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사람

한경직목사의 생애

하마사 2007. 7. 1. 09:13

제1장 출생 성장 결혼

1.간리마을

 

한 목사의고향은 평아남도 평원군 공덕면 간리이다. 간리 마을은 평양 동북쪽에 떨어져 있는 작은 마을이다. 그 옛날 원산에서 조랑말을 타고 평양으로 가던 선교사 한 분이 순천에서 자산 사인당으로 빠져야 할 길을 잘못하여 이 마을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마침 해는 저물고 갈 길을 더 갈 수 없어서 부득불 이 마을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마을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것이 계기가 되어 이들 중 청년 셋이 평양을 다녀온 후 가족들과 함께 마을 동쪽 언덕 위 돌배나무 밑에 앉아 예배를 드렸다. 이것이 자작교회의 시작이다. 차츰 온 동리가 예수를 믿게 되었고 한씨 가문만도 20여 가구가 믿게 되었다. 간리 마을 복음화에 정성을 쏟은 분은 마포삼열 선교사였다.
마을 동쪽 준령 넘어에 있는 법흥사 부석건물을 헐어얻은 재목과 기와로 첫 예배당을 지었다. 처음 모여 예배드렸던 그 자리에 예배당을 세운 것이다.
장로교 초대 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의 정석 그대로 이 마을을 복음화 되도록 지도한 선교사들은 교육기관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윗마을 동구 밖에 학교를 세웠는데 이 이름을 진광소학교라고 하였다. 설립자는 방위량선교사였다.
한경직목사의 육촌 형인 한병직목사는 평양신학교 제3회 졸업생으로 한국장로회 초대 목사중의 한분으로 간리마을의 대선각자였다. 그의 지도적 영향은 거의 절대적이어서 한경직목사의 교육편력에도 그의 지도의 손길이 있었다.

 

2."갈"한씨의 후손

한목사가 태어나 성장한 간리 마을에서는 한씨 문중이 약 30여호 있었고, 또한 그 부근 마을에는 약 100여호가 있어서 한씨는 박씨, 김씨 문중과 더불어 정립의 세를 이루고 있었다. 한씨 가문에는 동화와 같은 일화가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한씨 조상 어른이 불행하게 상처를 하였다. 전부인은 아들 하나를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후처의 몸에서도 아들 하나를 얻었다. 후처는 별로 마음씨 고운 사람이 아니었던 모양인데, 자기 소생의 아들을 편애하다보니 전처소 생을 등한시했고, 나중에는 암암리에 학대를 하였다. 어느해 겨울 두 아들 은 외관상 꼭같이 두툼한 솜옷을 입었으나, 이상하게 전처 소생의 아이는 항상 춥다고 떨고 있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매우 이상하게 생각하여 어느날 밤 두 아이의 옷을 자세히 살폈다. 깜짝 놀랄 일을 발견하였다. 후처 소생 의 아이의 옷은 햇솜을 넣은 옷인데 반해 전처 소생의 아이의 옷은 갈꽃을 넣은 옷이었다. 어쩌면 이것은 한씨 가문의 일종의 추문이 아닐 수 없었다. 이로부터 한씨 가문은 두개의 계보가 생겼다. 동시에 호칭도 달라졌다. 즉 "솜"한씨와 "갈"한씨이다. 행인지 불행인지 한목사는 "갈"한씨의 후손에 속 한다고 하는 한목사의 일화가 있다.
한목사의 부친이 12세 때에 조부가 돌아가셨다. 15세된 백부가 조부의 축 적한 재산을 모두 탕진해 버렸으므로 한목사의 부친은 할 수 없이 육촌형 항병직목사 댁에서 농사 일을 도우며 살았다고 한다.
한목사의 부친은 타고난 성품이 인자하고 부지런하고 성실해서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중에서도 한글과 쉬운 한문을 터득 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부지런히 일한 결과 소규모의 자작농이 되어 자립할 수 있게 되자 곧 결혼을 하였다. 그때 형편으로는 매 우 늦은 결혼이었다.
한목사가 열살 났을 때에 그 모친이 별세하였다. 한목사는 그 모친이 대단 히 부지런하고 인자한 분이었다고 기억하고 계시다. 어릴 때에 모친을 따라 목화밭에 가서 목화따는 일을 돕던 기억도 새롭고,간혹 밤에 자다 깨어 보 면 모친의 언제나 늦도록 물레질을 하고 계신 모습이 지금도 선하다고 말하 신다.
만혼을 하신 아버님은 아들에 대한 두가지 결심을 하였노라고 하였다."내 가 만혼하였으니 아들만은 일찍 결혼해야 할 것이고 내가 배우지 못하였으 니 아들은 힘 닿는 데까지 공부를 시켜야겠다고"고 하셨다.

 

3. 13세에 결혼

한목사는 13세에 결혼하였다. 부친께서 결심하신대로 비교적 일찍 결혼한 셈이다.부인은 뒷동네 김씨댁 규수였다.
연상의 신부였기에 살림에 능하였다. 한목사가 남평양 영성학교에서 교편 을 잡고 있을 때 첫애기 순희를 낳았다. 미국유학 시절에는 특별한 환경에 처해 있는 부인들을 위하여 세운 숭현학교에서 공부하면서 아이를 돌보며 살림하면서 많은 고생을 하였다.
한목사가 미국서 돌아왔을 때에는 건강상의 큰 문제가 있을 때였다. 투병 2년간의 병은 폐결핵이었으니 치유 후의 요양과 섭생, 음식과 수면 등 생활 전폭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은 일반 상식에 속하는 일이다. 여러가지 일을 수시로 접해야 하는 목사의 생활로서는 자신의 건강을 위한다는 것이 어느 모로 보아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오늘 일하고 내일 쓰러진다 하더라도 자신 의 몸을 위해서 해낼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 모든 일을 부인 김찬빈 여사가 해내었다. 한목사의 오수를 관리하기 위해서는 대문 밖에 나가 앉아 아이들이 함부로 떠들지 못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심지어 방문온 손님과의 대화하는 시간까지도 제한하였다. 다른 사람이 볼 때에는 너무 지 나치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것은 한 목사의 건강을 위해서는 절대 적으로 필요하였다. 그래서 한목사는 "그이는 나의 은인이라."고 까지 하였 다.
한경직목사가 영락교회 뿐만 아니라 세계적인 목회자로서 후대에 전해질 수 있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와 한목사 자신이 신앙과 인격과 경건과 성 경중심의 목회로 일하였기 때문이다.다른 한편으로는 한목사의 일생 목회의 반려자로서 배후에서 그림자처럼 떠나지 않고 목회의 대성을 위해서 일편단 심 희생 봉사한 사람이 부인 김찬빈권찰이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부군을 위하여 이렇게 희생하는 가운데 김찬빈권찰은 관절염으로 고생하게 되었다. 이 질환이 불치의 병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1974년 12월 31일 에 향년 76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한목사는 '나보다 훨씬 건강하였는데 나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다니! 참으로 인간의 수명이란 인간이 무어라 짐작할 수 없음을 새삼 느꼈노라"고 하였다. 일상생활의 균형이 깨어질 때 누구나 당황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삶을 주장하는 이는 아버지 하나님이시기에 깨어진 삶의 균형도,내심의 당황함도,우리 주님 친히 치유해 주시고 바로 잡아주셔서 보다 더 큰 것으로 한목사의 생활을 메워 주시고 채워주심을 감 사하는 신앙을 우리는 육안으로 볼 수 있었다.딸 순희는 목사의 아내가 되 었으니 만족하시리라고 짐작되고 아들 혜원은 일찍 미국가서 공부하였다. 목사가 되어 미국교회에서 시무하고 있으니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한목사에게는 친손과 외손 그리고 외증손이 있어서 크게 위안이 된다.

제2장 국내에서의 교육

1.통학길에서 요3:16을

 

한목사님은 어려서 마을 서당에 다니지 않고 기독교 교육과 애국교육을 철 저히 하는 진광소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 진광소학교의 교육을 전담한 선생은 홍기두 선생이었는데 홍선생 은 도산 안창호 선생이 경영하는 평양 대성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그 학교 가 일제의 탄압으로 폐교될 때까지 다녔다.
진광에 부임한 후 30-40명 학생을 전담해서 가르쳤다. 홍선생은 한학과 신 학문을 겸비한 분이었다. 신앙이 돈독하고 덕망이 높았으며 민족의식이 투 철하고 애국심이 강한 분이었다. 이 어른의 교육적인 영향은 매우 컸다.
한목사는 통학하는 길옆 어느집 대문에 크게 인쇄하여 붙인 성경구절(요한 복음 3:16절)을 가면서 오면서 읽는 가운데 자연히 암송하게 되었다고 한 다. 이것은 그로서 처음 암송한 성구인 동시에 한목사의 어린 시절에 시낭 적 기초를 갖게한 결정적 요인이라고 한다.이런 경험을 가진 그는 지금도 [성경암송]교육과 [계시교육]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 한다.
한목사의 지능은 출중하였다. 특히 수학의 재능은 누구도 추종을 불허하였 다. 이것을 간파한 한병직목사는 자기 동생을 반드시 중학교에 진학시켜야 할 것을 강하게 권유하였다. 한목사는 진광에서 이미 한반 월반하여 그 실 력을 과시하면서 드디어 진광을 졸업하였다.

 

2.애국하는 학교 [오산]으로

거리상으로 보아서는 평양 숭실학교에 가는 것이 당연한 일이었지만,결국 정주 오산중학교에 입학하게 된 것은 오산중학은 신앙지도만 아니라 애국하 는 학교로서 철저한 애국교육을 한다고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이것만으로도 육촌되는 한병직목사의 애국심의 일면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입학시험의 성적이 좋았던 까닭으로 2학년에 해당되는 시험도 쳐보라고 하 기에 쳐본 결과 역시 합격이 되어 결국 2학년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또 한 번 월반의 실력을 과시한 셈이다.
오산은 소문난 그대로 애국하는 학교였다. 남강 이승훈선행과 고당 조만식 선생이 이끄는 이 학교의 애국교육은 생명있는 산 교육이었다. 예배시에 절 규하는 고당의 설교는 불을 뿜는 애국적인 설교였으며 그의 훈화는 폐부를 찌르는 간곡한 애국정신의 고취였다. 특히 남강선생이 졸업반 학생 4,5명을 한 조로 하여 자택으로 초청 지도한 일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감명깊은 가 르침이었다고 한다. 대화중에 친히 상의를 벗으시고 105인 사건때 고문당하 여 얻은 상처를 보이면서 "아직도 이렇게 멍이 들어 있고 심한 통증을 느낀 다.나는 조선 사람이니까 틀림없이 조선사람으로 죽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에 와서 수많은 지도자들이 변절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가 없어! 그러나 조국은 틀림없이 독립할거야.그러니까 참고 힘을 길러 나라위해 물을 억제하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한목사에게 있어서 오 산의 애국교육은 절대적이었다.반드시 신앙교육에 애국교육 및 과학교육이 병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3. 처음 당해본 고문

3.1운동이 일어난 직후에 시국관계로 오산학교 당국은 졸업식을 준비할 경 황이 없었다.결국 한목사는 오산학교를 졸업식 없는 졸업을 하였다.
오산을 떠난 후 시골 집에 한거하고 있을 때에 평양부근 남산고을 교회에 서 경영하는 영성(英成)학교의 교사로 초빙을 받았다. 때가 때인 까닭으로 한목사는 단독으로 결정하지 않고 진광소학교 은사인 우용진선생을 찾아가 상의하였다. 부임하는 것이 좋겠다는 우선생의 의견을 따라 영성학교에 부 임하였다. 처음 경험하는 교사생활이었다. 정성드려 학생을 지도하였다. 선 각후각의 심정으로 배워주고 깨우쳐주고 느낄 것을 느끼게하고 간직할 것을 간직하게 하였다.
많은 사람을 의의 길로 돌아오게 하는 생활은 귀하고 빛나는 삶이라는 생 각이 앞섰다. 많은 어린이를 옳은 길로 인도하는 것은 하늘의 소명인 동시 에 이 겨레의 영욕을 좌우하는 애국운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 무렵 평양경찰서 폭탄사건이 발생하였다. 이것은 물론 독립군의 항일투 쟁의 일환이었다. 독립군을 잡기 위하여 경찰과 헌병이 총동원 되었다. 독 립군의 행방을 수탐하기 위하여 남산고을 교회장로 3.4명과 같이 한목사도 잡혀 들어갔다. 불문곡직하고 고문부터 하는 것이었다. 손가락 굵기의 목봉 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 쥐어 틀었다. 이런 고문쯤은 고문의 초보라지만 참 으로 견디기 어려운 만행이었다. 난생 처음 당하는 고문이였기에 더욱 참기 어려웠다. 독립군은 북촌 방면으로 갔다는 정보에 한목사가 살고 있는 북촌 마을 전역을 걸쳐 한집 한집 수색을 하였다. 독립군을 찾는다기 보다는 일 종의 항일의 증거물을 찾기 위한 가택 수색이었다. 방을 두지고 벽장을 뒤 지고 실내의 모든 일용품까지 샅샅이 뒤졌다. 한목사는 슬그머니 걱정이 생 겼다. 비밀리에 입수하여 읽던 임시정부에서 발행한 독립신문을 벼루함 크 기로 접어서 벼루함에 넣고 벼루를 눌러 놓았는데 만일 이것이 발각되면 우 선 참혹한 고문을 당해야 할 것이고 다음은 독립신문 입수 경위 등을 문초 할 터인데 참으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당하게 되리라는 걱정이 태산 같았 다. 그러나 다행히 발각되지는 않았다.

 

4.대학가는 소원이 이뤄지다.

처음부터 한목사는 대학진학의 꿈을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여건이 여의치 않음을 알고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남산골의 영성학교에서 평양과는 지척이어서 기회 있을 때마다 평양에 나가 숭실대학을 구경도 하고 동시에 공부할 수 있는 길을 은근히 알아보기도 하였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학비조달인 바 돈없는 한목사로서는 이 문제 해결 없 이는 대학진학의 문은 열릴수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꾸준히 알아본 결과 고학의 길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고학의 길이란 주로 선교사들의 일을 도 와주고 학비를 얻는 일을 말한다. 당시 남산골 교회에서는 석근옥집사의 조 부이시다. 석전도사는 한목사를 방위량선교사에게 소개하였다. 방선교사는 안주교회 선교사로서 숭실대학의 이사이기도 하였다. 방선교사는 자기가 관 할하고 있는 구역의 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즉시 자기의 서기일을 맡겼다. 이로써 대학진학의 꿈은 실현되었다.
방선교사는 설교를 흥미있게 하였다. 특히 그림을 잘 그렸으므로 학생들에 게 설교할 때는 칠판에 그림을 그려가면서 하는 것이 특색이었다. 농사군의 얘기를 할 때에는 농부의 그림을,나귀타고 가는 사람의 얘기를 할때에는 나 귀탄 사람을 그리면서 하는 것이었다. 참으로 흥미 진진한 설교였다.
한목사는 숭실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방선교사의 일을 도왔다. 사실 하는 [일]그 자체가 한목사에게 큰 도움이 되었다 한다.
한목사는 과학을 공부하기로 하였다. 당시 숭실대학에는 김호연교수 등 저 명한 과학교수가 여러분 있었다. 특히 미국가서 공부하고 온 김호연교수는 같은 분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대단하였다. 한목사는 조국이 망한 원인을 나 름대로 조용히 생각해 보았다. 여러가지 있었겠지만 과학의 낙후가 가장 중 요한 원인이 아니었겠느냐 하는 생각을 하셨다. 과감하게 문호를 개방하고 앞선 외국문화를 받아 우리의 것으로 받아들였던들 하는 후회스러운 생각도 하였보았노라고 하신다. 그래서 대학공부를 할 바에는 꼭 과학을 해야겠다 는 마음이 굳혀졌다고 한다. 한편 수학을 잘 하였으니 과학쪽을 선택하는데 크게 작용하였다고 생각한다.
당시 숭실대학은 한국의 유일한 대학인 동시에 우리 장로교계 기독교대학 인 까닭으로 뜻이 있고 자랑스러운 대학이었다. 더구나 구한말에 세운 대학 이기에 국가적으로 또는 민족적으로 더욱 큰 목적과 뜻이 있었다.
숭실대학의 교육과정의 주된 순위를 보면 신앙이 그 첫째요, 애국이 그 둘 째요, 과학이 그 셋째였다. 이 순위를 보더라도 학교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었다. 졸업생 모두가 목사가 된다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모두 예수 믿 는 사람으로서 애국하기를 바랐다. 과학자가 되더라도 예수 믿는 과학자가 되기를 바랐다. 교육의 근본 토양이 기독교였기에 목적이 분명하였다. 어두 운 것이 없는 곧은 길이었기에 옥쇠는 있을 수 있어도 와전은 있을 수 없었 다. 문을 닫을지언정 교육의 토양을 바꾸거나 탈바꿈을 할 수는 없었다. 그 교육의 토양을 바꾸거나 탈바꿈을 할 수는 없었다. 그 교육이 한국에 필요 한 인재를 많이 키워냈다. 그 교육이 한국교회의 수많은 명장을 육성해 냈 다. 그 교육은 한국을 살리는데 큰 몫을 하였다.
한국이 세운대학을 일제는 전문학교로 격하시켰다. 저들의 칼 앞에 대학이 전문학교로 격하되었으나 숭실대학의 [얼]은 격하시킬 수 없었다. 눈에 보 이는 토양은 파헤쳤으나 눈에 보이지 않는 정신 그리고 그 영적인 학교인 동시에 하나님의 학교이었음을 모두가 명심한다.

