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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명(자료 출처) |
저 자 |
출 판 사 |
비 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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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수용소에서 -인간의 의미탐구 |
빅터 프랭클/ 정태시 역 |
제일, 1977 |
2002 완독 |
빅터 프랭클, 정태시 역, 『죽음의 수용소에서-인간의 의미탐구』, (서울: 제일출판사, 1977)
저자 빅터 프랭클
비인에서 태어나서 프로이드와 아들러에게서 배웠으며 장래가 촉망되는 소장 정신의학자로서 비인에서 연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치스의 정신착란증은 그의 운명을 하룻밤 사이에 일변시켜 버렸다. 저자는 오직 유태인이라는 사실만으로 체포되어 악명 놓ㅍ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송치되었다. 여기에서 격리되었던 그의 부모와 아내, 그리고 두 어린이는 약 300만 명의 다른 유태인들과 함께 생명을 빼앗겼으나 그는 기적적으로 살아 남을 수가 있었다. 그는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한의 비정적인 극한 상황속에서 잔학한 세계의 압제와 어떻게 해서든지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는 죄수들의 에고이즘과 대결하면서 오히려 인간다운 품위를 견지하는 정신세계의 승리를 몸으로서 체허하였다. 그는 그것을 속기기호로 수십장의 휴지에 가득 적어 놓았다. 그것은 정신의학으로 보아서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을 뿐 아니라, 하나의 사상가로서의 프랭클을 탄생시킨 태반이 되었다. -4-5쪽
프랭클의 기본사상은 실존분석이라고 불리운다. 그런데 그의 실존은 키에르케고르 이래의 실존개념을 계승하고 있는 것으로서 그것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것이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참으로 인간답게 될 수 있는 근거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5쪽
프랭클의 학설을 비인의 제3학파라고 부르고 있다. 그것은 그가 지그문드 프로이드(Sigmund Freud)의 정신분석학과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의 개인심리학을 발전적으로 계승하였기 때문이다. -5쪽
프랭클은 인간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정신자세는 ‘의미를 지향하는 의지(Will to Meaning)’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곧 인간에게 있어서 본질적으로 필요한 것은 인생에게 의미를 부여해주는 충족감이요, 사명감이라는 것이다. 곧 ‘어떻게 사느냐’ 하는 것보다 ‘무엇 때문에 사느냐’ 하는 대답이 문제라는 것이다. 프랭클의 의미요법은 “인생이 나에게 무엇을 줄 것인가?”라고 하는 질문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사실은 “인생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라고 질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인생의 도전을 받아서 응전하는 데에 삶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가치를 창조하도록 만들어진 존재인데 설사 그것이 불가능하다 하더라도 인간의 의미는 상실되지 않는다. 그래서 인생은 자기가 처해있는 여건이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의미가 있는 것이며, 그가 이 책에서 되풀이해서 말하고 있듯이 언뜻 보기에는 보람이 없는 듯한 자기 희생에까지도 의미가 있다고 그는 주장한다. 마치 우수한 운동선수가 스스로 어려운 목표를 설정하고 이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하는 것같이 인간도 인생에 있어서 스스로 고난과 대결하여 정신적으로 성장하고자해서는 안될 것인가 라고 묻고 있다. 6-7쪽
-빅터 프랭클, 정태시 역, 『죽음의 수용소에서-인간의 의미탐구』, (서울: 제일출판사, 1977)→이 책의 8쪽까지는 역자의 머리말임.
