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막 15:1-47
찬송: 144장, 367장, 364장, 519장, 135장
제목: 십자가와 무덤
목표: 십자가와 무덤의 바른 의미를 알고 승리의 삶의 살게한다.
고난주간은 부활절 전 한 주간으로, 이 기간 동안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하고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묵상하며 지내는 기간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특히 성금요일이라고 하여 주님이 십자가를 지신 날을 기념하며 주님의 고난을 깊이 묵상하고 은혜를 되새기는 날입니다. 약 2000천년 전 금요일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에서 물과 피를 다 흘리시고 숨을 거두신 후에 무덤에 묻히신 날입니다.
오늘 저녁에는 예수님께서 고난주간 일주일동안 어떻게 보내셨는지 살펴보면서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와 죽으신 후 묻혀있던 무덤을 생각하며 십자가와 무덤의 의미를 되새겨보고자 합니다.
먼저 고난주간 예수님의 행적을 요일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1일(주일) 예루살렘 입성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 모든 것을 둘러보시고 때가 이미 저물매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베다니에 나가시다” (막 11:11)
예수님께서 만왕의 왕으로 자신을 죽이려는 사람들의 성으로 공공연히 나귀를 타시고 입성하셨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이를 지켜보았습니다. 앞장서시는 예수, 영광 받으실 예수님으로 종려나무를 가지고 환영하는 수많은 인파들의 환영을 받았지만 처참하게 무너지게 될 예루살렘 성전을 바라보시며 통곡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성전에 들어가셔서 모든 것을 둘러보셨습니다. 그리고 웅장하고 아름답게 장식된 성전 속에서 인간의 위선, 탐욕, 가증스러움, 이기주의 등의 죄악이 가득 차 있음을 보셨습니다. 다음 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더럽혀진 성전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 채찍을 드셔야 했습니다.
제2일(월요일) 성전을 청결케 하심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엎으시며”(막 11:15)
당시 성전 안에서는 명절 때 희생의 제물로 쓸 짐승과 향유, 그밖에 필요한 물품을 매매하였고, 성전 안에서만 쓰는 유대 화폐를 교환하여 주곤 하였습니다. 이러한 상인들, 돈 바꾸는 자들과 결탁한 제사장들은 막대한 부당 이익을 취하였습니다. 그래서 성전은 완전히 시장판과 같이 되어 버렸던 것입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그들을 내어좇으시며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막11:17)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참 제사장의 자격으로 더러워진 성전에 대해 격분하시고 이를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전뿐 아니라 온 세계와 인류를 성결케 하시려는 하나의 표징이었습니다.
오늘 한국교회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우리 광성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그리고 우리의 몸이 성전이라고 하셨는데 저와 여러분 개인의 성전은 어떻습니까? 예수님이 채찍을 드시지 않도록 늘 자기를 점검하고 성결을 유지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3일 (화요일) 과부의 두 렙돈 교훈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희는 다 그 풍족한 중에서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 모든 소유 곧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셨더라.”(막 12:43-44)
예수님께서 연보궤를 대하여 앉으셔서 그들의 헌금 넣는 것을 지켜보셨습니다. 한 과부가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넣자 예수님께서 “이 가난한 과부는 연보 궤에 넣는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헌금의 액수를 보시지 않고 과부의 중심을 보시고 기뻐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양보다는 질을 중요시하십니다. 외형적인 액수보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고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단순히 적은 액수의 물질을 기뻐하신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정성이 담겼느냐의 문제입니다.
폐지를 수집하여 어렵게 모은 돈으로, 파출부와 식당에서 허드렛일을 하면서 힘들게 모은 돈으로 십일조, 감사헌금, 주일헌금을 정성껏 드리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눈물 젖은 물질입니다. 과부가 드린 예물처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물인줄 믿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은 어떤 마음과 정성으로 하나님께 예물을 드리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4일(수요일) 한 여인의 헌신
“저가 힘을 다하여 내 몸에 향유를 부어 내 장사를 미리 준비하였느니라.”(막 14:8)
예수님께서 한센병이 걸린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한 여인이 비싼 향유가 든 옥합을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와 그 옥합을 깨뜨리고 향유를 예수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이 향유는 300데나리온 오늘날의 화폐단위로 환산하며 약 3,000만원에 해당하는 금액으로 무척 비싼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여인에게서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사랑의 충동을 볼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불평과 비난 속에서도 예수님를 향한 그녀의 사랑은 그칠 줄 몰랐습니다. 이 일을 주님께서 칭찬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십니까? 주변 사람들의 시선과 여러 가지 환경을 의식하며 주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마음을 주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제5일(목요일) 최후의 만찬
“저희가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니 다 이를 마시매 가라사대 이것은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막 14:22-24)
예수님께서는 그가 배반당하시던 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유월절을 지키셨습니다. 이 때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만찬을 드셨습니다. 이는 십자가 위에서 자기 몸을 희생해 제자들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되실 것을 말씀으로만 아니라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행동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찢기실 자신의 몸과 흘리신 피로 속죄를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마지막 만찬 때 예수님은 영원한 대제사장으로서 흠이 없는 자신의 살과 피를 대속의 제물로 하나님께 드리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떡과 잔을 나누셨던 것처럼 우리는 가진 것을 얼마나 나누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제6일(금요일)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시다
“예수께서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시다.”(막 15:37)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셔서 십자가 위에서 하신 말씀을 묵상함으로 하나님의 섭리와 위대하신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가상칠언이라고 합니다.
