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바르게 판단합시다

하마사 2006. 10. 16. 07:35
 

본문: 고전 4:1-5          찬송: 458장

제목: 바르게 판단합시다

목표: 주님이 판단하시게 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바르게 판단합시다’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기준을 가지고 누군가를 판단하고 평가하기를 좋아합니다. 제가 직장 생활할 때 퇴근 후 직장 동료들을 만나면 상사들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이야기들을 많이 하곤 했습니다. 그분의 장점이든 단점이든 다른 사람을 자기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을 재미있어 하고 즐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하다보면 객관적인 부분도 있지만 주관적으로 평가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자기의 주관과 기준을 가지고 상대방을 평가하고 욕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인간은 아무리 중립적인 입장을 가지고 객관적으로 판단한다 할지라도 정확하지 못합니다. 자기 이익과 결부되면 판단의 잣대가 흔들립니다. 성경도 말씀합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마 7:3). 같은 떡이라도 남이 가진 것은 커 보입니다. 이것은 시력의 문제가 아닙니다. 눈이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라 죄악으로 오염된 우리의 본성이 비뚤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자기에 대해서는 상당히 관용적입니다. 이런 말이 있잖습니까? 자기가 몰래하는 사랑은 로맨스이고 남이 몰래하는 사랑은 스캔들이다. 이렇듯 우리 자신들은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이런 불완전한 존재가 불완전한 인간을 평가하고 판단하는 것이 올바를 수 있겠습니까?

오늘 본문도 이런 판단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고전 1:10에서부터 시작된 고린도교회의 분열에 대한 논의가 4장에서 마무리되면서 바울은 분열의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한 인간적인 판단에 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을 세상지혜로 판단하지 말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성도가 서로를 세상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고 특히 주의 종들을 인간적인 조건으로 평가하는 것은 분열의 위기를 초래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복음 사역자들을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김으로서 일체의 세상적이고 인간적인 판단을 배제해야 합니다. 비록 성도들이 세상적인 평가와 인간적인 판단을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장차 최고의 심판주이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공의롭게 판단하실 것이므로 오로지 하나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이 오늘 본문의 요지입니다.

그럼 지금의 우리와 비슷한 어려움에 처했던 고린도교회가 겪었던 상황을 통하여 우리가 어떤 판단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것이 바른 일꾼인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각자 하나님께서 역할에 따라 맡겨주신 사명이 있습니다. 구역장, 권찰로, 교회학교 교사로, 찬양대원으로, 친교부원으로, 차량봉사위원으로, 제직회부서원으로, 남여선교회원으로 혹은 여러 다른 부서에서 각자 임명을 받은 교회의 일꾼들입니다.

그러면 교회의 일꾼된 서로를 어떻게 판단해야 하겠습니까?


1.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인정해야 합니다(1절 상반절).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바울은 주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는 사역자를 표현할 때는 ‘섬기는 자’(디아코노스)라는 뜻의 단어를 사용하는데, 여기서 그리스도의 일꾼이란 단어는 ‘배 밑에서 노를 젓는 자’(휘페레테스)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일꾼’은 상관의 명령에 따라 노를 젓는 노예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바울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서 자신의 위치를 보다 겸손하게 표현하려 했습니다.

바울사도에게 중요했던 문제는 귀한 신분이냐 아니면 천한 신분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가 누구에게 속해있느냐가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사람이라고 하면 그 신분이 배 밑에서 노를 젓는 비천한 신분일지라도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시편 84편의 고라자손의 시에서도 이런 사상을 엿볼 수 있습니다. 10절입니다.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거함보다 내 하나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주의 궁정에서 한 날이 하나님 떠나신 다른 곳에서 천 날보다 낫고, 악인들이 있는 장막에 사는 것보다 하나님 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지금 어떤 신분을 가지고 있느냐보다 누구에게 속한 사람, 누구의 일꾼이냐가 더욱 중요합니다. 바울은 분명하게 자기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인정해달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일꾼이기에 고린도교회를 세운 바울이나, 고린도교회를 키워온 아볼로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라 할지라도 자신의 인간적인 권위를 내세울 수가 없는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순종하는 그리스도의 일꾼들로 여겨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국가에서 중요한 인사가 있거나 직장에서 인사이동이 있으면 오르내리는 말이 누구의 사람이냐를 묻는 물음입니다. “누가 뒤에서 밀어주는 사람이다. 누가 밀어주어서 승진했다” 등의 말들이 오갑니다. 누구의 사람이냐에 따라 세상에서의 승진과 출세도 보장되지만, 반대로 밀어주는 사람이 낙마하면 함께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시편기자는 이런 말씀을 합니다.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찌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 146:2-5).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속한 일꾼입니까? 사람보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며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고 계십니까?

