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화

음악에 빠져 3시간 자본적 없어요- 천재 작곡가 지박(박지웅)

하마사 2008. 5. 24. 09:57
  • [Why] "음악에 빠져 3시간 이상 자본적 없어요"
  • 힙합에서 오라토리오까지 '천재 작곡가' 지박
        "도장 파듯이 뚝딱 작곡… 생활의 달인 닮았죠"
        영화음악상 '제리 골드스미스상' 동양인 최초, 세계 최연소로 받아
        "내가 만든 곡 딱 30초 듣더니 대통령 취임식 음악 맡기더군요"
        어릴때부터 쌓아온게 안에 축적…오래 고민 안해도 바로바로 나와
  • 허윤희 기자 ostinato@chosun.com
        입력 : 2008.05.23 14:22 / 수정 : 2008.05.24 06:53
    •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카페에 들어서자 알록달록한 셔츠에 머리를 닭 볏처럼 꼿꼿이 세운 남자가 활짝 웃었다. 본명 박지웅(31). 스스로를 '지박'으로 부르는 음악가다. 최근 김기덕 감독의 새 영화 '비몽(悲夢)'의 음악 작업을 끝낸 지박은 뮤지컬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 작곡에 몰두하고 있다.

      이제 갓 서른을 넘긴 이 청년 음악가의 이력은 상상을 초월한다. 23세에 할리우드 영화음악 유망주에게 주는 제리 골드스미스 상을 세계 최연소로 받았다. 동양인 최초이기도 하다. 2001년, 2002년에는 미국음악가협회(ASCAP)가 주최하는 영화음악 작곡대회에서 2년 연속 수상했다.

      김기덕 감독은 지박의 음악을 듣자마자 "천재"라고 극찬했다. 올 2월 열린 이명박(李明博) 대통령 취임식 준비위원장을 맡았던 박범훈 중앙대 총장은 지박이 내민 CD를 딱 30초만 듣고 그를 취임식 행사의 음악감독으로 낙점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바닷물을 다 마셔봐야 짠 줄 아나? 손가락으로 찍어만 봐도 그 맛을 알 수 있지."

      ―그때 기분이 어땠나요?

      "정말 좋았죠. 프로는 역시 프로를 알아보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 영화음악가 지박의 작업실에 가득 찬 영화 관련 피겨들. 그는 "뭔가 영화적인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 피겨를 수집한다"고 했다. /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 ―스스로 천재라고 생각하세요?

      "저는 그냥 작곡하는 게 즐거워요. 내가 좋아서 하는 건데 남들이 '천재'라고 하니까…. 스타크래프트를 좋아하는 꼬마가 밤새워 게임을 하는 것처럼 좋아서 잠 안 자고 하다 보니 그렇게 된 거죠."

      ―어쨌든 천재라는 거네요?

      "저는 노력으로 이렇게 된 거예요."

      의외의 답변에 소리 내 웃었더니 그도 멋쩍은 듯 따라 웃었다. 그러더니 다시 큰 소리를 쳤다.

      "저만큼 노력한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고 하세요. 학교 다닐 때부터 세 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어요. 보통 엔니오 모리코네 같은 영화음악의 대가들은 나이 들어 성공했잖아요? 저는 그 나이 될 때까지 못 기다릴 것 같아서 먹고 자는 시간만 빼면 계속 음악 듣고 분석했어요."

      이명박 대통령 취임식 당시 그는 국악과 양악, 힙합, 팝페라 같은 장르의 음악을 다채롭게 활용했다. 테너 정의근이 부른 '오늘 그리고 내일'은 그가 쓰고 있는 오라토리오를 인용했고, 국악과 양악이 어우러진 느낌의 곡들도 새로 썼다.

      "새 정부가 시작되는 의미 있는 자리였잖아요. 나라의 큰 행사를 맡아서 하니까 꼭 월드컵에 선발된 축구선수가 된 것 같았죠. 전쟁터에 나온 것 같기도 하고. 신나서 일했어요. 각 분야의 대가들과 함께 일하는데 제가 감독이랍시고 제일 어린데도 제 의견을 먼저 물어보고 다 반영해줬어요."

    • 지박이 자신의 작업실에서 신시사이저를 연주하고 있다. 사진 앞쪽으로 영화감독 알프레드 히치콕의 피겨가 놓여있다. / 조인원 기자 join1@chosun.com
    • ―영화음악을 만드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던가요?

