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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판 사 |
완독일자 |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 |
필립얀시 |
IVP, 2001 |
2001. 7. 16 |
▶실적이 아닌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조차도 비은혜로 오염된 공기를 마시고 있다. 헤밍웨이의 한 소설이 이를 잘 보여준다. 어느 스페인인 아버지가 집을 나가 마드리드로 간 아들과 화해하기로 다짐한다. 아버지는 뒤늦게 양심에 가책을 느끼며 “엘리베랄” 신문에 이런 광고를 낸다. “파코, 화요일 정오에 몬타나 호텔에서 만나자. 다 용서했다. 아빠.” 파코는 스페인에서 흔한 이름이다. 아버지가 그곳에 나가자 파코라는 이름의 젊은 남자가 무려 800명이나 나와서 저마다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P. 40
▶피터 그리브는 나환자로 살아온 일생을 회고록으로 펴냈다. 그는 인도에 살던 중 그 병에 걸렸다. 부분 마비에 한쪽 눈까지 멀어 영국에 돌아온 그는 성공회 수녀들이 운영하는 어느 공동체에 넘겨졌다. 일도 할 수 없는데다 사회에서 버림받았다는 생각에 원망만 생겼다. 그는 자살을 생각했다. 공동체를 탈출하려고 치밀한 계획도 여러 번 세웠지만 나가도 갈 데가 없어서 그만두곤 했다. 하루는 이상하게 일찍 잠이 깨어 산책을 나갔다. 어디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나길래 가보니 수녀들이 성당 안에서 환자들 이름을 벽에 붙여 놓고 기도하고 있었다. 그 중에 자기 이름으로 있었다. 혼자가 아니라 더불어 함께 있다는 경험이 그의 삶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자신도 세상에 필요한 존재임을 느꼈다. 은혜를 느낀 것이다. P. 43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보면 정작 렌즈를 느끼지 못한다. 이런 렌즈처럼 은혜는 어디에나 있다. 결국 하나님은 내게 주변의 은혜를 볼 수 있는 눈을 주신 것이다. P. 45
▶죄인에 대한 문제라면 하나님은 그냥 팔 벌리고 서서 “이리 오라”고 말씀만 하시지 않는다. 줄곧 서서 기다리신다. 탕자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니다. 그분은 서서 기다리시지 않는다. 찾아 나서신다. 목자가 잃은 양을, 여인이 잃어버린 동전을 찾아 나선 것처럼. 그분은 가신다. 아니다. 그분은 이미 가셨다. 그 어떤 목자나 여인보다 무한히 먼 길을. 진정 그분은 하나님 신분에서 인간 신분이 되기까지 무한히 먼 길을 가셨다. 그렇게 죄인들을 찾아오신 것이다. p. 61
▶“아마데우스”: 라틴어로 ‘하나님의 사랑 받는 자’ p. 67
▶은혜는 일등이냐 꼴찌냐를 따지지 않는다. 은혜는 산수가 아니다. 은혜란 하나님의 선물로 받는 것이지 노력의 대가로 얻는 것이 아니다. p. 68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용서할 수 없는 죄를 용서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사하셨기 때문이다. p. 71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가 시카고대학교를 방문하자 학생들과 학자들이 주위에 모여들었다. “바르트박사님, 지금까지 연구를 통해 배운 가장 심오한 진리를 무엇입니까?” 기자회견 때 누군가 묻자 바르트는 주저없이 답했다. “예수 사랑하심은 거룩하신 말일세.” p. 76
▶사회학에는 ‘거울자아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아내, 아버지, 상사 등)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정말 그대로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날 사랑하신다는 놀라운 성경말씀을 정말 진실로 믿는다면, 거울을 볼 때마다 하나님의 눈으로 나를 볼 수 있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질까?