1.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
하나님의 용서하시는 사랑은 끝이 없습니다. 자기를 모욕하고 죽이는 무리들의 죄를 용서해달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골 3:13절은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도를 가르치시면서 예수님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라고 말씀 하셨으며 일흔 번씩 일곱 번 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마 18:21-22)
이 저녁에 용서의 능력을 달라고 기도하시고 주님의 사랑으로 서로 용서하며 사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
회개하는 죄인에게 하나님은 새로운 희망을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달렸던 한 강도가 회개하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라고 하자 주님은 그에게 천국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지막 십자가위에서 까지 한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주셨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소망과 희망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웃들에게 얼마나 희망과 소망을 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까? 오히려 절망과 좌절감을 안겨주고 있지는 않습니까? 가족과 이웃들에게 주님처럼 끝까지 복음으로 용기와 소망을 주면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3.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27)
인간 사이에 있어야 할 돌봄과 사랑을 보여 주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 등 네 여인이 울고 있었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울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요한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고 하면서 부탁하셨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격은 여인입니다. 예수님을 성령으로 잉태하게 되어 남편에게 송구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제 예수님을 먼저 보내는 어머니의 마음은 한없는 슬픔으로 잠겨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 우리에게 효도를 가르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부모님께 효도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교회와 이웃의 어르신들을 공경하고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4.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 27:46)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시고 버림받으신 예수님의 거룩한 절규를 보게 됩니다.
이것은 말할 수 없는 고뇌에서 비롯된 절규였습니다. 죄 없는 자가 정죄를 당하고 허물없는 자가 박해를 받으며 은혜 베푸는 자가 잔인하게 죽어가는 일이 역사상 처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홀로 지시고 하나님께 버림을 당하시는 순간 주님으로서는 매우 고통스러운 세 시간이었습니다. 이런 절규를 통해서 우리는 주님도 우리와 같은 육신의 몸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들 대신에 버림을 당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버림당하심으로 우리는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주님보다 억울한 일을 당하신분 계십니까?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없어 속으로 울분을 참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주님처럼 하나님께 하소연하시기 바랍니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 들어줄 수 없는 고통과 억울함의 절규를 하나님은 오늘도 듣고 계심을 믿고 하나님께 부르짖어 위로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5. "내가 목마르다!"(요 19:28)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인성(人性)을 입증하고 신성(神性)을 나타내는 요한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상에서 "내가 목마르다" 하심은 곧 목마른 인생을 부르시는 뜻도 있습니다. 인생은 어디서 무슨 물을 마셔도 그 심한 갈증을 해소할 길이 없으나 주님이 주시는 물은 영원한 갈증을 해소합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 55:1).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과 관심에 목말라 있습니까?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며 목말라 있습니까? 경제적인 문제나 자녀들의 문제로 목말라 있습니까? 이 세상의 모든 목마름의 문제를 해결하시려 친히 목말라하신 주님께로 더 가까이 나아가서 해갈함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6. "다 이루었다!"(요 19:30)
거룩한 희생으로 모든 죄를 속하셨다는 하나님 어린 양의 승리의 외침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가죽 채찍으로 서른아홉 대의 매를 맞으셨습니다. 가죽 채찍 끝에는 낚시와 같은 쇠고리가 달려 있어서 가죽 채찍이 살에 닿을 때마다 살갗이 찢어지고 피가 터져 엉켜 붙었습니다. 가시관을 쓰신 머리와 대못에 박힌 양손과 양발에서도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무지한 군병의 창에 옆구리를 찔리셔서 물과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의 옷은 군병들이 제비 뽑아서 나누어 가졌고, 벗기운 채로 주님은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 계셨습니다.
