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나보다 더 좋은 백두산 사진 찍는다면… 난 그런 꼴 못 봐"
정일이 형님,
백두산 찍을 일이 있으면 나를 불러주시오
일본인이 찍으면 그게 어찌 백두산이오 피가 통하는 사진을 찍어야지
배낭을 메고 걸어온 탓인지 그에게 역한 땀 냄새가 났다.
“누군가 나보다 더 좋은 백두산 사진집을 만들면 안 됩니다. 그런 꼴 못 봐요. 내 사후(死後)에는 몰라도. 앞으로 오는 후배들에 의해 밀리는 것은 받아들이지만. 지금 다른 사진작가들에게 지는 것은 결코 용납 안 돼요. 더 이상의 백두산 장면이 나올 수 없을 때까지 찍고 또 찍는 거죠.”
산악사진가 안승일(65)씨는 18년째 백두산을 찍고 있다. 그는 일년 중 절반은 거기서 지낸다. 국내에서 설을 쇠기는 10년 만에 처음이라고 했다. 이는 치열한 프로정신일까, 혹은 편집증일까.
“백두산을 찍은 지 1년 만에 사진집은 냈어요. 그때 서문에 ‘이는 가건물이다. 이제부터 다시 찍어서 제대로 만들겠다’고 썼죠. 5년을 더 찍고 오려는데, 마침 백두산이 중국의 10대 명산(名山)으로 지정됐어요. 중국 사진작가들이 백두산으로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그러면 난 어떡해. 인해전술로 만드는 백두산 사진집과 맞붙어 자신이 생길 때까지 찍을 수밖에 없겠다고 했죠.”
―그렇더라도 그 세월 동안 찍었으면 질리도록 다 찍었지 않겠습니까?
"내 마음에 담아둔 어떤 장면이 나올 때까지 기다립니다. 어떤 사진은 3년 만에, 어떤 것은 8년 만에 찍은 것도 있어요. 일출을 찍으려는데 마침 근처 하늘에 철새들이 줄지어 날고 있어요. 저 새들이 붉은 해를 가르면서 날아주면 멋있지 않겠나. 철새가 날아오는 계절에 새벽마다 몇 년이고 기다립니다. 무모한 짓이오. 카메라를 설치해놓고 텐트 생활을 하지요. 이런 기다림이 짜릿짜릿한 거죠.”
―사시사철 그 풍경이 바뀐다 해도 결국 산(山) 풍경 아니겠습니까?
“일상의 사진은 누구나 찍습니다. 수석(壽石)을 찍는 놈이 아무 돌이나 찍나요. 숱한 돌에서 찍을 만한 놈을 찾아내는 겁니다. 꽃도 아무 꽃이나 찍나, 같은 도라지꽃이라도 꽃마다 표정이 달라요. 광화문에 사람 수천 명이 있다고 해서 아무나 찍나요. 나는 산이 감춰둔 가장 장엄하고 신비스러운 장면을 찾는 겁니다. 날이 좋으면 산에 올라가지 않아요. 안개가 끼거나, 눈과 비가 오는 악천후 때는 올라갑니다. 그때 산의 표정이 있어요.”
- ▲ 안승일씨는 "기다린다. 어떤 사진은 3년 만에, 어떤 것은 8년만에 찍은 것도 있다"고 말했다. /이덕훈 기자
나는 그의 복부 비만을 보면서 말했다.
―산 사진을 찍는 사람의 체형치고는 어울리지 않군요.
"이건 직업병입니다. 산을 늘 돌아다니는 게 아니라 한 지점에 가서 천막 치고 기다려요. 내 취미가 요리입니다. 밥 먹고 똥 누고 잡니다. 별로 움직일 일이 없어요.”
―백두산에 화산 폭발 조짐이 있다는데, 그걸 알고 있습니까?
"우리 동네에서는 그런 보도를 우습게 여깁니다. 백두산에 와서 얼마나 오래 지속적으로 관찰 연구하고 내놓은 발표인가요. 북한이 일본 연구팀에 화산 관측장비를 달라고 했다는 것도 마치 그런 증거로 대는데, 북한 사람들은 내 카메라를 봐도 달라고 합니다. 내가 다녀보면 오히려 백두산의 온천물이 식어요. 천지(天池) 가장자리에 온천물이 솟아 흐르는데, 겨울철에 옷 벗고 누워 있으면 등이 뜨뜻했습니다. 요즘에는 확실히 덜해요.”
그는 백두산 근처 마을 이도백하(二道白河)에 집을 얻어 살고 있다. 처음 백두산에 간 것은 1994년이다. 후배들과 한 달간 중국 유람을 하는 길이었다.