 

5.삶의 방향이 결정되던 그날 밤

숭실대학 3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방위량선교사는 피서겸 지나간 일들을 정리하고 새로운 계획의 수립과 준비를 위하여 황해도 구미포에 가게 되었 다. 방선교사를 돕기 위하여 한목사도 동행하였다.
구미포는 그리 크지 않으나 매우 중요한 포구였다. 한목사는 바닷가 황혼 의 경치에 마음이 끌렸다. 사장을 밟으면서 명상을 하였다. 순간 한목사는 기도하고 싶은 생각이 났다. 사장에 무릎 꿇고 기도하는 한목사에게는 이상 한 충격이 있었다. 주님의 음성을 들었다. 주님의 부르심에 헌신할 것을 약 속하였다. 온 몸과 마음을 주님께 드리기로 결심하였다. 이로써 한목사의 삶의 방향은 다시 정립되었다. 오랫동안 심사숙고해서 결정한 어제의 결정 은 모두 무너졌다. 하나님의 강력한 부르심에 한목사는 순종하기로 하였다. 한목사의 앞길은 분명해졌다. 강력한 성령의 힘으로 깨우쳐 갈 길을 정해 주셨으니 가고저하는 그 길에 또한 동행해 주실 것을 확신하였다. 보잘것 없는 한 과학도를 친히 불러 하나님의 종이 되게 하심은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섭리라고 한목사는 믿었다.

 

6. 잊을 수 없는 그 돈 100원

숭실대학을 졸업한 후 방위량선교사는 한목하에게 미국유학을 권유함과 동 시에 유학에 필요한 모든 것을 방선교사 자신이 준비해 주었다.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가는 중에 마지막으로 매우 중요한 문제는 여비 문 제였다. 남강선생을 찾았다. 소개편 두통을 써 주셨다. 한통은 K 선생에게 또 한통은 윤치호선생에게 였다. 먼너 K 선생을 찾아갔다. 일언에 거절을 당하였다. 다음은 윤선생을 찾았다. 자세한 설명을 들은 후 윤선행은 쾌히 돈 100원을 주셨다. 그때 돈 100원이라면 우리나라에서 미국까지의 선임이 었다. 큰 돈이었다. 당시 윤선생의 말은 '공부가 끝나면 꼭 한국으로 돌아 와서 조국을 위하여 일해야 하오. 이 돈을 후에 꼭 갚겠다고 하지만 그럴 필요는 없어요 꼭 갚기를 원한다면 나 아닌 다른 사람에게 같은 뜻으로 도 와주면 될 것이오."하였다는 것이다.
귀국 후 한목사는 한번도 이 고마운 돈 100원을 잊은 일이 없다고 한다. 신의주 제2교회 시무시에는 교회신축에 전력을 기울였기 때문에 심유여이역 부족이었고, 서울에 피난 온 후에는 더욱 말이 아니었는데 더구나 전쟁을 치뤄야 할 때이지 도무지 어려움이 떠날 날이 없었다고 한다.
부인 김찬빈권찰이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비로소 이 돈 갚을 생각을 하 게 되었다고 한다. 윤치호선생의 아들 윤영선선생이 당시 농림부장관에 있 을 때이기에 그 돈을 그분에게 갚기로 생각하고 부인이 내놓은 돈 100만원 을 가지고 윤장관을 찾았다. "한목사님, 내가 어떻게 이 돈을 받을 수 있 겠습니까? 도저히 받을 수 없습니다."하고 완강히 거절하였다. 한목사는 " 내 생각도 좀 해 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선친의 뜻을 받들어 좋은일 하실 때에 보태 쓰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간신히 전달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목사는 은혜를 갚았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노라고 한다. 고마 운 분의 고마운 뜻은영원히 갚을 수도 없지만 영원히 잊을 수도 없다고 한 다. 마음비에 깊이 새겨 두고 그 뜻을 본받아 살고저 하는 노력이 있을 뿐 이다.

제3장 미국에서의 교육

1. 엠포리아 대학

 

엠포리아대학은 캔사스주에 있는 장로교계 대학이다. 당시 엠포리아 대학 의 학생수는 약 500명,장로교계 대학답게 신앙지도에 철저를 기하는 대학이 다.
숭실대학에서 과학의 기초를 공부한 한목사는 엠포리아에서는 인문계 학문 을 마음껏 공부할 수 있었다. 특히 역사, 철학,심리학에 관심을 가지고 공 부하였다. 정말 공부다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학문의 심오함을 비로소 감 득하게 된 한목사는 공부에 만족할 뿐만 아니라 학문 탐구에 새로운 불이 붙기 시작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엠포리아 생활은 만족하였노라고 했다. 신앙의 훈련은 더 말할 나위없었다. 졸업하면서 문학사 학위를 받고 계획한 대로 프린스톤에 가서 신학을 공부하기고 하였다.

 

2. 프린스톤 신학교

프린스톤은 150년의 역사를 가진 신학교로서 고목이 숲을 이루워 고색이 창연한 학교였다. 누구에게나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때로는 신비감 마저 느끼게 한다고 한다.
당시 백낙준박사는 프린스톤을 떠나 예일대학으로 갔고 박형룡박사는 루이 벧대학으로 옮겼고 2학년에는 최윤헌목사가, 동기동창으로는 김성학,이규 용,옥호열목사등이 있었고 일본 청산학원을 거쳐온 송창근,김재준 두 목사 는 약 1년간 체류하다가 피쯔범에 있는 위스턴신학교로 자리를 옮겼다.
프린스톤 재학 중 한목사는 특히 구약학을 가르치는 스티븐슨교장을 위시 하여,교회사 교수 릿츌,성서학 교수 어드만, 희랍어 조교수 메췐 등의 영향 을 받은 바크다고 한다. 당시 대두하기 시작한 고등비평을 용납하지 않는 보수주의 신학자들이었다. 그러나 메췐을 제외하고는 모두 비교적 시야가 넓은 분들이어서 학문적인 연구에 크게 보탬이 되었다고 한다.
프린스톤대학에서 걸어서 약 15분 거리에 무명전사의 묘소가 있다. 주위에 는 울창한 수림이 빽빽히 둘러 있어서 그지없이 조용한 처소이다. 한목사는 이 묘소를 특별기도의 처소로 정하였다. 참으로 신비스러운 은혜의 장소였 다고 한다. 묵상하고 기도하는 가운데 내일을 계획하고 앞날의 청사진을 그 리며 주님과 더불어 의논하였노라고 한다. 여기에서의 간단없는 간절한 기 도는 황해도 구미포 모래사장에서의 기도의 연속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프린스톤을 졸업한 후 계획한 대로 예일대학에 가서 교회사를 전공하여 박 사학위를 취득코저 했다. 그러나 건강에 이상이 생겼다. 종합진단 결과 진 행중에 있는 폐결핵임이 판명되자 예일대학 진학을 단념할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의 손에서 모든 것이 상합하여 선을 이룰 것을 믿으 면서도 한편 당황한 마음은 금할 길이 없었다.

 

3. 생사의 갈림길에서

뉴멕시코에 있는 엘버키크 요양원의 의사인 피터박사의 소개로 이 병원 목 사관에서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다.당시의 폐결핵 치료방법은 거의 자연요법 에 의존하였다. 환자 자신의 마음 가짐과 태도, 인내력과 신념여하에 따라 병치료의 결과가 좌우될 수 밖에 없었다.
한목사는 2년간의 투병생활 속에서 주로 독서와 기도로 일관하였다. 특히 각분야의 지식이 광범위하게 수록되어 있는 대사상집(THE GREAT BOOKS)을 탐족하였다.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report) 에 얽매어 대학시절에 손도 대 지 못하던 분야의 책을 접하고 많은 지식을 쌓게 되는 기쁨과 보람을 얻었 다. 그러나 한편 한목사의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의 감정을 금할 수가 없었 다. 이렇게 많은 공부를 하고도 민족과 국가,교회와 사회를 위하여 부여받 은 재능대로 마음껏 일할 수 있는기회조차 가져보지 못하고 요절한다는 것 은 너무 애석하고 안타깝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이때 한목사는 더욱 간 절히 기도하였다. 병치유를 위한 애원의 기도인 동시에 서원의 기도이기도 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야망이 있어 따르는 누구보다도 강하고,높은 야망이 있어서 이에 따르는 명예욕도 누구못지 않았지."하는 회고의 말씀을 하였다. 한목사는 바로 이것을 깨닫게 되었노라고 한다. 이러서 애원의 기 도가 회개의 기도로 바꾸어졌다. 섬김을 빙자한 개인의 야망과 명예욕을 완 전히 버릴 수 있게 하여 달라는 애원의 기도를 하였다. 온유와 겸손, 인내 와 사랑으로 뭇양을 먹이는 선한 목자가 되어지기를 원하며 서원하였다. 은 혜로 주신 모든 재능을 주님께 드려 교회와 사회,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봉 사하리라고 약속의 기도를 하였다. 이때야말로 한목사의 일생의 최대의 위 기였다고 한다.
2년간의 투병 결과 병은 완전히 치유되었다. 생사의 갈림길에서의 위기를 벗어났다. 하나님의 특별한 권고와 은혜임을 감사하였다.
병이 치유되자 주위의 교수들과 친구들은 미국에서 공부를 더하거나 아니 면 목회를 하라는 권유도 있었으나 한목사는 예일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서 원한대로 귀국하였다. 한 위기를 교훈과 시련으로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그 위기를 거두고 앞길을 준비해 주시는 이도 여호와이심을 한목사는 찬송하였다.

 

4.서원한대로 귀국

조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일본을 들르셨다. 한목사는 일본의 사정을 살피고 싶었고 군국 일본 제국주의 치하의 일본 국민의 사정을 피상적이나마 살피 고 싶었고 이런 상황 속에서 초라하게 끼어 사는 동포들의 사저도 알고 싶 었다. 특히 유학온 우리 젊은이들의 동태도 눈익혀 보고 싶었다.
귀국후 우선 평양에 정착코자 하였다. 거리적으로 고향 마을이 가깝고 동 시에 여러가지 여건으로 보아 일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중에도 평양 신학교가 있고 모교인 숭실대학이 있고 옛 은사들과 가까 운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은사 고당선생이 이사장으로 있고 동창 김항복장로가 교장으로 있는 숭인상업학교에서 교목 겸 교사로서 일해 줄 것을 부탁받았다.
얼마후 숭실대학에서도 교섭이 왔다. 한목사도 좋게 생각하여 허락을 하고 부임을 준비 중인데 일본 경찰은 한목사의 사상이 불온하다는 이유로 취임 을 허락하지 않았다. 저들은 처음부터 한목사의 앞길을 막았다. 이 일을 계 기로 숭인학교에서도 일할 수 없음을 알고 앞으로 갈길이 매우 어렵고 험난 함을 절감하였다.

