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하나님의 요구조건

하마사 2007. 9. 13. 06:07
 

본문: 미 6:6-8                            찬송: 351장

제목: 하나님의 요구조건

목표: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자로 하나님의 요구에 응답하며 살게한다.



탈레반이 한국인 인질들을 석방하면서 요구한 사항들이 신문에 실린 것을 보았습니다. ▲아프간 파견 한국군의 연내 전원 철수 ▲아프간에 체류 중인 한국 민간인 8월 내 전원 철수 ▲아프간에 기독교 선교단을 다시는 보내지 않을 것 등의 요구조건이었습니다.

프로운동선수들도 팀을 결정할 때 구단과 선수 상호간의 요구조건이 맞을 때 결정하게 됩니다.

이렇듯이 불법적으로 인질을 잡았다가 풀어주면서도 부당한 조건을 요구하는가하면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조건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조건이 맞지 않을 경우는 협상이 결렬되거나 원하는 선수를 스카웃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자기의 아들까지 십자가에 희생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지옥 갈 우리를 구원해준 대가를 과도하게 요구하시지 않습니다. 구원의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요구에 응해야 은혜에 보답하는 사람들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구하시는 것 즉 하나님의 요구조건이 무엇인지 알아보면서 그 요구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선 본문의 내용을 살펴보면

미가선지자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불의한 행위는 고치지 아니하고 좋은 제물을 드리는 형식주의적인 예배행위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공의와 인자로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 것을 교훈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자신들이 자백하고 회개하는 상한 심령으로 드리는 제사(시 51:17)임을 알지 못하고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했던 것처럼 좋은 제물만 많이 드리면(삼상 15:21-22)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 회개가 없는 많은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겠느냐(사 1:11)라고 반문하십니다. 그리고 스스로 깨끗케 하여 하나님 앞에서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공의를 구할 것을 요구하십니다(사 1:16-17).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에 기록된 대로 1년된 송아지를 제물로 바쳤고 때로는 양 떼 전부를 하나님께 드려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천천의 수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바쳤습니다. 그리고 그 제물로도 만족하지 못한 백성은 하나님께서 내 것이라고 하신 맏아들을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살찐 수양보다 청종함이 낫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형식적이고 양적인 것을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바치는 사람의 회개와 믿음과 정성을 원하십니다(행 5:1-11).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구하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위선적인 제사보다 더 나은 세 가지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것은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고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고 선하게 대하며, 자기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세 가지 중에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는 것은 사람에게 행할 의무가 새겨진 십계명의 둘째 돌판을 포함하는 것이며, 겸손히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 행할 의무가 기록된 첫째 돌판을 함축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조건인 세 가지를 살펴보겠습니다.


1. 공의를 행하는 것입니다(8) 

8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공의란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을 본받아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삶의 도를 행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특히 정치지도자들에게 요청되었던 것이었으나 모든 백성들에게 동일하게 요구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공의를 실천하는 삶을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이야기할 때 크게 두 가지로 말하는데 공의와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기 때문에 사람이 죄를 범하면 반드시 징계를 해야만 합니다. 공의의 속성상 죄를 묵인하고 넘어가실 수는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했기 때문에 에덴동산에서 쫓아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죽으리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사람에게 죽음을 주실 수밖에 없었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구원하는 방법 역시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을 충족시켜야만 가능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고 영생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삼상 2:3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심히 교만한 말을 다시 하지 말 것이며 오만한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지어다. 여호와는 지식의 하나님이시라 행동을 달아보시느니라.』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고 정확히 판단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은 외모를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 분이십니다. 또한 하나님은 지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사람들의 행동을 달아보신다고 하십니다. 물건을 사고 팔 때 저울에 달아서 그 무게를 측정하여 거래하듯이 하나님도 우리를 저울로 달아보시듯 판단하시는데 입의 말이나 외모가 아니라 행동과 중심을 달아보시고 판단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영어성경에는 ‘공의를 행하며’를 'act justly'로 번역했습니다. 'act' 행동이 중요합니다. 행동하되 공의를 행해야 합니다.

몇 일전 어떤 일간지에 ‘예수 믿고 손해 보기’란 글이 실렸는데 우리가 새겨보아야 할 부분이 있어 소개합니다.