브레난 매인의 글 중에 어느 아일랜드인 신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하루는 이 신부가 걸어서 시골 교구를 심방하던 중 길가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한 노인을 만났다. 감동받은 신부가 그에게 말했다. “하나님과 아주 가까우신 분이겠군요.” 기도하다 말고 올려다본 그 노인은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웃으며 말했다. “그럼요, 그분이 저를 아주 좋아하시는 걸요.” p. 78
▶유진 피터슨은 4세기의 신학적수 어거스틴과 펠라기우스를 비교한 적이 있다. 펠라기우스는 도시출신에 점잖고 구변도 좋아 누구에게나 호감을 샀다. 반면 젊은 시절을 방탕하게 보낸 어거스틴은 어머니와의 관계도 유별났고 적도 많았다. 그러나 펠라기우스는 인간의 노력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잘못됐지만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해서 결실도 좋았다. 어거스틴은 순수한 열정으로 하나님을 좇았으나 펠라기우스는 자기방법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했다. 피터슨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론상으로는 어거스틴 쪽이지만 실제생활은 펠라기우스 쪽이라 지적한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 하나님의 마음까지 사려고 강박적인 노력을 반복하는 것이다. p. 80
▶다른 사람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건너야 할 다리를 부수는 것이다. -조지허버트 p. 92
▶1077년 교황 그레고리7세에게 용서를 빌기로 한 신성로마제국 황제 헨리4세는 이탈리아 교황숙소 밖에서 눈 속에 사흘을 맨발로 서 있었다. 아마도 황제는 용서의 성흔으로 발에 동상을 입고 흡족한 기분이 되어 돌아갔을 것이다. p. 97
▶“주님, 저를 날씬하게 하실 수 없거든 제 친구들을 뚱뚱하게 해 주세요.” -희극작가 어마 봄베크는 한때 그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p. 98
▶“자비라고는 하나도 베풀지 않으면서 어떻게 스스로 자비를 바라겠느냐?“ 세익스피어는 「베니스의 상인」에서 이렇게 간명히 표현했다. p. 99
▶대부분 양심적인 이들은 용서란 자격있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다고 말한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의 생각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용서(forgive)라는 단어는 그 자체에 ‘주다’(give)라는 말이 들어있다(용서의 또 다른 말 pardon에도 donum 즉 ‘선물’이라는 말이 들어있다). 용서에도 은혜처럼 무자격, 과분함, 불공평이라는 묘한 특성이 있다. p. 100
▶나찌 정권에 맞서 싸우면서도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순종한 디트리히 본회퍼 이야기. p. 101
▶먼저 용서받은 경험이 있어야 남을 용서할 수 있는 법이다. p. 101
▶은혜의 복음은 용서로 시작하여 용서로 끝난다. p. 102
▶나찌 학정을 고스란히 겪은 헬무트 틸리케의 용서에 관한 말 p. 103
▶용서를 “사랑할 줄 모르는 이에게 베푸는 사랑”으로 정의한 헨리 나우웬의 용서에 관한 말 p. 104
▶용서는 그리스도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용서해야하는 실제적 이유 세 가지 p. 111
1)용서만이 비은혜의 사슬을 끊고 비난과 고통의 악순환을 중단시킬 수 있다.
신약에 가장 빈번히 사용된 ‘용서’라는 헬라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자신을 풀어주다, 멀리 놓아주다, 자유케 하다’라는 뜻이다.