"별 마음 없이 따라나섰어요. 그런데 백두산을 오르던 중 멀리 북녘 산하를 봤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디 있었나. 여기서 찍어야 한다는 전율을 느꼈어요. 일행에게 ‘먼저 가라. 난 여기에 남을 것’이라고 했지요. 그때는 산속에 폐쇄된 측후소 건물에 들어가 지내며 백두산을 찍었어요. 당시 북한은 일본 사진작가를 불러 백두산을 찍게 했습니다. 내 카메라는 중국에서 북한의 백두산을 찍었고, 그 카메라는 북한에서 중국의 백두산을 바라본 셈이지요. 그 일본 작가와 함께 백두산 사진전을 열었어요.”
그는 ‘백두산’ 사진집을 낸 뒤, 안쪽 표지 날개에 ‘정일이 형님, 백두산 찍을 일이 있으면 나를 불러주시오. 일본인이 찍으면 그게 어찌 백두산이오. 피가 통하는 사진을 찍어야지’라고 썼다. 그는 사진집 다섯 권을 베이징주재 북한대사관에 보냈다.
그게 인연이 됐는지, 2001년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사진작가 공동전시회’에 초청됐다. 그때 평생 처음 그는 양복을 입었다고 한다.
"평양에 들어갈 때도 이런 등산화 차림으로 갔습니다. 전시회에 김정일이 온다고 해서, 북측 안내인이 양복 두 벌을 내놓으며 갈아입으라고 했어요. 난 양복 입을 줄 모른다고 하니, ‘옷이라는 게 자기를 위해 입나 상대방을 위해 입는 거지’라고 해요. 그때 내 평생 처음 양복을 30분간 입었습니다. 김정일 사인을 받으려고 수첩 들고 서 있었는데, 김정일은 안 왔어요.”
―양복을 안 입는 이유가 있습니까. 결혼식 때는 양복을 입었을 것 아닌가요?
"쉽게 말해 똥고집이고 잘난 척한 거죠. 결혼식은 아예 안 했어요.”
당초 그를 만날 생각을 했을 때, ‘건전한’ 주부 독자들의 반응을 먼저 떠올렸다. 그는 국내 최고의 산악사진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하지만 그 성취(成就)는 집을 떠나면서 얻은 것이다. 부인과는 별거상태다.
그는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10년 전 어느 날 아무것도 안 갖고 집을 나왔어요. 내 나이에는 ‘가출’이 아니라 ‘출가’입니다. 하지만 이혼은 안 했어요. 서로 떨어져 편하게 삽니다. 한 집에서 인상 쓰며 사는 것보다 나쁘진 않아요. 비록 따로 살아도 잘생긴 아들이 있는데, 내가 좋아하는 아들의 엄마와 인연을 끊을 수는 없지 않나요.”
―그렇게 사진 작업에 미쳐서 나가 살 작정이었다면 당초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지, 가정을 만들었으면 뭔가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요?
"무슨 철학이 있어 이런 삶을 선택한 것은 아닙니다. 어쩌다,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된 겁니다. 이 일은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가정을 다 챙기면서 할 수 없는 일이 있어요. 미안하기는 하지만, 결혼해서도 머리를 깎고 중이 되는 놈도 있어요. 나는 머리를 기르고 집으로도 와요. 중보다야 낫지 않나.”
- ▲ 안승일씨가 찍은 백두산.
―자식은 자기 좋은 것만 하고 살겠다고 떠난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얼마 전 군에 입대한다고 백두산으로 전화가 왔어요. ‘남들처럼 가서 밥 사주고 해야 하나?’고 물으니, 아니라고 해요. ‘지금은 괜찮고 다만 결혼할 때는 꼭 참석해달라’고 합니다. 하나뿐인 아들이 결혼식 때 내가 안 올까 봐 걱정합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걱정해야지 자식이 아버지를 걱정해서야….
"글쎄, 아들은 내가 백두산에서 실종될까 봐 걱정이라고 한 적 있어요. 그때 내가 말했어요. 실종 소식이 들리면 백두산으로 일단 오기는 해라. 다만 와서는 두리번두리번 찾는 척하다가 그냥 돌아가라. 나를 발견해 국내로 끌고 가면 모두가 힘 들다. 나를 불에다 넣고, 땅속에다 파묻고, 가루로 내는 게 좋겠느냐. 병원에서 3년 동안 똥 싸면서 죽으면 좋으냐. 산에서 편안하게 썩으면 얼마나 좋은 것이냐.”
상식의 잣대로 그를 보면 심사가 불편할지 모른다. 가령 그가 자랑스럽게 털어놓은 ‘성취’의 기쁨도 우리 기준으로는 얼른 납득되지 않을 것이다.
"어느 날 북한산을 찍으면서 내가 마음속에 담아둔 장면을 마침내 찍었어요. 차를 몰고 왔는데, 후배에게 ‘나는 근처 문산역(驛)에 내려달라’고 했어요. 결정적 순간을 분명히 찍었는데, 만일 자동차로 오다가 교통사고가 나면 어떻게 하나. 그래서 나는 따로 2시간을 기다려 기차를 타고 왔어요. 내가 바라던 걸 찍었을 때 이런 재미가 있습니다.”
