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의해 공인되기까지는 300년이 걸렸다. 중동과 중앙 아시아,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의 기독교 지역이 이슬람 지역으로 되기까지는 불과 백년도 걸리지 않았다. 유럽이 기독교 지역이 된 과정은 2천년 가까운 세월이 걸렸다. 켈트족과 게르만족 그리고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의 후예들이 기독교를 받아 들이기까지 적게는 수백년 많게는 천년이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다. 하지만 유럽이 비기독교화의 과정을 겪은 시간은 4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를 두고 유럽의 역사적 세속화(Historical secularization)라고 부른다. 유럽은 비기독교화(De-Christianization)의 도전에 직면해 있는 것만이 아니다. 이보다 더 큰 파도처럼 덮쳐오는 이슬람의 파고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리비아의 가다피의 말처럼, “총칼없이 유럽은 이슬람화의 과정”을 겪게 될 것이며 “그 기간은 수십년이 채 되지 않을 것”이다. 유럽의 많은 지역의 이슬람화가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한편, 우리에겐 다음과 같은 질문이 생긴다.
“무엇이 이토록 빠른 유럽 기독교의 약화”를 가져 왔으며, 반면 “이토록 빠른 이슬람의 성장”의 요인은 무엇일까?
기독교 진영이 추구하는 기독교 선교와 전도는 본질적으로 개인의 회심과 믿음의 선택에 있다. 하지만 이슬람의 선교는 전도와 포교에 있지 않고 제도의 개혁(샤리아 법이 실현 가능하도록)과 금융, 경제, 군사, 문화 그리고 정치와 종교 행위에 이르기까지 통합하는 총체적 시스템 구축에 있다. 그럼으로 비무슬림에서 무슬림으로 개종시키는 것도 궁국적으로 이슬람의 통합적 시스템 구축을 가능케 하기 위한 전략적 단계에 불과하다. 이슬람화를 위한 정당한 방법은 너무나 다양하다. 개인의 개종, 국제 결혼, 도시 건설, 금융 시스템 구축, 대규모 이민, 인구의 자연 증가, 무역의 증대, 교육과 문화를 통한 다와(Daw’ah)의 구축, 방송 매체, 그리고 정치 통합을 통한 이슬람 선교이다. 이슬람 선교는 모든 영역에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기독교 선교과 이슬람 선교의 근원적 차이점은 개인의 회심과 통합적 시스템 구축이다. 이슬람의 통합적 시스템 구축을 위해서라면 구제, 회유, 한시적 거짓말(이는 포교를 위한 수단으로), 전쟁(지하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불사한다. 기독교에 있어서 어떤 사람이 예수를 믿고 안 믿고는 오로지 개인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슬람에 있어서 이슬람을 믿느냐 믿지 않느냐는 개인의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슬람을 받아 들이느냐 아니면 그렇지 않으면 비이슬람으로서 평생을 굴종과 굴레에 묶여 사느냐의 문제이다. 비무슬림으로서 이슬람권에 사는 사람의 문제는 매일 매일 드려지는 아잔의 기도로부터 시작해서 마치는 시간까지 법과 제도, 국가와 군사, 경제와 문화, 교육과 인간의 가치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로 움직이는 통합적 시스템 안에서 살아가야 하는 처절한 삶의 문제인 것이다. 어떤 지역이 일단 이슬람 지역이 되는 순간에 각 개인의 자유와 상관없이 세금과 병역의 의무, 법과 제도 그리고 공동체(움마)의 울타리를 세대와 세대를 걸쳐 피할길이 없다. 이슬람 지역에서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으로 세대를 거쳐 생존해야 할 가능성은 차라리 참담함에 가깝다.
“기독교 진영이 이슬람의 선교 방식을 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저들은 기독교의 안방을 이전에도 그리했듯이 지금도 밀려 들어 오고 있다.
마호메드 사후에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시작된 이슬람은 엄청난 속도로 주변 지역을 정복해 나갔다. 마호메드가 죽은지 불과 몇 년 안되어 아라비아 반도를 이슬람의 초승달에 평정되었다. 마호메드의 후예들이 페르시아(지금의 이란)를 정복하고자 벌인 치열한 전쟁은 이슬람 팽창사에 기폭제가 된다. 그 전쟁의 핵심에 선 장군 누아만은 크테시폰 전투에서 다음과 같은 선포를 한다. 무타구치 요시로가 쓴 중동의 역사라는 책에 나오는 문구를 보자!