힌두교 학자들은 한사람의 의가 회복되는데 정확히 얼마나 걸리는지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았다. 금생과 내생의 나의 모든 불의에 상응하는 벌을 받으려면 680만 번의 윤회를 거쳐야 한다. p. 111
▶유대인 철학자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역사의 불가피한 일들에 대한 유일한 처방은 용서로서, 용서가 없이는 ‘회복 불능의 궁지’에 발이 묶일 뿐이다. 용서하지 않을 때 나는 과거의 감옥에 갇히며, 변화의 잠재력은 완전 차단된다. 그것은 통제권을 타인 즉 원수에게 내어 준 뒤 혼자서 과오의 여파를 당하는 운명을 자초하는 것이다. p. 115
▶용서란 높은 도덕율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만은 아니다. 용서란 바로 자신을 위한 것이다. p. 115
▶2)용서의 두 번째 위력은 가해자가 겪는 죄책감의 중압을 덜어주는 것이다. p. 115
▶헨리 알렉산더라는 kkk단원의 용서에 담긴 이야기. p. 115
▶소설“레미제라블”에 나오는 장발장과 신부의 감동적인 용서에 대한 이야기 p. 116-18
빵을 훔친 죄로 19년 중노동을 선고받은 장발장은 점점 사나운 죄수가 되어갔다. 주먹싸움에서 그를 이길 사람이 없었다. 그의 의지를 꺽어놓을 사람도 없었다. 드디어 출소의 날이 왔다. 그러나 당시 죄수들은 신분증을 가지고 다녀야 했기에 어느 여관주인도 이 위험한 전과자를 받아주려 하지 않았다. 궂은 날씨에 묵을 곳을 찾아 나흘간 시골길을 헤매던 그에게 마침내 어느 친절한 신부가 자비를 베푼다. 그날밤 장발장은 너무 편안한 침대에 가만히 누워있다가 신부와 그 누이가 잠자리에 들자 침대에서 이러나 찬장을 뒤져 가족 은잔을 훔쳐서는 어둠 속으로 슬며시 달아난다. 이튿날 아침 경찰 세명이 장발장을 끌고 와 신부의 집 문을 두드린다. 훔친 은잔을 들고 달아나던 범인을 붙잡은 것이다. 그들은 이 악당을 평생 사슬에 묶어 놓을 태세였다. 그러나 신부의 반응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특히 장발장은 말할 것도 없다.
“다시 오셨군요!” 신부는 장발장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참 다행입니다. 제가 촛대까지 드렸던 걸 잊어버리신 모양이죠? 그것도 은이라서 족히 200프랑은 나갈 겁니다. 깜박 잊고 놓고 가셨나요?”
장발장은 눈이 휘둥그래졌다. 그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심정을 눈빛에 담아 노신부를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신부는 경찰에게 장발장은 도둑이 아니라고 했다. “이 은잔은 제가 선물로 준 겁니다.” 경찰이 떠나자 아예 할 말을 잃은채 떨고 있는 손님에게 촛대를 주며 말한다. “그 돈을 정직한 사람이 되는데 쓰시기로 저와 약속하신 것을 절대 잊지 마십시오. 잊으시면 안됩니다.”
인간의 모든 복수본능을 넘어선 신부의 행동의 위력에 장발장의 삶은 완전히 달라진다. 용서에 정면으로 부딪히자- 게다가 회개한 적도 없는데- 영혼의 철벽 방어망마저 눈 녹듯이 스러진 것이다. 촛대를 은혜의 소중한 상징물로 간직한 그는 어려운 이들을 돕는데 여생을 바친다.
위고의 소설에는 실은 용서에 대한 두 가지 비유가 담겨있다. 정의밖에 모르는 형사 자베르는 그 후 20년간 매몰차게 장발장의 뒤를 밟는다. 장발장이 용서받고 새 사람이 되자 그는 복수를 갈망한다. 장발장이 자베르의 목숨을 건져주던 날- 쥐가 고양이한데 은혜를 베푼 셈- 그는 자신의 흑백 놀리 세계가 붕괴될 조짐을 느낀다. 본능에 역류하는 은혜 앞에 속수무책인데다 자기 안에 그에 상응하는 용서가 없음을 안 그는 세느강 다리에서 몸을 던진다.