일꾼은 주인에게 속해 있어야 하고 주인의 명령에 순종해야 합니다.

<예화>제가 어렸을 적에 아버님이 과수원을 하셔서 몇 년 동안 일꾼(머슴)을 두고 함께 생활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여러 명의 일꾼들을 겪어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은 참 잘하는데 아버님의 말에 잘 순종하지를 않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은 잘 못해도 시키는 일에는 잘 순종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일년 약속을 하고는 힘이 든다고 중간에 약속을 어기고 가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아버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일꾼부리기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 힘은 들어도 차라리 혼자서 일하는 것이 가장 속편하다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일군이 주인의 말을 무시하고 제 고집대로 할 때 깊이 속앓이 하시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사람의 일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주인의 말씀에 순종하는 좋은 일꾼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자기만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여기지 말고 함께 일하는 서로를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인정해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인정해야 합니다(1절 하반절).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여기서 ‘맡은 자’란 ‘한 집안의 사무를 관장하는 집사’ 또는 ‘청지기’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밀이란 ‘복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란 복음을 통해 구원의 일을 맡아하는 청지기 즉 하나님의 비밀인 복음을 많은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가르침으로 봉사하는 하나님 교회의 청지기입니다.

청지기가 무엇입니까? 고대 로마사회에서 부유한 가정에 고용되어 집안의 전반적인 일을 맡아 관리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단지 주인을 대신해서 집을 관리해주는 역할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향해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교회의 청지기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청지기로 인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 자기만 청지기라고 생각하고 상대방을 청지기로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때로 우리가 교회의 주인인양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복음을 맡은 자임에도 우리가 복음의 주체인양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님을 자랑해야 함에도 우리는 청지기의 일감을 자랑할 때가 있습니다. 직분과 직임은 청지기의 사명 감당을 위해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임에도 우리는 그것을 자랑하고 내세우며 일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밀 즉 복음이 주체입니다. 복음을 위해 청지기가 있는 것이지 청지기를 위해 복음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을 위해 청지기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지기 때문에 복음이 바뀌거나 변질되어서는 안됩니다.

금년에 새로운 청지기들이 새롭게 많이 세워졌습니다. 이 분들이 항상 그 자리에서 봉사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다른 봉사의 일이 주어지면 자리를 옮길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금년에 임명받지 못한 성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작은 일이나마 주어진 자리에서 충성하다보면 하나님이 더 큰 일감으로 청지기의 사명을 다시 맡겨주십니다.

1996년 신문에 상계동 슈바이쩌라고 알려진 김병희박사가 자신의 전재산 53억을 자신의 모교에 기증한 기사가 실렸는데, 그때 그분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젠 내 삶을 정리해 가야할 때가 되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는 관리자일 뿐 소유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이렇게 청지기 정신으로 살 수 있었던 계기를 간단히 소개하고 있는데 당뇨병과 협심증 등을 앓아 몸이 몹시 허약해 “한달만 더 살게 해주신다면 많은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겠다.”고 기도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청지기정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철저히 소유자가 아닌 관리자로 인정하며 살아갑니다. 우리의 건강, 물질과 명예와 가정까지도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것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위해 봉사하라고 우리에게 청지기의 사명을 주시고 모든 환경을 주신 것입니다.