“우리들은 과오 속에서 살고 있지만 알라는 우리들을 불쌍히 여겨 예언자 한 사람을 보냈다. 그는 우리들의 동포이며 게다가 가장 고귀한 집안의 분이다. 그는 우리들을 이교도이 어둠에서 진실한 가르침의 빛으로 이끌어 주셨다. 이미 그는 돌아 가셨지만 이 세상에서 우리들의 가르침에 속하지 않은 자 모두와 싸우라고 유언하셨다. 즉 그자들은 가르침에 귀화하든지, 공물을 바치든지, 아니면 무기를 들고 저항하든지 선택해야 한다. 만약 가르침을 믿으면 우리들은 그대들에게 왕국을 남길 것이다. 믿고 싶지 않으면 공물을 바쳐라. 모두 원하지 않는다면 싸울 준비를 하라”
상기의 글은 이슬람 선교와 전쟁의 조건을 잘 말해준다.
1. 가르침에 귀하하라! 즉 무슬림으로 개종하라!
2. 개종하지 않으면 세금을 내라!
3. 아니면 전쟁을 통해 굴복시키겠다!
위의 세가지는 인류 역사 가운데 왜 이슬람이 그토록 빠른 속도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에 대한 해답을 주는 단서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늘과 땅의 권세를 그 제자들에게 주시고 이 천국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라고 하셨다. 한 영혼을 그리스도 예수 앞에 이끌기까지 죽음도 불사하고 전하지만 개종을 위한 강요나 또는 세금 부여나 또는 국가와 국가, 그리고 지역과 지역을 가르는 전쟁을 일으키라는 말씀은 없었다. 천국은 이 땅에 속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천국은 죄가 없고 예수 그리스도의 의와 진리만이 영원히 함께 하는 영광의 나라이다. 가장 좋은 것을 주기 위해 이땅의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삶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하지만 종교라는 미명하에 기독교에서 이슬람의 영역으로 개종이나 믿음이라는 영역에 가면 그것을 바라보는 개념과 세계관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이슬람에 있어서 종교는 개인의 선택 사항이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이다. 이슬람의 공격 가운데 기독교인으로서 기독교 공동체(Duhmitude)로 살아온 중동의 기독교인들은 세대와 세대를 거쳐 교육과 정치, 문화, 그리고 종교 행위에 일으기까지 불평등 대우를 받아 왔다. 이집트 정교회 출신으로 1400년 동안의 처절하고 비참하리만치 아프고도 서글픈 이슬람권 기독교인들의 역사를 담은 “Bat Ye’or 의 “Islam and Dhimmitude: Where Civilization Collide” 을 글을 읽노라면 등골이 오싹하리만치 돌진해 오는 이슬람의 도전이 눈앞에 펼쳐진다. 천년을 넘게 질기고도 질긴 기독교 신앙을 지켜온 중동의 기독교인들에게 큰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모래폭풍 일으키며 그 잔악무도한 말밥굽에 숨소리 죽여야 했던 기독교인들의 초라함이 그녀의 책에서 묻어 나온다. 예오르(Ye’or)의 책은 이슬람의 두 전략 평화와 정복, 그 대답은 복종(이슬람) 또는 전쟁(지하드)을 고스란히 담아낸다.
기독교에 있어서 종교는 믿음의 문제이기에 국가의 체제와 정치, 군사, 문화, 경제, 그리고 사회전반에 이르기까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지에 따른다. 하지만 이슬람에 있어서 종교는 무슬림대 비무슬림, 선택 사항이 아닌 조건없는 운명적 굴종을 요구한다. 일반적으로 비이슬람권에 있어서 종교와 정치 그리고 문화와 삶은 별개의 문제라는 등식은 상식으로 통한다. 하지만 이슬람권에 있어서 이러한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독일의 어떤 크리스찬이 기독교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슬람 지역에서 무슬림이 기독교나 기타 종교로 개종하는 일은 너무나 위험천만한 일이다. 이는 코란이 무슬림이 타종교로 개종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으며, 개종하는 가족 일원에게 명예 살인하지 않는 것도 신성모독에 해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슬림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것은 불가능하개 만든 것은 비단 코란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와 가족, 공동체와 삶의 양식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개종이 관계된 복잡성은 너무나 깊고도 끈질기다. 어떤 무슬림이 개종하는 순간 국가가 경영하는 종교 경찰의 심문부터, Hadith 과 샤리아, 정치, 인권유린과 명예살인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개종자가 당할 법적 지위의 박탈 즉 Muslim 에서 Dhumi(이슬람의 입장에서 기독교인이나 유대인을 지칭할 때 쓰는 말) 인 비무슬림으로서 이해하기 어려운 살아있는 순교의 현장이 된다. 너무나 행복하고 편안하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할 수 있는 우리의 환경과 모든 삶의 영역을 다 걸고 그리스도 예수를 믿어야 하는 무슬림의 선택은 선택의 순간부터 그 간격이 엄청나다. 이슬람에서 의미하는 개종이라는 영역의 의미를 우리 기독교들은 주시해야 한다.