프랭클은 수많은 크고 작은 정신적 고문의 피해자인 환자들에게 “왜 당신은 자살을 하지 않느냐?”고 질문을 한다. 그들의 대답으로부터 그는 정신요법의 원리를 찾아내기가 일쑤이다. 어떤 사람은 그의 자녀에 대한 사랑을 떨칠 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다른 사람은 자기의 재능을 쓰지않고 포기하기가 아깝기때문이라고 한다. 셋째 사람은 다만 잊어버리기가 아쉬운 추억속에 머물러 있고 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러한 파산된 인생의 가냘픈 실오라기를 가지고 의미와 책임의 확고한 패턴으로 조직화하는 것이 의미요법의 목적과 도전인데 이것이야말로 프랭클이 창안해낸 새로운 실존주의적 분석학이다. -9쪽
죽음의 수용소란 책에서 그는 의미요법의 발견으로 이끌어준 자신의 체험을 설명한다. 오래동안 짐승과 같은 강제수용소의 죄수로서 그는 알몸뚱이의 존재가 되어 버린 자기자신을 발견한다. 그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 그리고 그의 아내는 수용소 안에서 죽었거나 혹은 가스실로 끌려가서 그의 누이를 제외하고는 그의 온 가족이 나치스 수용소에서 전멸이 되었다. -9쪽
실존주의의 중심테마는 “산다는 것은 고통을 당하는 것이고 살아남는다는 것은 고통을 당하는 속에서 의미를 찾는 것이다.”
프랭클은 니이체의 말을 즐겨 인용한다. “왜 살아야 하나 하는 인생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 나갈 수가 있다. -12쪽
많은 유럽의 실존주의자와는 달리 프랭클은 비관론자도 아니고 반종교주의자도 아니다. 정반대로 도처에 산재하는 고통과 악의 세력에 직면하고 있는 자로서 그는 놀랍게도 인간이 그의 곤경을 초월하는 능력과 적절한 진리를 발견하는 능력에 대해서 희망적인 관점을 가지고 있다. -13쪽→고든 올포트(Gordon w. Allport)는 하버드대학 심리학교수로서 이 책의 머리말을 썼다.
은사망상(恩赦妄想)-사형을 선고받은 자가 그 최후의 순간, 교수의 바로 직전에 혹시 은사나 받지 않나하고 공상을 시작하는 일이다. -29쪽
아우슈비츠에 도착했을 때 친위대의 고급장교의 오른손 집게 손가락방향에 따라 삶과 죽음이 결정(약 90%의 대부분이 오른쪽-가스실로 직행). -32쪽
종이뭉치(학술원고) 보관을 부탁했다가 욕만 먹고 포기. -35쪽
가질 수 있었던 환상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36쪽
자포자기의 농담과 호기심이 발동. 아우슈비츠에 있어서도 말하자면 세계를 객관화하고 인간을 거리를 두고 보는 거의 냉정한 호기심이 지배했다. 우리들은 모든 일이 일어나는 것과 또한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늘 호기심을 가지고 있었다. -37쪽
고생중에서도 잠은 의식을 빼앗고 이 모든 고통을 없애주었다. 인간은 무슨 일이나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하는 수많은 증거 가운데 다음 몇 개를 인용한다. 즉 수용소생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번도 이를 닦을 수 없었고 또한 음식물의 현저한 비타민 부족에도 불구하고 이전에 가장 건강을 위해 영양을 섭취하던 때보다도 건강한 이와 신체를 보존했다는 사실이다. 또는 반년 동안이나 같은 속옷을 입고 나중에는 아무리 보아도 그것이 속옷이라고는 할 수 없게 되었고, 수돗물이 얼어붙어 한 번도 빨 수가 없었으며, 흙일을 한 손은 더럽고 상처투성인데도 불구하고 한번도 상처가 곪아 본 일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또한 이전에는 옆에 방에서 조그만 소리만 나도 잠이 깨곤했는데 모로 꼭 끼어 누워서 귀속에다 대고 코를 골아도 눕기가 무섭게 깊은 잠이 들곤 했다. 이리하여 도스도예프스키가 『죽음의 집의 기록』에서 인간에 대하여 인간은 모든 것에 적응할 수 있다고 한 것이 얼마나 정확한 판단인가를 재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59쪽
어떤 세계관적인 근본태도에서 나는 아우슈비츠의 첫날 밤, 취침 전에 말하자면 나는 내 자신에게 철조망을 향해서 달린다는 짓은 결코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이것은 수용소에서 늘 쓰이는 표현이고 수용소에서 흔히 사용되는 자살의 방법으로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즉 고압의 전기가 통해있는 철조망에 접촉하는 일이다. -40쪽
