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先軍정치 강조 전시 총동원체제 유지 경각심 갖고 北 살피길
美 7함대 동원 가능한 韓·美 ‘연합작전 체제’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
정리=김재곤 기자 truman@chosun.com
입력 : 2007.06.25 00:19 / 수정 : 2007.06.25 0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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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57주년을 맞았다. 백선엽(白善燁·87)예비역대장(군사편찬연구소 자문위원장)은 57년이 지난 지금도 6·25전쟁과 관련해 국내는 물론 미국·일본 등 해외에서도 ‘전쟁영웅’으로 자주 회자되는 인물이다. 올해 우리 나이로 미수(米壽)를 맞은 노병(老兵)은 고령에도 불구하고 6·25전쟁 관련 주요행사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한·미 장병을 상대로 한 강연 등 여전히 활발히 활동하고 있다.
지난 22일 일본 출장을 다녀온 그를 이튿날 용산 전쟁기념관 4층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백 예비역대장은 “김정일 체제가 존재하는 한 6·25전쟁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강조했다.―요즘 6·25전쟁이 언제 일어났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습니다.
“3년 뒤면 벌써 6·25전쟁 발발 60주년이 되니 젊은이들이 모르는 것은 한편으로는 당연합니다. 하지만 한반도의 특수성이나 아직도 정전(停戰) 상태인 점을 감안해 교육을 시켰어야 할 일입니다. 북한이라는 공산집단이, 김정일 체제가 존재하는 한 잊어선 안 되는 일이에요.”
―6·25 당시 미군보다 평양에 먼저 입성하는 등 전공(戰功)이 많았습니다. 위기의 순간은 없었습니까.
“역시 기억에 남는 것은 다부동 전투입니다. 당시 미군 2개 연대와 우리가 첫 번째 협동작전을 했습니다. 미군들은 2차 대전 경험이 있어서인지 전투력, 지휘력이 탁월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 우리 부대가 후퇴했을 때 왔습니다. 부대원들 앞에서 ‘저 사람들(미군)은 목숨 내던지고 싸우는데 우리가 이래야 되겠냐. 내가 선두에 서서 돌격을 명령할 테니 나를 따라오라. 만약 내가 후퇴하면 쏴도 좋다’ 이렇게 말하고 돌격해서 진지를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한번은 평안북도 운산에서 중공군 3개 사단에 포위됐는데, 그때 미군과 우리 포병이 하룻밤에 1만3000발의 포탄을 쏴 우리 사단을 안전하게 철수시킨 일도 있었지요.”
―6·25 당시 미군과 연합작전을 많이 했는데 당시 한·미군 관계는 어땠습니까?
“한국전쟁 때는 한국군 창군 초창기였고 훈련이 잘 안돼 있었습니다. 내가 육군참모총장이었을 때 미군에선 밴 플리트 대장이 한국사령관으로 만 2년 동안 한국군을 위해 노력했습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그리스 군대를 현대화한 경험을 살려 한국군 현대화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약 2000명의 우리 군 장교를 미국에 보냈고, 한국에 돌아온 이들이 우리 군의 밑거름이 될 수 있었습니다. 또 2~3개월에 1개 사단씩 만들어서 10개 사단을 20개 사단으로 늘렸고, 포병도 17개 대대를 한꺼번에 증강하는 한편 대공화기도 보강했습니다.”
―6·25전쟁의 특징을 간단히 정리해주시죠.
“6·25전쟁은 김일성(북한)하고만 한 전쟁인 줄 아는데, 첫해를 제외하고 나머지 2~3년 동안 김일성은 보조역할밖에 못했습니다. 6·25 전쟁은 김일성과의 전쟁과 중공군과의 전쟁, 이렇게 2개의 전쟁으로 구성됩니다. 원흉은 스탈린, 마오쩌둥(毛澤東), 김일성입니다. 스탈린은 무기 등을 댔고, 마오쩌둥은 200만명의 실제 병력을 제공했습니다.”
―33세에 한국군 최초이자 최연소 대장이 되는 기록도 세우셨는데요.
