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요 8:1-11
찬송: 512장
제목: 어떻게 살까?
목표: 사랑으로 품어주고 은혜에 감사하며 자기를 알고 용서하며 살게한다.
언젠가 아들이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친구집에 놀러갔는데 그 친구가 먹기를 좋아하고 움직이기를 싫어하는 것을 보고 이상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막상 자기가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은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하는 것을 보고 이상히 여기면서도 자기를 모르는 것이 비단 아들뿐이겠습니까? 나 자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사람은 이렇게 자기중심적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예수님이 감람산에서 기도하신 후 아침에 성전에 가시자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을 가르치시는 중에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이 간음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와서 가운데 세우고 하는 말이 율법에는 이런 여자를 돌로 치라 했는데 선생님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라고 질문합니다. 이렇게 말한 이유는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 예수님을 시험할 목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말을 듣고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무엇인가를 쓰신 후에 일어나셔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땅에 손가락으로 글을 쓰시니 양심의 가책을 받은 사람들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님과 여자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 때 여자에게 너를 고소하고 정죄하던 자가 없느냐 물으시고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셨습니다.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세 가지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관점에서
1. 품어주어야 합니다.
11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어떤 상담학자는 사랑을 이해, 인정, 긍정, 수용, 용서라고 하면서 사랑이 사람을 건강하게 만든다고 말했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면 병들게 되어 있습니다. 식물과 동물도 관심과 사랑을 가져주면 건강하고 아름답게 자랍니다. 하물며 사람은 말할 나위 없습니다. 사랑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면 정신적으로 약해지고 병들게 됩니다. 자신감을 상실하고 낮은 자존감을 가지게 됩니다.
아마도 이 여인은 어떤 연유인지는 몰라도 간음하면 죽는다는 율법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런 죄를 범하다가 잡힌 여인이었습니다. 한 남자를 너무나 사랑하여 죽음까지 각오한 여인일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많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당하여 자포자기하듯 그런 범죄에 빠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사회에 대한 강한 반항의 표시로 범죄를 저지르고 죽으려고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것도 아니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순간적인 충동에 의한 실수로 범죄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이 여인은 죽을 위험에 처한 불쌍한 여인입니다.
세상에는 불쌍한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추운 길거리에서 구걸하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합니다. 부모님을 잃고 고아가 된 어린이를 보면 불쌍합니다. 부모님이 계시지만 부모님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하고 학대받으며 살다가 버려진 아이들을 보면 불쌍합니다. 테러로 가족을 잃고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하고 안타깝습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다가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면 불쌍합니다. 이렇듯 불쌍한 사람들이 많습니다만 더 불쌍한 사람은 마귀의 종노릇하는 사람들입니다. 자기의 본심은 아닌데 마귀가 시켜서 죄를 지으며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오늘도 마귀의 종으로 죄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이 모두를 불쌍히 여기고 품어주어야 합니다. 정죄하려면 끝이 없습니다. 단점을 지적하면 끝이 없습니다. 덮어주고 품어주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품어주는 마음입니다. 아무리 잘못을 저질렀어도 품어줄 때 변화가 있습니다. 모두가 미워하는 삭개오를 품어주시고 그의 집에 함께 가셨을 때 삭개오가 변화되었습니다. 욕심많은 삭개오가 자기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겠으며 만일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단지 삭개오의 마음을 이해해주시고 그의 아픔을 품어주셨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위고가 쓴 레미제라블이란 소설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장발장의 이야기를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장 발장은 한 조각의 빵을 훔친 죄로 19년간의 감옥살이를 마치고 출옥합니다. 아무도 돌보지 않는 그에게 하룻밤의 숙식을 제공해 준 신부의 집에서 은촛대를 훔쳤다가 다시 체포되어 끌려가게 되었을 때, 밀리에르 신부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그 은촛대는 자기가 장발장에게 선물한 것이라고 증언하여 그를 구해 줍니다. 여기서 장발장은 비로소 사랑에 눈을 뜨게 되어 마들렌이라는 새 이름으로 사업을 하여 재산을 모으고 시장으로까지 출세합니다. 그러나 경감 자베르는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그의 뒤를 쫓아다니다가 때마침 어떤 사나이가 장발장으로 오인되어 체포되고 벌을 받게 되었을 때, 장발장은 스스로 나서서 그 사나이를 구해 주고 감옥에 들어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품어주는 한사람이 결국 장발장이라는 죄수를 훌륭한 시장으로 만들어 불쌍한 사람들을 돕는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어머니의 사랑이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자식의 허물을 끝까지 감싸고 덮어주며 이해합니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품이 늘 그립고 어머니의 사랑을 목말라 합니다. 아무리 흉악한 죄수라도 자기를 사랑해준 어머니의 품을 그리워하는 법입니다. 왜 입니까? 세상의 모든 사람이 죄수라고 미워하고 정죄해도 어머니만은 품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얼마전에 시골에 계신 부모님을 찾아뵙고 배운 것이 있습니다. 친척 중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분이 계신데 유독 어머니는 그 분을 받아주십니다. 심지어 집안에 결혼식이 있어도 그분에게는 알리지 않을 정도입니다. 상종하지 말라고 하며 주변에서 어머니께 말씀하시지만 늘 받아주셔서 그분은 시골집을 다녀가곤 하십니다. 이번에 어머님이 그분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런 사람은 그런 사람으로 받아주어야지 어떻게 사람이 다 똑같을 수 있느냐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것을 인정하고 품어주는 마음을 가지셨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은 싫어해도 어머니가 받아주시고 품어주시니까 어머니가 계신 집은 늘 사람들이 많이 모여 때로는 힘들기도 하시지만 외롭지 않습니다.