기독교 진영은 기독교는 종교라고 생각하지만, 무슬림은 이슬람이 단순한 종교의 영역을 넘어 삶의 방식(A Way of Life ), 문화와 관습과 국가와 정치를 포괄하는 총체적 체재라는 점이다.
이슬람은 삶의 방식(A Way of Life) 이기에 종교와 정치를 분리할 수 없으며, 문화와 삶을 따로 떼어 놓을 수 없다. 창조의 질서인 총체적 체재(Holistic System) 를 창조한 유일신 알라의 명령과 뜻에 ‘자발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바로 “Islam” 의 진정한 의미가 된다. 중동 어디를 가도, 한국에도 이제 곳곳에 서있는 모스크에는 어김없이 초승달이 달려 있다. 모하메드가 메카에 위치한 히라 동굴에서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첫 계시를 받은 날 밤하늘에 초승달이 떠 있다고 하여 수도원의 십자가를 떼어내고 초승달로 대체하게 되었고, 이제 초승달은 이슬람의 상징이 되었다. 모하메드 이전에도 초승달 무늬는 3세기부터 7세기 중반에 이르기까지 지금의 이라크 일부와 와 이란 지역을 통치했던 사산 왕조의 왕권의 상징이었다. 특히 모하메드가 속한 쿠라이시 부족은 달신을 섬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달신이 이슬람의 상징으로 바뀌어 무슬림의 형제애를 가르키는 것으로 대체되었다. 어떤 기독교인이 기독교 지역에 살고 있다 해도 그가 드리는 행위인 예배와 십일조, 구제, 그리고 순례가 없어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는 기독교적 행위는 전적으로 개인의 선택 사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슬람 체재가 한 번 세워진 곳에는 세대와 세대를 거쳐 종교, 정치, 문화, 교육, 군사, 경제 행위에 이르기까지 이슬람의 총체적 체재에서 벗어 날 길이 없도록 무조건 이슬람 체제에 순응하도록 되어 있다. 무슬림이 되는 순간부터 꼭 지켜야 되는 몇가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선택 사항이 아니다. 이슬람권 아래의 무슬림은 선택의 여지없이 반드시 이슬람의 다섯 기둥을 지켜야만 한다. 이 다섯가지가 바로 신앙 고백, 예배, 구제, 단식과 성지 순례이다.
무슬림이 지켜야 하는 기본 행위 다섯가지를 이슬람의 다섯 기둥(Five Pillars of Islam)의 첫걸음은 매우 단순한다. 코란의 첫구절을 암송하면 무슬림이 된다. 이러한 일로 무슬림이 되는 과정이 복잡하고 매우 어려운 것이라고 생각한 분들은 의외로 이슬람에 대한 경계를 풀게 된다. 이것은 그들이 이 단순한 문구에 얽힌 엄청난 의미와 관계성을 모르기에 하는 생각이다. 이슬람을 믿는 무슬림이 되는 첫 단추인 신앙고백을 이만(Iman)이리고 하는데 즉 믿음(신앙, Faith)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1. 신앙(Shahada, Faith)
무슬림이 되는 첫걸음은 의외로 쉽다. 코란의 첫 구절은 “알라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오직 알라만 있으며, 모하메드는 알라의 선지자 ( أشهد أن لا إله إلاَّ الله و أشهد أن محمدا رسول الله )”라는 고백을 하면 된다. 이를 Shahada 즉 신앙고백이라고 부른다. “앗쉬아두 안라아(알라) 일라하 일라, 와 앗쉬아두 안나 무함마다안 라쑬로 알라(ʾašhadu ʾan laa ilāha illa (A)llāh, wa ʾašhadu ʾanna Muḥammada(n) rasūlo (A)llāh)를 암송하는 것 하나만으로 무슬림이 되는 것이다. 혹자는 이러한 신앙 고백이 어렵지 않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이 문구 하나에 성경 전체와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부인케 하는 엄청난 책략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 보자! 비기독교인이 기독교인 될 때 다음과 같은 고백을 한다고 하자.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살아계신 아들이시요, 그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사 나의 사하셨으며, 나는 그분이 나의 구주임을 믿습니다!”라고 고백했다고 하자. 그의 고백 이후에 그에게 사회적으로, 제도적으로, 그리고 종교적으로 요구하는 사항은 별로 많지 않다. 특별이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할 필요도 없고, 반드시 어떤 지역을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 여행할 요구는 더더욱 없다. 그의 마음에 회의감이 들거나, 설령 배교하거나 타락해도 그것은 개인의 신앙에 달린 일이다. 하지만 이슬람에 있어서, 무슬림이 배교하면 알라를 거역하는 신성모독이 되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기독교나 타종교로 개종할 수 없으며, 자신의 자녀와 또 자녀 세대에 걸쳐 이슬람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게 된다. 더군다나 무슬림 여성은 비무슬림 남성과 결혼할 수 없다. 한번의 개종이 수백세대를 거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엄청난 굴레가 이 단순한 단어 ‘신앙고백(Declaration of Faith)’ 즉 ‘샤하다(Shahada)’ 에서 이루어진다. 매우 쉬운 것 같으나 돌이킬 수 없는 숙명의 나래로 떨어뜨리는 이슬람의 ‘신앙고백(샤하다)’의 힘을 간과하지 말자! 아래의 그림은 샤하다가 적혀 있는 아랍어 문구이다.
