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기癌… 전우들 옆에 묻히고파"
매년 부산 유엔공원 찾는 6·25 참전 英군인 그룬디씨
유엔공원서 일하는 박은정씨를 수양손녀 삼아 영국호적에 올려
"의사가 말렸지만 억지로 방한…
손녀 은정이 결혼 후 첫 생일인 내년 5월에도 올 수 있었으면"
"암 치료 중에 해외여행은 안 된다고 의사가 말렸지만 뿌리치고 왔어요. 이번이 마지막 한국 여행이 될지 모르니 슬픕니다."
지난 17일 서울 한 호텔에서 만난 영국인 제임스 그룬디(James Grundy·79)씨는 부풀어 오른 오른쪽 허벅지를 만지며 고통스러워 했다. 그의 손엔 마약 진통제 모르핀이 쥐어져 있었다.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주삿바늘로 허벅지를 찔렀다. 그룬디씨는 올 초 거의 완치됐던 척추암이 악성림프종(면역체계인 림프계에 악성 종양이 생기는 병)으로 번지면서 더는 손을 쓸 수 없는 상태가 됐다고 했다.
- ▲ 17일 오후 서울 한 호텔에서 매년 한국을 방문하고 있는 6·25전쟁 참전용사 영국인 제임스 그룬디씨가 최근 한국의 안보 상황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김지호 인턴기자
1988년 영국군 참전용사 100여명과 한국을 방문했던 그는 그 뒤 매년 한국을 방문했다. 6·25전쟁이 발발했던 6월이나 유엔데이(국제연합일·10월 24일)가 있는 10월 한국을 찾아 전우들이 묻혀 있는 부산 남구 대연동 유엔기념공원을 둘러봤다. 친절한 한국 사람들이 좋아 한국을 찾게 된다는 그룬디씨는 한국을 '제2의 고향'이라고 했다. 형제·자매들이 모두 세상을 떠나고 자식도 없는데다 2년 전엔 아내마저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그에겐 한국 땅에 수양 손녀가 있다. 그가 이번에 아픈 몸을 끌고 한국을 찾은 이유는 11일 부산에서 열린 수양 손녀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부산 유엔공원에서 근무하는 박은정(35)씨가 그의 손녀다. 박씨는 매년 유엔공원을 찾는 그룬디씨 사연이 궁금해 차를 대접하며 가까워졌다. 3년 전엔 집에 초대해 식사를 같이하기도 했다.
그룬디씨는 "(박씨가)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안 계신다고 하기에 (박씨에게) 나를 '할아버지'라고 부르라고 했다"고 했다. 그룬디씨는 지난해부터 해외여행을 할 때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한국에 있는 박씨가 장례를 책임지고 소지품도 정리한다'는 유서를 갖고 다닌다고 했다. 그는 올해 초 영국 호적에 박씨를 손녀로 올렸다.
박씨는 "할아버지가 죽어서도 전우들과 같이 살고 싶다며 당신이 돌아가시면 화장을 해서 재를 부산 유엔공원 연못 안쪽 섬에 묻어달라고 했다"며 "출·퇴근할 때 묻혀 있는 당신에게 인사만 해달라는 말씀을 하실 때 엉엉 울었다"고 말했다. 그룬디씨는 박씨 남편에게 '로버트(Robert)'라는 영어 이름을 지어줬다. 이 이름은 그룬디씨 가문에서 10세대마다 남자 아이에게 지어주는 이름이라고 한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각별한 그룬디씨는 최근 안보 상황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천안함·연평도 사태와 관련, 한국 정부의 대응이 늦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한국 정부가 바로 군사적 대응을 하든가 아니면 비슷한 행동에 나섰어야 했는데 눈치만 보고 어찌할 바를 몰랐던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그룬디씨는 '마지막 소원'이 하나 있다고 했다. "우리 손녀 은정이 생일이 5월이거든요. 결혼하고 첫 생일을 꼭 축하해주고 싶습니다. 더 바라지도 않아요. 쉽지 않겠지만 내년에도 한국에 오고 싶어요."
-조선일보, 2010 /12/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