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광야로 몰릴 때

하마사 2010. 2. 27. 10:01

본문: 막 1:9-15

찬송: 542장

제목: 광야로 몰릴 때

목표: 인생의 광야를 만날 때 지혜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알게 한다.

 

 

새는 본래 나는 것이 특징인데 날지 않는 새도 있습니다. 이런 새가 가장 많은 곳이 뉴질랜드라고 합니다. 뉴질랜드에 있는 키위나 펭귄은 날지 않습니다. 그들은 걸어만 다녀도 먹을 것을 많이 구할 수 있으므로 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생활을 오래 하다보니까 날개가 점점 작아져 퇴화된 것이라고 합니다.

모진 북풍이 강한 바이킹과 그들의 조선술을 개발시켰듯이 성경에는 평탄히 살다가 죽은 사람의 이야기가 없을 정도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해서 이스라엘의 고통스러운 역사와 더불어 예수님과 바울에 이르기 까지 성경은 고통을 통과한 믿음의 사람들의 기록입니다.

누구에게나 인생의 광야가 있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 미디안광야에서 40년을 보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나와 40년 동안 광야생활을 거친 후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다윗도 사울을 피해 도망 다니며 광야생활을 거쳤으며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도 이세벨을 피해 호렙산으로 가기위해 40일 동안 광야생활을 거쳤습니다.

구약성경에만 광야가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례요한은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광야생활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40일의 광야생활을 하신 후에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바울도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 3년 동안 아라비아광야생활을 거쳤습니다.

이처럼 자의든 타의든 누구나 광야의 훈련을 거칠 수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부흥하고 성장할 때가 있는 반면에 험한 광야의 기간이 있습니다. 국가에도 광야의 기간이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광야와 같은 시간 말입니다. 어떤 분이 ‘하나님은 공짜가 없으시다’고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은 훈련을 통해 사람을 만드시고 어떤 어려운 환경도 변화시켜 복있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이처럼 개인과 가정, 교회, 크게는 나라와 민족이 하나님의 훈련과정인 광야로 몰릴 때가 있습니다. 광야로 몰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1. 불평을 멀리해야 합니다.(12-13상)

12-13절 상반절, “성령이 곧 예수를 광야로 몰아내신지라. 광야에서 사십 일을 계셔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시니”

 

어떤 책에 이런 글이 있었습니다. “형무소에 있는 사람들은 하루종일 불평과 원망을 말합니다.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들은 하루종일 감사의 기도를 드립니다. 성도들이 만일 감사의 기도 대신에 불평만을 한다면 형무소의 죄수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대가 가죽장갑이 없음을 불평할 때 손 없는 사람을 생각해 보라. 그대가 유명상표의 구두를 못 신을 때 발 없는 사람을 생각해보라. 그대의 불평을 팔 생각은 하지 말라. 그것을 살 시장은 없다. 혹시 그대의 불평을 사 줄 사람이 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단지 그대의 착각일 뿐이다.”

오늘 성경에는 특이한 구절이 등장하는데 12절입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셨다는 표현입니다. 공관복음의 기자들인 마태, 마가, 누가는 예수님께서 세례 받으신 후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광야로 나갔음에 대하여 모두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광야'란 성경 문학적으로 타인과 완전히 결별된 곳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당시 예수님께서 실제로 금식하셨던 광야가 과연 어디였던가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합니다. 모세와 엘리야의 금식 장소였던 호렙산으로, 또는 다볼산으로, 그리고 여리고 근처의 한 장소로 보기도 합니다. 그중에서 광야가 세례 받으신 곳과 멀지 않았을 것이라는 측면에서 여리고 근처의 한 장소로 보는 견해가 타당성을 얻고 있습니다.