2. 예배 (Salah)
무슬림으로 개종한 사람은 알라에게 살라 즉 예배(Salah)를 드려야 한다. 이는 의무사항은 하루에 반드시 다섯번씩 알라에게 직접 기도해야 한다. 코란을 잘 아는 사람이나 아니면 회중 가운데 택일하여 이 기도를 드리게 한다. 대부분의 모스크에서는 이맘이 이끈다. 이 기도는 새벽, 낮, 늦은 오후, 석양질때, 그리고 한 밤중에 행해지고 리듬이 있는 곡조와 함께 다섯번의 기도를 드린다. 이때 드려지는 아잔 기도(Adan)는 다음과 같은 것을 선포한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 외에 다른 이를 섬기는 것이 없음을 나는 증거한다.
알라 외에 다른 이를 섬기는 것이 없음을 나는 증거한다.
기도하러 오라!
기도하러 오라!
성공으로 오라!
성공으로 오라!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는 위대하다!
알라 외에 다른 이를 섬기는 것이 없음을 나는 증거한다.
무슬림이 되는 순간부터 코란의 첫장에 나오는 7구절은 모든 무슬림들이 매일 드리는 기도문을 암송하며 하루에 다섯번씩 기도를 드려야 한다. 매일 드리는 무슬림의 기도문을 Al-Fatiha 라고 부른다. 아래의 그림에는Al-Fatiha 라는 7개의 기도문이 아랍어로 쓰여 있다.
7개의 기도문은 다음과 같다.
1. 가장 자비로우시고, 언제나 긍휼이 많으신 알라의 이름으로 (بِسْمِ اللّهِ الرَّحْمـَنِ الرَّحِيم: Bismillāhi r-raḥmāni r-raḥīm , In the name of Allah, the Most Gracious, the Ever Merciful)
2. 우주의 주이시고, 공여자이시고 지키시는 알라에게 다 찬양하라 ( الْحَمْدُ للّهِ رَبِّ الْعَالَمِين:Al ḥamdu lillāhi rabbi l-' ālamīn, All Praises to God, Lord/Cherisher/Sustainer of the Universe)
3. 가장 자비로우시고, 가장 긍휼이 많으신 (الرَّحْمـنِ الرَّحِيم: Ar raḥmāni r-raḥīm, The Most Gracious, the Most Merciful)
4. 심판의 날의 주권자 (مَـالِكِ يَوْمِ الدِّين: Māliki yawmi d-dīn, Sovereign of the Day of Judgement)
5. 우리는 당신만을 예배하며, 당신께만 도움을 청합니다. (إِيَّاك نَعْبُدُ وإِيَّاكَ نَسْتَعِين: Iyyāka na'budu wa iyyāka nasta'īn, You alone we worship, and You alone we ask for help)
6. 진정한 길로 인도하소서 ( اهدِنَــــا الصِّرَاطَ المُستَقِيمَ: Ihdinā ṣ-ṣirāṭ al-mustaqīm, Guide us to the true path)
7. 당신에게 후의를 청하는 모든 이에게는 길을, 당신의 진노를 얻는 자와 잘못된 길을 가는 자에게는 그리 하지 마소서 ( صِرَاطَ الَّذِينَ أَنعَمتَ عَلَيهِمْ غَيرِ المَغضُوبِ عَلَيهِمْ وَلاَ الضَّالِّين: Ṣirāṭ al-laḏīna an'amta 'alayhim ġayril maġḍūbi 'alayhim walāḍ ḍāllīn , The path of those on whom You have bestowed your favor, not of those who have earned Your anger, nor of those who go astray)
상기의 7가지 기도문을 매일 암송하며, Al-Faithah 를 따르는 자들은 아민(Amin)을 말하게 된다.
한번 무슬림이 된 순간부터 그 이후에 태어나는 모든 사람들은 무슬림의 기도를 훈련받으며 일생을 두고 매일 다섯번씩 아잔 기도를 드려야 한다. 다음은 아잔 기도 드리는 훈련을 받는 어린이의 모습이다.