제4장 성역의 시작

1.신의주 제2교회로

어느날 김기범장로라는 분이 한목사를 찾아왔다. 키는 별로 크지는 않았으 나 긴 수염을 가진 50대의 겸손한 분이었다. 그는 한목사에게 자기를 소개 하였다. "나는 신의주 제2교회의 시무장로인데 한선생을 우리 교회의 전도 사로 초빙코저 불원천리하고 온 것이요. 우리 교회는 아직 매우 연약한 교 회로서 모이는 교인수가 겨우 300명 정도이고 아직 예배당을 짓지 못하고 日人들이 사용하던 집을 개축하여 교회당으로 사용하고 있소...그러나 한가 지 큰 자랑거리가 있소,그것은 다름 아닌 장래성이 있는 청년들이 있소. 청 년이 많다는 것은 곧 장래가 밝다는 증거가 아니겠소?연약한 우리 교회이기 에 한선생을 초빙코자 왔으니 꼭 허락해 주기를 바라오."하였다. 한목사는 미국에서 돌아와 평양 숭인상업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숭실대학으로 가려는 생각이었으나 당시 총독부 당국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는 교회를 생각중에 있었고 또한 평양의 어느 교회에서의 청빙도 있었다. 그러나 한목사는 김장로의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간절하고도 간결 한 부탁을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신의주 제 2교회는 신의주 제1교회 로부터 분리된 후 8년간을 최득의목사가 시무했으나 사면하고 압록강 건너 에 있는 안동현 제일교회로 부임하였기에 당시 은퇴한 목사로서 훌륭한 최 명준목사가 신의주 제2교회를 임시로 돌보아 주었다. 신의주 제1교회는 윤 하영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는데 그분이 한목사를 추천하였던 것으로 믿어진 다. 한목사는 김장로의 부탁도 부탁이려니와 그 교회는 특별한 도움이 필요 한 약체의 교회라는 것을 감안하여 이런 교회야말로 자신이 가야 할 교회라 고 생각하였다.
김장로의 말대로 교회는 외형적으로 매우 빈약하였다. 그러나 교회를 진정 으로 사랑하는 성실한 일군이 많았다. 한목사는 선한 목자가 되기를 염원하 고 기도하였다. 당시 청년들에게 온건한 신학적인 기초와 지식이 필요하였 음을 느끼고 신앙의 생활화와 사상적 계도가 철저히 요구되었다. 그들에게 는 민족의식의 고취와 구체적인 애국의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일념 아 래 각종 세미나를 통하여 계획성 있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당시의 교회는 가옥을 고쳐 예배당으로 개조한 일본집으로 기둥이 12개나 되었다. 부임 당시엔 약 350명의 교인이 참석하였다. 제일 시급했던 일이라 면 예배당 건축이었다. 그것을 놓고 기도하던 중이었는데 하루는 나이 많은 어느 집사 한 분이 와서 말하기를 "건축을 위해서 2만원의 건축예산을 두고 기도하되 먼저 1만원을 목표로 기도하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1만원의 연보 가 잘 되려면 김기범장로님이 2천원 연보해야 될 것입니다."라고 귓뜸하여 주었다. 제직회가 있기 전 어떤 목적을 위하여 서로 의논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을 당시에는 "추리한다"고 했다. 처음에는 1천원 작정하셨던 김장로도 한목사의 권면으로 쾌히 허락해 주어서 그날 제직회를 열었을 때에는 연보 가 1만원이 훨씬 넘게 나와서 예배당 짓는데는 과히 어려움을 당하지 않았 다. 신의주 제2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이 특히 많았지만 감사헌금도 많이 나 왔으며 교인수도 1천명이 넘었고 건물도 160여평의 2층 건물로서 연건평 320평으로 종각을 두곳으로 세운 훌륭한 교회로지었다. 장로가 당시 12분이 나 되었고 교회는 날로 부흥하였다.
한목사는 1933년 만주 안동제1교회에서 모인 의산노회에서 안수를 받았다. 당시 노회장은 윤하영목사였다.
한목사는 자신의 목회를 시작할 때부터 초대 장로교선교사들의 선교정책을 잊지 않았다. 그들은 세가지 목표를 교회의 불가결의 사업으로 삼았다. 즉 전도사업,교육사업, 그리고 봉사사업이다. 특히 봉사사업은 모든 불우한 이 웃을 위하여 사랑의 손길을 펴는 사업을 말한다.이것은 주님의 절대적인 명 령이요 교회존재의 기초적인 본분이라고 생각하였다. 고아들과 의지할 곳 없는 노인들을 위하여 보린원을 설립하였다. 교회가 독자적으로 운영하기에 는 역부족이었다. 이런 사업은 사회적이기 때문에 신의주 일대에 있는 유지 들과 교회에 호소하여 다소의 결실을 얻을 수 있었으나 여유있는 것은 아니 었다.
1941년 12월 8일은 일본이 미국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하기 시작한 날이다. 큰 전쟁을 도발한 일본은 평시에 눈익혀둔 소위 사상이 불온한 요시찰 인물 들을 그대로 반치해 둘리 만무하였다. 모든 교역자들과 교회에 막심한 핍박 이 올 것을 예감할 수 있었다. 수난의 날은 임박하였다.
왜경들은 한목사를 교회로 부터 추방하였다. 절대로 강단에 설 수 없으며 모든 교회일에 관계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한목사는 김관주전도사에게 강단 을 맡기고 교회를 떠났다. 남신의주에 있는 보린원으로 갔다. 밭을 갈고,씨 를 뿌리고, 고아들과 모시고 있는 노인들을 돌보며 명상과 기도로 기약이 없는 길고 긴 날들을 하루 하루 보내었다. 그러나 그[날]을 기다렸다.
어떤 다른 의미로서는 보다 큰 청사진을 그리는 퇴수의 시간이기도 하였 다. "많은 사람들이 변절하였다.참으로 슬픈일이다. 그러나 조국의 독립은 틀림없으니 끊임없이 배우고 힘을 길러야 해."하시던 은사 남강선생의 말씀 이 마음 속에서 새로워지곤 하였다.
이런 상황속에서의 보린원 운영은 쉬운일이 아니었다. 재정적으로매우 곤 란하였다. 운영비 조달을 주 목적으로 하고 만주를 거쳐 상해에 가보자는 주이 사람들의 권유로 그렇게 하기로 하였다. 동행으로는 정석준장로(당시 는 집사)외 다른 한사람과 같이 떠나기로 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만주에 가 는 것으로 되더 있으나 실은 상해행에 목적이었다.
상해에 간다는 것은 한목사에게는 별다른 의미가 있었다. 임시정부에 직접 관계하고 있는 지면의 인사들은 의도적으로 한목사 만나기를 피하였다. 그 것은 물론 한목사 일행을 위해서였다고 한다. 귀국후 임시정부 요인들을 만 났다는 소문이 나면 틀림없이 시끄러운 일이 있을 것임을 예상했기 때문이 다.
고아원 운영비 조달을 위하여 갔으니 우선 그 목적달성이 급선무였다. 만날 분을 만났고 또 승락을 받았다. 그러나 우송해 준다던 약속은 실현되지 못 하였다. 해방의 기쁨이 생각보다 빨리 왔기 때문이다. 그 돈은 못 받았어도 해방이 되었으니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이 된 셈이다.

 

2. 고아 제1호 복순이

한목사는 보린원을 생각할 때마다 그 소녀를 잊을 수 없노라고 하신다.방 금 쓰러질듯한 오막살이,부엌에서 불을 때고 있는 한 소녀를 확인할 수 있 었다. 자욱한 연기 속에서 불을 때고 있는 여덟살난 소녀는 복순이라는 아 이였다. 방안에는 폐병으로 누워있는 이 아이의 아버지가 있었다. 폐병을 경험한 한목사는 이 폐결핵 환자는 일견에 중환자임을 알 수 있었다.
사연은 다음과 같다. 가장되는 사람이 폐병으로 기동이 어려워지자 집안 살림을 꾸려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복순이 어머니는 젖먹이 아이를 업고 남 편과 복순이를 버리고 어디엔가로 종적을 감추었다.
한목사 일행은 복순이에게, "만일 우리가 먹을 양식을 마련해 주면 살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었는데,그 소녀는 할 수 있노라고 하였다. 환자에게는 약을 준비해 주고 또 두 사람이 먹을 양식을 대주기도 하였다.이듬해 봄이 되자 환자는 세상을 떠났다. 할 수 없이 복순이를 이 일에 관심이 있고 또 뜻이 있는 분의 가정에 맡겼다. 그분은 그 아이를 극진히 사랑하고 돌보았 다. 그러나 그댁 아이들의 성화에 복순이는 그 도움과 사랑을 누리기에는 너무나 어리고 약하였다.
이 아이 때문에 고아원의 필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특별히 뜻 있는 분들의 극진한 협조로 보린원을 세우게 되었다. 보린원에는 고아들만 아니 라 의지할데 없는 노인들도 모셨다. 복순이는 우리 보린원의 제1호의 원생 이된 셈이다.

 

3. 조국의 해방과 분단

조국은 해방되었다. 기쁨과 후회 영광과 치욕이 엇갈렸다. 신의주 제2교회 는, 보린원에 있는 한목사를 찾아갔다. 교회에 복귀하여 다시 강단을 맡아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한목사는 그렇게 할 마음이 없었다. 일언에 거 절하였다. 과거의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지 오늘의 상황으로는 결코 그렇 게 할 수 없었다. 한목사는 계속 보린원에 남아 있어서 주위의 상황을 깊이 살펴야 할 필요가 있었다.
해방이 되자 평안북도 지사인 일인이 한목사를 찾아왔다. "이런 상황속에 서 이 지역의 치안을 책임지고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한목사 당신뿐인 줄 알고 왔으니 우리들의 이 간절한 부탁을 꼭 받아 주기를 바란다."고 간청할 때에 한목사는 조용히 생각하여 보았다. 그 한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지역 사회의 치안유지를 위해서는 물론이고,민족적으로 원한의 적이기는 하나 당 시의 현실이 이 요청을 수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日人지사는 곧 신의주 방 송국에 가서 "앞으로 이 지역의 치안은 한경직목사가 책임지고 수고하게 되 었다"고 방송을 하였다.
한목사는 대선배인 윤하영목사와 상해임시정부 요인이었던 이유필선생의 협조로 자치회를 조직하고 일본인으로부터 무기를 인수하고 상호간의 충돌 을 피하기 위하여 일본 군인들에게 일체의 외출을 삼가도록 지시하였다.
이와 동시에 한목사는 미지의 내일에 대비하여 애국적이고 민주적이고 기 독교적인 힘의 집결을 위하여 기독교 사회민주당을 조직하였다.
해방을 맞이하는 이 겨레에게는 아무런 준비가 없었고 정치적으로나 사회 적으로 완전히 공백상태에 있는 이때에 역량있고 통찰력 있는 지도자는 역 시 교회안에 있었다. 예상되는 혼란을 대비해서도 그렇고 새 출발을 위하여 새나라를 올바로 건설해야 하는 사명의식을 가진 인사들도 역시 당시의 지 도적인 역활을 하던 목사들 중에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한목사 자신이 정 치에 깊은 관심을 가했다거나 또는 일종의 정치적인 야심에서의 정당조직이 나 사회참여가 아니었다. 누군가가 꼭 해야할 일인데 꼭 할 사람이 없으니 우리라도 손을 대야한다는 애국일념 하에서 되어진 일이라고 설명한다. 그 리고 새나라의 건국의 기틀은 반드시 민주적이고 기독교적인 터위에 놓아야 겠다는 소박한 생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38선 이북에는 소련군이 진주하였다. 조국의 허리는 잘렸다. 공산주의자들 의 획책에서는 이 모든 수고와 생각은 아무런 작용을 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는 대세하에 체포령이 내려진 것을 알게된 한목사는 주위의 종용에 따 라서 월남을 결심하였다.

제5장 탈 출

1. 서울에 오다

월남을 결김한 한목사는 당시 백마에서 활동하시던 윤하영목사와 함께 김 치선청년(현재 영락교회의 시무장로,숭전대학총장)의 안내로 정든 땅을 떠 났다.
1945년 10월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그때만 하여도 탈출하는 길이 비교적 쉬운 때라는데도 문자 그대로 천신만고의 길이었다. 생명을 건 탈출의 행각 이기에 주님의 도우심을 믿었으나 소위 인간의 최선의 길이라는 것도 실은 무력한 것임을 경험하였노라고 하신다. 한목사의 하시던 일에 동참했던 이 유필선생은 탈출에 실패,38선 부근에서 피살되었다.
가족을 대동치 못하고 오는 길이었으니 한목사의 마음은 매우 무거웠다. 서울에 도착하자 오래전부터 서울에 정착하고 있던 백경보장로댁에 우선 머 물기로 하였다. 약 1개월 후에는 안동교회 장로로 계셨던 백지렴장로댁으로 자리를 옮기었다. 가족이 월남하여 올 때까지 백지렴장로 댁에서 숙식을 하 였다. 감사할 뿐이었다.
이때에 송창근목사와 김재준목사는 서울 승동교회 하층에서 조선신학교를 운영하고 있었다. 비록 짧았지만 두분은 모두 프린스톤에서 만난 한목사의 친구들이었다. 서울에까지 왔으니 신학교를 같이 하자는 권유에 한목사는 쾌히 허락하였다.
송창근목사와 김재준목사는 한목사의 가까운 친구였다. 단지 다르다면 두 분은 다 같이 일본 청산학원을 거쳐 프린스톤에 잠깐 머물다가 웨스턴 신학 교에서 신학을 하였고 한목사는 이미 말한대로 국내에서 숭실대학,미국에서 는 엠포리아대학을 거쳐 프린스톤에서 신학을 한 점이다. 후의 일이지만 불 행하게도 한국장로교회가 처음 분열될 때에 김재준목사는 기독교 장로교회 로 되었고 송창근목사는 이북으로 납치되어 한목사 일생에 섭섭한 일이 있 다면 이일을 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지녔던 우정이야 어디 가련만 우리 장로교회의 분열의 시작이 여기에서 시작된 것을 생각하게 되면 이상한 감 회가 있게 마련이다.

 

2. 영락교회창립

조선신학교 이전문제가 났을 때 세분목사는 서울에 산재해 있는 천리교재 산을 접수하여서 신학교 이전문제를 해결하는 동시에 서울역전(동자동)에 있는 천리교 총본부에는 조선신학교가 사용하고,그 구내에 교회를 세워 송 창근목사가 시무하고, 신당동에 있는대지와 건물에는 김재준목사가 맡아 교 회를 세우기로 하고,영락정에 있는 경성분소에는 여자신학교를 세움과 동시 에 교회를 세워 한목사가 시무하도록 약속하였다. 적산인 천리교재산을 접 수하는 일은 여의하게 되었다.
한목사는 약속한대로 영락정에 여자신학교를 설립함과 동시에 베다니 전도 교회를 시작하였다. 1945년 11월 25일에 설립논의를 하고 1945년 12월 2일 주일에 첫 예배를 드렸다. 첫 예배에 모인 사람은 27인이었는데 교회이름을 베다니 전도교회라고 하였다.
탈출! 북한 공산당의 학정으로부터의 탈출,생명을 걸고 생존과 자유를 위 하여, 특히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38선을 넘어 탈출해 오는 불가승수의 탈 출민의 군상이었다.
베다니 전도교회는 어느 사이에 피난민 교회라고 소문이 났다. 피난민들이 모여들었으니 피난민교회라고 불러 마땅하였다. 베다니교회는 피난민교회라 고 소문이 퍼지니 피난민이 더욱 많이 모여들었다. 38선을 넘어 남하한 피 난민이 더욱 많이 모여들었다. 38선을 넘어 남하한 피난민들,만주와 중지, 남지 일대에서 귀국한 동포들,멀리 일본 화태 등지에서 온 사람들까지 모여 들었다.
베다니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청사진은 이렇게 구현되고 있었다. 포스타를 붙인 일도 없고, 나팔을 분 일도 없고,한경직목사의 수완이 좋아서도 아니 고 누가 의도적으로 소문을 낸 것도 아니언만,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큰 경 륜 속에서 친히 준비하시고 모이게 하시고,일감을 주시고, 일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

 

3. 하나님이 세워주신 교회

날로 팽창해 가는 교회의 급선무는 교회의 머리가 그리스도임을 밝혀 교회 의 참된 구심점이 흔들리지 않게 하는 일이었다. 교회창립 일주년 때에 한 목사는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설교한 바 있다.

(1)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다. 그리스도가 분열될 수 없 는 한 교회의 통일성과 공동성이 파괴될 수 없다. 사업보다도 인화가 더 중 요하다. 다양의 극치 속에서도 조화를 찾아 총화의 아름다움을 드높이는 것 이 교회의 참모습이다. 인간은 항상 인간의 부족과 유한성을 인지해야 한 다. 진리수호를 빙자하여 평범한 자기의 고집을 고집하거나 교리수호를 구 실로 주도권의 야심을 가지고 분열과 불화를 초래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머 리에 또 하나의 가시관을 씌우는 과오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교회의 머리 는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변치 않는 그리스도 자신이심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이다.
(2)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한다. "그 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 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여 사 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엡 4:16)하신 말씀은 교회성장의 정도를 말 하는 것이라고 거듭 강조하셨다.
(3) 교회는 본질적으로 신적인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가 사회를 봉사하 되 교회가 세속화 되어서는 안된다. 교회가 세상을 섬길지언정 세상의 대접 을 받고자하는 것을 잘못된 자세이다. 교회가 비록 세상에 있어서 세속문화 에 접하고 있으나 하나님의 전으로서의 교회됨과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교 회됨을 나타내고 수호해야 한다. 교회는 반드시 주고 돕는 손을 활짝 펴서 가난한 자,병든자, 눌린자, 소외된 자의 대변자가 되어야 하고 또 저들을 위하여 최대의 섬김의 도를 이행해야 할 것이라고 교훈하였다.
(4) 이 교회는 우리 하나님이 세워주신 교회요,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이루 어진 교회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기셔서 특별 히 북에서 토지를 빼앗기고 집을 잃고 허둥지둥 남부여대 살 길을 찾아 38 선을 넘어온 많은 피난민들을 위하여 세워주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영락교회는 어떤 개인이나 혹은 몇몇 사람이 세운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친히 세워주신 교회라고 누누히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세워주신 교회이기에;
(1) 세워주신 이의 뜻에 순종하는 겸손이 있을 뿐이다.
(2) 은혜와 자비와 구원의 손길로 세워주신 교회이기에 그저 감사와 봉헌 이 있을 뿐이다.
(3) 교회를 세워주신 이의 원대한 뜻과 섬세한 청사진에 대한 경탄과 승복 이 있을 뿐이다.
(4) 세우신 이가 그의 선하신 뜻에 의하여 맡기신 일에 충성을 다할 뿐이 다.
(5) 세워주신 이의 뜻을 찾아서 그의 아름답고 선하고 완전하신 뜻을 분 별하고 증거하는 일 외에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6) 내꿈,내 이상,내 설계,내 청사진,내 주장, 내 견해,내 수완,내 판단, 내 능력을 앞세워서 고집하는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결단코 허락하시지 않는 다.