한편 마가복음서의 강한 이미지에 비해 마태와 누가는 완곡한 동사를 사용하였습니다. 그들은 이 시험 사건을 보고하면서 예수님께서 성령에 ‘이끌려서’(성령에 인도되어서) 광야로 나아갔음을 묘사한 것에 비해 마가는 적극적인 의미의 ‘내쫓다’는 뜻이 강한 단어를 사용해서 성령께서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신지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가의 이 기록은 마태나 누가의 기록보다 더욱 역동적이며 생생한 현장감을 나타내 주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강권적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입니다. 더 강한 표현으로는 몰아내셨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광야로 왜 예수님을 몰아내셨을까요? 이 세상에 오실 때도 말똥냄세 나는 마구간에서 태어나셨고 유복한 가정이 아닌 평범한 목수의 가정에서 자라셨으면 하나님의 아들로서는 고생할 만큼 하셨는데 왜 또 광야와 같은 결핍과 고통이 있는 곳으로 몰아가셨을까요? 이 정도면 불평 할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의 아들을 이렇게 취급해도 되냐고 말입니다. 참을 만큼 참았다고 하소연할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할 때 보면 불평들이 많았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간 것을 알면서 보기 때문에 왜 저렇게 불평들이 많을까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자리에 있다면 생각이 달라질 수도 있습니다. 당장 마실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습니다. 목이 타들어가고 배가 고픕니다. 옛날에 먹었던 맛있는 음식들도 생각납니다. 만나만으로는 그 입맛을 만족시켜주지 못합니다. 당장 내일 죽더라도 오늘 먹을 것은 먹고 싶은 것이 인간입니다. 이런 갈증과 배고픔 속에서 불평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믿음생활을 잘 했는데 자녀들의 수능시험 성적이 형편없어 재수하고 삼수해야 한다면 불평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자녀들이 취업을 못해 앞길이 막힐 때, 중병이 들어 고통당할 때 불평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편에서 바fms 믿음생활 하려고 하는데 교회의 법적인 문제는 점점 어렵게 되어갈 때 불평이 나오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믿음생활 잘 하려고 하는데 남편이 점점 더 속을 썩이고 자녀들이 마음을 찢어놓을 때 불평이 나오지 않습니까?

언젠가 아들이 제게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버지는 남들처럼 왜 돈이 없느냐? 왜 아직 부목사냐? 왜 학교에서 멀리 이사를 왔느냐? 왜 우리가족은 자주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 왜 TV가 없느냐? 왜 컴퓨터를 마음껏 할 수 없게 하느냐? 등 여러 가지 불평을 들으면서 내가 부족한 아버지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화도 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왜 불평거리가 없겠습니까? 하나님에 대한 불평이 왜 없겠습니까? 교회와 목사님들에 대하여 그리고 성도님들에 대한 불평이 왜 없겠습니까? 가족과 이웃사람들에 대한 불평이 왜 없겠습니까? 광야로 몰릴 때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불평과 원망입니다. 출애굽기 15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홍해를 건너고 미리암과 모든 여인들이 손에 소고를 잡고 춤을 추면서 높고 영화로우신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쁨과 감격도 3일을 넘기지 못합니다. 물이 없는 수르광야를 지나고 마라에 이르러 물을 마셨지만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게 되자 모세를 대하여 일제히 원망하고 불평했습니다. 이처럼 광야는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곳이기에 우리를 불평하게 만드는 곳입니다. 어쩌면 불평하는 것이 인간적으로는 당연한 곳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을 보면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몰아내셔서 40일을 계시면서 사단에게 시험을 받으시며 들짐승과 함께 계셨는데 불평했다는 기사가 없습니다. 사단이 끊임없이 시험해 왔습니다. 음식을 가지고 명예욕과 권력욕을 부추기며 시험했습니다. 우리와 똑같은 육체를 가지셨기에 물과 음식에 대한 욕구와 더불어 두려움도 엄습했을 것입니다. 당시 유대 광야 지역에는 뱀, 이리, 표범, 여우, 멧돼지, 하이에나 등이 이따금씩 출몰했다고 합니다. 예수님은 내적이고 외적인 공포와 고독 그리고 사나운 야생 동물들을 대하심으로 더욱 큰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단적으로 영적 전쟁을 치르고 계신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관계를 단절하신 채 철저히 홀로되셔서 고독에 찬 역경을 감내하고 계셨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아무도 격려해주거나 도와줄 수 있는 사람도 없었으며 먹이가 부족한 들짐승들이 우글거리는 무서운 곳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광야로 몰렸으니 불평거리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성령이 예수님을 광야로 모실 때 분명한 이유가 있듯이 우리들을 광야로 몰아내실 때도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건강의 광야, 물질의 광야, 인간관계의 광야, 내면의 광야, 영적인 광야로 몰릴 때가 있습니다. 광야로 내몰릴 때 가장 먼저 찾아와 함께 가자고 하는 동행자가 불평과 원망입니다. 한번 받아주면 계속적으로 친해지려고 합니다. 결국 불평이 습관화되어 절망하고 파멸에 이르게 됩니다. 단호히 거절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광야생활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모진 광야생활을 하시면서도 불평하지 않았습니다. 교회가 어렵고 가정생활이 힘들고 일터가 척박해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감사의 이유를 찾아 감사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을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13하)

13절 하반절, “천사들이 수종들더라.”