그는 왼쪽 다리를 전다. 다른 운동은 별로였는데 등산은 잘했다. 중학교 때 북한산에 올라가서 처음 사진을 찍었다고 한다. 동네 사진관 주인이 “잘 찍었다”고 칭찬해준 게 그의 진로가 됐다. 대학에서는 원예과를 중퇴하고, 다시 사진과로 옮겨 갔으나 또 중퇴했다.
"한때 산에 목숨 걸고 암벽으로, 빙벽으로, 정신 팔고 다녔어요. 조팝나무꽃도 싸리꽃도 모르면서 산에 수십년씩 다녔어요. 봄이 왔다고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주는 그 예쁜 꽃들에게 이름 한번 안 물어보고 어디에 한눈팔고 뭐 하러 산에 다녔나. 등산 하는 사람은 웃기는 겁니다. 등산복 입고 폼잡아 봐야 산삼 캐러 다니는 심마니 발 뒤축도 못 따라가요. 대학 시절 설악산 공룡능선에 힘들게 올라섰는데, 송뢰버섯을 따는 사람이 있었어요. 텐트에서 하룻밤 지내고 다음날, 그 사람이 또 송뢰를 따고 있어요. 어디서 잤느냐고 물으니, 마을로 내려가 집에서 자고 왔다고 해요.”
그는 열 권 넘게 산(山) 사진집을 냈다. 사진집으로 밥벌이가 될 리가 없었다.
"나중에는 필름 살 돈도 없었어요. 배는 고프고, 그래서 충무로에서 광고 사진을 찍기로 했습니다. 그런 결심을 하고 등산장비를 지고 북한산에 올라갔어요. 하룻밤을 자고 난 뒤 장비를 모두 불살랐습니다.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속이 시원했어요. 광고 사진 장사는 너무 잘됐어요. 사진을 찍어서 밥을 먹는다는 게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지요. 너무 신이 나 땅에 발이 안 닿더라. 당시 여직원 월급을 4만원 줬는데, 광고 사진 한 장 찍어주면 5만원 받았으니까. 돈을 상자에 쑤셔넣었습니다. 그렇게 몇 년 지나자, 다시 산으로 가자는 마음이 들었어요.”
―왜 그런 생각이 날까요?
"그건 본능입니다. 퇴근하면 북한산 백운산장에 올라가 자고 아침이면 사무실로 출근했어요. 요즘 등산화 신고 시내를 다니는 영감의 원조였지요. IMF 이후로 광고가 줄고 디지털 카메라가 나오면서 스튜디오는 문을 닫았어요.”
―그때 벌어놓은 돈으로 지금까지 버티고 있습니까?
"내가 찍은 필름을 빌려주고 사용료를 받아요. 장당 40만원입니다. 생활이 빠듯해요. 그래도 나는 돈 쓰는 데가 별로 없습니다. 등산장비업체에서 옷과 신발을 그냥 주고, 술집에도 안 갑니다. 광고 사진을 찍을 때도 룸살롱에서 광고주들을 접대한 적이 없어요. 대신 현찰로 내 수입의 10%를 무조건 광고주에게 돌려줬어요. 별볼일없는 나한테 일을 주는 것에 대한 보답이었지, 뇌물이 아니고.”
―보기와는 달리 술을 안 마십니까?
"아니, 술은 마시죠. 한자리에서 소주 세 병쯤 마십니다. 하지만 평생 술집에 가본 적은 없어요. 저녁에 밥집에만 가봤지.”
―같은 사진작가이지만 배병우씨의 소나무 사진은 1천만원 이상씩 하지 않습니까?
"나는 모르겠어요. 사진이라는 게 복제가 가능한데, 어떻게 그렇게 팔 수가 있나. 나 같으면 그렇게 사겠는가. 내가 배병우씨를 만나서 물어볼 처지도 아니고. 시기하는 것은 아니나, 부럽기는 합니다.”
그는 국내에서는 북한산이 잘 보이는 경기도 파주의 아파트에 살고 있다. 거실에서 북한산을 찍기 위해서다.
―선생이 일반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삶의 메시지는 뭘까요?
"재미있게 살아라. 하고 싶은 일을 해라. 그리고 죽기 살기로 일해라. 나는 하루 네 시간 이상 안 잡니다.”
―하고 싶은 일만 하면 가끔 곁의 가족은 힘들겠지요.
"사람은 여러 가지를 다 잘할 수는 없어요. 살면서 하나라도 제대로 하기가 힘듭니다.”
인터뷰 동안 거의 난방을 안 한 실내에서 나는 ‘추위’를 느꼈지만, 그는 반팔 셔츠를 입고 있었다. 산의 추위에 단련돼 손님 접대를 잊었다고 했다. 평소 남편에 대해 불만이 있었던 주부들은 그를 통해 위안받았을 것이다.
-조선일보, 201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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