살라는 드물게 아랍어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용하신 아람어(Aramaic)인 Hallow 라는 뜻에서 왔다.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축복’하거나 또는 ‘기도’하는 의미의 인간의 행위를 의미한다. 무슬림에게 있어서 살라는 종교적 의식이자 암송으로 이슬람 예배의 행위로 간주된다. 위의 그림이 보여주는 살라는 하루에 다섯번씩 의무적(fard)으로 행하는 기도로 자원하여 드리는 기도인 Nawafil 과는 구분된다. 살라는 이슬람의 다섯기둥 가운데 샤하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이다. 매일 다섯번씩 드려지는 기도는 반복되는 말과 움직임을 동반하는 이를 라카(rak’ah)라고 부르는데 엎드리는 ‘절’을 지칭한다. 다섯번의 기도는 예배로 간주되며, 모스크가 없는 가정, 깨끗한 정원등 장소에 가림이 없이 드려지며 대략 10분 정도 걸린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에는 모든 무슬림이 함께 하는 합동 예배가 드려진다.
1일 5회의 예배의 명칭은 다음과 같다.
1. 파즈르: 알 파즈르(al fajr)라고 부르는 두번의 조용한 라카(raka’at)의 기도가 이 시간에 드려진다. 알 파즈르는수브흐(subh)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조용하고 깨우기 때문에 불리우는 이름이다. 알 파즈르는 보통 동트기 전 새벽에, 특히 지평선에 줄을 긋듯 해가 떠오르는 시간에 드려진다.
2. 주흐르(thuhr): 낮 예배로 정오를 조금 지나는 시간에 드린다. 막대기를 수평으로 땅에 세워 그림자가 정 가운데 놓이는 시간에 드린다. 이때는 4번의 조용한 라카(raka’at)를 행한다.
3. 아스르:오후인데 주흐르와 마그립 중간으로 보통 오후 3시30분 경에 드린다. 하딧(hadith)에는 아수르가 드려지면 해가 완전히 질때까지 다른 기도를 드릴 수 없다고 한다.
4. 마그립: 해질때 드리는 기도이며 세번의 raka’at 을 먼저 행한 후, 큰소리로 두번의 raka’at 을 큰소리로 행한다. 마그립 기도는 보통 20분 정도 걸리는데 해가 지는 순간부터 마지막 붉은 황혼이 지평선으로 질때까지 드려진다.
5. 이샤: 밤에 드려지는 기도로 마그립 예배 후 약 1시간 반정도 뒤에 행한다. 먼저 네번의 raka’at 을 큰소리로 행하고 마지막 두번의 raka’at 은 조용히 드린다.
3. 구제( Zakat)
무슬림에게 중요한 원칙은 모든 것이 알라에게 속해 있다는 점이다. 알라의 부요가 인간을 신뢰함으로 맡겨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구제라는 뜻의 아랍어 자카트(zakat)는 “정화(purification)” 와 “성장(growth)”라는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이슬람 사회에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무슬림의 소유가 그들에게 사용되도록 정화되었다고 믿는다. 이러한 구제가 지속적인 새로운 성장을 가져온다고 본다. 각자의 무슬림은 각 개인에 따라 구제 액수를 정산한다. 기본적인 주거비와 직업에 필요한 도구 비용을 뺀 일년 수입 중 40분의 일 즉 2.5%를 기준한다. 각 개인에 따라 비공개로 자선금(sadaqah)을 자원해서 내기도 한다. 이러한 자카트를 모아 이슬람력 10월 1일에 가족에 수에 따라 지불해 주는 희사금을 쟈카뚤 피뜨르라고 한다. 그러기에 구제 즉 자카트는 구빈세와 같은 세금의 기능을 해 줌과 동시에 자선금 또는 희사금의 의미까지도 내포한다. 이것이 바로 모든 무슬림으로 하여금 한 형제라는 강력한 연대감을 심어주게 한다. 이에 관해 코란의 앗 타우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로 자선금은 가난한 자와 불쌍한 자와 거기에 종사하는 자와 그들의 마음이 위안을 받을 자와 노예와 채무인 자와 알라의 길에 있는 자와 그리고 여행자들을 위한 것이니 이는 알라로부터의 명령이라. 알라는 아심과 지혜로 충만 하시니라. (코란 9:60)
4. 단식 (SAWM)
이미 세계에 많이 알려진 라마단은 이슬람의 다섯 기둥 중 하나로 모든 무슬림을 하나로 묶어 주는 매개체 역할을 한다. 특히 중동 지역의 라마단 기간에 여행해 본 분들은 그 위력을 실감했을 것이다. 이슬람력으로 히즈라 즉 9월로 ‘라마단” 1개월 동안 행해지는 단식(사움)을 말한다. 해 뜨는 아침부터 해 지는 저녁까지 어떤 음식도, 물도, 배우자와의 성관계도 금지시키는 강력한 금식 기도가 라마단 기간에 행해진다. 이때에는 부정적인 생각을 해서도 안되고, 식욕, 성욕과 같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억제해야 한다. 말과 행도 그리고 악에 대해서도 내적 절제를 통해 정화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몸이 아프거나, 노약자이거나 또는 여행중이거나, 생리 중인 여성이거나, 임신 중이거나 또는 젖먹이는 중인 여성에게는 금식을 하지도 않아도 되며 그들이 나중에 해가 다 지나가기 전 건강하거나 능력이 되면 남은 일수를 채우면 된다. 어린이들도 금식 기도에 참가하거나 또는 관전할 수 있다. 라마단 금식은 자신의 정화(self-purification)와 자기 절제(self-restraint)를 주 방법으로 사용된다. 스스로 세상의 안락함으로부터 끊음으로, 비록 짧은 기간이지만 알라의 존재 앞에 자신의 목적을 그에게 맞추는 기간으로 보고 있다. 코람의 알 바까라에 다음과 같은 금식의 언급이 나온다.