한목사의 목회로 베다니 전도교회는 날로 성장 성숙하여갔다. 특히 베다니 교회는 명실공히 [탈출성도들의 만남의 장소]'[피난민들의 상호위로의 집] [신앙의 자유를 얻은 감사와 기도의 제단][혈육이산의 아픔을 달래는 몸부 림의 안방][조국분단의 분함을 호소하는 눈물의 밀실][무너진 제단을 기필 코 되찾아 수축하리라는 서원의 다락방]이 되었다.

 

4. 흰돌의 성전과 한목사의 꿈

1949년 9월에 건축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건축위원 간에는 두가지 의견이 있었다. 그 첫째는 피난민 교우들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하여 우선 돌로 사 방을 둘러쌓고 당분간은 지붕을 천막으로 덮자는 것이었고, 그 둘째는,우리 형편에 아무리 어렵더라도 교인수가 2천명이 넘으니 정성을 최대한으로 모 으면 가능하지 않겠는가,지금까지 생각하여 온 그대로 완전한 석조건물을 짓자는 의견이었다. 드디어 후자가 결정되어 돌집을 짓기로 하였다.
이 안에 결정되는 과정에는 백경보장로의 주장이 비교적 강했다. 돌집을 생각하게 된 동기는 다음과 같다.
시무하시던 신의주 제2교회로부터 추방 당한 한목사는 남신의주에 있는 보 린원에 가 계셨다. 어린이들과 노인들을 돌보는 일과 밭농사를 거드는 일 외에 시간을 정하고 언덕위에 올라 조용히 기도하고 묵상하는 시간을 가졌 다.
분명히 잠은 들지 않았는데 꿈을 꾸었다.꿈을 꾸었다고 생각하니 잠은 들 지 않은 것이 사실이었다. 비몽사몽의 상황이었다. 언덕에서 장안을 내려다 보니 놀랍게도 삼천리 강산이 한 눈에 보였다. 흰돌로 지은 교회당이 삼천 리 강산을 꽉 메웠다. 소스라쳐 눈을 떴다. 일종의 환상을 보았다. 무언가 를 암시해 주시는 환상이라고 생각하였다. 순간적으로 마음에 생각되는 것 이 일본은 틀림없이 패망한다. 그리고 조국은 분명히 독립한다 독립된 조국 은 그리스도의 터 위에 세워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매간에도 잊을 수 없 는 환상이었다.
예배당 건축문제가 제기되었을 때 한목사는 이 꿈을 생각하였다. 그 꿈의 실현을 위하여 오늘을 있게 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 님의 뜻이라면 돌집을 짓게 되리라고 믿고 기도하며 기다렸다. 불쌍한 피난 성도들을 위하여 여호와께서 진정 집을 준비하실 생각이라면,이 집을 통하 여 삼천리 강산에서 복음의 메아리가 꽉차게 하실 뜻이라면 그 꿈이 실현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1949년 3월 24일에 기공하여 1950년 5월에 준공하였다.

 

5.주일총선을 반대하다

우리나라는 유엔 한국위원단의 감시하에 실시되는 총선거에 의하여 통일정 부의 수립이 가능했으나 북괴의 일방적인 그리고 계획적인 음모와 거부로 인해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남한에서만이라도 총선을 거쳐 정부를 수립한 다는 결의에 의하여 선거일을 1948년 5월 9일로 확정하여 발표하였다. 5월 9일은 주일이었다.
김상로집사(영락교회집사,수년전에 작고하심)을 통하여 이 사실을 알게 된 기독교공보사(사장 김응학장로)는 즉시 사원들에게 빨리 대책을 강구하라고 하였다. 우선 교게 지도급 인사를 찾았다. "국가에서 하는 일에 섣불리 반 대의 기치를 드는 것은 무모한 일이 아니야?" 고 모두들 나서기를 꺼려하는 눈치였다. 그때 한목사만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앞장을 서시었다.
하지중장,이승만박사,유엔 한국위원단장에게 주일날 총선거 실시를 반대한 다는 진정서를 보내는 동시에 신문을 통하여 교계에 여론을 환기시켰다. 이 반대운동에 서명한 교단과 단체는 그리 많지 않았다.
이 반대운동은 수주간 계속하였다. 결국 총선기일을 5월10일로 개정 공포 하였다. 이것은 한국 교회 사상 매우 중요한 한 토막이다. 주일날 총선거 반대운동을 전개함에 있어서 한경직목사의 결연한 태도와 지도는 매우 중요 한 역사적인 일이었다.
한목사는 성수주일의 기본입장을 일보도 양보하지 않았다. 더구나 건국의 기초작업인 총선거를 성일까지 범해가면서 하려는 것은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청교도적인 생활윤리를 강조하는 한목사의 태도는 끝까지 결연하였 다.

 

6. 구국전도가 부르며 남원으로

한국교회는 해방후 수년간 사회의 모든 양상을 볼 때 일종의 위기의식을 느꼈다. 국내 사정은 점점 혼미해 갔다. 북한 공산당의 움직임은 심상치 않 았다. 간첩사건도 빈번했다. 여수 반란사건과 같은 것은 참으로 몸서리가 나는 뼈아픈 일이었다. 사회는 이모 저모로 부패의 양상이 날로 심각해 갔 다. 청년들의 퇴페적인 흐름은 모골이 송연할 정도였다.
교회는 이 양상을 보고 수수방관할 수가 없었다. 수차의 협의 끝에 모든 교회가 합심하여 거교회적으로 [기독교 구국운동]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드 디어 1950년을 구국전도의 해로 정하였다.
4월9일부터 4일간 시내 각교회가 합동하여 영락교회에서 이북 신도대회를 열고 속히 나라가 통일되기를 위하여 기원하여 매일 오후에는 총동원하여 가두로 나가서 대중전도와 개인전도를 하였다. 이것은 일종의 시위적 의미 도 있었다. 그때에 모든 교회가 보여준 협동정신과 동지에는 참으로 영구불 망의 것이라고 한목사는 말씀하신다.
수차의 협의 끝에 43명의 목사를 선발하여 2회에 걸쳐 공산 게릴라의 준동 이 가장 심한 지리산 지역 13개 군민들에게 특별전도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제1차는 1950년 1월에 제2차는 동년 2월에 각각 실시하기로 하였다. 한목 사는 제1차시에 참가하였다. 남원군 일대를 약 일주일간 순회하면서 전도하 였다. 이렇게 전개된 구국운동은 위험을 무릅쓴 전도 행각이었다. 불안과 공포에 떠는 불쌍한 농민들에게 큰 위안과 용기를 주었다 복음의 말씀은 저 들에게 큰 힘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이 지역에 교회가 별로 없었다. 문자 그대로 미개척 지구였다. 이 때에 눈물로 뿌린 복음의 씨는 자랐다. 지금은 타 지역에 비해 교회수가 월등하게 많다. 거의 방방곡곡 교회가 설립되어 있다.
한목사가 남원지역으로 출발할 때에 부탁을 받은대로 한편의 구국의 노래 를 지어 전도대 본부에 보냈다. 이 노랫말에 고 강신명목사가 곡을 부쳤다. 노래 가사는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
   이 강산에 나라시사
   자유의 종 크게 울려
   새 나라가 되었도다
   일어나 일어나
   십자가 정병들아
   진리의 띠 굳게 메고
   성신의 검 높이 들어
   악마 화전 소멸하세
   아침 저녁 지성으로
   하나님께 간구하고
   몸 바치고 제물드려
   주의 나라 이룩하세
   만세반석 굳은 터에
   이 나라를 굳게 세워
   영과 육이 구원 얻고
   천추 만세 복 받으라
고 강신명목사 생존시에 이 노래의 곡을 간수하고 계시냐고 문의한 바 있 다. 만일 없으시다면 기억을 하고 계시느냐고 물었다. 이미 잊었기에 재생 할 수 없노라고 하셨다. 혹시 가사를 보면 생각이 날 수 있을런지 모르겠으 니 가사를 보여달라고 한바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못하였음을 못재 섭 섭하게 생각한다.

제6장 6.25사변과 1.4후퇴

1. 제2의 탈출을 원치않았는데

6.25가 발발한지 사흘만에 서울이 함락되었다. 한목사는 제2의 탈출을 할 마음이 없었다. 교회를 지킬 생각이었기에 교회안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기 를 원하였다. 이 민족에 대한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말 알고 싶었다. 이 땅위에 교회에 대한 주님의 경륜이 무엇임을 보고 싶었다.
27일 오후 교회 청년 및 사람이 한목사를 찾아왔다. 한목사의 안위를 걱정 한 나머지 속히 교회 구내를 떠나 자리를 옮길 것을 종용하였다. 의정부 방 면으로 몰려 들어오는 북괴군의 남침으로 서울이 위태로우니 우선 교회 구 내를 떠나야 한다고 강권하였다.
김치복,이창로 두 장로는 한목사를 억지로 모시고 보린원을 거쳐 청파동에 있는 김성호선생댁으로 갔다. 이어 강신명목사도 모셔왔다. 그날 밤 네 사 람은 김선생댁에서 지내었다. 한강대교는 우리 국군에 의하여 폭파되었었 다. 날이 새자마자 일행은 마포강편으로 나갔다. 강을 건너려는 사람이 문 자 그대로 인산인해였다. 강을 건너는 방편이란 나룻배 뿐이었다. 그때에 한목사를 아는 사공이 이 일행을 알아보았다. 이 사공의 특별한 호의로 강 을 건널 수가 있었다.

 

2. 피난행각

도강을 했으나 일정한 목적지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정부가 남쪽으로 가 니 따라서 남쪽으로 가는 것 뿐이었다. 피난민 행렬이 남을 향하여 가니 한 목사 일행도 남을 향하여 가는 것 뿐이었다. 붉은 무리가 북으로부터 남쪽 을 향하여 쫓아오니 남쪽으로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수원을 거쳐 대전까지 왔다. 전세는 여전히 불리하였다. 정부 따라 전주에 까지 갔으나 호남지역이 더 불안하다는 이유로 정부는 다시 대전으로 올라 올 때에 한목사 일행도 대전으로 다시 왔다.
대전에 왔을 때에 많은 교역자들이 모여 왔다. 1950년 7월 3일 교히 지;도 자들은 대전제일교회에 같이모였다. 밀리고 또 밀려서 여기까지 온 우리들 이니 여기서나마 이 나라 이 겨레를 위하여 무언가 할 일을 찾아야 하지 않 겠는가 하는 것이 주요 화제이었다. 별로 어렵지 않게 [대한기독교구국회] 를 조직하기로 합의하였다. 전시에 유효적절한 구국운동을 전개하자는 것이 었다. 한목사가 회장이 되었다.
우선 큰 집회를 가졌다. 계몽강연을 통하여 주민들에게 반공사상을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전신에 필요한 용기와 단결,인내와 국민적인 책임이 무엇 임을 호소하였다.동시에 선무공작대를 조직하여 각처에 파송하여 선무 구호 계몽 등 사업을 하였다. 무엇보다도 사상적 계몽이 긴요하였다.

 

3.구국운동 전개

전세는 계속 불리하였다. 기독구국회는 대구로 옮겼다. 제일교회를 중심해 서 모였다.당시 제일교회 시무하시던 한병혁목사는 구국회를 위하여 성의있 게 협조하였다.
구국회의 활동은 더욱 적극적이었다. 쫓겨 흩어지는 입장에서의 전쟁을 치 루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인적자원이었다. 총을 메고 일선에 나가 국토를 지킬 젊은 사람이 필요하였었다. 구국회는 기독청년 지원군을 모집 하기 시작하였다.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별반 성과가 없었다. 그러나 낙심 하지 않았다. 나라가 위태로울 때 나라 위해 몸 바쳐 나서는 것이 가장 큰 애국임을 역설하였다. 특히 예수 믿는 사람은 이 애국의 대열에 솔선 하는 것이 마땅한 도리임을 역설하였다. 결국 약 3천명이 모집되었다. 신명여자 중학교를 훈련장으로 정하고 훈련을 시작하였다. 일선배치 직전에 괴뢰군을 남하하여 낙동강까지 육박해 왔다. 대구도 위험하게 되었다. 부득불 전원 부산으로 이동할 수 밖에 없었다.

 

4. 부산에 까지

모집한 3천의 지원군은 부산 모국민학교에 수용하였다. 3천명의 젊은이들 을 위하여 동분서주 온몸과 시간을 바쳐 땀흘린 분이 황금천목사였다고 한 다. 한목사느니 다음과 같이 회상한다."그 수고는 정말 영구불망의 것이야 진정 애국심에서 흘러나오는 정성이었다고 생각해 국가적으로 볼 때에 큰상 과 훈장을 수여해야 할 공로이지 이 일을 위하여 그 거구가 움직일 때마다 굳은 신념과 백절불굴의 기백을 우리 주위를 압도하였지,참으로 본받을만한 거장이었다"고 말씀하였다. "전시에는 누구나 불안하고 쫓기는 심정인데 자 기 일신 외에 누구를 돕는다든가 전체를 위한 섬김의 생각이란 좀처럼 가지 기 어려운 것이 아니겠는가?황목사의 이 애국정신은 천추에 길이 길이 기억 되어야 할 장거라고 생각하지! 천보유방아니 만보유방하리라고 말해도 지나 침이 없을 것이야"하는 한목사의 표정은 당시의 광경을 방금 보고 계신 것 처럼 보였다.

 

5. 피얼스목사를 만나다

수백명의 교역자가 부산에 모여 들었다. 노진헌목사가 시무하는 중앙교회 가 모이는 장소였다.모여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일 외에는 별로 할 일이 없었다. 한목사도 이 모임에 빠짐없이 참여하였다. 마음에 생각되는 일이 많으셨다고 한다. 답답한 심정도 금할 길이 없었다고 한다. 걱정하는 바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 교역자들은 모두 이 나라의 지도자인데 이제 이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마저 힘을 잃고 소망이 없는 맥빠진 사람들이 된다면 이 나라의 장래는? 이 겨레의 앞날은? 기진 맥진하여 이를 악물었다. 처참 한 이 전쟁의 결과는 어찌될 것인가. 하는 불길한 생각마저 머리속에 맴돌 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라고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이 때에 한목사는 피얼스목사를 만났다. 피얼스목사는 6.25전에 서울에서 집회를 가진 바 있었다. 그 때에 한목사가 그의 통역을 맡아 주던 중 인연 이 되어 한목사와는 비교적 가까운 사이였다.6.25가 나자 미국정부의 방침 에 따라서 귀국하게 되었다. 다시 한국에 나오려고 무척 애를 썼으나 군인 이 아니니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후에 한가지 방법을 찾아냈다. 즉 피얼스 박사 자신이 경영하는 잡지사의 기자의 신분으로 나올 수 있음을 알았다. 피얼스목사는 곧 한국에 다시 나왔다. 한국에 와보니 정말 목불인견의 상황 이었다. 상실된 인명, 파괴된 시설,유리방황하는 피난민,불쌍한 고아들,의 지할데 없는 미망인들,한마디로 말해서 피얼스목사는 마음에 큰 상처와 자 극을 받았다 [The man of broken heart]라는 말 이에 다른 무슨 말로 당시 의 그의 심정을 묘사할 수 없었노라고 한목사는 술회하였다.
무언가 한국을 돕고 싶은데 오늘 이런 상황속에서 한국교회를 위하여 무엇 을 했으며 좋겠느냐고 피얼스목사는 한목사에게 상의해 왔다.한목사는 눈을 들어 상황을 살폈다.도움을 받아야 할 일은 하늘의 별처럼 많았다. 우선 시 급한 일이 무엇일까 하고 곰곰히 생각하여 보았다. 오늘의 국난을 대중 앞 에서 믿음과 소망과 슬기로 대처해야 할 책임있는 교역자들을 먼저 생각하 게 되었다. 우리 방황하는 수백명의 교역자가 우선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야 겠으니 교역자 중심의 특별 집회를 열자고 하였다.
합의를 본 후에 장소를 송도로 정하고 부흥회를 열었다. 약 4백명의 목사 가 참석하였다. 숙식을 제공하면서 집회를 하였다. 모든 비용은 피얼스박사 가 담당하였다.
다음에 할 일은 피난민 구호라고 생각하였다. 무엇보다도 기거해야 할 거 처문제가 시급하였다. 군으로부터 다량의 군용 천막을 얻어다가 거처할 곳 을 마련하였다. 물론 이 일도 피얼스박사가 앞장 섰다고 한다. 피얼스 목사 는 영락교회를 끔직이나 사랑하였다. 여러 방면으로 피얼스목사는 우리 교 회를 도왔다.
피얼스목사는 복음선교를 위하여 그리고 구호사업을 세계적으로 펼쳤다. 과로로 인하여 병이 났다. 백방으로 치료하였으나 결국 효과를 거두지 못하 고 고인이 되었다. 그는 생전에 이 구호운동을 위하여 지구를 열아홉바퀴 도는데 해당되는 장거리 여행을 하였다고 한다.
피얼스목사의 신앙은 순수하고도 단순하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그는 그리 스도의 사랑을 몸소 체험한 사람이었다. 하는 일에 대하여 쏟은 정열은 형 용할 말이 모자란다. 그는 정열의 덩어리라고나 할까 전 정열을 바쳐 그리 스도를 사랑하기 때문에 이웃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절대 순종할 뿐이 었다. 그는 진정 신명을 바쳐 그리스도를 사랑한 분이었다. 사랑을 순수하 게 실언한 분이다. 그분을 [사랑의 화신]이라고 부르고 싶다고 한목사는 증 언하셨다.