나는 아우슈비츠에서 최초의 밤을 지내고 다음날 오전 중 다음과 같은 사실이 일어났을 때 겨우 미소를 지을 수 있었고 또 기운을 차릴 수가 있었다. 즉 ‘바라크 폐쇄’에도 불구하고 이미 우리들보다 1주일 빠르게 아우슈비츠에 도착한 친구(M)가 우리들이 있는 바라크에 몰래 들어왔다. 그는 우리들을 안심시키고 계몽시켜서 위로해 주력 애를 썼다. 그는 생명을 건지려고 생각하거든 다만 한가지 방법이 있다. 그것은 노동이 가능하다는 인상을 주는 일이다. 수염을 깍으라. 그리고 언제든지 꼿꼿이 서서 걸으라. 그러면 가스실에 갈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42쪽
쇼크의 최초의 단계가 지나면 죄수는 제2단계에 빠져 들어갔다. -43쪽
제2의 단계라고 하는 것은 비교적 무감동의 단계이다. 즉 내면적인 사망이 차차 시작된 것이다. 이미 말한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정서의 반응외에도 새로 들어온 죄수들은 수용소 생활의 제1기에는 고민과 감정의 흥분을 체험하지만 얼마 안가서 그들은 자신들의 이런 감정을 말살하기 시작한다. 처음 한동안은 특히 고향에 남겨두고 온 사람들에 대해서 무한한 동경을 가진다. 또한 추악에 대한 증오가 있다. 차차 자기감정과 흥분을 말살하게 된다. -44쪽
이미 심리적 반응의 제2단계에 있는 죄수들은 눈을 피하지도 않는다. 무관심 무감각이 되어서 그들은 아무 말 없이 바라다보고 있다. 증오, 전율, 동정, 흥분 등 이러한 어떤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고민하는 자, 병든 자, 죽어가는 자, 죽은 자, 이 모든 것들은 몇 주일간의 수용소 생활 후에는 당연한 구경거리로 돼 버리고 이미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없게 된다. -46쪽
감정의 마비, 내적인 냉담과 무관심-수용소의 죄수들의 심리적 반응의 제2단계의 이 특징은 그들로 하여금 얼마 안가서 날마다 또는 시간마다의 구타에 대해서도 무감각하게 만든다. 이 무감동이야말로 그 당시 죄수들의 마음을 둘러싼 가장 필요한 무장이었다. -47쪽
구타를 당할 때 제일 고통스러운 것은 구타에 따른 조롱이다. -49쪽
제2단계의 주요특징으로서의 무감동은 필요한 마음의 자기방위인 것이다. 현실은 완전히 은폐되어 있었다. 모든 행동과 그에 따르는 모든 감정생활은 유일의 과제 즉 단지 생존을 유지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단지 생존한다는 일이 자기의 그리고 상호간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직접 생명유지에만 집중한다는 심리적인 상태와 필요성의 압력 밑에서는 전 정신생활의 현상이 원시적인 단계에까지 끌려 내려간다는 것은 용이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이런 소망이나 노력의 원시성은 죄인의 전형적인 꿈에 있어 분명했다. 수용소의 죄수가 자주 꾸게 되는 꿈은 어떤 것일까? 죄수는 빵이나 과일이나 담배나 따뜻한 목욕탕 등을 꿈꾸는 것이다. 가장 소박하고 원시적인 욕구충족이 결여되어 있는 것이 가장 원시적인 소망의 꿈으로 채워지는 것이다. -55쪽
죄수들은 상상외의 영양부족으로 신음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지만 수용소에 있어 저하된 정신생활의 원시적인 충동성 속에서는 식사가 중심이 되었다. -55쪽
수용소생활의 하루 수물네시간 중 가장 무서운 순간은 아침에 눈을 뜰 때였다. -59쪽
영양부족의 결과 수용소 생활에 적응한 제2단계의 죄수의 원시적 충동성은 식욕을 의식의면전에 드러내 놓았으나 다른 한편 영양 부족은 성욕이 일반적으로 없어졌다는 사실까지도 무서울 정도로 설명해 줄 것이다. 죄수의 꿈에서까지도 성적인 내용은 떠오르지 않았다. -59쪽
일반적으로 수용소에서는 이를테면 문화적인 동면(冬眠)이 지배하고 있었다. 이 다소나마 공통적인 현상을 제외하고는 또한 두 가지의 관심이 있었다. 하나는 당연한 일이기는 했지만 정치적 관심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관심이었다. -61쪽
사랑은 결국 인간의 실존이 높이 승화하는 최후의 것이며 최고의 것이라는 진리이다. 나는 지금 인간의 시와 사상과 그리고 신앙이 표현할 수 있는 궁극의 것이라는 그것의 의미를 파악한 것이다. 사랑에 의한 그리고 사랑속의 피조물의 구원이 그것이다. 만일 지구상에 아무것도 남아 잇지 않다 해도 인간은 순간적이라 할지라도 사랑하는 인간의 모습에 마음속 깊이 몸을 바침으로서 행복해진다는 것을 나는 알게 된 것이다. -66쪽
일부 죄수에게 있어 나타나는 내면화의 기회만 있으면 예술이나 자연에 관한 지극히 강렬한 체험으로도 되어 갔다. 그리고 그 체험의 강렬함은 우리의 환경과 그 처참한 모습들을 잊어버릴 수도 있었다. -69쪽