      "영화음악은 내가 어느 만큼 표현해야 하는지, 신나거나 슬픈 느낌을 표현하는데 내가 너무 오버한 건 아닌지 영상을 보면서 조절이 가능해요. 취임식 같은 대형 행사 음악은 처음 맡아봤는데, 상상의 여지가 더 많고 자유로웠어요. 제가 받은 주문이 '고급스럽고 아카데믹하면서 너무 한국적이지도 않고 글로벌하게'였어요. 그 안에서 마음껏 펼칠 수 있었죠."

      지박의 부모는 모두 성악가. 덕분에 그는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음악을 들었다. 7세 때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9세 때 미국으로 건너가 줄리어드 음대에서 클래식 작곡을 공부했다.

      클래식을 전공하던 그가 영화음악으로 방향을 바꾼 것은 존 코리글리아노 교수의 조언(助言) 때문이다. 코리글리아노는 영화 '레드 바이올린'으로 아카데미 음악상을 받은 작곡가다. 이후 그는 보스턴 버클리 음대와 UCLA에서 영화음악 작곡을 공부했다.

      그의 천재성이 빛을 발한 것은 이때부터다. UCLA 재학 중 할리우드 영화음악상의 양대산맥을 휩쓴 것. 그가 제리 골드스미스 상을 받았을 당시, 생존해 있었던 스미스는 "젊은 나이에 상상할 수 없는 뛰어난 테크닉과 완벽한 표현력을 지닌 천재 작곡가"라고 평가했다.

      미국음악가협회가 주최하는 작곡대회는 수천 명이 경쟁하는 예선을 거쳐 5분짜리 영상을 보고 즉석에서 곡을 만드는 식으로 치러졌는데, 그가 만든 10곡 중 'TOP10'에 6곡이나 뽑혔다고 한다.

      ―언제부터 영화음악을 하고 싶었죠?

      "5~6세 때부터 '주말의 명화'를 보면서 음악을 듣고 울었어요. '사랑과 슬픔의 볼레로' '남과 여' '러브스토리'…. 음악이 마음을 적신다고 해야 되나? 음악이 나오는 그 순간만큼은 감정이 풍부해지고 확 몰입이 되는 거예요. 그때는 OST라는 게 따로 있는 건지도 몰라서 빈 테이프에 영화를 녹화해놓고 음악 듣고 싶을 때마다 틀었어요."

      ―그런데 왜 클래식을 전공했어요?

      "기초를 탄탄히 다지기 위해서죠. 집을 지을 때 바닥부터 튼튼하게 지어야 폭풍이 불어도 안 무너지는 것처럼요."

      ―그럼 이제 안 무너질 만큼 기초를 다진 건가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만큼 음악을 많이 듣고 공부했습니다. 15세 때 제가 살던 동네에 세계에서 제일 큰 예술도서관인 링컨센터 도서관이 있었어요. 들어가는 것도 공짜, 음악 듣는 것도 공짜였죠. 와, 이 많은 악보, CD가 다 공짜라니! 이게 웬 떡이야 했죠. 그 많은 음반을 매일 4~5시간씩 투자해서 3년 동안 다 들었어요. 제가 원래 백화점 시식 코너도 좋아하고, 본전 정신이 투철해요."

      귀로 들었던 음악을 악보로 보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다. 그는 "모든 곡을 독학으로 마스터했다"고 했다. 예를 들어 작곡가 한 사람을 정해 그 사람의 초기 곡부터 말기까지 샅샅이 훑으며 변화 과정을 살피고, 악보를 분석해 메모하는 식이다.

      "제가 대학을 세 군데나 다녔지만 저보다 클래식 많이 들은 교수님은 없더라고요.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이런 방법으로 터득한 것이 훨씬 더 저를 성장시켰어요. 제가 클래식 공부를 충실히 해왔기 때문에 기본이 튼튼해서 지금 하는 작업이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클래식 하는 사람들은 영화음악을 '딴따라'라고 하기도 하는데, 존 코리글리아노 교수님이 만든 곡들은 정통 클래식처럼 수준이 높아요. 저도 그런 음악을 만들고 싶었어요."

      ―김기덕 감독 작품은 어떻게 참여하게 됐죠?

      "제리 골드스미스상을 받았을 때 났던 기사를 보고 김 감독 측에서 연락이 왔어요. 제 음악 듣고 감독이 좋다고 해 2003년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을 처음 맡게 됐고, 다음 해 '사마리아', 이번에 '비몽'까지 하게 된 거죠."

      ―같이 일해본 김 감독은 어떻던가요?

      "괴팍할 거라는 선입견이 있던데 전혀 그렇지 않아요. 굉장히 겸손하더군요. 권위적이지 않고, 꼭 옆집 아저씨 같아요."