 

6. 군복입고 평양에까지

서울이 수복된 후 다시 평양이 수복되었다. 한목사는 대한기독교구국단 회 장의 신분으로 군복을 입고 경영하였다.
평양이 수복되자 평양 시민 선무목적을 띠고 평양에 가셨다. 실은 지하에 숨어있던 기독교인들의 생사를 확인하는 일이 더 중요하였다. 그리고 중요 한 것은 북한의 교회 재건문제이었다.
우선 서문밖 교회에서 감사 축하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다. 정말 수를 세일 수 없을 정도의 무리가 모여 들었다. 숨어 살던 사람들은 이발도 면도도 세 수도 못한채 모여왔다.참으로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눈물없이 볼 수 없는 감격적인 장면이었다고 한목사는 회고하신다.
한목사 일행은 우선 김일성대학 도서관을 보았다. 모든 기물과 책들이 되 는대로 흩어져 있었다. 황망히 도망간 흔적을 역역히 볼 수 있었다. 다음은 숭실대학 부근 과거 선교사들이 살던 집들을 돌아보았다. 동행한 선교사들은 자신이 살고 있던 집이여서 그런지 매우 관심있게 살피고 있었 다고 한다.

 

7.옥호열 선교사

옥호열 선교사는 한목사의 프린스톤 동기동창이다. 신학교를 졸업한 후 자 원애서 한국선교사로 부임하였다. 옥선교사는 끈기있게 책임감이 강한 목사 였다. 온건한 신학적 배경을 토대로한 그의 정열적인 신앙은 많은 사람에게 본을 보였다. 6.25사변이 발발하자 미국 정부방침에 의해 일시 귀국하였으 나 다시 종군목사의 신분을 가지고 다시 나왔다. 그는 미군의 종군목사의 책임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사랑하는 한국의 선교사로서의 사명도 최선을 다하여 수행하였다.
1.4후퇴시에 끈질긴 교섭끝에 북한에 산재해 있던 교인 3천명을 원산에서 배를 태워 남하하게 한 일은 참으로 놀라운 업적이 아닐 수 없다.옥선교사 아니고는 아무도 해낼 수 없는 큰 일이었다고 한목사는 감격어린 어조로 말 씀하신다.
이승만대통령의 용단으로 반공포로가 석방된 후 석방된 포로 중에서 젊은 그리스도인을 선발하여 신학공부를 시켜서 목사가 되게 한 사실을 그의 선 교사업 중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그의 도움으로 목사된 사람이 100명이 넘는다고 하면서 한목사는 다시 경의의 표정을 감추지 못하신다.
옥목사는 한목사의 동기동창일 뿐만 아니라 절친한 친구이다."옥목사가 결 혼할 때에 나 자신이 여러가지 시중을 직접 들어 주었지"하는 한목사는 감 회 깊은 회억의 순간을 가지신다. 옥목사는 영락교회의 협동목사로 모셨떤 사실은 모두 잘 아는 사실이다.
그는 정년이 되어 귀국하였다. 수년전에 그 부인이 먼저 세상을 떠났고 그 의 나은 생애를 고독하게 지내시다가 역시 수년전에 소천하셨다.

 

8. 보린원 원아 미공군기편으로 제주도에

유엔군은 전면 후퇴하기 시작하였다.한목사 일행도 서둘러 평양을 떠나 귀 경하였다. 후퇴하는 군중은 매일 천여명씩 영락교회를 거쳤다. 영락교회는 여러 면으로 저들을 돕지 않을 수 없었다. 어느듯 크리스머스를 맞이했다. 아직도 남아 있는 겨우 5백여명이 모여서 에배를 드렸다. 남은 교우들도 각 기 사정이 허락하는대로 피난길에 올랐다. 향방은 대개 대구 부산 제주도였 다. 한목사는 보린원 원아 60여명을 미공군 비행기편으로 제주도로 옮겼다. 참으로 고마운 일이었다. 한목사는 할 수 없이 서울을 떠났다. 우선 부산에 머물기로 하였다. 정부는 1월 4일 서울에서 철수하였다. 부산을 임시 수도 로 선포하였다. 일반 시민들도 그의 전부 남쪽으로 철수하였다. 중공군과 괴로군은 대체로 37도선 즉 오산,장호선,제천,영월,삼척선에서 저지되었다.

 

9. 피난길에 세운 기념의 석

6.25는 민족사적으로 비극인 동시에 교회사적으로는 수난속에서 새 전기를 마련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인지케 하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이런 어려움 속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강한 팔과 큰 손이 하시는 일을 직접 경험하였다.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군의 경서함이 헛되었다는 사실도 경험할 수 있었다.
서울을 떠난 영락교회 교인들은 대개 대구,부산,제주도에 정착하였다. 어 디에서도 하나님의 권고하심과 임재를 깨닫고,감사의 제단을 쌓고,회개와 감사의 기도드릴 것을 잊지 않았다.
대구에서는 대구영락교회를 부산에서는 부산영락교회를 ,제주도에서는 제 주영락교회를 세우고 교회당을 신축하고 당회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소속지 역 노회에 가입하는 일을 잊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지도에 의한 것이었 다.
사실 한목사는 [영락] 이란 두글자를 기념으로 세운 지방교회의 이름에 붙 이는 것을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다. 원칙적으로 [영락]이라는 글자를 빼고 지방교회 이름답게 부르도록 권유했으나 결국 그렇게 되지 않음을 부끄럽게 생각하노라고 하신다.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고 지금껏 별반 큰 부작용이 없음을 다행으로 생각하시노라고 부언하신다. 대구영락교회를 제외하고는 모두 횐돌로 교회당을 건축하였다. 역사적 의미를 지닌 돌집이요 교육의 돌 집임을 자처하는 백석의 전이다.

제7장 교회의 기반을 더욱 공고히

1. 세가지 사업 목표

한목사가 설정한 세가지 사업 목표와 네가지 지도방침은 영락교회의 실상 과 그 참 모습을 설명하는 [씨와 날]이라고 본다. 이것은 영락교회의 뿌리 중의 기간이 되는 뿌리로서 영락교회의 역사적인 뿌리이며 방향이라고 할 수 있다.
세가지 사업 목표라 함은 [전도][교육][봉사]이다. 한목사의 증언대로라면 이 삼대사업은 장로교 초대 선교사들의 선교정책과 일치하는 것이라고 한 다. 구체적인 설명을 생략하나 꼭 강조하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다. (1) 삼대사업의 발전이 곧 영락교회의 발전이며 삼대사업의 확장이 곧 영 락교회의 확장이며 삼대사업의 알차점이 곧 영락교회의 알차짐이라고 이해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교회의 부속건물의 명칭을 [선교관][교육관][봉사관] 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삼대사업에 대한 영락교회의 불변의 의지를 상징한 다고 보아야 마땅한 것이다. 상징만이 아니라 그 실제를 말하는 건물이요 그 내용을 약속하는 증거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즉 영락교회가 계획하고 경영하는 모든 일들이 이에서 연역되고 이에서 귀납되게 하는 것이 이 사업 목표를 세운 한목사의 뜻이라고 믿어마지 않는다.

 

2. 네가지 지도방침

네가지 지도 방침이라 함은 곧 영락교회가 걸어 나아가야 할 다음과 같은 신앙노선을 의미한다.

(1) 성서중심의 복음주의적 신앙
(2) 경건한 청교도적인 생활훈련
(3) 에큐메니칼 정신으로 교회 상호간의 협력과 연합 사업에 적극 참여
(4) 교회의 대 사회적인 양심의 구현이다.

첫째로, 복음주의적 신앙이라 함은 성경중심, 그리스도 중심, 십자가와 부 활 중심의 신앙을 의미한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을 믿는 믿음을 통하여 개인적으로 주어지는 구원을 의미한다. 구조적 인 악을 위하여 사회개혁,사회혁명을 구원의 끝이라고 하는 사상과는 구별 되는 말이다. 모든 일에는 선후가 있는 법이라고 한목사는 힘주어 말씀하신 다. 그리고 복음주의라 함은, 소위 자유주의 노선과는 대립되는 말이다. 영 락교회는 처음부터 복음주의 노선을 고수하여 왔다.[처단과 분열][좌와 우] 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영락교회는 한목사의 지도방침에 따라 온건하고 전통 적인 성서중심의 복음주의적 신앙노선을 고수하였다.독선적인 근본주의적 보수정통의 유혹에 기울어지지도 않았고 오만한 자유주의의 흐름에도 한눈 팔지 않았다. 성서중심의 복음주의적 신앙의 길에서 흔들림이 없이 걸어왔 다.
둘째는 청교도적인 생활훈련이다. 청교도적인 생활이라 함은 온전히 거듭 난 생활을 의미한다. 회개하고 새사람된 사람의 생활을 의미한다. 복음을 믿음으로 거듭난 사람의 생활의 열매는 다음과 같다.

(1) 성결한 생활
(2) 성실한 생활
(3) 근면하는 생활
(4) 절제하는 생활
(5) 사랑하는 생활하는 의미한다고 그는 말씀하신다.

1945년 11월 25일 밤 교회설립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한목사님은,"우리 믿 음의 형제들은 청교도적인 생활을 영위할 것임은 물론..."하는 말씀이 있었 다.
한국교회가 진정 한국을 사랑하는 민족교회라고 자처한다면 오늘 우리 사 회의 온갖 부조리와 극단의 이기주의의 산물인 범법행위와 도덕부재의 세상 을 만드는 일체의 퇴폐풍조와 공동체의식을 무시하는 이기주의의 행패와 범 신론적인 사상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비생산적인 그리고 낭비적인 풍토와 황 금을 만능의 도구로 생각하는 풍조를 안와좌시할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신 다.
진정한 정의로운 복지사회를 구현하려면 이 겨레의 일상생활 특히 예수 믿 는 우리들의 실생활만이라도 반드시[질박 검소][근면 정직][성실 절제][청 정 무사]의 기풍이 안과 밖에서 싹터야 하겠다고 역설하신다. 신문에 보도된대로 지난번 부활절 메시지의 말씀에서도 우리 사회에 심화 되어가고 있는 허욕과 사치,무분별한 낭비를 걱정하시면서 절제하는 생활을 강조하신 바있다.
셋째는 에큐메니칼 정신이다. 에큐메니칼 정신이라 함은 협력,협동,동참, 참여의 정신을 의미한다. [백화만발]이란 말로 표현하는 꽃의 세계를 볼 때 에 그 다양성과 통일성은 실로 놀라마지 않는다. 풀이나 나무, 새나 짐승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한 그리스도를 믿으나 그 이해와 표현,그리고 각기 강조하는 점이 다소 다 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교파가 다르고 이에 따라 정치 예배의식 등이 다소 다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비록 교파는 다르지만 교파를 초월해서 온 교회 가 다같이 당면하는 일 즉 국가,민족 사회를 위한 봉사나 복음전파에 있어 서,서로 앞장 서서 협력할 줄 알아야 한다고 역설하셨다.
이종성목사는 "한경직목사는 일찍 세계교회에 눈뜨셨고 한국교회의 갈 길 을 잘 알고 계셨다"고 하였다. 한 목사는 세계를 전도의 장으로 삼아 땅끝 까지 예수님의 말씀을 전하는 일에 협력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하신다. 온세 계의 형제들과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교회의 사명을 다하자는 뜻이라고 말씀하신다.
넷째는 올바른 사회봉사와 사회참여이다. 우리 주님은 죄인을 불러 영혼을 구원하셨을 뿐만 아니라 병든자를 고쳐 주시고 주린자를 먹이시고 슬픔 당 한자를 위로하셨다. 그리스도는 지금도 교회를 통하여 이 일들을 계속하고 계신다.그러므로 교회는 전도를 할 뿐만 아니라 사회를 섬기는 많은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의료사업, 사회복지사업,교육사업,모든 문화사업에 깊 은 관심을 가지고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구원받은 성도들이 살만한 사회와 국가를 이룩하기 위하여 힘을 써야 할 것이다. 곧 정의가 확립되고 인권이 존중되며 자유가 보장되는 자주국가를 건설하기 위하여 힘을 써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사회참여여 문제에 관하여는 다음과 같이 간단 명료한 말씀을 하셨다.

(1) 교회와 정치는 반드시 분리되어야 한다.
(2) 국가가 교회의 내정을 간섭할 수 없는 것처럼 교회는 정치에 직접 간 섭함을 허용치 않는다.

 

3. 그가 생각하는 목회자상

한목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이상적인 목회자상]은 어떤 것입니까 하고 문의 한 바 있다. 그는 지금까지 [이상적이란 말]은 생각해 본 바 없으나[성실한 목회자]란 말은 항상 염두에 두었노라고 하셨다.

그가 생각하는 성실한 목회자란 우선 다음과 같이 이해하고 싶었다.

(1) 거짓이 없는 목회자
(2) 언행일치,신행일치,표리상부의 사람으로서의 목회자
(3) 事神待人 持己 接物에 있어서 일호의 거짓이 없는 목회자

 

한목사는 [성실한 목회자란?]

1. 자기를 지키는 목회자라고 말씀하면서 딤후 2;15절을 제시하였다."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케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 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다음은 딤전 4:16절을 주셨다.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 게 들은 자를 구원하리라"그리고 구체적으로 다음 네가지를 말씀하셨다.

(1) 중생해야 한다.
(2) 분명한 소명의식이 있어야 한다.
(3) 성막을 짓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4) 계속 성장해야 한다.

2. 강단을 바로 지키는 목회자를 의미한다고 말씀하신다.

(1) 성경중심의 설교를 해야 한다.
(2) 반드시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한다.
(3) 언행일치의 설교를 해야 한다.
(4) 육신,영혼,가정,사회,국가적 생활에까지 미치는 설교가 되도록 노력해 야 한다.
(5) 뭇사람의 손을 잡아 주는 설교가 되어야 한다.
(6) 시대를 통찰하는 십자가 중심의 설교
(7) 기도가 따르는 설교
(8) 뭇양에 관한 실존적인 메시지가 담긴 설교
(9) 종국적으로는 죄인을 구원하는 설교로서 강단을 바로 지키는 목회자가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3. 교회를 운영하는 책임이 있음을 아는 목회가 되어야 한다.

(1) 공평과 화평과 관용으로 다스린다.
(2) 뭇양을 돌보되 길잃은 양,병든 양,약한 양을 돌봐야 한다.
(3) 사업의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
(4) 바른 신앙노선으로 인도하는 지도방침이 분명해야 한다.