이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이 분이 바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시기 위해서 죄도 없으시면서 가장 죄 많은 자처럼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입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을 이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이 세상에 와서 자기의 일을 다 이루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는 가족의 꿈이나 국가나 교회, 어떤 공동체의 계획을 완전히 다 이룰 수 없는 불완전한 인간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세상에 오신 목적을 모두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다 이루지 못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은 완전히 다 이루신 주님을 의지하며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7.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예수님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란 말씀을 즐겨 사용하셨습니다. 산상설교 가운데서 17번, 유월절 다락방에서 45번(요 14, 16장), 요한복음 17장에서 6번이나 나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세상에서 마지막 말씀을 아버지로 끝맺으셨습니다. 아버지란 명칭은 용기를 북돋아 주고 자신을 갖게 하는 이름입니다. 요즘은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떨어져 힘없는 아버지, 초라한 아버지의 상이 생겨나고 있지만 예수님은 육체로부터 분리되려는 찰나에 있는 그의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존귀한 이름입니다. 능력있는 이름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아버지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얼마나 큰 특권인지 모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은 감히 부를 수조차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고 그 때마다 우리를 사랑해주시고 도와주시는 든든한 아버지이심을 믿고 하나님 아버지를 많이 부르며 사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7일(토요일) 무덤 속의 예수님
“요셉이 세마포를 사고 예수를 내려다가 이것으로 싸서 바위 속에 판 무덤에 넣어 두고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으매”·(막 15:46)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빌라도에게 가서 청하여 자기를 위하여 새로 만들어 둔 무덤에 예수님을 장사지냈습니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제자였지만 이제는 관헌의 박해와 친지들의 차가운 눈총을 무릅쓰고 용기있게 행동했습니다. 그는 당당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자신이 무덤에 들어가심으로 죽음을 이기고 악의 권세를 물리치시게 되셨습니다. 그는 무덤의 어두움을 제거하셨으며 그 공포를 영원히 쫓아 버리셨습니다. 죽음이 예수님을 잠시 상하게 했지만 부활하심으로 이제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든 사람에게 죽음이 그 위력을 끼치지 못하게 만드셨습니다. 금요일에 무덤에 묻히신 예수님은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십자가와 무덤의 의미가 어떻게 변했습니까?
1. 죄의 상징이 은혜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십자가는 흉악한 죄인들이 달리는 사형틀이었습니다. 반역죄를 지었거나 많은 사람들을 죽인 강도와 같은 사람들이 처참하게 죽어가도록 만든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그리고 무덤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최종적으로 가야하는 장소입니다. 죄의 삯으로 주어지는 이 세상의 마지막 장소입니다.
그런데 죄의 상징인 십자가와 죽음의 상징인 무덤이 주님으로 인하여 은혜의 상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십자가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영영 지옥의 형벌속에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죽음의 형틀이 변하여 은혜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의 삯으로 주어진 무덤으로 인해 우리가 죽음의 그림자를 늘 드리우고 살아야 하지만 주님은 그 무덤을 깨치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생명의 은혜를 주셨습니다.
2. 패배의 상징이 승리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십자가는 패배와 실패의 상징입니다. 국가에 반역을 일으키다가 실패하였든지 아니면 개인적인 욕심을 채우려 강도짓을 하다가 잡혔든지 성공하지 못하여 패배자가 된 사람들이 달리는 형틀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온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이 실패하여 패배자로 십자가에 달리신 것 같았지만 주님의 십자가는 승리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능력으로 우리는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무덤도 마찬가지입니다. 패배자들이 가는 곳이 무덤입니다.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렸더라도 인간의 한계는 극복하지 못하는 패배자들이 가는 곳이 무덤입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며 무덤으로 가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여 무덤에 묻히고 말았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무덤이 있기 마련입니다. 요즘에는 무덤을 만들지 않고 화장하여 흙에 뿌리거나 수목장을 하여 무덤이 없는 경우도 많지만 그래도 그곳이 무덤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무덤은 3일만에 열려 빈 무덤이 되었습니다.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신 승리의 주님이 되셨기 때문입니다.
3. 고통의 상징이 기쁨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십자가는 고통을 연상시킵니다. 양손과 양발에 대못을 박고 머리에 가시면류관을 쓰고 쨍쨍 내리쬐는 태양아래 매달려 사람들의 조롱과 손가락질을 받으며 처참하게 죽어가는 고통의 상징입니다. 또한 무덤은 죽음으로 인해 당하는 고통을 연상시킵니다. 죽음은 사람들에게 눈물과 고통을 안겨줍니다. 그래서 계 21:4절에서 천국의 생활을 기록할 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와 무덤은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기쁨의 상징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요즘에 여성들이 목걸이나 귀걸이에 십자가 형상의 장신구를 하고 다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끔찍한 사형틀이 갖는 고통의 상징이 아니라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평안과 기쁨의 상징으로 변화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무덤 또한 부활로 인해 기쁨과 환희의 상징으로 변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주간 일주일동안의 주님의 행적을 살펴보면서 자신을 점검하고 가상칠언을 통해 주님의 마음을 확인하고 주님의 십자가와 무덤의 의미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변화시키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