    • 2001년 미국음악가협회가 주최하는 대회에서 영화음악가 엔니오 모리코네와 함께 찍은 사진.
    • 지박을 만나기에 앞서 그가 작곡한 영화 '봄여름…'과 '사마리아'의 OST를 반복해 듣고, 영화를 다시 봤다. '사마리아'의 음악은 간결하다. 악기를 많이 써서 두꺼운 울림을 만들려는 게 최근 영화음악의 추세라면, 그의 음악은 반대로 '덜어내서 더 또렷해진' 선율이 꼭 필요한 영상에 녹아있었다. 그는 "어린 소녀의 청순한 느낌, 원조교제를 해도 그게 왜 나쁜지 모르는 느낌을 표현하려 최대한 간결하게 했다"고 말했다.

      '봄여름…'은 그보다는 더 풍부하고, 악기 편성을 폭넓게 썼다. "작품의 '철학적'인 면을 소리로 표현하기 위해 국악, 특히 불교음악을 공부했고, 퓨전 느낌이 나게 코드 사용이나 편곡은 기존의 영화음악처럼 하면서 주요 선율을 국악기로 썼다"고 했다.

      놀라운 건 작곡 속도다. 거의 '일필휘지(一筆揮之)' 수준이다. '봄여름…'은 2주 만에 40곡을 썼고, 사마리아는 사흘 만에 28곡을 만들었다. 이번 '비몽'은 열흘 동안 70곡을 썼다. 그는 스스로 "도장 파는 아저씨처럼 뚝딱 만든다"고 했다.

      ―그렇게 속성으로 작곡할 수 있는 비결은 뭔가요?

      "경험이 많아서 그렇죠. 어릴 때부터 쌓아온 게 제 안에 축적돼 있으니까요. '생활의 달인' 이런 프로그램을 보면 몇십 년째 요리해온 분들은 숙달돼 설탕 몇 그램인지 저울에 재지 않아도 본능적으로 알고 넣잖아요. '자장면의 달인'이 면발을 뽑아내는 것처럼 이젠 고민을 안 해도 바로 나와요."

      ―너무 쉽게 곡을 쓰는 거 아닌가요?

      "제가 이렇게 말하니까 폼도 안 나고 싱겁죠? 어렸을 때는 악상이 빨리 안 떠올라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안 써져서 괴롭다'는 말을 하는 후배한테 저는 그래요. '네가 노력하고 난 다음에 좌절하든지 해라. 클래식 레퍼토리 많이 들어봤냐. 고전부터 윤이상 같은 현대음악까지 다 공부해본 적 있느냐'고요."

      ―그렇게 써대면 소재가 금세 고갈되지 않나요?

      "한 장르만 쓰면 쉽게 비워질지 모르겠는데 여러 장르의 음악을 한꺼번에 하니까요. OST 작업할 때는 신중한 음악 만들다가 그 다음엔 힙합 실컷 쓰고, 또 오라토리오 작업하고… 이러다 보면 지치지 않고 계속 재미있어요."

      ―나도 모르게 '자기 복제'할 우려도 있을 텐데.

      "모방을 안 하기 위해 많이 들었어요. 내가 많은 걸 연구하지 않으면 쓰면서도 이게 어디 나왔던 선율인지 자신도 모르죠.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기 전에 남이 만든 걸 많이 먹어보지 않으면 이게 누가 먼저 만들었던 건지 아닌지 몰라요. 많이 먹고 맛을 구별할 수 있으면 모방 안 하죠. 음악도 마찬가지예요."

      그는 2004년 뉴에이지 음반 'So Sad'를 발표했다. 뉴에이지는 듣기 쉽고 무조건 편안한 음악이라는 선입견을 깨려고 음반을 냈다고 했다. "한국에서 '뉴에이지=쉬운 음악'이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잘못된 거예요. 그건 전에 그 장르를 해왔던 뮤지션들이 안일하게 작업해온 책임도 있어요. 원래 뉴에이지는 피아노 솔로로 연주하는 음악이에요. 그런 면에선 쇼팽의 '녹턴'도 일종의 뉴에이지죠. 쇼팽이야말로 뉴에이지의 선구자라구요."

      ―음악을 안 들으면 불안해지죠?

      "음악은 마약이에요. 비 오는 날 날씨를 푹 즐기려면 피아노 음악이 있어야 돼요. 보세요, 지금 음악 없으니까 허전하지 않아요? (그가 벌떡 일어나더니 '비몽' OST 중 한 곡을 틀었다) 음악 없이 가만 있으면 아무 생각도 안 떠올라요. 꼭 마약 떨어진 환자처럼 불안해지고, 소금 안 뿌린 고기처럼 맛이 없어요."