 

4. 그의 설교

한경직목사의 설교는 국내 국외를 막론하고 신급의 차에 관계없이 누구에 게도 심금을 울리며 생활의 변화를 촉구하고 심령의 새로운 각성을 격발하 는 설교임을 인정한다. 한목사의 설교는 성경중심의 설교 즉 그리스도의 중 심의 설교이다. 성육신의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이기에 육에서 영에 이르기 까지 개인으로부터 시작하여 가정,사회,민족국가에 이르기까지 전달되는 그 의 메시지는 영감이 있고 감화력이 있고 새 삶의 길을 보여주는 설교이다. 무릎을 세우고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는 능력의 설교이다. 위 로와 평강을 주고 온유와 겸손의 도를 밝히는 설교이다. 깊고 높은 진리를 평이한 말로 표현하는 한목사의 설교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이어서 눈이 미치 지 못하거나 손이 닿지않는 유의 설교가 아니라 구쳐거이고 실존적이어서 우리의 실생활의 장막을 뚫고 들어온다. 무엇보다도 그의 설교는 신행일치 의 간증적 설교이기 때문에 감화력이크다. 겸손하지 못하면서 겸손하라는 설교를 할 수 없다. 사랑하지 못하면서 사랑하라는 설교는 허공을 치는 설 교가 될 것이다. 자신이 애국하지 못하면서 애국하라는 설교를 할 수 있겠 는가 부의 축적이 있고 주는 손을 펴지 못하는 목사는 결코 [네 있는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눠주라]는 설교를 할 수 없다. 한경직목사의 설교 는 신행일치의,언행일치의 설교이기 때문에 감화력이 있고 설득력이 있다. "한경직목사의 설교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꼭 필요한 교 훈을 얻어 가지고 돌아오게 마련이다."이것은 우리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 르치던 곽안전 선교사의 증언이다. "한경직목사는 한국교회의 대표적인 설 교가라고 하면 별로 반대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그의 설교를 자주 들 었고 그의 설교집도 거의 다 읽어 보았지만 그의 설교는 가장 성서적이고 보수적이면서도 그 다루고 이는 폭이 상당히 넓다.
그의 설교는 언제나 두개의 초점이 분명하나 하나는 변치않는 영원한 말씀 이고 또 하라는 변하는 상황 즉 현실에 초점을 두고 있다. 요새 흔히 쓰는 신학적인 용어를 빌린다면 텍스트(Text)와 콘텍스트(Context)를 잘 조화시 킨 설교이다.
사실 이 둘중에 어느 하나를 빼거나 무시한다면 산메시지가 될 수 없다. 아무리 영원불변하는 정통적인 진리를 선포한다 해도 그것이 인간의 현실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면 그것은 성서 주해는 될지 모르나 참 메시지는 아니 다. 또 아무리 상황을 바로 진단하고 인간의 현실 문제를 예리하게 분석한 다. 해도 현실의 모든 문제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해답을 찾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시사해설은 될지 모르나 권위있는 설교는 될 수 없다. 그러 나 한목사의 설교는 언제나 이 두 초점이 잘 조화를 이룬다. 뿐만 아니라 한목사의 그 내용에 담긴 사상은 깊고 넓지만 복음을 설명하는데 사용하는 용어나 해석은 어떤 계층의 사람이든 알아들을 수 있는 평이함에 그 특색이 있다. 특히 그의 설교가 듣는 청중에게 특별한 감동을 주는 것은 그분의 서 교자세이다. 물론 그의 설교집에서도 배우는 바가 많지만 직접 강단에서 선 포하는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면 그 경건한 모습과 침착한 어조에 마음이 사 로잡히게 된다. 더우기 그분의 설교에는 간절함이 있다. 그 간절함은 설득 력이 있어 사람들의 가슴에 파고 듦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정진경목사의 말씀이다.
"목사의 큰 직능은 좋은 설교자인 것이다. 한목사님은 글로 쓴 설교보다 말로 하는 설교가 더욱 좋다. 한 설교에 꼭 한가지는 사람의 마음에 못을 박아준다. 그리고 누구나 알아듣도록 평범하면서도 감동에 젖게하고 소박하 면서도 복음의 핵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예화는 언제나 적절하고 진행 상 강약의 리듬을 고르게 하며 설교를 듣는 회중이 그의 말씀에 빨려들게 한 다. 성구의 제목과 내용의 반복은 있어도 감격과 감동은 그때마다 새롭다. 그래서 그의 설교를 통해 성경이 살아 움직이는 말씀임이 재확인 된다. 그 의 설교는 대중적이면서도 개인 개인의 가슴에 개별적으로 전달되고 또 새 로운 결단을 촉구하게 된다. 그는 천명 만명을 앞에 놓고 설교하면서도 그 설교는 꼭 한사람에게 하는 것처럼 다정하고 직접적이다. 그는 한 사람 한 사람으로서의 천명 만명이지 천명 만명을 하나의 무더기로 휘두르지 않는 다."
이것은 조향록목사의 말씀이다.
"한경직목사에게 있어서 설교는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이다. 첫째 그 분의 겸손이 설교하고 또 그분의 간절한 진실의 기도가 설교이며 그분의 인 격이 설교하고 있다. 그래서 그분의 설교는 듣는 사람에게 거리가 없고 친 근감을 주며 감동적이다."
이것은 홍현설목사의 말씀이다.

제8장 은 퇴

1. 원로목사로 초대

한목사는 신의주에서 13년간, 영락교회에서 27년간,40년목회를 일기로 일 선에서 은퇴하셨다.
만사는 다 [때]가 있다. [나는 때]가 있으며 [죽는 때]가 있고 [시작한 때]가 있으니 [끝나는 때]가 있다.
70세를 고희라고 한다.살만치 살았다는 뜻도 있겠지만 인간의 수명의 가장 귀한 단계에 도달했다는 뜻도 있따. 이 중요한 단계에까지 오르는 사람이 많지 않기에 고희라고 했다고 생각한다.
한목사는 정년은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소감의 말씀과 감사의 말씀을 하신다.
"어언 내 나이도 70이 되었으며 고희의 수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뿐이 다. 더구나 폐결핵으로 앓고 있을 때에 3년만이라고 이 생명을 더해주시면 하는 소원의 기도를 드렸는데 이렇게 건강하게 고희의 수를 누리다가 정년 은퇴할 때까지 일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할 뿐이다. 나의 이러한 감사에는 특별한 의미가 따른다."
고 하시면서

(1) 지금까지 많은 충성된 종들과 같이 일하게 하심을 감사한다. 우리 교 회는 가장 어려운 때에 어렵게 건설된 교회이다. 어느 한 사람이나 몇 사람 의 손이 아니라 부지기수의 믿음의 손길과 충성된 발길이 이 교회 건립의 거름이 되었음을 감사한다.
(2) 우리 교회는 태평성대 속에서 태평가를 구가 하면서 건설한 교회가 아 니다. 우리의 때는 난시요, 전시였다. 우리의 건설은 나라와 유관하고 민족 과 유관한 건설이었다.

국가와 민족에 보탬이 되는 섬김의 건설이었음을 감사한다. 전시가 아니었 던들 모자원 같은 기관이 설립되었을리 만무한다. 탈출의 비극이 없었던들 대광학교와 같은 교육기관이 서둘러 설립되었을리 만무하다. 전쟁으로 인하 여 불우한 소년 소녀들이 시장과 길거리에서 방황하지 않았던들 영락중상업 교등학교를 야간학교로 설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전란으로 말미암아 사상적 으로 도덕적으로 혼란해진 모습이 없었던들 우리의 전도열이 그렇게 높지 못했을 것이다. 어려운 때에 필요한 어려운 일을 하게 하시고 성취케 하신 일들이 사회와 민족을 위한 것들이 되게 하심을 감사한다.

(3) 하나님의 은혜로 교회의 성장이 일취월장하여 성숙에의 단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기초작업을 할 수 있었음을 감사한다.기초가 영원히 흔들리지 않기 위하여 신앙의 동지들과 손잡고 기도하며 일하게 하심을 감사한다. 감사의 기도는 최대의 힘임을 경험하였다. 감사의 기도는 만족과 평안을 선물로 안 겨주고, 감사의 기도는 은혜를 은혜로 알게 하는 믿음의 선물이 되게 하며, 감사의 기도는 나를 겸손에의 길로 갈 수 있는 비결임을 보여준다.
(4) 정년 은퇴는 고갯길을 오르는 길손이 정상에 올라 땀씻으며 온 길과 갈 길을 바라보면서 심호흡을 하는 것과 같음을 느낀다.
(5) 목사의 기도는 축복의 기도요,감사의 기도요, 간구의 기도인 동시에 목회자의 기도는 땀의 기도요,고뇌의 기도이다. 때로는 눈물의 기도요,맥박 의 단절을 느끼는 숨가뿐 기도이다. 목사는 현직에 있어도 목사요 은퇴했어 도 목사인 까닭으로 기도의 내용과 그 특성이 달라질 리 만무하다. 그러나 왠진 더 자유로운 심정을 가지게 된다. 기도의 폭이 넓어짐을 느낀다. 기도 의 시간이 더욱 많아짐을 감사한다.
(6) 은퇴는 필연적으로 일종의 고독감을 같은것을 수반하기 쉽다. 그러나 새로운 비죤을 주시고 힘과 건강이 미치지 못할 정도의 일을 주심으로 고독 이란 것이 발붙일 곳이 없게 하신다. 수많은 신앙의 친구들이 주위에 있음 을 감사한다. 깨끗하고 조용하고 아름다운 환경을 주심을 감사한다. 각종 나무를 주셨고 풍요한 열매를 주셨기에 감사할 뿐이다. 자녀들이 가까이 있 어서 고독을 몰아내 주기 때문에 나는 감사를 생산하는 경험이었다. 그러므 로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도다."하는 찬송이 있을 뿐이다.

1973년 1월 2일 오후 2시에 약 3천명이 참가한 가운데 한경직목사의 원로 목사 추대식이 있었다. 이 추대식에서 공원장로는 다음과 같은 요지의 추대 사를 하였다. "....전략...오늘의 영락교회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은 분 명하지만 자찬할만하니 청백하고 강직한 한경직목사의 노력의 상징이라 하 겠다. 이후에 영락교회를 알기 위하여는 한경직목사를 알아야하기에 원로목 사로 추대하는 것이며 종신토록 한경직목사를 모심과 동시에 목사님이 주신 뜻을 길이 받들어, 주신 말씀을 명심하여 그대로 준수코자 원로목사로 추대 한다."고 하였다.
김재준목사는
"프린스톤에서 같이 공부한 인연으로 한경직목사와의 변함없 는 인간관계를 유지하면서 때로는 흉금을 털어놓고 지내왔다. 노자의 말에 공성신퇴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보통은 진퇴가 어려운데, 담담한 심경으로 은퇴하는 한경직목사에게 존경을 표하게 된다. 한경직목사는 신학을 위한 대학원에 진학하려다가 건강이 나빠져서 중단하였다. 후에 그것이 폐결핵으 로 밝혀져 요양소에 있을 때, 하나님께서 몇년간만 더 살게 해주신다면 하 나님의 사업을 하다가 하나님께 돌아가겠다는 기도를 계속하고 있다는 편지 를 저에게 한 적이 있다. 그런데 40년간의 목회 후 은퇴까지 하니 오묘한 하나님의 경륜을 볼 수 있다. 한경직목사는 성공적인 목회를 하였다 그는 인간관계가 원활하며 평화스러운 인상을 준다. 그의 미소를 보면 화평해진 다. 여기에 목회의 비결이 있는 것 같다. 신학교의 문제로 한경직목사와 상 담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때 자기의 생각과 남의 생각을 절충시키는 조 화의 방법으로 사람과의 마찰을 피함을 나에게 알려 준 것이다.원활한 계승 을 위해 후임자를 준비하라고 권하였을 때 후임자가 있다고 하였으니 지혜 롭고 훌륭한 마감의 목회를 장식한다고 생각하였다... 중략... 퇴임하면서 한가지 본직이 없어지는 반면에 여러가지 잡직이 생기면서 영광스러운 일이 기다리고 있다. 영락교회에 쏟았던 전력을 여러 교회 교파(카토릭까지 포함 함)에 기울일 것과 국가의 어려운 문제에 대해 전력을 다해 줄 것을 바라는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다.
선교사 마삼락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한국의 복음의 능력을 상징화 한 한경직목사는 한국교인만이 아니라 교회의 지도자이며 한국의 통일을 위 하여도 일하는 분이다."라고 하였다.
홍현설박사의 추사는 다음과 같다."영락교회의 한 시대는 끝나고 다른 시 대가 시작된다. 한경직목사는 영락교회와 아니 한국교회와 분리될 수 없는 분이다. 그는 세계에서도 뛰어난 교역자이다. 위대한 설교자는 인간의 영혼 에 대한 사랑을 소유해야 하는데 한경직목사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 있다. 가난한 사람과 부유한 사람,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그리고 학식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들을 구별없이 사랑한 것이다. 사람의 고뇌를 얼굴을 통해 인식하 는 목회자였다. 신의주 제2교회에서 목회할 때,가난한 사람을 심방하면 자 기의 돈을 쓰는 것이 상례였다.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일본경찰에 대하 젊었 을 때 의시가 3년밖에 살 수 없다고 하였는데 벌써 그 이상을 살았으니 죽 어도 좋다고 하였다. 한경직목사를 투옥시키면 그의 뒤를 따를 4백여의 젊 은이가 있었던 것이다. 목사와 교인 사이에 우정의 관계로 부터 권위가 생 기는 법이다. 그런데 한경직목사는 고통과 역경속에 있는 사람에 대한 봉사 와 위로를 성실하게 실천한 것이다. 영락교회강단을 맡았던 한경직목사는 세계의 강단을 맡아야 한다. 후계자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기를 빌며 또 한 세계의 양심을 깨우치는 광야의 소리인 영락교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총회장으로 부터 감사패가 수여되었다. 특이한 것은 영문으로도 표기를 하 였는데 이유인 즉 한경직목사가 세계적인 목사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와같은 추대사 및 축사에 대해서 한경직목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건강이 좋지 않아 오래 살 줄 몰랐는데 하나님께서 은혜로서 도와 주셨으니 하나님께 감사한다. 은퇴하는 자에게 도에 지나친 말씀을 해 주셨는데 나는 영락교회 목사로서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였으니 하나님께 부끄럽다. 영락교 회가 축복받은 것은 당회원들의 충성, 권사들의 노고,남녀집사 및 권찰들의 수고,그리고 교회학교 교사들과 성가대원들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인 것이 다. 이 모든 사람들이 교회를 사랑하였다. 은퇴하는 이 때에 나는 사과해야 할 일들이 있다.교인들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들과 동참하지 못했으며 나 를 만나지 못하고 간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백낙준 박사는 박조준목사 위 임식 설교에 "포도나무는 새 가지가 나와야 한다"고 하였다. 이제 저 보다 는 모든 면에 뛰어난 사람을 세워주셨으니 저보다 더 사랑하고 도와주셔야 한다."
고 말씀하셨다.
훌륭한 목회를 끝내고 은퇴라는 한경직목사의 겸손한 답사였다.

