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인 수녀 추모 기도 "참으로 겸손했던 어머니… 하늘나라서 더 행복하시길"
남편과 아들이 앞서 잠든 용인 천주교 묘지에 안장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참으로 많이 사랑하였고 참으로 많이 사랑받아 행복하였노라고 겸손히 고백해온 우리의 어머니를 받아주십시오. 헤어짐의 슬픔을 그저 울고 또 우는 것으로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는 우리의 나약함을 굽어보시고, 진실하고 따뜻하고 지혜로운 모습으로 지상의 소임을 다하고 눈 오는 날 눈꽃처럼 깨끗하고 순결하게 생을 마무리하신 우리의 어머니를 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더 행복하게 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지난 22일 별세한 소설가 박완서씨의 장례미사가 열린 25일 오전 10시 경기도 구리시 토평성당. 이해인 수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추모 기도를 올리자 성당 안을 가득 메운 추도객들이 눈물을 글썽였다. 고인은 지난해 봄 부산에서 암 투병 중인 이 수녀를 만나고 돌아가는 길에 '나는 꼭 당신의 배웅을 받으며 이 세상을 떠나고 싶습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나보다는 오래 살아주십시오'라는 편지를 남겼다. 이해인 수녀는 "지금도 옆에 계신 것 같아 실감이 안 나지만 선생의 작품을 읽고 또 읽으며 기쁘게 보내드릴 거다"고 말했다.
- ▲ 25일 오전 소설가 박완서씨의 장례미사가 고인이 다니던 경기도 구리시 토평성당에서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미사가 끝나고 교우와 지인 등 장례참석객들의 애도 속에 운구행렬이 성당을 떠나고 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이에 앞서 오전 8시 40분 서울 일원동 삼성서울병원에서는 영결식이 치러졌다. 특별한 의식 없이 진행된 영결식은 차분하고 숙연한 분위기에서 끝났고 이어 운구 행렬은 고인이 다니던 구리시 토평성당으로 향했다. 1시간 동안 진행된 장례미사에는 유족을 비롯해 소설가 박범신·이경자·은희경·공지영·강영숙·조선희·심윤경·임철우씨와 시인 이근배씨, 문학평론가 유종호·김윤식·정과리씨와 강태형 문학동네 대표, 김영현 실천문학 대표,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 500여명이 참석했다.
장례미사를 집전한 김성길 전임 토평성당 주임신부는 "참으로 크신 분임에도 요란하고 화려한 장례를 마다한 채 신앙의 여정을 걸었던 이곳 성당에 소박한 장례미사를 맡기셨다"며 "수많은 이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셨지만 늘 한 송이 수선화처럼 다소곳하고 겸손의 향기를 풍기신 분"이라고 추모했다. 또 김 신부는 "선생은 가지신 것을 기쁘게 나누어주신 분이셨다"면서 "지금도 성당 1층 쉼터는 선생이 기증하신 소중한 책들로 꽉 차 있다. 책 읽는 즐거움과 독서를 통해 삶을 껴안을 수 있는 용기를 주신 선생께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조시(弔詩)를 낭독한 정호승 시인은 "일찍이 이 시대의 나목(裸木)이 되어 문학 언어로 위안과 행복 열매를 나눠줬는데 이제 또 어디 가서 한 그루 나목으로 서 계시려 하십니까. 며칠 전까지 아차산 뜰 거닐고, 봄에 피어날 예쁜 꽃 얘기하고, 고구마도 드시고, 마더 테레사가 좋아한 초콜릿도 드셨는데…"라며 눈을 감았다.
고인의 유해는 먼저 세상을 떠난 남편과 아들이 잠들어 있는 경기도 용인시 천주교 공원묘지에 오후 2시쯤 안장됐다. 아들의 묘를 아래에 두고 남편과 나란히 묻힌 고인의 관 위에는 하얀 국화 꽃잎과 고인이 생전에 자신의 몸을 덮어주기 바랐던 '부드럽고 따숩은' 흙이 소복이 올려졌다. 영하 10도를 맴도는 매서운 추위에도 유족과 지인들은 1시간 넘게 "편안히 잠드소서"를 합창하며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했다. 고인의 맏딸인 수필가 호원숙씨는 "어머니는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도 맑고 깨끗하셨고, 담담하게 죽음을 맞으셨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조선일보, 201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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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박완서씨 어제 발인 이해인 수녀 '송별시'
꽃이 된 기도
엄마의 미소처럼 포근한 눈꽃 속에
눈사람 되어 떠나신 우리 선생님
고향을 그리워한 선생님을
그토록 좋아하시는 부드러운 흙 속에
한 송이 꽃으로 묻고 와서 우리도 꽃이 되었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을 더 깊이 사랑하는 꽃
선생님의 인품을 더 곱게 닮고 싶은
그리움의 꽃이 되었습니다
- ▲ 25일 치러진 박완서씨의 장례미사에서 이해인 수녀가 슬퍼하고 있다. /전기병 기자 gibong@chosun.com
선생님이 계시어 더 든든하고 좋았던 세상에서
우리는 엄마 잃은 아이처럼
울고 울어도 눈물이 남네요
선생님은 분명 우리 곁에 안 계신데
선생님의 향기가 눈꽃 속에 살아나
자꾸 새롭게 말을 걸어오네요
아프지만 아름다운 이 세상을 위로하는
미소천사로 승천하신 것 같다며
이 땅의 우리는 하늘 향해 두 손 모읍니다
'갑자기 오느라 작별인사 못했어요
너무 슬퍼하면 제가 미안하죠
거기도 좋지만 여기도 좋아요
항상 기도 안에 만납시다, 우리'
선생님의 초대에 행복한 오늘
한 마음의 평온함으로 인사합니다
사랑하는 선생님, 안녕히 가십시오
우리의 어둠을 밝히는 엄마별이 되어주십시오
-조선일보, 2011/2/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