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엡 4:1-10
찬송: 218장, 487장, 399장, 464장 / 484장
제목: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
목표: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게한다.
요즘에 취업하기가 힘듭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하면 집안의 경사라고 할 정도입니다. 청년 실업률이 높아가고 있다고 합니다. 이런 때 자기를 불러서 일해 달라고 하는 직장이 있다면 얼마나 감사하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들도 죄로 인해 버려진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아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면 부름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은
1. 겸손과 온유한 생활입니다.(2상)
2절 상반절,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겸손하고 온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겸손이라 함은 예수님이 친히 모범을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이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며 보여주신 겸손의 모습과 높은 보좌를 버리시고 낮고 천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모습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위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했습니다. 예수님을 위해 자기가 낮아지고 쇠해야 한다며 겸손히 예수님을 높이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시적으로 얼마간은 겸손할 수 있지만 문제는 ‘모든’ 겸손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항상 겸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변함없이 겸손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자기보다 나이가 많고 지위나 생활형편이 높은 사람에게 겸손하기는 쉽습니다.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게 똑같이 겸손한 자세로 살아가기는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겸손한 사람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잠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응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겸손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살면 재물과 영광과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또한 온유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온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온유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교만한 사람은 온유할 수 없습니다. 민 12:3절에서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말씀합니다.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보면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은 살아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자기를 주장하고 교만하며 거칠어야만 험한 세파를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은 겸손하고 온유한 생활을 해야합니다.
2. 사랑으로 용납하는 생활입니다.(2하)
2절 하반절,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서로 용납하는 것 역시 쉽지 않습니다. 용납하는 것은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잘못을 수용하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오래 참아야 합니다. 오래 참지 못하면 용납할 수 없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상식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용납하는 것이 정말로 어렵습니다.
차를 운전하다보면 깜빡이를 켜지 않고 갑자기 끼어들어 놀라게 하고서는 전혀 미안한 기색을 하지 않는 사람, 피우던 담배를 끄지도 않고 창밖으로 집어 던지는 사람, 건널목을 건너고 있는데 신호등을 무시하고 막 달리는 사람, 차량 밖으로 쓰레기를 함부로 버리는 사람 등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디까지 용납해야 합니까?
밖에서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도 함께 신앙생활 하면서 용납하기 어려운 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오래 참음으로 사랑으로 용납하라는 것입니다.
요셉은 자기를 죽이려 했고 미디안 장사꾼에게 팔려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게 했던 형들을 용서해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팔아 십자가에 못 박히게 할 가룟 유다와 3년이나 함께 생활하셨습니다. 그의 얼굴을 볼 때마다 십자가 생각이 나지 않았겠습니까? 예수님은 끝까지 참고 인내하시며 사랑으로 용납하셨습니다.
용서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예수님은 우리에게 얼마나 용서하라고 말씀하십니까?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와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라고 질문하자 “일곱번뿐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번이라도 할지니라.”(마 18:22) 말씀하십니다.
오래 참음으로 사랑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하나됨을 지향하는 생활입니다.(3)
3절,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평안의 매는 줄’이란 ‘평화를 이룩하는 줄’로서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도들의 평안과 일치는 성령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성령은 사랑으로 하나되게 하는 영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된 것입니다.(고전 12:13)
성령은 우리를 하나되게 하십니다. 사도행전 2장에는 오순절에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예루살렘교회의 모습이 나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기록되어 있습니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썼다는 것입니다. 성령은 이처럼 마음을 같이하게 만들고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게 하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마귀는 분열의 영입니다. 분열하게 만드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교회를 분열케 하고, 성도들의 마음을 분열케 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이간시키는 것은 마귀가 하는 일입니다. 마귀는 하나됨과 일치를 원하지 않기 때문에 자꾸만 분리시키려고 합니다. 서로 싸우게 만들어 일치를 깨트리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성령님이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노력하지 않으면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는 마귀의 미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십니까? 그렇다면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해야 합니다. 겸손하고 온유하게 살아야 합니다.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며 살아야 합니다. 이런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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