 

2.계속되는 사업들

(1) 군복음화 운동
은퇴하신 후에 한목사님이 계속 생각하고 계신 사업의 그 첫째가 군복음화 사업이다. 한목사는 평소부터 군복음화 운동에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계셨 다. 학원 복음화의 마찬가지로 이 운동도 복음화 운도에 있어서는 하나의 황금어장으로 보신 것이다. 교육 정도의 차,생활환경의 차 등으로 인하여 당면하는 문제가 없지 않으나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누구에게나 어떤 상황에서도 복음이 되기 때문에 군복음화하는 모든 복음화 운동에 우선되는 운동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60만 대군이 복음화 될 때를 상상해 볼 때에 우리나라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가 된다고 한목사는 보고 계신다. 군복음화 운동은 군 자체에도 정훈교육의 효과, 군기확립의 효과 등이 부수적으로 얻 어지는 것만도 운동 중의 운동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복음전파적인 측 면에서 볼 때에는 더욱 두번 다시 얻을 수 없는 기회라고 그는 간주하신다. 어느 한 때 바로 이 운동의 어려움이 있을까 걱정해서 즉 전도의 문이 닫칠 까 걱정해서 은인자중 입을 봉하고 있을 때도 있었다. 이렇듯 한목사는 이 문제에 깊은 관심을 항상 가지고 계시다. 당연히 교단적으로 더 폭 넓게 관 심을 가져야 한다고 하셨다.
이에 따르게 마련인 군목의 대우문제,군목의 장기복무문제,군전도에 필요 한 정책수립문제 등 많은 문제가 있다고 보시는 것이다. 아직도 일반의 관 심에는 미치지 못함을 아쉬워 하신다. 우선 각 지교회가 앞장서서 힘을 쓰 고 또 힘을 합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하신다. 산발적으로 다소의 재정적인 지원을 소극적으로 하는 것은 본격적인 군복음화 사업이라고는 할 수 없다 고 하신다. 이 문제의 근본적이고 적극적인 대책 없이는 현재 당면하고 있 는 문제와 또 전망되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한목사는 사 려깊게 말씀하신다. 사실 이런 문제 해결 없이는 언제나 무력한 현상유지에 급급해하는 양상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걱정하신다. 이 문제 해결을 위 하여 기금 조성 작업이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지만 더 적극적인 활동과 관심 을 모아야 할 것이라고 간절히 말씀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으로서 애국하는 길 중에 가장 적절한 애국의 길은 바로 전군복음화 운동에 참가 협조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나라를 복음으로 사랑하는 일,나라를 복음화운동 전개로 사랑하는 일 이상의 훌륭한 길이 어 디 있겠느냐고 하신다. 특히 우리의 적이 사상적인 것과 내적,즉 도덕적인 부패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두가지 적을 쳐 부수는 무기는 [복 음]밖에 없다고 잘라 말씀하신다. 영락교회가 솔선하여 이 운동의 확고한 기틀을 마련하기를 바란다고 부탁의 말씀도 있었다.군당국은 군자체와 국가 르 마위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협조 동참해야 할 것이라고 하신다. 군전도의 문을 의식적으로 더 활짝 열어야 할 것이라고 당부하신다. 지휘관의 성격, 종교관 등에 따라서 이 운동이 기웃둥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주의의 말씀을 주신다. 현 시점에서 볼 때에 이 운동 이상 더 큰 애국운동은 없다고 보고 싶다. 군의 정신무장은 바로 이[복음]으로 되어야 안심할 수 있다고 본다. 더구나 생사를 예측하지 못하는 군생활에 있어서 저들의 영적인 문제를 해 결해 주지 않고는 군의 문제를 완전히 해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느냐고 반문하신다.

 

(2) 아세아 교회진흥원 사업
한목사가 은퇴하신 후에도 계속 관심을 가지고 생각하고 게신 두번째 사업 은 교회진흥원 특히 아세아 교회진흥원 사업이다. "이 사업의 필요성은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이 사업의 범위도 그지없이 넓음을 짐작하고 있기에 역부족의 사업인 줄 알면서도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와 기회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다. 특히 피얼스박사의 도움이 없었 던들 시작의 실을 보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모든 일은 합동하여 선을 이루 시는 우리 주님의 역사의 일단이라고 생각하며 동남아 복음화에 하나님의 손길이 이로써 펼쳐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하면서 일의 중요성을 처음부터 마음에 간직하고 있었다.
동남아에 산재한 나라는 모두가 회교국이 아니면 불교국이다. 차라리 고정 된 종교가 없는 나라라면 전도의 문이 더 용의하게 열릴 것이지만 기성종교 인 이교가 전통적으로 굳게 자리잡고 생활화되어 있는 나라들이기에 복음화 작업은 인간의 안목으로는 매우 어렵게만 생각된다. 그러나 인간의 어려움 이 곧 하나님의 어려움일 수는 없다. 니느웨성을 회개캐 하신 하나님이시요 로마제국을 복음으로 정복한 하나님이시다. 비록 이교국이지만 진리의 겨자 씨 한 알이 결국 큰 나무를 이루고 숲을 이루워 공중의 나는 새가 깃들일 때가 있음을 약속하신 하나님이시다. 한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으면 30 배,60배,100배의 열매가 있을 것을 약속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는다.
일의 성과는 하나님께 맡기고 일은 우리가 해야 할 것이다.이 사업은 기념 사업의 장식품이 아니라 기념사업의 생명이 되기를 바란다. 한목사가 하던 사업이어서 계승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의무의식에 얽매어 사업을 위한 사업이 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아세아는 기필코 복음화 되어야 한다. 오늘의 실정으로 보아 아세아의 복 음화는 처음부터 한국교회에 부여된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산동선교를 위시 하여 태국선교등 선교사업의 시도와 점차적인 확장이 이를 뜻한다고 생각한 다. 개교회가 선교사를 파송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세아교회진흥원을 통하 여 보다 근본적인 보다 폭넓은 과감한 사업이 구상되고 실천되기를 바란다. 고시적이고 연레적인 행사형에 발 묶이는 진흥원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하신다.

 

3.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나라를 사랑한다."고 하시는 한목사의 말씀을 그대로 옮겨 기록한다. 말씀하신 것을 받아 썼으니 다소의 차이가 있을런지 모르겠다.
"그 동안 나는 여러 차례 외국에서 집회를 인도하지나 초청강사로서 갔던 일이 많다. 모든 집회가 유의했고 은혜그러웠다. 그러나 내가 누구에게도 은혜를 끼쳤다는 생각을 해 본 일이 없다. 언제나 나 자신이 여행을 통하여 은혜를 받게 마련이다. 강의 내용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부터 시작하여 말씀 을 전달하는 과정,수많은 믿음의 친구들과의 사귐을 가지는 일,외국 풍물을 새로운 각도에서 경험하는 중에서 얻은 바가 많다. 외국에 여러번 가서 여 러분을 만나 말하고 사귀는 중에 미국에서는 몇차례 시위의 대상이 되어 본 일이 있다. 시위를 벌이는 분들 중에는 친분이 있는 친구들도 있었다. 시위 의 목적은 당시의 정부체제에 대하여 왜 말이 없느냐는 것이었다. 때로는 뜻하지 않게 없는 사실을 만들어 유포시키는 일도 있었다. 한편 섭섭한 마 음이 없지 않았으나 그러나 별로 쾌념치 않았다. 그리고 변명겸 내 소신을 밝힐 내 믿음의 양심에 따라 나라를 사랑하는 까닭에 나는 나의 애국의 길 을 걸을 따름이다.
이 문제에 관하여 우리 교회의 시무장로님 중에서도 문의한 적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어째서 말이 없느냐 하는 말이고 때로는 어째서 침묵만 지키느 냐고 물어온다. 나는 다음과 같은 기본 입장을 생각한 후 기도하고, 기도한 후 다시 생각하는 중에 내 내심에 나 나름대로 간직하는 바 생각이 있노라 고 하였다.

(1) 강단은 시국 강연장에나 정치논단이 아니라는 점을 항상 기억한다.
(2) 다른 사람의 흠점을 거론하지 않는 대원칙을 잊지 않는다.
(3) 더구나 본인이 없는 곳에서 그 사람에 대한 공격적인 얘기를 공개적으 로 하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
(4) 어느 특정인에 관한 일은 언제나 직접 그 개인에게 조용히 충고하고 주의를 촉구한다. 그것이 정치적이거나 도덕적이거나 상관할 것 없이 그런 방법을 취하는 바 이 사사로운 면담의 대화의 내용이 비록 공적인 것이라 하여도 그 내용을 공개할 수 없는 것이다.
(5) 정치노선에 유관한 것은 나는 국가의 안보적 차원에서 심사숙고한다. 안보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통제정책에 이용하는 폐단과 위험이 있다. 하더라도 그 자체가 정말 국가안보에 미칠 가능성이 없다고 단언할 수 없는 한 안보위주의 길을 걷고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언제나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실정이다. 국제적인 역학적 균형의 이치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 위험의 가능성을 전 적으로 배제할 수 없는 한 언제나 지혜롭게 처신해야 한다. 나는 나라를 내 생명과 같이 사랑한다. 그러므로 공산주의는 나의 제일의 적이다. 38도선이 우리 국토를 양단하고 북의 공산주의의 침략적 위험이 항상 도사리고 있어 서 우리를 엿보는 사실이 엄연히 있는 한 우리의 문제는 우리 나라와 민족 의 차원에서 모든 것을 보고 모든 것을 계신하지 않을 수 없다. 일시적인 감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때로는 깊은 통찰력에 의하여 인내에 인내를 더하는 참을성이 필요하다.
그러나 정말 국가의 존망이 달려있는 위기가 닥쳐왔을 때에야 누가 무엇을 주저할 것인가? 모두 몸 받쳐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6) 사회참여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은 모름지기 두가지 면을 생각해야 한다. 사회복지에 유관한 사회참여는 국가의 손길보다 더 앞설 수 있다면 더욱 좋을 것이다. 이것은 우리 신앙인의 쌍무적 사명이기 때문이다. 그러 나 정치적으로 다뤄야 할 사회참여 문제는 신중을 기해야 할 것이다. 항상 사회질서와 국가의 안위 문제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언제나 공산당이 좋아 하고 공산당이 박수치고 공산당이 38선을 넘볼 기회를 주는 모든 물리적인 투쟁을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상당히 오래전 일이다. 가까운 친구인 모 저명 목사의 부탁으로 어떤모임 에 갔었다. 모두 기독교계 굴지의 인사들이 모였다. 화제는 모종의 서명운 동을 전개하여 국내외에 널리 알려서 우리 국민의 여론의 소재를 밝힘과 동 시에 보다 유효한 물리적인 행동의봉화 구실을 해보자는 것이었다. 수일 후 C군이 찾아왔다. C군은 나의 친한 친구 목사의 자제이다. 나를 자주 찾고 매우 유능한 청년이었다. 나에게 서명을 부탁하였다. 나는 이미 본바가 있 고 생각한 바 있었기에 마음에 정한 바 있었다. 이 운동의 결가가 유효하지 도 못하려니와 늑대를 쫓으려다가 호랑이를 불러들이는 격이 되거나,혹 떼 려 갔다가 혹 붙여오는 격이 될 것임이 명백하겠고 동시에 실효를 거두지 못하면서 공연히 대혼란만 가져올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문이 막 열 린 군전도의 길이 막힐 것이 분명하였다. 나는 기도하는 심정으로 서명을 사양하였다.친구들은 모두 나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을런지 모르나 나로서는 변할 수 없는 신념이 있었다. 무위한 혼란은 공산당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을 언제나 생각해서 조심해야 한다.공산주의 하에서는 자유?인 권?생명? 아무것도 없으며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강건너 불구경하듯이 개인의 피해의식만을 앞세워 대중을 오도하는 일을 우리 신앙인들은 삼가야 할 것이다. 특히 우리 신앙인들은 역사가 하나님의 수중에 있음을 기억하고 참아야 할 때에는 참아야 하고 침묵을 지켜야 할 때에는 침묵을 지키며 기 회를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리되, 결연한 행동이 필요할 때에는 사생취의 (捨生取義)의 자세로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다.
가거 R정권 때에는 나를 흥사단계 사람으로 오인하고 나를 질시하고 나를 경계하고 나를 경원하였다. 그러나 처음 세운 나라의 기초가 튼튼해야겠나 다는 생각에 가능한 모든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C정권 때에는 그저 걱정만 하였다. 하나님 앞에 기도로 걱정하고 또 도움 을 청하였다.
P정권 때에는 나는 많은 어려움을 당하였다. 초기 C씨기 기틀을 잡고 있을 때에는 민심 수습을 위하여 외국 특히 미국에 우리의 뜻을 전달하기 위하 여 고 짐활란박사,최두선박사 등과 같이 민간 사절단으로 도미하여 많은 애 를 썼다. 중도에 주인이 바뀌었다. P씨가 정권을 잡았다. 오도된 정보에 의 하여 우리집 가택 수색까지 하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 다. 내가 국가를 대표하여 국위를 선양코저 외국에 나가있는 동안에 내집을 수색하였다. 물론 귀국한 뒤에 면대하여 정중한 사과를 받은 일이 있다. 그 러나 나는 국가의 안위를 앞세워서 할 일을 다 했을 뿐이다. 국가의 안보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못마땅하지만 그렇다고 혼란을 조성하는데 한몫 낄 마음은 없었다. 이는 오로지 나는 대한민국 국민이요 예수 믿는 목사로 서 공산주의자들을 제일의 적으로 보기 때문이었다. 저들이 좋아하고 저들 이 쾌재를 부르고 저들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는 일은 결코 할 수 없다는 신 념 때문이다. 현시점에서는 이것을 먼저 앞세워야 할 애국의 길을 걸어야겠 다는 생각이 굳게 서 있다.

 

4. 고맙지만 사양하노라

본당이 건축된 후 교회는 급성장하였다.이에 따라서 많은 부속건물이 필요 하였다. 노후한 구건물들은 하나 하나 철거하게되고 새건물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였다.
목사 사택으로 사용하던 건물도 물론 말할 수 없이 낡은 건물이었다. 당회 가 의논하고 목동에 목사 사택을 한채 지었다. 넓은 대지에 이층 문화주택 이라고 들었다. 완성된 후에 그 사택으로 모시고자 하였다. 그러나 생각대 로 되지 않았다.
당시 한목사의 심정은 매우 괴로웠다고 했다. 입장이 난처함을 느끼지 않 을 수 없었다고 한다. 당회의 성의는 감사하지만 과연 목사가 교회 구내를 떠나는 것이 마땅한 것인가 하고 거듭 생각하여 보았노라고 하셨다. 사택이 교회와의 거리가 멀어지면, 그 거리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교인들과의 거리 가 멀어지는것 같고 교인들과의 대화의 기회를 스스로 멀리하게 만드는 우 를 범하는 것 같아서 그리고 이시할 마음이 없다고 하신 모앙이다. 두거나 사모님의 태도는 더욱 완강하였다. 가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좀더 넓게 편리하게 살기위하여 목사가 교회 구내를 떠나 멀리가는 것은 양심이 허락 지 않는다고 반대하였다. 당회는 그런데까지 깊이 한목사님을 이해하지 못 하였다. 부끄러운 일이다. 해외 집회를 위하여 필요한 여비를 드리면 남은 돈은 언제나 반제하셨다. 생활비를 성의껏 드리면 두 늙은이가 쓰면 얼마나 쓴다고 이렇게 많이 주느냐고 하시면서 꼭 필요하신 금액만 떼고 교회에 돌 려주시었다. 그러므로 김준곤목사는 "한목사는 영원한 청교도다.그가 청렴 청빈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가 옷을 벗어주 고 봉급을 털어주어서 사모님이 애를 먹었다는 많은 일화들이 있다.모자원, 보린원,경로원,농아인 등 불우한 사람들을 돕는 교회 구호사업도 주님의 사 랑의 사회적 실천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하는 일은 선전이 없다. 오른손 이 하는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는 숨은 이야기가 더 많다. 실천에 있어서 의 식과잉이 되어 북치고 나팔부는 사람들 가운데서 홀로 세미한 피리소리 같 은 실천자! 그래서 더욱 성자답다."고 증언하신다.