인간의 고뇌의 크기도 전연 상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며 한편 그 자신은 지극히 잔잔한 일이라 할지라도 최대의 기쁨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었다. -76쪽
이미 모든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위협받는 일이 없으며 그만큼 운명에 감사하였다. 이를테면 밤 눕기 전 이를 잡을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기뻐했다. 불기하나 없는 막사에서 때로는 지붕 안쪽 천장에서 고드름이 내려져 있는 추위 속에서 이를 잡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일 수는 없었지만 그러나 이때 갑자기 공습경보가 울려 등불이 꺼지고 이를 잡지 못하게 되는 것보다는 낫다는 말이다. 이는 대체로 전부를 잡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한 밤의 반을 편안히 잠들 수 있는 것이었다. 79-80쪽
나는 곧 자기가 노동 중대에서 지쳐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죽을 바에는 나의 죽음은 어떤 뜻을 가져야 할 것이었다. 의사로서 앓고 있는 친구를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다면 현재와 같이 쓸모없는 토공으로서 지쳐 쓰러져 죽기보다는 훨씬 의의가 있는 것으로 믿었다. -82쪽
수용소 안에서의 보신의 최고의 열쇠는 “절대로 두드러지게 나타나지 말라”는 말이기 때문이다. -84쪽
죄수의 대부분은 당연한 일이기는 하였으나 일종의 열등감에 괴로워하고 있었다. -101쪽
카포, 쿡 수용소 창고 관리자, 수용소 경찰관 등의 인간들인데 그들은 원시적인 열등감을 보상하고 있었다. 그들은 대체로 보통 죄수의 배부분과 같이 자기가 핍박을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반대로 출세한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 가운데는 황제망상(皇帝妄想)에까지 발전하는 자도 있었던 것이다. -102쪽
창조적인 생활은 죄수에게는 이미 폐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적이며 향수적인 생활만이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고 생명 그 자체가 하나의 뜻을 갖는 것이다. 고뇌도 또한 하나의 의미를 갖는 것이 틀림없다. 고뇌가 생명에 어떤 형태로건 붙어있다면 운명도 죽음도 또한 그렇다. 고뇌와 죽음은 인간의 실존을 비로소 온전한 하나로 만드는 것이다. -109쪽
인간은 어떠한 곤란한 상황하에서도 최후의 순간까지 생명을 뜻있게 형성할 수 있는 풍부한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109쪽
수용소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자기 자신이 언제까지나 수용소에 머물러야 하는지 모르는 사실이었다. -112쪽
사람은 가장 곤란한 순간에 미래의 시점으로 도피하는 일도 많은 것을 알고 있다. -117쪽
그 자신의 미래를 믿을 수 없었던 인간은 수용소에서 멸망해 갔다. 미래를 잃음과 동시에 그는 의지할 바를 잃고 내적으로 붕괴하고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도 전락했던 것이다. -119쪽
용기와 낙담, 희망과 실망, 그 어느 쪽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인간에 있어 참으로 중요하다.-121쪽
죄수에 대한 모든 심리적 치료 또는 정신위생적 노력이 따라야 할 표어로서는 대체로 니이체의 “왜 사는가를 아는 자는 거의 모든 어떻게 살 것인가에 견디는 것이다.”라는 말이 가장 적절할 것이다. -121쪽
인생이란 결국 인생의 의미에 대한 문제에 정확하게 대답할 일, 인생이 각 인간에게 과하는 사명을 다할 일, 매일 매일의 근무를 행하는 일에 대한 책임을 담당하는 것에 불과하다.-122쪽
기다리고 있는 일, 또는 기다리고 있는 사람에 대한 책임을 의식한 인간은 그의 생명을 버릴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126쪽
인간의 생명은 항상 어떠한 사정속에서도 의미를 갖는 법이며, 그 존재의 무한한 뜻은 고뇌와 죽음까지도 포함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130쪽
해방을 맞은 사람들의 체험은 심리학적인 입장에서 말한다면 현저한 인간기피증이었다.