그럼 청지기들에게 있어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2절). 충성입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하나님은 자신이 부르신 청지기들에게 일을 맡기시되 좋은 언변이나 좋은 학벌이나 물질을 요구하시기 이전에 가장 먼저 충성을 요구하십니다. 한자의 충성 충(忠)자는 가운데 중자에 마음심 변입니다. 마음의 중심을 드리는 것이 충성입니다. 아무리 사람보기에는 충성하는 것처럼 보여도 그 중심을 드리지 않으면 바른 충성이라 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이 하나님의 명을 받아 사울이후에 이스라엘을 이끌어갈 새로운 지도자를 찾으러 이새의 집에 갔을 때, 이새의 첫째아들 엘리압을 보고는 외모에 반하여 기름을 부어 왕을 세우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삼상 16:7)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교회에서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일감을 맡은 청지기들은 하나님께 중심을 드려 충성해야 합니다.

(잠 25:13)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케 하느니라.”

금년 한해 아니 평생토록 무슨 일이 맡겨지든 주님이 맡겨주셨다는 마음으로 주인 되시는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는 충성스러운 청지기로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최종 판단은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3-5절).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4]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바울사도는 고린도교인들이나 다른 세상 사람들이 자기를 판단하는 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으며 자신은 그런 세상 사람들의 편견을 아주 작은 일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자기도 자신이 뛰어난 하나님의 종이라거나 형편없는 일꾼이라고 판단하지 않는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즉 세상에서 바울을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은 고린도교인들도 아니요 세상 사람들도 아니며, 또한 자기 자신도 아닌 하나님 한 분 뿐이라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은 고린도교회가 서로 파당을 만들어 바울파, 아볼로파, 게바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서로 비방하기를 일삼던 당시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습니다. 여러 파로 나뉘어 서로 물고 뜯고 싸우면서 바울에 대하여도 각기 다르게 판단하는 그런 평가는 중요하지 않고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하면서 모든 판단을 하나님께 맡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는 말씀이 진리와 거짓을 구별하고 선과 악을 가려내며 의와 불의를 판별해야 되는 성도의 의무를 포기하라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단지 세속적인 기준에 따라 판단하거나 최후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역할을 자기가 대신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본성적으로 부패한 사람들의 판단은 왜곡될 수 있기 때문에 공의로우시며 각 사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 최종적인 판단을 맡겨야만 합니다.

주께서 오시는 때 곧 주님께서 재림하시면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 즉 역사 속에서 드러나지 않고 숨겨진 무수한 일들이 밝히 드러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또한 그 때에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 속담에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마음속은 아무도 모릅니다. 인간의 마음속을 모르는 사람이 사람을 바르게 판단할 수 없습니다. 오직 인간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만이 숨겨져 있는 인간의 마음과 뜻을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은 하나님은 아직 행동으로 옮겨지지 않은 마음의 뜻까지도 심판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시기 때문에 모든 것의 근본까지도 심판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 앞에 깨끗한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윤리, 도덕적으로 조금 더 깨끗하다고 하나님 앞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낫다고 자신있게 이야기 할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우리가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우리의 판단력이 온전치 못할 뿐 아니라, 인간에게는 서로를 판단할 권한이 없기 때문입니다.

롬 14: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우리는 한사람도 빠짐없이 모두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본문 5절 하반절에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주님 재림하시는 그 때에 주님은 인간의 모든 행위를 판단하시고 심판하십니다. 그 때에 모든 사람들의 행위와 마음속에 품었던 것들까지 낱낱이 드러나고 상벌이 내려질 것입니다.

특히 그리스도의 일꾼으로,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청지기)로 충성을 다한 사람들에게는 주님의 칭찬과 상이 클 것임을 믿고 최종 판단은 주님께 맡기시고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충성을 다하시는 저와 여러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설교 >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야의 소리를 들읍시다  (0) 2006.10.16
어떤 목자입니까  (0) 2006.10.16
하나님의 말씀이 임할 때  (0) 2006.10.16
사울의 실수를 통한 교훈  (0) 2006.10.13
새사람이 되려면  (0) 2006.1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