“현재 한국 기독교는 선교 수용 이후 최대 성장의 절정에서 최고의 위기를 맞았다. 위기는 한국 기독교의 교만과 독선, 이기심에 연결되어 있다. 한국 사회 다수는 한국 기독교에 대해 헌신적 공동체로서의 기대를 가지고 있지 않다. 이대로라면 서구의 기독교가 걸어 간 길과 같은 한국 기독교의 좌절을 지켜보아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3·1운동 당시 기독교는 소수였으나 이 운동의 결과로 짊어져야 했던 책임의 중심에 서 있었다. 당시의 크리스천들은 예수를 믿는다는 일이 이익의 길로 가는 것이 아니라 희생과 고난을 마다하지 않는, 참 은총의 길로 가는 것이라는 성숙한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은 죽어야 될 자리, 손실을 보아야 할 자리가 있다면 예수를 믿는 자들이 먼저 나서야 할 것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이치를 깨닫고 있었다.”

행동하는 크리스천이 예수님을 믿는 것으로 손해 보는 것을 각오하고 행동할 때 한국의 기독교의 희망은 다시 살아날 수 있다는 요지의 내용이었습니다. 말로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은데 예수님 때문에 손해를 보면서 살아가려는 행동하는 크리스천이 더욱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의롭지 못한 세상에서 의롭게 산다는 것은 힘듭니다. 그만큼 손해도 각오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우리들도 의를 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시 106:3, 『공의를 지키는 자들과 항상 의를 행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의를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의의 열매를 거둘 때가 반드시 오기 때문입니다. 갈 6:9절 말씀처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2. 인자를 사랑하는 것입니다(8)

8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인자란 윗사람으로 아랫사람에게 베푸는 모든 친절하고 자비로운 행위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아무런 자격이 없는 죄인들을 자녀로 삼으신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체험한 우리들은 마땅히 다른 사람들에게 동일한 사랑을 베풀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요일 4:16에서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고와와 과부 그리고 나그네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등장하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는 사랑이 필요한 사람의 대표적인 사람들로 등장합니다. 즉 소외된 이웃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신 10:17-19) 『[17]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신의 신이시요 주의 주시요 크고 능하시며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라. 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18]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신원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사 그에게 식물과 의복을 주시나니 [19]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었음이니라』

(신 24:19) 『네가 밭에서 곡식을 벨 때에 그 한 뭇을 밭에 잊어버렸거든 다시 가서 취하지 말고 객과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버려두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손으로 하는 범사에 복을 내리시리라』

이 말씀을 실천하여 복을 받았던 사람이 다윗의 증조부인 보아스입니다. 룻기에 보면 나오미와 룻이 모압에서 실패하여 아들과 남편을 잃고 고향 베들레헴으로 돌아와 어려움 가운데 있을 때 룻이 추수하는 밭에 나아가 이삭을 줍습니다. 그런데 마침 보아스의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보아스가 일꾼들에게 룻을 위하여 일부로 이삭을 떨어뜨려 더 많이 줍게 하라고 말합니다.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입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후에 보아스는 룻과 결혼하여 다윗의 증조부가 되고 예수님의 조상이 되는 복을 누렸습니다.

며칠 전에 어떤 권사님으로부터 차를 타고 오면서 잠간 들은 이야기입니다. 우리 교회에 다니는 어떤 집사님의 가정에서 페인트칠을 할 일이 있어 사람을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 때 젊은 부인이 그 집을 가게 되었는데 마스크도 쓰지 않고 일을 하는 모습을 안쓰럽게 보시고 어떻게 이런 힘든 일을 하게 되었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그러자 지금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어 집안 형편이 어려워 일을 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 어떤 병원인지 물어보고는 나중에 그 병원을 찾아 도와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 믿으라는 말도 안하시고 성경을 사서 놓고 가셨다고 합니다. 지속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 가족들을 돌보면서 지내던 중에 그 가족전체가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하고 교회에 등록하여 지금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조건인 인자를 사랑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믿으라고 말로서 전도하지 는 않았지만 그분의 사랑으로 한 가정이 변화되어 주님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우리는 강도만난 사람의 참된 이웃에 대한 예수님의 비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이 있었는데 첫 번째로 제사장이 피하여 지나쳤고 둘째로 레위인도 지나쳤지만 사마리아 사람이 비용까지 지불하면서 그 사람을 돌보아주었다는 이야기를 하시고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고 제자들에게 질문하셨습니다. 그 때 제자들이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자 ‘너도 이와 같이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부자이든 가난한 자이든, 행복한 사람이든 불행한 사람이든, 하나님이 만드시고 심히 기뻐하셨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싫어지는 사람은 병든 사람입니다. 가족이 싫어지고 친구가 싫어지고 이웃이 싫어지는 사람은 정신적으로 병든 사람입니다. 사람을 좋아해야 합니다.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건강한 사람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큽니까? 라고 질문하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명쾌하게 율법을 정리해 주셨습니다.

