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예화

[한뼘긴글ᆢ봉준호와 송강호의 아름다운 인연]

하마사 2020. 2. 16. 16:11

[한뼘긴글ᆢ봉준호와 송강호의 아름다운 인연]

2000년 봉준호는 영화 <플란다스의 개>로 충무로의 주목받는 신예 감독이 되었지만, 처참한 흥행 실패로 의기소침한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월애> 이현승 감독이 주최한 '디렉터스 컷' 행사의 초청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는 행사 인사와 간단히 식사만 하고 자리를 뜰 생각이었다.

바로 그때 행사장 계단에서 올라오는 누군가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는 바로 당시 <반칙왕>, <공동경비구역 JSA>로 새롭게 떠오른 충무로의 신성 송강호였다.
갑작스럽게 인기 배우와 마주친 봉준호가 먼저 멋쩍게 인사를 건네려 하자, 송강호가 먼저 "어 봉준호씨!" 하고 인사를 건넸다. 그의 인사에 봉준호는 당황했다.
송강호는 마침 어제저녁 <플란다스의 개>를 비디오를 통해서 봤다며 영화의 소감에 대해 봉준호 감독에게 즐겁게 이야기했다.

둘의 대화는 행사 진행으로 인해 짧게 끝났지만 봉준호는 유명 배우가 자신의 실패작에도 소감과 응원의 메시지를 보낸 것에 힘을 얻게 되었다.
송강호의 인사는 의욕을 잃었던 봉준호에게 큰 자극이 되었고 곧바로 다음 작품을 준비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렇게 봉준호는 2002년 어렵게나마 두 번째 작품을 계획하게 되었다.
당시 영화계에서는 두 번 연이어 흥행에 실패한다면 사실상 영화감독으로서 수명이 조기에 끝나는 일이기에 봉준호는 이번 작품을 마지막이라 생각하며 준비에 임했다.
그래서 이번 영화만큼은 유명 배우를 캐스팅할 계획을 세웠다.
그가 주인공으로 떠올린 배우는 2000년 디렉터스 컷에서 자신을 알아 봐 준 송강호. 하지만 워낙 대 스타여서 출연 결정은 쉽게 결정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게다가 데뷔작에서 크게 흥행에 실패한 경험이 있는 자신과 비교가 되지 않는 행보를 보이는 송강호는 너무나 큰 존재로 느껴졌다.
확신이 없던 상황에서 '믿져야 본전이다'라는 생각으로 송강호에게 각본을 보냈고, 너무나 초조했던 봉준호는 답변을 기다리지 못하고 떨리는 마음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상보다 빨리 전화를 받은 송강호가 봉준호에게 건넨 답변은…
"시나리오 봤습니다. 출연하겠습니다."
예상치 못한 흔쾌한 답변에 봉준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 재차 물었고, 송강호는 공손한 말로 신인 감독 봉준호에게 출연하고 싶다는 의사를 재 확인해주며 다음과 같은 말을 전했다.
"감독님 우리 5년 전에 만났잖아요. 나는 그때 당신 영화에 출연하기로 이미 결정했어요."

5년전이면 1997년 인데?... 2000년 디렉터스 컷 때가 아니고? 송강호의 말에 봉준호는 그제야 한동안 잊고 있었던 그와의 진짜 첫 만남을 떠올리게 되었고, 당시의 인연이 이렇게 이어진 데 대해 새삼 놀라게 된다.

무명의 배우를 알아봐 준 젊은 조감독
1997년 당시 무명의 연극배우였던 송강호는 영화 제작사 우노필름(현 싸이더스의 전신)의 사무실을 찾게 되었다.
영화사가 준비중인 차기작의 단역 배우를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달려온 것이다.
어려운 경제적 상황에서 단역 역할이라도 간절한 상황ᆢ
초조하게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송강호에게 영화의 조감독이었던 한 남성이 수줍게 다가와 인사를 건냈다.
"<초록물고기> 잘 봤습니다, 선배님!"