 

5. 경험과 비죤

영락교회는 27년간 목회하시고 은퇴하신지 어언 10년의 세월이 흘렀을 때 한목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린바 있다. "목사님에게 앞으로 다시 5년 간의 목회의 기회를 드린다면 어떻게 교회를 운영하시겠습니까?"
"나는 과거의 목회생활을 회고 성찰은 하면서도 만일 내게 다시 목회의 기 회가 주어진다면 이렇게 혹은 저렇게 해보리라는 가상적인 생각은 꿈에도 해본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매우 어려운 질문이기에 대답할 수 없음을 유 감으로 생각한다."고 전제하시면서 "다만 한가지만은 말할 수 있노라"고 하 신 적이 있다.
"흔히 나이 많은 사람을 경험의 사람이라고 하고 젊은 사람을 비죤의 사람 혹은 꿈의 사람이라고 하지. 경험을 무시하는 꿈의 전진은 새로운 창조와 개척을 가져올 수 있으면서도 저돌적인 행동방식으로 인하여 주변의 문제와 후속적인 문제 때문에 뜻하지 않은 부끄러움을 당할 우려가 있다. 반면에 경험은 신중과 슬기를 동반하여 만사를 통찰과 전망의 맷돌을 서서히 돌리 면서 결정하기 때문에 극히 건설적인 성과를 마련할 수 있지만 그것이 도를 넘으면 폐쇄적이어서 촌보의 전진이 없는 옛것을 전수하는 낙오의 부끄러움 을 당하기 쉽다. 그러나 경험이 비죤에 발 맞추고 비죤이 경험과 어깨동무 를 한다면 실수없는 전진적인 창조의 건설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이 시대는 꿈을 위주로 하는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dead hand ruling이 라는 서양속담을 명심하고 시대적인 착오를 범하는 우를 보여서는 안될 것. "이라고 말씀하셨다. 경험을 무시하지 않는 비죤,비죤을 경시하지 않는 경 험,이 양자가 중용의 도를 지켜야 한다고 하셨다.꿈과 경험을 겸득한 지자 가 없는 것은 아니나 지나치게 내꿈,내경험,내이상,내능력만을 의존코자 하 는 우자가 없는 것도 아니다. 인간의 지는 한계가 있고 인간의 힘도 한계가 있다.이것을 아는 겸손이 있어 비로소 위로부터 주시는 뜻을 구현할 수 있 는 참 인간이 될 수 있다.

 

6. 오직 성령만으로

한목사가 당회장으로 계실 때는 교회에 몸이 매여서 국외 혹은 국제적인 모임에는 초청 받는 대로 다 나가실 수 없었다. 그러나 일선에서 은퇴하신 후에는 국내는 물론 국제적 모임에 강사로 자주 참석하실 수 있게 되었다.
1968년 독일 백림에서 열렸던 세계 전도대회에 1973년 2월 27일부터 1개월 간 싱가폴 및 태국에서 열린 국제 선교 협의회 강사로, 1973년 6월11일부터 2주간 오사카 및 교오또에서 제일 교포 교회 연합 부흥회 강사로,1975년 1 월 13일부터 3개월간 세계 선명회 이사회 참석 및 재미 한인교회 집회 인도 차 도미하였다가 귀국길에 싱가폴 학가이 전도훈련원 강사로, 1975년 10월 28일부터 1주간 대만 대북에서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및 홍콩에서의 빌리 그래함 전도대회 강사로 ,1975년11월 22일부터 10일간 이란 기독교 교역자 세미나 강사로, 1976년 1월 18일부터 3개월간 국제 전도 협의회 세미나 강 사로 미국 한인교회 순회집회 강사로, 1976년 6월 17일부터 4일간 일본 동 경에서 열린 제9회 재림대망 동경대회 강사로, 1978년 7월 5일부터 1주간 한경직목사 설교집 일본어판 출판 축하회 및 재림대망 동경대회 강사로, 1979년 5월 3일부터 5일간 싱가폴 학가이 전도 훈련원 강사로, 1979년 11월 10부터 1주간 싱가폴 학가이 전도훈련원 강사로, 80세를 바라보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동분서주하면서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이런 국제적인 집회를 위하여 북미,남미,카나다,뉴질랜드,호주,동남아,중 동,아프리카,구라파,일본 등 문자그대로 세계 방방곡곡의 초청을 받았다. 일일이 다 언급할 수 없으나 그 중 한 가지 예만을 들기로 한다. 1,000명 대표들이 모인 싱가폴 동남아 선교대회 때,[힘으로도 못하고 능으로도 못하 고 오직 성령만으로](눅4:6)라는 성령설교를 하셨을 때 그 대회는 영적 정 점을 이루고 5분간이나 기립박수로 장내는 영감의 도가니였다고 했다. 이것 은 김준곤목사의 증언이다.

제9장 부탁하시는 말씀

한목사는 기회있을 때마다 교역자와 장로, 제직과 여러 교우들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한다.

 

1.목사님들에게

목사는 모름지기 겸손하고 성실해야 하며 생활화된 설교로서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 되어야 한다. 교역자란 먼저 그 자신이 구원받은 자로서 자신의 생 활이 산설교임을 기억해야 한다. 목사는 천국의 문지기로서 그 자신이 먼저 천국에 들어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부름받은 소명감이 분명하여 신령한 눈 이 날마다 밝아져 보는 것이 분명한 비죤의 사람이어야 한다. 건축가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자기가 지으려는 집을 자신의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하듯 교역자는 비죤을 가지고 목회에 충실히 임해야 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는 계속 자기 성장에 매진하여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보여야 한다. 목사는 자기 자신에 대하여는 완전히 죽어야 한다. 물질,명예에 있어서도 그리고 성공에 대한 관심에도 완전히 죽어야 한다. 그리고 목회자는 성령으로 충만 하여 언제나 기도의 생활을 하며 기도와 묵상을 통하여 언제나 주님을 마음 속에 모시고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계속하여야 할 것이다.

 

2.장로님들에게

공정하게 교회를 다스려야 하며 덕으로 교인들을 대하여야 한다.[말]을 조 심해야 하며 [교회평화]를 위하여 [자기]를 이겨야 한다. 성서에 명시된 장 로의 자격을 생활화하여 뭇교인 앞에 떳떳이 설 수 있어야 한다.

 

3. 전도사님들에게

우리 교회가 이렇게 커지니 전도사님들의 역할도 유난히 커져가고 있다. 목사님들 보다도 도리어 교인 접촉이 많고 또 직접 접촉하기 때문에 전도사 님들의 임무가 어떤 면에서는 더욱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문자 그대로 선 한 목자가 되기를 바란다. 적절한 말씀으로 먹이고,기도하고,돌봐야 할 것 이다. 여러분의 발길이 닿는 곳에 축복이 같이 하기를 바라며 여러분의 음 성이 들리는 곳에 크신 하늘의 위로가 수반되기를 바란다.

 

4. 청년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를 지켜야 한다.[근 면],[성실],[정결],[사랑]을 최고의 덕으로 삼아 이를 기리고 생활화하여야 한다. 나라를 사랑하라! 나라사랑하는 참 길을 주안에서 찾으라! 나라가 여 러분을 부를 때에는 사생취의(捨生取義)하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

 

5. 부녀들에게

봉사와 섬김의 도를 힘써 지켜 교회안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편만케 할 것 이며 우리 교회의 아름다운 전통을 이어받아 전도사업에 가일층 힘을 기울 어여 할 것이다.

 

6.학생들에게

우리가 사는 20세기의 현실을 직시하세요. 이 세기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지식이 팽창하고 기술이 고도로 발달된 시대이다. 그런데 깊이 생각하라! 지금은 이지식,이 기슬이 도리어 전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소.무슨 의 미인지 설명할 필요가 없다.[핵] 무기가 그 하나이다.
지식만능 기술만능이란 말도 옛 이야기이다. 지식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술 만도 부족하다. 이 지식, 이 기술을 바로 쓸 줄 아는 사람이 필요하다. 지 식과 기술이 안겨주는 이 엄청난 힘을 인류의 복지를 위하여 바로 쓸 줄 아 는 사람이 과거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교육은 지식과 기술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이것들을 배우는 동시에 이 모 든 것을 바로 쓸줄 아는 인간의 도야가 필요하다.인간이 인간을 스스로 만 들지 못한다. 여기에 신앙문제가 들어온다. 인간은 약하다.인간은 죄인이 다. 구주가 필요하다.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를 믿어야 한다. 신앙을 통하여 죄사함을 받고 새 사람이 되어야 한다. 과학문명이 발전할수록 참종 교가 필요하다.
오직 참된 신앙을 통하여 새 사람이 되고, 새사람이 될 때에 과학이 안겨 주는 모든 힘을 나 자신을 위하여 내 이웃을 위하여 아니,온 세계를 위하여 바로 쓰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될 때에 내 마음과 내 가정과 내 나라와 아 니,온세계에 평화와 행복이 깃들것이다. 사람은 약하다. 내 스스로 원하는 일을 하지 못한다. 나를 본래 지으신 조물주에게로 돌아가야 한다.

 

7. 집사님들에게

교회의 머리는 그리스도이시니 주님을 사랑하듯 교회를 사랑하라.[법]과 [규율]과[경우]를 초월하여 사랑과 화합으로 금도를 넓혀라.모든 불의를 사 랑으로 쫓아내어야 할 것이며 교회는 땅에 있으나 하늘에 속한 것임을 기억 하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인내로 교회 평화를 도모하라.

 

8. 신학도들에게

모든 학문 가운데 신학을 택한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소명감이다. 곧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까닭이다. 체험과 그 환경은 각각 다를 것이다. 그러나 이 소명감 만은 누구나 공통할 것이 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신학도들은 이 소명감이 분명해야 한다.
그리고 이 소명감이 있는 신학도로서는 간단없이 "경건과 학문", 이 두가 지를 기억해야 한다. 꼭 같지는 아니한 것이나 중생의 체험을 통한 새 사람 이 되어야 하겠고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하신 성경의 말씀을 늘 기억하고 경건한 생활을 하도록 힘써야 한다.
이러한 생활을 위하여는 매일 기도의 시간과 성경을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리고 모든 신학에 관한 학문을 진지하게 공부할 것이며 어느 한쪽에 치우치 지 말고 성경과 교회역사를 통하여 내려오는 그 중심적인 조류를 파악하기 에 힘쓸 것이다. 언제나 그리스도의 몸은 하나요 교회도 하나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하고 교역자는 우선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하고 또 그리스 도인의 최고 목표는 그리스도다운 그리스도인이 되면 그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이 때로는 십자가를 의미하는 바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최고 목표라는 것 을 기억하고[믿음의 주요 온전케하시는 예수]를 바라보며 나아가기를 바란 다.

 

9. 교사들에게

모든 교사들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어린 생명의 영을 맡은 청지기임을 알 아야 한다. 깨달음 없이 깨닫게 할 수 없으며 서지 못하고 서게할 수 없음 을 명심해야 한다. 예수 믿는 교사는 이 민족의 새문화 창조의 역군임을 알 아야 한다. 사생동행 솔선수범의 곧 산 교육임을 명심해야 한다.

 

10. 공무원에게

대한민죽 공무원으로서 온 국민을 봉사할 수 있는 자리에 앉았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큰 특권임을 기억하고 항상 감사와 기쁨으로 맡은 바 일에 충 성을 다하여 봉사하기를 바란다. 적은 일에도 충성하고 꾸준히 충성하기 를 바라며 특별히 국각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는 생명까지 바칠 각오가 있어야 한다. 성경에 "죽도록 충성하라"고 하신 말씀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여러분 하나 하나는 우리 국가의 대표임을 잊지말아야 한다. 우리 국민도 그리고 외국인들도 여러분의 행동을 보고 우리나라를 평가하게 된다. 관존 민비의 옛 사상을 온전히 버리고 권리의식의 자세도 씻어 버리고 문자 그대 로 공복의 자세로 봉사해야 한다. 상식과 양식으로 모든 공무를 처리해야 하고 진정한 애국 애족의 정신과 올바른 자유민주주의 사상과 깨끗한 생활 의 터전을 위하여 근면과 성실과 친절과 온유 겸손의 태도로 정말 민중을 위한 봉사자가 되기를 바란다. 특별히 가난한 자,약한 자, 권세없는 자들을 잘 돌봐야 한다. 이렇게 되면 실로 하나님과 사람에게 고임을 받고 국가중 흥에 큰 공헌을 하게 될 것이며 실로 보람있는 삶을 가지게 될 것이다.

 

11.고학의 길

한목사님은 숭실대학 재학시에도 고학을 했지만 믹구 유학시에도 줄곳 고 학을 하였다고 한다. 한목사님의 가정형편으로는 고학하지 않고는 대학의 문을 들어설 수 없었다. 그러나 숭실대학 시절의 고학은 돈벌어 학비를 조 달한다는 생각보다는 고학하는 그 일 자체에서 큰 보람과 큰 뜻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하신다. 맡은 일에 취미와 성격에 적합했을 뿐만 아니라,하는 공 부에도 크게 도움이 되었다고 하신다.
미국유학 시절에도 한목사님은 계속 고학을 하셨다. 학교에서 주는 대여장 학금도 있었고 학비를 보조하여 주는 선의의 어른들도 있었으나 고학을 계 속하셨다. 남의 상점에 가서 아침 저녁 청소를 해 주기도 하고 클럽에서 웨 이터 일을 하면서 숙식비를 벌기도 하였다. 고학을 통하여 얻은 것은 그 일 자체의 기능적인 것이 아니라 그 일을 하는 정신과 뜻과 생활에 있음을 경 험하였노라고 하신다. 우선 약속을 지켜야 하고 시간은 엄수해야 하고 책임 을 철저히 완수해야 하고 결근이 없어야 한다. 맡은 일에 정성을 다하는 성 실한 태도가 필요하다. 일을 시키는 사람은 시키는 사람으로서의 만족을 얻게끔 하여야 하고, 일하는 사람은 일 하는 사람으로서의 유익함을 얻을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여기에 삶의 필요한 사회적인 훈련이 있고 인격적인 훈련의 요소가 듬뿍 있음을 느끼셨노라고 하신다. 일을 시키고 일 을 하는 사람 사이에 이뤄지는 바람직한 인간 관게에서 창조되고 얻어지는 근로의 보상은 매우 큰 것임을 경험하셨다. 이것이 영구적인 직업이 아닌 임시적인 아르바이트라 하더라도 이 일을 통하여 얻어지는 직업에 대한 태 도와 훈련의 뜻이 매우 큰 것을 경험할 수 있었다고 하신다. 성실한 고학 생활은 성실한 사람이 되게 하는데 크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하신다.
대광학교 초창기에 대부분의 학생들이 고학을 하는 불우한 학생들인 줄 알 고 있다. 종이봉지를 붙이고, 성냥곽을 붙이고, 라이터 돌을 팔고,신문을 팔고,심지어 공사장에서 중노동까지 하는 학생들이 많았다고 들었다. 이런 중에서의 교육의 성과는 매우 컸다고 생각한다. 영락교회가 야간학교를 시 작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주경야독이란 문자 그대로 교육을 실시하는 데서 교육의 특별한 진가를 얻을 수 있었다고 기억한다.
과외공부가 금지되면서부터 대학생들의 아르바이트의 범위가 매우 넓어졌 다. 상점,백화점,식당,걸거리에서의 교통안내 등 그 영역이 굉장히 넓어졌 다. 모두 자신있게 맡은 일에 임하고 있는 모습과 하고 있는 일에서 뜻을 찾고 보람을 얻는 그 자세는 참으로 만족하게 보인다. 육체적인 일을 천시 하는 우리들의 전통적 습성에서 점차 탈피해가는 과정을 통하여 바람직한 직업관이 확립되기를 바란다.
타골의 다음 시귀가 생각난다.

 하나님은 
 굳은 땅 갈고 있는
 농군의 곁에 계시며
 돌을 부수어
 길 만드는 사람과 같이 계신다.
 하나님은 
 뜨거운
 쪼약빛 아래서
 쏟아지는 소나기 맞으며
 일하는 사람들
 먼지 뒤덮인
 옷걸친 사람들과 같이 계신다.
 더러워지고
 남루해진들
 무슨 상관이 있으랴
 일하면서 그를 만나고
 땀 흘리면서
 그의 곁에 있어 봐요1
뜻깊은 시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각분야에 걸쳐서 그의 뜻을 구현하는 일에 동참한다는 의식으로 직업을 선택하는 슬기는 고학을 통하여 얻을 수 있을 것임을 암시하여 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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