군대에 가면 훈련소에서 젊은 군인들을 울리는 방법이 있습니다. 힘든 훈련을 시켜놓고 땅에 누워 하늘을 쳐다보게 하고 어머니 은혜를 노래 부르게 합니다. 훈련이 힘들면 힘들수록 울음소리가 진하기 마련입니다.
낳실 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오. 어머님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이처럼 품어주는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감옥을 짓는다 할지라도 죄를 막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품어주는 사랑을 간직한 사람들이 죄인 한사람을 품어주기 시작하면 세상은 아름답게 변할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로마서 8:1,2절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한없는 허물과 죄로 인해 내가 나를 용서할 수 없을 지라도 예수님은 너그러이 품어주시고 용서하여 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심지어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의 죄를 용서하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34)라고 말입니다. 이 주님의 품어주는 사랑이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켜왔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아름답게 변화시켜 나갈 것임을 믿습니다.
여자의 관점에서
2. 은혜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 분문에는 여자가 예수님의 은혜를 알고 어떻게 구체적인 반응을 보였는지 나타나지 않습니다. 여자가 말한 내용은 한 마디 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고 물으실 때 “주여 없나이다.”라고 대답한 것이 전부입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이후에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부끄러운 죄를 짓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창피를 당했기에 그 마을을 떠나 다른 동네로 이사를 가서 살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여자가 예수님의 품어주는 사랑을 체험하고 그 은혜를 간직하고 살았다면 삶이 변했을 것입니다.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고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절영지회(絶纓之會)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갓끈을 끊고 노는 잔치를 일컫는 말로 어려움에서 구해주면 반드시 그 은혜를 잊지 않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전투에 이겨 궁중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문무백관을 초대했습니다. 신하들이 모두 큰 소리로 환성을 지르며 왁자지껄 소란했습니다. 바로 그때 등불이 꺼지더니 왕의 애첩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느 누가 그녀를 희롱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놀라면서도 그 사나이의 갓끈을 잡아 뜯고는 왕에게 간청했습니다.
"폐하, 등불을 켜게 하시고 갓끈이 없는 자를 잡아 주세요."
불만 켜면 갓끈이 끊긴 자가 바로 감히 왕의 애희(愛姬)를 희롱한 자라는 사실이 드러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도리어 불을 켜지 못하게 하고 큰소리로 모두에게 갓끈을 떼어 던지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다시 불을 켜도 그 자리에 모인 모든 장수가 갓끈을 뗀 뒤라 누가 그런 무엄한 짓을 했는지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3년 후 진(秦)나라와 전쟁이 벌어져 진군에 패한 왕이 위급에 빠져 있자 목숨을 내던져 분전하여 왕을 구하고 그의 용기 덕분에 드디어 대승을 거두게 한 장수가 있었습니다. 장웅(蔣雄)이란 장수였습니다. 장왕이 이상하게 생각하여 그를 불러 물었습니다.
"나는 평소에 그대를 특별히 우대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토록 죽기를 무릅쓰고 싸웠는가?"그러자 그 장수가 엎드려 말했습니다.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3년 전에 갓끈을 뜯겼던 것은 바로 저였습니다. 그때 폐하의 온정으로 살아날 수 있었으니 그 뒤로는 목숨을 바쳐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을 뿐입니다."
이 싸움에서 진에게 이기고 난 다음부터 초는 차츰 강대해져서 장왕은 급기야 춘추오패(春秋五覇)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힘 있는 자가 약한 자를 돕는 것, 가진 자가 없는 자에게 베푸는 것, 아는 자가 모르는 자에게 가르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쉬울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베푼 자에게는 쉽게 잊어버리는 작은 것이라 할지라도 은혜를 입은 자는 평생을 두고 오래도록 가슴에 간직할 일이 될 수 있습니다.