요일 4:20,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가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사람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이 두 번째로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요구조건입니다.


3.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8). 

8절,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겸손은 두 가지 측면에서 생각할 수 있는데 첫째는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 없는 자임을 인정하는 것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 안에 선한 것이 있다면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인정하고 감사드리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정체를 바로알고 그에 합당하게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 앞에 겸손이란 단어가 선행되어 있는데, 이는 올바른 자기 인식을 통하여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질 때 비로소 하나님과의 온전한 연합을 일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을 영어성경은 ‘walk with God’라고 적었습니다. 이 말은 ‘동행’이란 말과 같은 뜻으로 쓰이고 있습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는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약 4:6). 여행을 갈 때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가면 즐겁지만 마음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가면 불편합니다. 우리는 천국에서 이 세상에 여행 온 나그네세월을 지나고 있습니다. 이 인생의 여행 동안 하나님과 함께 동행해야 하는데 하나님이 마음 편하게 함께 가기를 원하시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싶어도 하나님이 물리치신다고 까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기 원하시면 하나님 앞에서 늘 겸손하게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으로 에녹과 노아를 꼽을 수 있습니다. 에녹에 대한 성경구절은 창 5:22-24입니다. 『[22] 므드셀라를 낳은 후 삼백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23] 그가 삼백 육십오세를 향수하였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노아에 대하여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 하였으며』(창 6:9)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과 동행했던 에녹은 죽음을 맛보지 않고 천국으로 갔고, 노아는 모든 인류가 홍수로 심판을 받아 죽을 때 노아와 그 가족만 구원을 받아 아담 이후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는 복을 누렸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에녹과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하여 어려움이 없었습니까? 아닙니다. 에녹이 300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수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노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방주를 지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일을 하면서 얼마나 많은 조롱을 받았겠습니까? 그러나 그 조롱받는 모습을 하나님도 다 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갈 때도 때로는 시련과 어려움이 있습니다. 고난과 슬픔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우리는 흔히 하나님이 동행하시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그 때도 우리와 함께 하시고 그 아픔을 함께 아파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신 1:31, 『광야에서도 너희가 당하였거니와 사람이 자기 아들을 안음 같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행로 중에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

그러나 우리는 때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비난과 조롱을 받을 때는 하나님을 앞세우고 자기는 뒤로 슬쩍 빠졌다가 영광과 칭찬을 받을 때만 자기가 앞서서 하나님 대신 영광을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요구조건은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찬송가 355장 4절 가사처럼

‘존귀영광 모든 권세 주님 홀로 받으소서.

멸시천대 십자가는 제가지고 가오리다.

이름없이 빛도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처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살아가면 하나님이 더 기뻐하시리라 믿습니다.


오늘 본문 8절에서 중요한 명사를 세 단어로 구분하면 justice(공의), mercy(인자, 자비), God(하나님)입니다. 동사를 찾으면 act(행하다), love(사랑하다), walk(걷다)입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사랑의 하나님이시고 말로만 하는 사람보다는 행함있는 믿음의 사람을 그리고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사는 사람을 그리고 삶의 어떤 순간에도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의 아들을 십자가에서 죽이시면서까지 우리들을 사랑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어떤 경우에도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누릴 수 있습니다.

이같이 큰 은혜를 입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면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세 가지 요구조건에 응답하며 살아가는 것이 사람의 도리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라고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요구에 기쁘게 응답하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http://www.ikwangsung.kr/bbs/skin/sub_service/sermon/sermon.php?id=sub_service&no=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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