너희 선임자들에게 단식이 의무화된 것처럼 알라을 믿는 너희에게도 단식은 의무라. 자제함을 통하여 의로워질 것이라. 정하여진 날에 단식을 하면 되나 병중에 있거나 여행 중에 있을 때는 다른 날로 대응하되 불쌍한 자를 배부르게 하여 속죄하라. 그러나 스스로 지킬 경우는 더 많은 보상이 있으며 단식을 행함은 너희에게 더욱 좋으니라. 실로 너희는 알게 될 것이라. 사람을 위한복음으로, 그리고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라마단 달에 꾸란이 계시 되었나니 그 달에 임하는 너희 모두는 단식을 하라. 그러나 병중이거나 여행중일 경우는 다른 날로 대체하면 되니라. 알라는 너희의 고충을 원치 않으시니 그 일정을 채우고 너희의 편의를 원하시니라. 그러므로 너희에게 복음을 주신 알라께 경배하며 감사하라. (코란 2:183-185)
5. 성지 순례 (핫지)
인종과 지역 그리고 세대와 세대를 하나로 엮어 무슬림이라는 강력한 연대감을 심어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순례이다. 기독교에는 성지 순례가 이러한 연대감이 없지만 모하메드에 의해, 특히 코란에 명령한 일생에 단 한번이라도(물론 여러번 행할 수 있고) 메카를 순례하는 성지 순례(Hajj)는 이슬람에서 있어서 무슬림이라는 일치감을 주는 중요한 기둥이다. 이슬람의 성지 순례는 대순례(핫지)와 소순례(우므라)로 나뉜다. 무슬림의 한 생애에 그들의 건강과 재력이 허락하는 한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메카를 순례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핫지는 이슬람력 12월 10일을 전후로 행한다. 무엇이 매해마다 2백만명의 무슬림으로 하여금 그곳으로 향하도록 하는 동력이 되는가? 이는 유일신 신앙을 고수한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을 전례를 따르도록 하기 위함이라고 말한다. 코란의 알 바까라에 다음과 같은 명령이 나온다.
대순례는 명시된 달에 행하되 순례를 행하는 자는 성욕과 간사하고 사악한 마음을 갖지 말 것이며 언쟁도 하지말라. 그리고 선행을 행하라. 그리하면 알라께서 아실것이라. 내세를 위한 양식을 마련하되 가장 좋은 양식은 이성이 있는 자들의 정직한 품행이라. 그러므로 현명한 자들아, 나를 두려워하라. (코란 2:197)
코란에 명시된 것처럼 다신교 신앙이 팽배하던 메카에 유일신 신앙을 가진 아브라함과 이스마일의 믿음을 기리기 위해 저들은 성지순례를 행하는 것이라고 저들은 말한다. 이는 유일신 알라에 대한 신앙을 “성지순례와 고행을 통해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신앙을 기리고 자신들도 알라에 대한 믿음과 선례를 답습할 수 있다”고 믿는다. 순례객들은 카바(Ka’bah)를 일곱번씩 돌게 되며, 사파(Safa)와 마르와(Marwa) 사이를 일곱씩 왕래한다. 사파와 마르와는 메카에 위치한 작은 두개의 언덕(산)으로 핫지와 움라흐(Umrah)의 순례를 종교 의식으로 행하는 것이다. 이곳은 하갈(아랍어로는 하지르, Hajir)이 광야에서 물을 구할 때, 샘물이 터진 곳이기 때문이라고 저들은 믿는다. 순례객들은 7번의 걸음을 마치고 메카 외곽에 있는 광대한 광야에 모여 알라의 용서를 구하는 기도를 드린다. 이는 심판의 날에 대한 예비 관람(preview)인 셈이다. 그럼 저들은 왜 일곱번씩 두 언덕 사이를 돌아야 하며, 무엇때문에 그런 순례를 해야만 하는가?
