는 어떤 유혹에도 그쪽을 넘겨다봐서는 안 된다. 카메오? 마약 배우는 사람들이 '딱 한 번만!' 하다가 중독되지 않나."
―방송계에서는 아나운서가 설 자리가 없다는 얘기도 들려온다. 뉴스는 이미 스타 기자들이 꿰차고 들어와 있으니.
"그 책임의 일말이 아나운서들에게 있다고 본다."
―화요일 밤 10시에 방송되는 OBS의 토크쇼 '명불허전'으로 방송에 컴백했다.
"오래 세워두었던 자전거를 다시 타는 느낌이다. 처음엔 뒤뚱거려도 금세 자리잡고 굴러가겠지. 자기 분야에서 올곧게 살아온 분들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이라 응했다."
―메이저 방송사로도 컴백할 수 있었을 텐데.
"지상파든 케이블이든 뉴스가 끝난 그 시간이면 일제히 왁자지껄해지고 경박해지더라. 하루를 차분하게 마감할 시간인데, 대한민국에는 리얼버라이어티 말고는 없는 듯 하나같이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떠 있어서 싫었다. 방송이 그래서는 안 된다. 국민들을 편식시키는 것은 일종의 범죄행위다. 방송의 본령을 벗어나는 행위다. 머지않은 장래에 역풍을 맞을 거다."
―본인이 '노털'이기 때문은 아닐까.
"그럴지도 모르지. 그런데 (경기대) 내 제자들, 기껏해야 30대 초반인 그들도 볼 만한 프로그램이 없다는 걸 보니 영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열정 없는 삶은 영혼에 주름을 만든다
―구순의 노부모를 모시고 사신다 들었다.
"아버님이 92세, 어머님이 88세다. 아침 식탁에 우리 부부까지 넷이 앉으면 도합 314세다."
―아버님은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유능한 의사였다.
"그럼 뭐 하나. 월남해서는 함께 내려온 처가 식구들까지 먹여 살리느라 평생 변두리 의원에서 일만 하셨다.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으시고. 내가 아버지를 닮았다."
―어머니는 숙명여고를 졸업한 엘리트이셨던데.
"당신 뜻을 일구지 못한 걸 후회하시는 눈치시지만 공부하실 여건이 못됐다. 그래도 상식이 나보다 풍부하고, 당신 머릿속에 세계지도가 들어 있다. 아직도 우리 집 아침 식사는 '맨손으로 삼팔선을 넘어온 월남 피란민으로…'로 시작되는 어머니의 식탁기도로 시작된다. 그 기도가 오늘의 나를 있게 했다고 믿는다."
―부인인 이선희 교수는 '내조의 여왕'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SBS 개국할 때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었다. 이적에 따른 금전적 보상도 함께. 집사람에겐 말하지 않고 혼자 고민하다 거절했다. MBC 귀신이 되겠다고 했지. 서울방송 개국한 뒤 집사람에게 말했더니 딱 한마디 하더라. '당신 멋져, 잘했어요.' 필부필부(匹夫匹婦)다."
―방송 현업을 떠난 뒤에도 유니세프, 소아암 어린이 돕기, 사랑의 집짓기 같은 데서 활동을 많이 하셨다.
"세월은 얼굴에 주름을 만들지만 열정 없는 삶은 영혼에 주름을 만든다. 더 건강해지면 다시 열정을 바칠 일이 생길 테지."
―많은 암환자들이 암이 발생하기 전과 후의 삶이 180도 달라진다고 말한다.
"사람이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더라. 신앙적으로 보면 내게 또 다른 소명이 있어서 이런 연단(鍊鍛)을 주시지 않았나 싶다. 내려놓음, 나눔, 섬김…. 그런 단어들을 요즘 많이 생각한다."
-조선일보, 2011/4/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