-137쪽
로고데라피는 말하자면 미래에, 즉 환자가 장차 수행하여야 할 일이나 의미에 중점을 두고 있다. -146쪽
‘로고스’는 희랍어로 ‘의미’를 뜻한다. 로고데라피는 인간생존의 의미에 대한 추구는 물론 인간생존의 의미에 그 중점을 두고 있다. 로고데라피에 의하면 삶의 의미의 탐구는 인간행동의 중요한 동기가 된다. -146쪽
모든 정신적 갈등은 반드시 신경증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어느 정도의 갈등은 정상적이고 건전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고통은 반드시 언제나 병리적 현상이 아니다. 신경증의 증세이기보다도 고통은 인간성취일 수도 있다. 특히 그 고통이 실존적 욕구불안에서 생길 때 그렇다. -153쪽
나치수용소에서는 자기가 수행하여야 할 임무가 있다는 것을 알 때 사람들이 가장 시련을 잘 견디어 낸다는 것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내 자신을 말할 것 같으면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을 때 출판할 준비가 다 되어 있는 나의 원고를 몰수당하였다. 이 원고를 다시 써야 되겠다는 나의 염원이 혹독한 수용소 생활을 견디어 내게 한 것이 확실하다. 예를들면 내가 장티푸스에 걸렸을 때 해방이 될 때까지 살아나기만 하면 원고를 다시 쓸 수 있도록 종이쪽지에 메모를 많이 하여 두었다. 바바리아 포로 수용소의 어두컴컴한 바라크 안에서 잃어버린 원고를 다시 쓴 것이 파멸의 위기로부터 나를 건져 주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처럼 정신건강은 어느 정도의 긴장에 기초를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155쪽
사람이 실제로 필요로 하는 것은 무긴장한 상태가 아니라 보람있는 목표를 향하여 분투 노력하는 것이다.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을 덜 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가 충족하여야 할 가능한 의미에의 부름이다. -156쪽
로고데라피는 교육도 설교도 아니다. 도덕적 권고와 거리가 먼 것처럼 논리적 추리와도 거리가 멀다. 비유적으로 말한다면 로고데라피스트의 하는 역할은 화가의 역할이라기보다 안과의사의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화가는 자기가 보는대로의 세계를 우리에게 전해주려고 하고 안과의사는 우리들로 하여금 세계 그대로를 볼 수 있게 하여준다. 로고데라피스트의 역할은 의미와 가치의 범위를 깨닫고 그리고 볼 수 있도록 환자의 시야를 넓히고 확대하는 데 있다.-162쪽
인간의 주요관심사는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인새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이 로고데라피의 기본원리이다. 자신의 고난이 의미가 있다는 확실한 조건하에서는 사람은 기꺼이 그 고통을 받기까지 하는 이유가 그것이다. -165쪽
인생의 의미는 무제한이다. 인생의 의미는 고난의 가능한 의미까지도 포함하기 때문이다.
-167쪽
로고데라피는 인간존재의 덧없음에 유의하지만 염세적이 아니고 활동주의적이다. -174쪽
인간자신 속에 두 가지 가능성을 다 갖고 있다. 어느 것을 실현할 것인가는 상황에 달려 있지 않고 자신의 결정에 달려 있다. -18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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