이 점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과 유대교의 근원적 차이를 보여 주는 대목이다. 이슬람의 전통에 의하면, 알라는 아브라함의 아내 하갈(Hagar)과 그의 간난아기를 생필품(provision)만 주고 광야로 내몰게 한다. 이는 그들의 믿음을 시험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하갈이 내 몰린 곳이 바로 사파(Safa)와 마르와(Marwah) 사이였다고 한다. 하갈과 아이가 가진 모든 음식이 떨어지자 하갈은 도움을 청하게 된다. 하갈은 더 쉽고 빠르게 음식을 구하기 위해 이스마엘을 땅에 버려두고 물을 찾기 시작한다. 그녀는 홀로 가장 가까운 언덕인 Al-Safa, 사파 언덕을 오르게 되고 그 주위를 살피게 된다.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음을 본 그녀는 다른 언덕인 Al-Marwah, 마르와 언덕으로 가게 된다. 그녀는 그곳에서도 아무서고 찾지 못하고 다시 사파로 간다. 그 사이에 하갈은 이스마엘이 안전한 것을 확인한다. 그러나 그녀가 두 언덕 사이의 계곡에 있을 때에는 이스마엘을 볼 수 없게 된다. 그럼으로 하갈이 계곡에 있을 때에는 달리기 시작하였고, 이스마엘을 볼 수 있는 평야에서는 달리지 않고 걸을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하갈은 강력한 땡빛이 내리치는 대낮에 일곱번씩 두 언덕 사이를 왕래한 후 이스마엘에게로 돌아 온다. 그후 울고 있는 간난아기인 이스마엘이 모래바닥을 문지르니 샘물의 입구 모양이 되고 급기야 물이 터저 나오게 된다. 이 우물이 바로 잠잠우물(Zamzam Well)이다. 이 우물은 알라가 하갈에게 천사를 통해 선사한 우물이라고 한다. 이 우물의 크기는 좌우 18 14 feet 정도된다.
메카를 성지로 만들어 카바를 비롯해 사파와 마르와 언덕까지 포함하는 지역을 포함하는 가장 큰 모스크라 일컬어지는 이곳을 마스지드 알 하람(Masjid al Haram) 이라고 부른다. 400,800 sq meters (99에이커 정도의 넓이) 에 달하는 이곳은 전세계 무슬림의 중심이 되는 곳이다. 바로 이곳 안에 카바가 위치해 있고 핫지(순례)의 걷는 의식(sa`i, Arabic: سعى)이 시작되는 데, 사파(Safa) 까지는 반마일정도이고, 마르와(Marwah) 까지는 100야드 불과한 거리에 있다. 사파와 마르와의 거리를 미터로 정산하면 450미터인 셈이다. 이곳을 왕복 일곱번씩 돌게 되면 대략 3.15 킬로 미터가 된다. 아래의 사진이 두 언덕 사이를 연결한 긴 통로(long gallery) 를 걷는 보여준다.
이때 순례객들은 핫지 기간동안에 알라에게 드리는 기도를 드린다. 다음을 클릭하면 그들의 기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
Talbiyah (real audio) - a prayer www.islam101.com/hajj/talbiyah1.ram
"Labbaik Allahumma Labbaik. Labbaik, La Shareek Laka, Labbaik. Innal Hamdah, Wan Nematah, Laka wal Mulk, La Shareek Laka"
"Here I am at Thy service O Lord, here I am. Here I am at Thy service and Thou hast no partners. Thine alone is All Praise and All Bounty, and Thine alone is The Sovereignty. Thou hast no partners."
