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다른 종교와도 다른 점 인정하고 대화할 수 있어야"
"朴대통령에 건의한 '새마음 운동'이 뒤에 새마을 운동 됐죠"
조용기(73)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는 천막교회에서 시작해 등록신자 78만명의 세계 최대 교회를 일군, 한국 개신교 성장시대의 상징적 인물이다. 또 지구를 115바퀴 돌며 정력적인 전도 활동을 벌였고, 세계 개신교계에 '데이비드 조'로 널리 알려졌던 그는 목회 50년을 맞은 지난해 5월 원로목사로 추대되며 목회 일선에서 물러났다. 은퇴 후로는 '사랑과 행복 나눔 재단' 이사장으로 구제·봉사 활동에 열정을 쏟고 있는 조 목사를 지난 15일 서울 여의도 CCMM빌딩 11층 집무실에서 만났다. 그동안 언론 인터뷰를 줄곧 사양해왔던 조 목사는 1시간여에 걸쳐 자신의 일생과 목회에 대해 열정적으로 이야기했다.
―은퇴 후에는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해서 내게 온 편지를 읽어보고, 답장 쓰고, 신앙 상담하고, 내 후임인 이영훈 목사의 목회를 돕고, 오후엔 집에서 운동 좀 하고 쉽니다. '사랑과 행복 나눔 재단'을 통해 필리핀·라오스·캄보디아 같은 어려운 나라를 돕는다는 자부심에 즐겁고 기쁩니다. 6·25전쟁 후 신학생 시절에 옷이 없어서 미국서 보내준 구호품 중 여자옷까지 입고 지냈던 것을 생각하면 감격스러운 일이지요."
―노환을 겪고 계시는 것으로 알려졌고, 한때 '중병설'이 돌기도 했는데요.
"건강은 좋아졌습니다. 요즘도 매주 주일 예배에서 한 번씩 설교합니다(조 목사는 인터뷰 중 손이 약간 떨렸지만 인터뷰 내내 또렷한 발음으로 말했다. 교회 관계자는 '평소에는 기운이 없다가도 설교 때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활기가 생기신다'고 전했다)."
―한때 조 목사님 은퇴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시각도 있었습니다. 목사님의 은퇴 후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지교회들이 독립하고 있고, 내년 초에는 교인 수가 43만명으로 줄게 됩니다. 이런 변화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듭니까?
"저는 시작부터 교회를 소유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과 성도들의 것이지요. 무리하고 억지 부리지 않고 하나님이 주신 시간만큼 일하고 다음 세대에 물려주고 싶었습니다. 하나님이 좋은 후계자를 주셨습니다. 이영훈 목사님은 우리 교회에서 자라고 공부를 많이 한, 나보다 훨씬 자질이 좋은 분입니다. 또 21개 지교회들도 다 열심히 잘하고 있어 행복합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장은 개신교뿐 아니라 사회적 현상처럼 보입니다. 늘 강조하시는 '성령(聖靈)의 역사(役事)' 외에 성장의 비결을 꼽는다면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희망을 이야기한 것이 아닐까요? 저는 어려서 매우 가난하게 살았고, 가난에 한이 맺혔습니다. 처음 교회를 개척한 것도 서울 은평구 대조동의 판자촌이었습니다. 전부 가난한 사람들이었어요. 그래서 천당 지옥 이야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설교하려고 애썼습니다. 부자 교회 못 가고 우리 교회 온 가난한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고 위로를 받은 것이 제게 큰 힘이 됐다고 봅니다."
- ▲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는“내 평생 시련은 있었어도 좌절하고 낙심하지 않았다”며“우리 민족은 충분히 희망이 있고, 한국은 작지만 세계의 지도국가가 될 것 이라고 믿는다”고 말했다./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교회가 엄청난 속도로 성장할 때에는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겁나지는 않으셨나요?
"저는 솔직히 한동안은 잘 못 느꼈습니다. 그건 아마 구역을 나눠 여성 구역장들에게 맡겼고 그 구역들이 성장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정신을 차리고 보니 교회가 좁아서 8부까지 예배를 드리고, 주일예배 설교도 4번씩 하게 됐어요."
―교회 개척 초기에는 병자 치유와 방언 등을 놓고 이단 논쟁도 겪었습니다.
"성경대로 신앙생활을 하면 신비한 체험을 겪게 됩니다. 초대교회에도 방언·예언·이적이 많았습니다. 교회가 세속적이 되면서 이런 것에 반발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과학이나 이성이 아니라 신앙입니다. 주님 말씀을 무조건 따르는 것이죠. 이단이라고 공격을 많이 받았지만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성경이 이단입니다. 50년 동안 마음고생 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늘 긴장 속에 살았습니다. 이젠 그런 부담을 덜고 나니 편안합니다."
―개신교는 1990년대까지 급성장하면서 물질주의, 성장주의, 배려 부족, 공격적 선교 등의 이유로 비판도 받았습니다. 바람직한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교회가 비판의 대상이 된 것은 담 안에 머물러서 자기들끼리만 잔치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이 교회를 이처럼 사랑하사'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렇게 사랑하사'라고 하지요. 교회에 모여서 예배 드리고, 나가서는 사랑의 손길을 베풀어야 합니다. 사회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또 교회가 너무 자기중심적이고 다른 종교와 대화가 없는 것도 문제입니다. 다른 점을 인정하고 대화는 할 수 있어야지요. '기독교 아니니까 마귀'라고 해선 안 됩니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한 가지 단어를 떠올린다면 어떤 것입니까?