▶정의에는 선하고 의롭고 합리적인 힘이있다. 반면 은혜의 힘은 다르다. 은혜는 세상에 물들지 않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초자연적 힘이다. p. 120
▶“교황에게 병력이 몇 사단이냐 있느냐?”며 교회의 도덕적 권위를 비웃던 스탈린 p. 133
▶복수의 논리에는 결정적인 약점이 있다. 숙원에는 결코 끝이 없다는 점이다. p. 135
▶간디는 만인이 ‘눈에는 눈으로’ 식의 정의 원리를 따른다면 세상은 결국 다 눈멀고 말 것이라고 말했다. p. 136
▶1987년 벨페스트 서부 작은 마을에서 재향 군인의 날 전몰 장병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개신교 신자들 위로 IRA(아일랜드공화국군)가 던진 폭탄 하나가 떨어졌다. 11명이 죽고 63명이 다쳤다. 이 테러 행위가 다른 많은 테러보다 깊은 인상을 남긴 것은 부상자 고든 윌슨의 반응 때문이다. 그는 아일랜드에서 북아일랜드로 이민와서 포목상을 하던 신앙심 깊은 감리교 신자였다. 폭탄이 터지자 윌슨은 스무 살 난 딸 마리와 함께 콘크리트벽돌 더미 1.5미터 아래에 갇혔다. “아빠, 정말 사랑해요.” 구조대를 기다리는 동안 아버지의 손을 꼭 쥐고 있던 딸이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다. 척추와 뇌에 손상을 입은 마리는 몇 시간 후 병원에서 숨졌다. 윌슨은 병원침대에 누워 이렇게 말했다. “딸을 잃었지만 원한은 없다. 상대를 욕한다고 마리 윌슨이 살아나지 않는다. 오늘밤 그리고 매일 밤 나는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다. 저들을 용서해 달라고.” p. 139
▶1990년 동독 최초로 자유선거를 통해 국회가 탄생하자 국회 최초의 공식 행위로서 정치 용어가 아니라 신학 용어로 작성된 다음과 같은 성명을 표결에 붙여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우리 동독 최초의 자유선거로 뽑힌 국회의원들은....유대인 남자들, 여자들, 아동들에 대한 모욕과 축출과 살해에 대해 이 나라 국민을 대신하여 책임을 인정하는 바이다. 우리는 비통함과 수치심으로 독일 역사의 이 무거운 짐을 인정한다.....국가사회주의 시기에 세계의 많은 민족이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했다. ...우리는 전세계 유대인들에게 용서를 구한다. 동독의 공식적 대 이스라엘 정책의 위선과 적의 그리고 1945년 이후에도 우리 나라에서 여전히 행해진 유대인 시민을 향한 핍박과 모욕에 대해 이스라엘 국민에게 용서를 구한다.”
의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랫동안 우레 같은 박수를 보낸 뒤 대학살 때 죽은 유대인을 기리며 잠시 묵념의 시간을 가졌다. p. 147
▶서독은 이미 공식적으로 잘못을 회개한 바있다. 뿐만 아니라 서독은 배상금으로 유대인에게 600억불을 지불했다. 독일과 이스라엘 사이에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국가간 용서의 더할 나위없이 좋은 본보기다. 국제 정치에서도 은혜는 고유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 p. 148
▶폴 틸리히는 용서를 과거를 잊기 위해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p. 149
▶남북전쟁 후 정치가들과 참모들은 많은 피를 흘리게 만든 남부 사람들을 중벌로 다스려야 한다고 아브라함 링컨에게 압력을 가했다. 대통령은 말했다. “적을 친구로 만드는 것이 바로 적을 쳐부수는 것 아닙니까?” p. 154
▶“자유에 대한 우리의 목마름을 원한과 증오의 잔을 마심으로 해결하지 맙시다. 우리의 창조적 항거가 물리적 폭력으로 전락하게 해서는 안됩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는 물리적 힘에 영적 힘으로 맞서는 장엄한 고지에 올라야 합니다.” 마틴 루터 킹이 추종자들에게 타이른 말이다. p. 157
▶용서는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이기에 어려운 기술 훈련과 함께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다.