“33세인 1953년 1월 31일에 대장이 됐습니다. 그때 이승만 대통령이 ‘자네 이번에 첫번째 대장이 됐는데 옛날엔 임금만 대장이고, 신하 중엔 대장이 없었다. 우리는 이제 리퍼블릭(republic·공화국)이니까 그거나 알게’ 라고 하셨습니다. 그때는 그 말뜻을 잘 몰랐는데, 뒤에 역사적으로 살펴보니 사실이더군요.”
―57년 전 일을 정확히 날짜와 시간까지 기억해 내는 데 놀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6·25전쟁은) 내 일생 최고의 토픽(topic)이었습니다. 무엇보다 나라의 운명이 달린 일이라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요즘 경제난 때문에 북한이 도발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은 것 같습니다.
“김정일이 다른 데는 안 가도 군대는 꼭 순시하는 데서 볼 수 있듯이 북한은 군사를 최우선시하는 선군(先軍)정치를 통해 전시 국가 총동원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이에 맞서 휴전선에서 북한과 대치하면서 24시간 경계태세에 있는 것 아닙니까. 세계에 이런 곳은 한반도밖에 없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잊어선 안 되고 경각심을 갖고 북한의 행동을 주시해야 합니다.”
―지난해 전시 작전통제권(작통권) 단독행사 문제가 논란이 될 때 반대 모임에 참여하셨는데요.
“전시 작통권에 대해선 1000만인 반대서명 운동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현재 국민의 많은 지지를 얻고 있습니다. 지금의 한미 연합작전 체제는 상당히 좋은 시스템입니다. 전시에 미군사령관이 지휘를 함으로써 필요하면 미국의 7함대도 불러올 수 있고, 미국의 공군력, 지상전력도 총동원할 수 있습니다. 이 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해요.”
―몇년 전 낙동강전투 답사현장에서 주한미군 장군들이 백 장군의 강의를 경청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요즘도 강연활동을 자주 하십니까.
“얼마 전 미 2사단 전 지휘관을 대상으로 두 시간 동안 강의했습니다. 24일에도 강연 일정이 있습니다. 이번 여름엔 일본 자위대 초임장교 500명이 150여명씩 3개조로 나뉘어 방한해 다부동전투 격전지 등을 견학하는 프로그램을 짰다더군요.”
―주한미군에 백 장군의 이름을 딴 상이 있다던데요.
“백선엽 어워드(award)’를 석달에 한번씩 모범 카투사(주한미국 지원 한국군병사)에게 수여하고 있습니다.”
―역대 주한미군 사령관 이·취임식 때 사령관마다 백 장군을 ‘전쟁영웅’이라고 부르며 경의를 표하곤 합니다.
“(웃으며)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지난해 2월 새로 취임한 벨 주한미군 사령관도 내가 쓴 ‘부산에서 판문점까지’를 취임 전에 세번 읽고 왔다고 하더군요.”
―군의 살아있는 전설로서 리더십의 표본으로 종종 거론되고 있습니다.
“리더는 용기, 책임감, 바람직한 가치관을 가져야 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리더십의 기본은 신뢰입니다. 신뢰가 구축돼야지 서로 믿지 않으면 성립이 안 됩니다. 한마디로 서로가 최선을 다하는 신뢰관계에 (리더십이) 있습니다. 리더십은 쌍무(雙務)지, (한쪽으로만 흐르는) 편무(片務)가 아닙니다.”백선엽 예비역대장은
6·25전쟁에서 1사단장, 군단장, 육군참모총장을 지내고 한국군 최초의 대장이 된 전쟁영웅이다. 한국군은 물론 미군에게도 ‘살아있는 전설(living legend)’로 통한다. 서른 살의 젊은 나이에 1사단장으로서 1950년 낙동강 방어선의 다부동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매년 주한미군 장성들이 그를 초빙해 낙동강 전선 등 격전지를 함께 다니며 당시 전황에 대한 강의를 듣곤 한다. 1920년 평남 강서 출신으로 만주군관학교에서 교육받고 장교가 됐다. 연합참모본부(합참) 의장을 거쳐 프랑스 등 각국 대사와 교통부장관, 6·25전쟁 50주년 기념사업위 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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