"'기적'입니다. 저 개인으로도 그렇고 우리 사회도 그렇습니다. 폐병 걸려 죽는 것 외엔 도리가 없다고 하던 제가 이렇게 목회할 수 있었던 것이나, 6·25전쟁 직후의 비참한 원시인 같은 생활을 하던 우리가 이렇게 살게 된 것이나 말입니다. 50년 만에 1인당 국민소득 200달러에서 2만달러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 은혜이지요."
―낙심하고 절망한 적은 없습니까?
"시련은 많았지만 낙심하지는 않았습니다. 제가 낙심하면 교회가 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럴 수 없었습니다. 제가 '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성도들이 전부 나만 쳐다보고 있는데 내가 낙심하면 교인 전체가 무너지는 것입니다. 시련이 오면 나를 향해 설교했습니다. '용기를 갖고 긍정적으로 살아라'라고 말이죠."
- ▲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가장 보람 있었던 일을 꼽는다면?
"세계 선교 다닌 것입니다. 문명국부터 아프리카 밀림까지 다녔습니다. 아마 빌리 그레이엄 목사 다음으로 온 세계를 주름잡은 것 같아요. 하나님이 힘을 주셔서 가능했는데 이젠 힘없어져서 못하니 마음이 쓸쓸합니다."
―자녀 문제로 구설에 오른 적도 있습니다.
"부모 입장에선 잘난 자식도 못난 자식도 책임지고 걸머지고 가야 할 짐입니다. 맏아들이 심려를 많이 끼쳤습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편안하게 됐습니다. 옛날 할머니들이 자식 기르는 사람은 남의 자식 욕하지 못한다고 말했지요. 자식은 마음대로 안 되더군요."
―50년 동안 설교를 하셨습니다. 목사님 인생에서 설교는 무엇입니까?
"가장 큰 부담이 설교 준비였습니다. 자다가도 아이디어가 떠오르면 노트에 적어놓았습니다. 성도들이 은혜 받고 교회 오기 좋아하게 만드는 것이 좋은 설교입니다. 설교는 목사의 천직이고, 죽더라도 설교해야 한다는 각오를 가져야 합니다. 설교에 대한 부담이 얼마나 컸는지 한번은 위 내시경 검사를 했는데, 반(半)수면 상태에서도 계속 설교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대통령부터 역대 대통령을 모두 만나셨지요?
"박 대통령께는 '새마음 운동'을 건의 드렸습니다. 농촌이 잘살아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주변환경을 탓하기보다 적극적으로 창조해 나가면 운명을 바꿀 수 있다, 마음부터 달라져야 한다는 뜻에서 '새마음'을 말씀드렸는데 '너무 기독교 냄새 난다'고 해서 새마을 운동이 됐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다른 대통령 가운데는 DJ(김대중 대통령)와 노무현 대통령이 기억에 남습니다. DJ는 오로지 통일이었습니다. 저는 보수적이라 의견 상충도 많았지만 토론도 많이 하고 신문(국민일보) 창간 기념식 때 부탁드리면 참석하시곤 했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딱 한 번 만났습니다. 그때는 제가 (당시 정부·여당이 추진하던) 보안법 폐지 반대 운동을 벌이며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집회도 할 때였습니다. 어느 날 연락이 와서 청와대 가서 기다리는데 응접실로 들어오시기에 '안녕하시냐'고 인사하니 고개만 끄덕하시더군요. 제가 '용기와 힘을 갖고 국정을 이끄시라'고 30분 정도 이야기했는데, 아무 말도 하지 않더군요. 그래서 가겠다고 인사하니 또 고개만 끄덕하고 들어가셨습니다."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민들이 많습니다.
"지난해 경제위기 이후로 우리가 가장 신속하게 회복하고 발전하고 있습니다. 정치인이 조금 단결하고 노사가 참고 일하면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 이상에 신속하게 이를 것입니다. 국회를 보면 낙심하고 좌절할 때가 있습니다. 전쟁터처럼 극한적 노사분규도 없어야겠지요. 그러나 저는 낙관합니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제품, 김연아 선수, 반기문 UN 사무총장을 보세요. 우리는 때로 과격하다가도 금방 또 화끈하게 잘 화해하잖습니까."
―이제 곧 성탄절이고 연말입니다. 좋은 말씀 해주시죠.
"세상 사는 동안 고통과 괴로움이 떠나지 않지요. 그렇지만 하나님 사랑도 떠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예수 믿는 사람만의 하나님이 아닙니다. 우리가 어려운 환경에 좌절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도와주십니다. 낙심하지 말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조용기 원로목사는
1936년 경남 울주군(현 울산광역시)에서 태어났다. 10대 후반 폐결핵을 앓으면서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목회자의 길을 선택했다. 신학교 동급생이자 뒤에 장모가 된 최자실 목사의 집에서 1958년 5월 예배를 드리며 목회 활동을 시작했다. 최 목사 가족을 비롯한 5명으로 시작한 목회는 신자가 급속히 늘어남에 따라 교회를 서대문(1962년)을 거쳐 여의도(1973년)로 옮겼다.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서울과 수도권의 21개 지교회를 비롯해 미국·일본·유럽·러시아·중남미 등에 조 목사의 제자들이 목회하는 '제자 교회'들이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신자 수는 1979년 10만명, 1984년 40만명을 넘기며 급성장해 78만명에 이르렀다. 조 목사는 또 1964년 첫 해외선교에 나선 이래 미국·일본·브라질 등 70여개국에서 370여 차례의 대형집회를 인도했다.
-2009/12/21,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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