p. 162
▶한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하나님이 의도하신 모습으로 본다는 것이다. p. 207
▶신학자 칼 바르트는 아돌프 히틀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죄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p. 211
▶성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손이 비어있는 자에게 주신다’고 말한바 있다. 손에 짐을 가득 든 사람은 선물을 받을 수 없다. p. 213
▶파스칼은 말했다. ‘죄가 많은 것은 분명 악이다. 그러나 죄가 많으면서 그것을 인정할 마음이 없는 것은 더 큰 악이다. p. 214
▶루이스는 회개란 하나님이 우리한테 임의로 요구하시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복귀 행위를 뜻하는 것’이라고 했다. 탕자의 비유에서 회개란 곧 기쁨의 잔치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한다. 그럴 때 앞날의 길, 관계 회복의 길이 열린다. p. 216
▶상처는 빛 아래서 밝히 보지 않는 한 고칠 수 없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본인이 문제를 인정하지 않는한- ‘나는 알코올 중독자다’- 치료에 희망이 없음을 안다. p. 216
▶월터 트로비쉬는 ‘그리스도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시지만 일단 그분이 받아주시면 우리는 있는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없다.’ p. 218
▶하버드대학의 생물학자 에드워드 윌슨이 실시한 다소 엉뚱한 개미실험 내용
개미는 시각이 아니라 후각을 통해 죽음을 감지한다는 것을 알아냈다. 개미들은 올레산 냄새만 맡으면 시체를 밖으로 끌어냈지만 다른 냄새에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그 본능이 어찌나 강하던지 종이 조각에 올레산을 묻혀 놓아도 개미들은 어김없이 종이를 개미무덤으로 끌어냈다. 끝으로 윌슨은 살아있는 개미 몇 마리에 올레산을 묻혀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살아있는 개미들이 다리와 촉수를 비틀며 버티는데도 동료 개미들은 무조건 잡아서 개미 무덤으로 밀어냈다. ‘죽었으나 살아있는’ 버림받은 성난 개미들은 집으로 돌아오기 전 몸을 깨끗이 닦았다. 올레산 자국을 지우지 않았다가는 즉각 동료들한테 붙들려 다시 무덤으로 쫓겨날 판이었다. 다시 집에 들어가려면 오로지 후각의 기준에서 살아있음을 증명해 보여야 했다. p. 221
▶극단적 율법주의의 예 p. 236
▶율법주의가 뿌리내리는 곳에는 극단론이라는 뾰족한 가시가 돋게 되어있다. 율법주의는 위험치고는 아주 미묘한 것이다. 아무도 자신을 율법주의자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남들의 규율은 지나치게 엄격해 보이면서도 자신의 규율은 꼭 필요한 것처럼 보이는 법이다.
예수님은 극단론 자체로 인해 바리새인들을 흠잡지는 않으셨다. 그분의 관심사는 그들이 남들에게 극단론을 강요했다는 것과 정작 중요한 문제는 무시한채 사소한 것에 치중했다는 것이었다. p. 238
▶위선이야말로 사람들이 기독교를 거부하는 가장 공통적인 이유 중 하나다. p. 239
▶율법주의는 본질상 위선을 부추긴다. 내면의 진상을 은폐할 수 있는 행동 목록이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위선의 해결 방안은 완벽 아니면 정직 두 가지뿐이다. 그러나 주 하나님을 마음과 뜻과 목숨을 다하여 사랑하며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아직 한 번도 본 적이 없기에 완벽은 현실적인 방안이 아니다. 그렇다면 유일한 방안은 회개에 이르는 정직이다. p. 242
▶율법주의는 교만과 경쟁심을 부추긴다. p. 243
▶은혜의 입구는 올바른 행동이나 거룩함이 아니요 오직 회개뿐이다. 죄의 반대는 선이 아니라 은혜다. p. 245
▶가톨릭 신학자 한스 큉은 “촘촘하게 짠 그물일수록 구멍이 많다”고 했다.