      ―좋은 음악이란 뭘까요?

      "지나가다 흘려 들었어도 꼭 다시 가서 사고 싶게 만드는 음악이죠. 요즘 나오는 음악들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해요. 집에 멍하니 앉아있다가도 '록키' 주제음악 들으면 '아, 다이어트 해야지' 하고 막 움직이게 되잖아요. 그런 음악이 없어요. 요새 음반이 왜 안 팔리겠어요? 저 같아도 돈 주고 안 사요. 감정이 풍부한 음악에 굶주린 사람들이 많아요."

      그에게 "작업실을 보여달라"고 했다. 예술의 전당에서 5분 거리에 있는 아파트가 그의 집. 그는 방 하나를 작업실로 개조해 쓰고 있다. 문을 열었더니 1 대 1 사이즈의 영화 관련 피겨가 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다. 터미네이터에 나온 아널드 슈워제네거 얼굴, 그렘린, 처키, 골룸… 1 대 1 사이즈만 150여 개. 하나에 몇백만원씩 하는 이것들을 수집하는 게 취미라고 했다.

      "영화음악을 하는 사람으로서, 사람들이 내가 작업하는 스튜디오에 오면 뭔가 영화적인 느낌을 살리고 싶어서요. 때문에 작업실이 점점 좁아지고 있어요. 하하." 180㎝의 키에 건장한 체격을 지닌 이 청년이 해맑게 웃었다. "작곡하는 시간을 빼면 하루 3~4시간씩 웨이트 트레이닝하는 게 유일한 낙"이라고 했다.

      ―좋아하는 영화음악가를 꼽자면?

      "프란시스 레이를 제일 좋아해요. '러브스토리' '남과 여' '하얀 연인들'…. 제가 어릴 때 '주말의 명화' 보며 좋아했던 음악이 다 이 사람 작품이었더라고요. 들으면 꿈꾸는 것 같고. 저한텐 첫사랑 같아요. 닮고 싶은 사람은 류이치 사카모토. 영화음악만 하는 게 아니라 테크노 앨범도 내고 연주도 직접 하고 다양한 활동을 하잖아요. 저도 그런 음악가가 되고 싶어요."

      ―욕심도 많고, 계획도 많죠?

      "그럼요. 뮤지컬 '비보이를 사랑한 발레리나'는 이번에 뉴욕 브로드웨이에 진출하면서 2시간 분량의 곡들을 완전히 새로 쓰고 있어요. 9월 초연 예정이라 막바지 작업 중입니다. 지금은 오라토리오 작곡에 몰두하고 있어요. 헨델의 '메시아' 이후 들을 만한 종교음악이 없잖아요."

      ―구체적으로 어떤 곡인가요?

      "누구나 쉽게 들을 수 있는 종교음악을 만들어야겠다고 16세 때부터 계획했어요. 2년 동안 집중해서 썼지요. 기본 작업은 다 끝냈고, 이제 악보로 정리하고 오케스트라 섭외해서 녹음하면 돼요. 내년 연말이면 무대에 오를 수 있지 않을까요. 30곡 정도 담을 수 있는 대작을 만들 겁니다. 장르는 클래식, 팝페라, 영화음악을 총망라한 게 되지 않을까."

      그는 "영화음악은 나이 들 때까지 계속 할 거고, 직접 랩을 해서 힙합 앨범도 내고 싶고, 팝 음반도 내고 싶다"고 했다. "지금까지 쓴 4000여 곡 중 아직 1%도 세상에 내놓지 못했고, 더 써야 할 것도 무궁무진"하단다. 


      → 지박은 누구

      지박(본명 박지웅)은 1977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이초등학교에 입학한 후, 9세 때 가족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성악가였던 아버지는 사업을 하고 있으며 어머니 김미화씨는 미국 뉴욕신학대 성악과 교수를 거쳐 현재 숙명여대와 서울시립대에 출강하고 있다. 부모가 모두 성악가인 음악적 환경 덕분에 자연스럽게 음악 속에서 성장했다. 뉴욕 라과디아 예술고등학교 재학 중 뉴욕 'BMG' 작곡대회에 나가 현대음악곡 '불안'으로 수상했고, 줄리어드 음대에서 클래식 작곡을, 버클리 음대와 UCLA에서 영화음악 작곡을 공부했다. 영화음악가 류이치 사카모토처럼 여러 방면에서 능력을 발휘하는 음악가가 되는 게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