돌에 맞아 죽을 수밖에 없었다가 살아난 여인이라면 그 은혜를 기억하고 일생동안 감사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죄로 인해 죽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영생을 얻은 사람들이기에 일생동안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군중의 관점에서
3. 자기를 알아야 합니다.(7-9)
7-9절, “저희가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자기를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치려던 돌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미국의 리챠드 닉슨 전 대통령에게는 아주 골치 아픈 정적이 있었는데 부통령을 지낸 적이 있는 허버트 험프리 상원의원입니다. 이 두 사람은 서로 대통령이 되려고 다투었고 서로 심한 상처도 주고받았던 사이였습니다. 험프리가 죽기 삼일 전 친한 친구였던 제시 젝슨 목사에게 '내가 닉슨에게 풀어야 할 문제가 있어. 그를 꼭 불러주게' 라며 닉슨을 좀 불러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래서 잭슨이 닉슨에게 연락하여 두 사람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이 병상에서 만나 험프리가 닉슨에게 과거 자신의 잘못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나를 용서해 주게. 그래야 내가 편안히 하나님 앞에 설 것 같아' 그때 닉슨도 '자네만 그런 게 아니야. 나도 자네에게 너무나 많은 상처를 줬어. 우리 서로 용서하고 서로 용서 받기를 바라네' 이 두 사람은 병상에서 서로 서로 용서의 기도를 올리면서 통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마음에 병이 든 사람을 진단할 때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첫째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이고 둘째는 사람의 단점을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싫어지고 사람과의 관계가 거북하게 느껴지거나 다른 사람의 장점보다는 단점을 자꾸 찾게 되면 마음에 병이 든 것으로 진단하고 자기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자기를 발견하지 못하면 계속적으로 다른 사람의 단점을 발견하여 인간관계를 힘들게 만들고 결국 사람이 싫어지게 되는 자기의 병을 더욱 깊게 만들 우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알고 처신하는 것이 이처럼 중요합니다. 먼저 자기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보고 살피는 지혜와 겸손함이 있어야 합니다. “너희 중에 죄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은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5)고 한 말씀과 같습니다.
엡 4:2절,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서로 용납하는 것 쉽지 않습니다.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래 참지 못하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이 정말로 어렵습니다.
차를 운전하다보면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들어 놀라게 하고서는 전혀 미안한 기색을 하지 않는 사람, 피우던 담배를 끄지도 않고 창밖으로 집어 던지는 사람, 건널목을 건너고 있는데 신호등을 무시하고 막 달려오는 차량, 차량 밖으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 등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디까지 용납해야 합니까? 밖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함께 신앙생활 하면서 용납하기 어려운 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래 참음으로 사랑으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자기를 들여다보면 똑같을 때가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익 앞에서는 법도 무시합니다. 자기 편리함을 위해서는 남에게 불편함을 끼칠 수도 있습니다. 자기를 알면 상대방을 정죄하고 판단하여 손에 들었던 돌을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 했고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했던 형들을 용서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로 자기가 애굽으로 팔려오게 되었음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팔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할 가룟 유다와 3년이나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십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며 사랑으로 용납하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모든 인류의 죄를 사하기 위해 오셨음을 아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알 때 죄인을 향해 들었던 돌을 내려놓고 용서할 수 있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라고 질문하자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말씀하십니다.
<예화>
중종조의 명신으로 성격이 겸허했고 특별히 청백리로 유명했던 반석평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원래 남의 집 종으로 태어난 사람이지만 어려서부터 악착스럽게 자신의 인격적인 성장과 학문적인 성장을 위하여 남모르는 수고를 거듭했습니다. 주경야독으로 모든 것을 극복해 가면서 익힌 그의 실력이 범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된 주인 이 참판은 아무 조건없이 그의 종 문서를 불태워 종의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면서 아들없고 재산 없는 어느 양반집 수양아들이 되도록 주선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리하여 예전엔 감히 엄두조차 낼 수 없었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고 그는 당당하게 급제하여 출세가도를 달리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형조판서로까지 승진했습니다.
어느날 그가 한양 거리를 지나다가 옛 주인 이 참판의 아들 이오성이 거지 몰골을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즉시 그 사람에게 큰 절을 하며 "어르신 저를 몰라보시겠습니까? 저는 당신의 종 반석평이라는 놈이올시다"라고 했습니다.
백주 대낮 한양 대로에서 형조판서 대감이 거지같은 사람 앞에 넙죽 엎드려 이런 말을 하고 있으니 어찌 예사로운 일이겠습니까? 그 당시 관례에 의하면 자기의 옛 신분을 밝힌다는 것은 곧 지금까지의 피 눈물로 쌓아올린 자기의 모든 특권을 박탈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가 어찌 그만한 사리를 모를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모든 것 이전에 은혜부터 갚아야한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뒷날 이 엄청난 반대감의 인격에 감동한 고관들의 주선과 임금의 특별한 배려로 그의 사표는 반려되었고 오히려 그가 추천한 이오성이 사옹원 별좌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다는 미담이 우리 역사 속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록 종이지만 사랑으로 품어주고 앞길을 열어준 이참판과 은혜를 기억하고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사를 표시했던 반석평대감, 그리고 그의 인격에 감동한 고관들과 임금이 사표를 반려하고 잘못을 용서해주었던 아름다운 미담처럼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도 이렇게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으로 품어주며 살아야 합니다. 죄를 용서받고 죽음에서 구원받았던 여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감사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인을 정죄하러 모였던 군중들처럼 자기를 알고 들었던 돌을 내려놓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며 살아야 합니다. 힘들더라도 이렇게 살아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참된 그리스도인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