송강호는 연극배우로 활동하며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초록물고기>의 조연으로도 출연했는데, 특히 <초록물고기>에서 송강호가 연기한 양아치 판수는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조연 캐릭터중 하나였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대중과 영화 관계자들에게 덜 알려진 그였는데, 먼저 자신을 알아봐 준 젊은 조감독의 인사가 너무나 고마웠다.

하지만 송강호는 그날 오디션에서 탈락하고 말았다.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지만 관계자들이 보기에 부족했다는 점도 아쉬웠지만, 가장 서운한 점은 그 아무도 탈락의 사유를 이야기해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당시 영화판에서는 그러한 인식이 부족했다.
그 때문에 무시당했다고 생각하며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그에게 장문의 삐삐 녹음이 도착한 것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게 된다.

메시지의 주인공은 회사에서 자신에게 인사를 건넨 조감독으로 자신의 연기를 정말 인상 깊게 봤다는 말과 함께 어떠한 이유로 함께 작업하지 못하게 되었는지 송강호에게 차분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메시지의 마지막에 다음과 같은 평생에 남을 말이 담겨져 있었다.
"언젠가 꼭 좋은 기회에 다시 뵙고 싶습니다."

어찌 보면 형식적인 인사일 수도 있지만, 송강호에게 그의 메시지는 너무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한낱 오디션에 탈락한 단역 배우에 불과한 자신에게 진심 어린 메시지와 인사를 전한 그 젊은 조감독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송강호는 다음에 출연한 작품 <넘버 3>로 충무로의 기대주가 되었고, 얼마 안 가 국민 배우로 등극한다.
여전히 무명시절 당시 자신에게 메시지를 남겼던 조감독을 잊지 않았던 그는 3년 후 <플란다스의 개>를 만든 봉준호가 바로 그 젊은 조감독임을 알게 되어 반갑게 인사를 한 것이고, 그로부터 2년 후 그가 보낸 시나리오를 받고 출연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아무도 알아봐 주지 않았던 시절 자신에게 깍듯이 예의를 갖춘 그 젊은 조감독은 인성 뿐만 아니라 훌륭한 예술적 감각까지 지닌 천재적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송강호는 5년 전 그가 자신에게 남긴 마지막 메시지의 끝 문장에 응답해야 할 때가 왔다고 결심하며 그의 작품에 출연을 승낙한 것이다.
그 작품은 바로 2003년 최고의 흥행작이자 역대 한국 영화 최고의 작품으로 손꼽히는 <살인의 추억> 이었다.

<살인의 추억>의 콤비 <기생충>으로 칸을 흔들다.
두 사람은 3년 후인 2006년 천만 관객 신드롬을 낳은 <괴물>로 다시 한 번 대한민국을 휩쓸게 된다.
그리고 서로의 인연을 놓고 싶지 않았던 그들은 2013년 할리우드의 연기파 스타들과 함께한 <설국열차> 프로젝트를 통해 서로의 이름을 전 세계에 알리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1997년 삐삐 메시지의 인연은 마침내 2019년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이라는 역사적인 순간을 탄생시켰다.
상패를 받은 봉준호 감독은 전 세계 언론이 보는 가운데 송강호 앞에 무릎을 꿇고 그에게 상패를 건냈다.
실패한 감독으로 끝날 뻔했던 자신에게 힘이 되어준 그에게 보낸 감사와 존경의 예우였지만, 송강호는 자신에게 먼저 인간적 예우를 대해준 그가 당연히 당신이 받아야 할 상이라며 치켜세웠다.

그 누구도 알아봐 주지 않던 시절, 서로에게 예를 갖추며 재능을 응원해준 그들이 만들어낸 오늘의 결과는 영화보다 더 감동적이었다.
그들의 조합은 아직도 앞으로도 '현재 진행중'이 될것이며, <기생충> 이후 또 어떤 놀라운 결과물을 만들지 기대된다. 설령 그것이 기대 이하의 결과를 낳는다 하더라도 두 사람은 그 누구보다 서로를 위로하고 응원해줄 아름다운 인연으로 우리에게 기억될 것이다.


-누군가 단체카톡방에 올린 글을 퍼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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