 

천사의 사명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성도들을 돕는데 있습니다. 이 천사들이 예수님께 시중을 든 때에 관해서는 마 4:11에 나와 있듯이 예수님께서 마귀를 물리치신 후였습니다. 성경에는 천사가 예수님께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중을 들었는지에 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지만 마귀의 시험을 이기신 예수님을 찬양하고 육체적 약함을 보살피는 일을 했을 것으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물론 천사들이 예수님께 시중을 든 때가 시험을 이기신 후로 기록되어 있지만 40일동안 광야생활 중에도 하나님은 침묵하며 함께 하셨습니다. 운동선수 아들을 두신 부모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들이 시합을 할 때면 부모님께 경기장에 나오지 말라고 부탁을 한답니다. 부모님은 아들에게 집에서 기도하겠다고 대답을 하지만 시합날이 되면 경기장 한 쪽에서 아들 몰래 그 시합을 지켜보며 마음으로 응원을 보낸다고 합니다. 아들이 보지는 않지만 아들이 뛰는 경기장에서 응원을 하며 함께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40일 동안 금식하면서 광야생활을 하는데 하나님이 모른척하고 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침묵하시며 함께하시다가 예수님이 마침내 마귀의 시험을 이기자 기뻐하시며 천사들을 보내어 시중을 들게 하셨던 것입니다.

야곱이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있을 때 하나님은 침묵하시며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야곱이 하란생활을 정리하고 가나안땅으로 떠나기 전에 꿈에 나타나 “라반이 네게 행한 모든 것을 내가 보았노라. 나는 벧엘 하나님이라.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내게 서원하였으나 지금 일어나 이곳을 떠나서 네 출생지로 돌아가라.” 말씀하셨습니다. 라반이 야곱에게 한 행동을 다 보고 계시면서 야곱과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야곱이 도망한 것을 알고 라반과 형제들이 7일 길을 쫓아갔을 때 밤에 하나님이 라반에게 나타나셔서 “너는 삼가 야곱에게 선악간 말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야곱을 지켜주셨습니다. 야곱은 몰랐을지라도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처럼 야곱의 일생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었습니다. 아버지 이삭의 집에 있을 때부터 외삼촌 라반의 집에 있었던 20년 동안 그리고 가나안 땅에 돌아와 살 동안도 하나님은 언제나 야곱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갈 때도 하나님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얼마동안은 침묵하셨을지라도 언제나 함께 하셨습니다.

요셉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인생을 살았습니다. 범죄하지 않으려다 모함에 의해 억울하게 수감된 요셉은 감옥에서도 전옥에게 인정을 받아 옥중 죄수를 관리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요셉은 가는 곳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형들이 구덩이에 던졌을 때도,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려갈 때도, 보디발의 집에서 종살이할 때도, 죄수의 신분으로 감옥에 있을 때도 하나님은 침묵하셨지만 어김없이 함께 하셨습니다. 특히 감옥에 있을 때 술 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석해주면서 그가 복직되면 자기를 생각하고 옥에서 건져달라고 부탁했지만 술 맡은 관원장은 감옥에서 나간 후 2년이 지나도록 연락이 없었습니다. 왕궁에 복직한 관원장에게 히브리노예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셉을 잊지 않고 함께 하셨습니다. 세상의 높은 관원이 기억하지 않고 잊어도 하나님은 끝까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또한 다윗의 광야생활도 모질고 힘든 세월이었습니다. 늘 죽음에 노출되어 있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았던 이유는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고백입니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선지자 850명과 대결할 때도 함께 하셨고 이세벨의 위협에 겁을 먹고 호렙산으로 도망가다 로뎀나무 아래 지쳐 쓰러져있을 때도 하나님은 어김없이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와 고통을 함께 나누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죄로 인해 신음하고 있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가 당하는 고난을 함께 당하시고 십자가까지 지시면서 고통에 동참하셨습니다. 그런 고통이 따르는 공생애를 시작하시기전에 성령에 이끌려 광야에서 금식하며 친히 고통을 체험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별명이 ‘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입니다. 하나님은 고통을 함께 하지 않고도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몸소 겪으시면서 인간의 아픔에 동참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금식하며 고통하실 때 하나님은 침묵하며 함께 하셨습니다. 이사야 41:10절에는 어떤 상황 속에서도 우리가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광야로 몰릴 때도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도와주시고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어 주심을 믿고 이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팽개치지 않습니다. 고통가운데 동참하시고 끝까지 함께 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저와 여러분들과 함께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깊은 시름이 있는 삶의 웅덩이에 빠져있다 할지라도 낙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미디안 장사꾼을 지나게 하셔서 요셉을 웅덩이에서 건져주셨듯이 우리도 건져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고 계십니까? 거기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인생의 험한 파도를 만나고 뜨거운 시험의 불꽃을 통과하고 계십니까? 거기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인생의 세찬 광야에 내몰릴 때도 실망하거나 낙망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어떤 광야일지라도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3. 새로운 역사를 준비해야 합니다.(14-15)

14-15절, “요한이 잡힌 후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가라사대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

 

광야로 몰릴 때 가장 먼저 찾아오는 손님인 불평을 멀리하고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믿으면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광야생활 이후 펼쳐질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는 일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광야생활은 하나님의 훈련과정입니다. 하나님은 귀한 것을 주실수록 그것의 가치를 알고 잘 간직하며 살도록 하기 위해 훈련의 강도를 높여가십니다. 훈련의 강도가 세면 셀수록 더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금식하며 사단의 시험과 들짐승의 위협을 이겨내면서 인류의 생명을 살리는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셨습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외치며 세례를 베풀던 세례요한이 잡히자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라고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셨습니다.