율법은 순종을 촉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불손종만 부추겼다. 율법은 병을 지적해 줄 뿐이다. 그러나 은혜는 치유를 가져온다. p. 246
▶언뜻 보변 율법주의가 어려워 보이지만 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를 얻는 것이 더 어려운 길이다. 자유안에 살려면 늘 성령의 인도에 마음이 열려 있어야 한다. p. 249
▶니체의 경고- ‘용과 싸우다 스스로 용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 p. 272
▶메이플라워 계약에는 청교도의 목표가 “하나님의 영광과 기독교 신앙의 진보와 우리 왕과 나라의 영예를 위하여 착수된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p. 279
▶신앙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 사랑을 표현하는 최상의 방법 세 가지
1. 하나님의 은혜를 베푸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주로 기여해야 할 부분이다. 고든 맥도날드의 말처럼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세상도 다 할 수 있으나 한가지 예외가 있으니 곧 세상은 은혜를 보일 수 없다는 것이다.
“잘못된 생각은 배격하되 그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을 배격해서는 안된다”고 말한 킹은 감방에 앉아 적에게 조롱당하는 중에도 “원수를 사랑하라”하신 에수님의 명령을 실천에 옮기려 애썼다. p. 282-285
2. 은혜의 방식에 따른다고 해서 교회가 정부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살게 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전 잠비아 대통령 카운다의 말처럼 “한 국가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왕궁에 그리스도인 왕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곳에 그리스도인 선지자가 있는 것이다.” p. 287-88
3. 체스터톤에게서 빌려온 원리로, 교회와 정부가 친해지면 정부에는 좋지만 교회에는 나쁘다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의 저항세력 즉 정부의 막강한 위력에 대한 평형세력으로 존재할 때 진가를 발휘한다. 정부와 친해질수록 메시지는 그만큼 희석된다. 국가교회로 귀속될 때 복음은 변질된다. p. 291-293
▶알렉산더 솔제니친의 말
반세기도 더 전에 어렸을 때 듣던 말이 기억납니다. 많은 노인들은 러시아에 닥친 대재난들을 이렇게 풀이하곤 했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버려 이런 일이 터진 것이다.” 그 이후 러시아 혁명사 연구에 족히 50년을 바치면서 수없이 많은 책을 읽고 개인 증언도 무수히 모으고 혁명이 남긴 파편을 추슬러 보려 나름대로 쓴 책도 8권이 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국민을 육백만이나 삼켜 버린 물락 혁명의 근본원인을 한마디로 말해보라 한다면 이 말을 반복하는 것보다 더 정확한 표현을 찾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잊어버려 이런 일이 터진 것이다.” p. 300
▶지금은 예배의 자유를 누리고 있는 보통 사람들한테 들은 이야기이다. 그들은 대부분 할머니한테 신앙을 배웠다. 교회를 말살하던 정부도 할머니들은 무시했다. 노파들이 마루나 쓸고 촛불이나 팔며 전통에 매달리다 죽게 내버려두자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의 요람을 흔든 것은 바로 주름살 투성이인 할머니의 손이었다. 지금 교회에 다니는 젊은이들 중에는 할머니가 잠자리에서 들려주던 찬송과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을 처음 배웠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p. 301
▶어느 중국 전문가에 따르면 중국의 부흥은 교회 역사상 수적으로 가장 큰 부흥이라 한다. 묘한 일이지만 정부의 억압이 오히려 교회에 유리하게 작용한 것이다. 권력 구조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중국 그리스도인들은 교회 본연의 사명인 예배와 전도에 힘썼을 뿐 정치 문제에는 별로 관여하지 않았다. 법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삶을 바꾸는 일에 집중한 것이다. p. 304
▶예수님이 보이신 천국은 일종의 비밀 세력 같은 것이다. 이리떼 속의 양떼, 밭에 감추인 보화, 가장 작은 씨앗, 가라지 속에 자라는 알곡, 밀가루 반죽에 넣은 작은 누룩, 고기에 뿌린 소금,- 모두가 사회 속에 들어가 역사하여 안에서 밖으로 변화시키는 운동을 암시하고 있다. p. 306
▶일찍이 스탈린은 폴란드 어느 마을에 공산주의의 장래를 실제로 증명해 보이고자 노와후타( Nowa Huta) 즉 ‘신도시’를 지었다. 그는 한번에 온 나라를 바꿀 수는 없지만 차후 건설한 세계의 맛보기로 번쩍이는 철강공장, 큼직한 아파트, 충분한 고원, 널찍한 도로 등을 갖춘 신도시 하나는 지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나중에 노와후타는 도시 하나 제대로 바꿀 수 없는 공산주의의 실패의 상징으로 전락해 결국 폴란드 자유노조의 본산이 되었다.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은 참된 본향의 거류민이다” 본회퍼의 말이다.