앞에서 살펴본 바에 따르면 이슬람의 근원적 기원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큰 질문이 생길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 아브라함과 이스마엘의 관계만 보아도 이슬람과 기독교 사이에 얼마나 큰 간격이 자리잡고 있는지 모른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데라(창 11:26)로 나와 있으나 코란에는 아자르(Azar; 코란 6:74)로 나와 있다. 아브라함이 이스마엘을 양육했던 곳은 헤브론(창 13:14-18)인데 코란은 메카라고 주장한다. 아브라함의 고향은 갈데아 우르(창 11:31, 12:5)인데 코란은 메카라고 한다. 아브라함은 하란을 통해 가나안으로 여행(창 11:31, 12:5)했는데 코란은 그것이 아니라 메카로 여행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께서 축복의 약속을 준 자손은 이삭(창 17:18-21, 22:2)인데 코란은 사라의 여종 하갈의 아들 이스마엘이라고 한다. 이스마엘은 이집트에서 약간의 시간을 보낸 적(창 12:10)은 있으나 아라비아 반도에 위치한 메카에 카바를 건립했다는 기록은 없다. 코란이 주장하는 것처럼 아랍인은 이스마엘의 후손이라기 보다는 종족적으로 욕단 (Qahtan or Joktan)이다. 욕단의 아들들의 이름들은 아랍지역에서 자주 발견되는 이름들이다. 스바(Sheab), Hazarmaveth, Ophir, Havilah와 같은 이름들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모압과 암몬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요르단) 야곱의 형 에서는 에돔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의 요르단) 아브라함의 세번째 부인인 그두라(keturah, 창 25:1-4)의 6명의 아들들은 아랍의 조상이 되었다. (예를 들어 스바(Sheba)와 드단(Dedan)은 예맨에 거주) 이와같이 메카를 성지로 삼고 아브라함의 무덤이 카바에 있다고 주장하고, 시내광야를 지나 이집트 접경으로 간 하갈을 지금도 불가능하지만 메카까지 갔다고 하는 주장도 이해하기 어렵다. 더욱 더 어려운 것은 이미 소년으로 성장한 이스마엘이 하갈과 함께 하였는데 코란이 주장하는 것처럼 간난아기라는 사실도 수긍하기 어렵다. 이 부분에 대한 상세한 분석을 다음에 나누고자 한다.
온세계의 무슬림을 하나로 묶어 쉽게 이끌어 가는 것 같은 신앙고백과 예배, 구제와 단식 그리고 성지순례에는 그리스도 예수 앞으로 오지 못하게 하는 엄청난 함정이 도사리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눈오는 날
곱씹을 앙금 그리 많아
눌러도 삐쳐나올 회환으로
꺼지지 않는 파쇠 있어
악순환 어둑나라 몰아내려
은총의 날개로 오신이여
어릿까뭇한 역사의 흔적
뭍위에 나락으로 쌓이면
사료 (史料)한 움쿰 목멘 이들
청야삼경 밀어 내는
자비의 내림으로 오신이여
온 세상 떠도는
청자갈 도올고 돌듯
새소리, 개울 소리, 바람 소리
파장떨이 남은 소리
잠재우고 오신이여
흰 싸락 낱알들
촘촘히 여울거리고
송이 자락 뭉글대면
품에 안긴 드센 솔잎 위로
눈무지개 버선발 깨우치신 님이시여
시작 노트
저는 다른 사람의 시를 읽는 것을 좋아 합니다.
시의 구성, 독특한 시법, 시어를 풀어내며 읽어 가는 묘미, 행간에 숨긴 시인의 마음을 살포시 살펴보는 동안 그 비밀의 문을 발견하면, 숨겨둔 보물을 발견하듯 그리 즐거움을 느끼곤 합니다.
전 가끔씩 저의 시 한 두시 씩 스스로 음미하곤 합니다.
시구속에 저만 간직하고픈 암호를 살며시 집어 넣었던 동심의 소년이 남몰래 다시 찾아 해독하는 그런 마음일까요?
지구를 여러 바퀴를 돌고 돌아 몸과 마음도 지친 12월 중엽 밤새 내린 눈은 대낮에도 그칠줄 모릅니다.
몸은 집문을 열고 걸어 나갈만한 상황이 아니지만 창밖에 내리는 눈은 온 세상을 하얀 세상으로 만들어 버리는 백설천지입니다.
창문 너머로 바라만 보는 흰 눈, 제 눈에 다 담아 넣어도 선하게 다시 튕겨 나올 것 같은 그런 날입니다.
종일토록 내리는 흰눈은 온 천지를 다 덮은 것 같지만…
그 흰 눈 언젠가 사라지겠지만 그 흰 눈위에도 글을 쓰는 사람이 있음을 아십니까?
바로 시인입니다.
하이얀 눈은 시인의 마음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곳에 쓸 수 있는 글은 오직 흰 빛깔의 마음을 가진 시인뿐 이겠지요.
온 천지를 두루 다니며 글을 흩 뿌립니다.
진실…
깨끗함…
오직 밝음…
하이얀 빛깔위에만 쓸 수 있는 진리를 쓰는 오늘은 바로 “눈오는 날”입니다.
눈꽃 핀 12월에
버림에 거침없어
입힘도 위로됬나
남길일 재지않아
덮힘뒤 발길놓나
무소유 살아보니
모든것 남는것뿐
설매꽃 능선위엔
피로쓴 고난의글
작고 작은 자 김 종필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