광야생활은 공생애를 위한 준비 기간이었으며 새로운 역사를 위한 준비훈련이었습니다. 천국 복음을 전파하며 진리를 가르치고 병자를 고치며 귀신을 쫓아내는 등 사단의 진영을 파하는 실제적인 사역을 시작하셨습니다.

바울이 아라비아에 가서 무엇을 했는지에 대해서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성경학자들은 약 3년 동안 주님과 더 깊은 교제를 하기 위하여 영적 훈련을 받은 기간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헌신되어지기 위해서 연단의 시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3년 동안 광야에서 묵상하며 기도하며 성경을 연구했습니다. 그 때 그는 복음의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모세가 40년 동안 미디안 광야 생활을 한 것과 세례 요한이 공적인 사역을 위해 광야에서 거처한 것과 같습니다(눅1:80).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은혜 받았다고 다 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역사를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고 주님과 더 깊은 교제시간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할 때 길이 자꾸 막히고 어려움에 봉착할 수 있습니다. 빨리 가야하는데 막히고 다 된 것 같았다가도 잘 안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더 훈련 받아야 하고, 더 준비되어야 한다는 하나님의 사인으로 보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벤쿠버 동계올림픽에 출전하여 5천미터에서 은메달, 1만미터에서 금메달을 안겨준 이승훈선수는 쇼트트랙 국가대표에서 탈락하자 포기하지 않고 스피드스케이팅으로 전향한지 1년도 되지 않아 기적같은 메달을 획득했습니다. 특히 1만미터 장거리는 아시아인으로서는 우승이 불가능하게 생각되어지던 종목이었습니다. 이처럼 훈련한 땀방울은 없어지지 않고 새로운 역사를 이루는 밑거름이 되는 것입니다. 쇼트트랙국가대표에서 탈락했다고 포기하고 절망했다면 이런 일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광야로 몰릴 때라도 새로운 역사를 위해 준비하며 훈련할 때 전화위복의 기적을 이룰 수 있습니다.

‘도전과 기회 3C혁명’이란 책을 쓴 강영우 박사는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 차관보를 지낸 사람으로 한국인으로서는 미국의 최고공직자에 오른 사람입니다. 그는 중학교 재학 중 외상에 의한 망막 박리로 실명한 후, 실명의 고통, 사회의 편견, 차별 등을 신앙과 굳은 의지로 극복하여 세계적인 재활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는 또 자녀교육에도 탁월하여 두 아들 중 장남인 폴강(한국명:강진석)이 금년 초에 36세의 나이로 40~50대 의사가 회장을 맡는 것이 관행이던 워싱턴 안과의사협회장에 취임하여 뉴스가 되었습니다. 최근 이 지역 월간지 워싱토니안으로부터 '2010년의 가장 뛰어난 의사' 중 한 명으로 선정되기도 했으며 지역 의료인 6,500명을 대상으로 한 투표에서 '베스트 안과의'로 뽑혔다는 소식입니다. 또한 작년 1월에는 32세 나이로 오바마 대통령의 입법특별보좌관(Special Assistant·차관보급)에 임명된 강 박사의 둘째 아들 크리스가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어린나이에 실명하였다고 좌절하고 포기했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에게 시각장애라는 광야생활이 시작되었지만 믿음과 도전정신으로 새로운 역사를 준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비록 나는 불빛도 구별할 수 없는 완전 맹인으로 40년을 살아왔지만 이 세상에서 가장 축복받은 사람 중 하나라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은 나에게 실명이라는 치명적인 약점을 통해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날 기회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들과 어울릴 수 있는 인생관, 세계관을 깨닫고 배우게 해주셨다. 실명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실명을 통해 오늘의 놀라운 축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오늘 벤쿠버 동계올림픽 피겨스케이팅에서 김연아선수가 세계최고점수로 우승을 차지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김연아선수는 우승 직후 SBS와 인터뷰에서 “아직도 우승이 믿어지지 않는다. 준비했던 걸 다 보여드려 기쁘고 내게도 이런 날이 왔다는 게 실감나지 않는다”면서 감격스러워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김연아선수 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이런 기쁘고 즐거운 날이 올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광야로 몰릴 때가 있습니다. 광야로 몰릴 때 불평을 멀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역사를 준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광야훈련이 끝나고 하나님의 비전을 담을 그릇이 준비되면 우리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위대한 새로운 역사가 펼쳐지리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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