적대적인 세상 속의 천국 식민지, 적어도 그것이 신약 성경이 말하는 교회의 비전이다. 드와이트 무디는 “백 사람 중 하나가 성경을 읽으면 나머지 아흔아홉은 그리스도인을 읽는다고 말했다.” p. 308
▶정치는 사람들 사이에 선을 긋는다. 반대로 예수님의 사랑은 그 선을 끊고 은혜를 베푼다. p. 311
▶권력의 사다리는 위로 가지만 은혜의 사다리는 아래로 임한다. p. 313
▶현재 호스피스 운동의 창시자 시슬리 손더스의 이야기
사회사업가이자 간호사였던 손더스는 죽어가는 환자들을 대하는 의료진의 모습에 기가 질렸다. 그는 거기에 거부감을 느끼고, 아무도 간호사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자 사람들이 찾아와 존엄성을 유지하고 고통없이 죽을 수 있는 곳을 세우기 위해 다시 의대에 가서 의사가 되었다. 현재 호스피스는 미국내에 있는 2,000개를 포함하여 40개국에 존재하고 있으며 그 중 반은 기독교에 기반을 두고 있다. p. 313
▶지금도 남부 특유의 코맹맹이 소리로 말하는 앨라배마 출신 백만장자 사업가 밀라드 풀러는 돈은 많았으나 불행했던 그는 결혼에 실패한 후 조지아 주 아메리커스에 가 클레런스 조단과 “코이노니아 공동체”에 빠져들었다. 오래지 않아 풀러는 모든 재산을 처분하여 지구상 모든 이는 집다운 집에 살 자격이 있다는 단순한 전제하에 기관을 하나 설립했다. 현재 “국제 헤비타트 운동(Habitat for Humanity)”에는 세계 각지에 집을 짓겠다는 자원 봉사자가 수천 명씩 몰려들고 있다. 풀러가 저의를 의심하는 어느 유대인 여자에게 자기 일을 이렇게 설명해 주었다. “부인, 우리는 전도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니어도 우리가 지은 집에 사실 수 있고 또 지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저와 많은 자원 봉사자들이 이 일을 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때문입니다.” p. 314
▶은혜의 렌즈로 세상을 보니 불완전이야말로 은혜의 선결 조건임을 깨닫는다. 빛은 갈라진 틈으로만 새어든다. p. 321
▶하나님은 ‘성인’보다 죄인을 더 가까이 하신다. 어느 강사가 영성을 이렇게 말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한 사람씩 줄에 매달아 붙들고 계십니다. 우리가 죄를 지으면 줄이 끊어집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매듭을 지어 다시 묶으시고 자연히 우리는 하나님께 더 가까워집니다. 우리는 죄를 지어 계속 줄을 끊지만 그럴 때마다 하나님은 다시 묶어 우리를 더 가까이 끌어당기십니다.
”p.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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