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설교

하기사행교회(하나님을 기쁘시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

하마사 2017. 12. 5. 11:52

본문: 14:17-18

제목: 하기사행 교회

찬송: 285

목표: 하나님을 기쁘시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가 되게 한다.

 

 

하기사행생소한 단어입니다. 주보에 설교제목을 보시고 의문이 생겼을 것입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어른들이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사용합니다. 일종의 줄임말입니다. 버카충은 버스카드 충전을 뜻합니다. 맥날은 맥도날드, 안물안궁은 안물어봤음 안궁금함, 따아는 따뜻한 아메리카노, 문상은 문화상품권, 갈비는 갈수록 비호감, 열폭은 열등감 폭발, 생선은 생일선물 등입니다. 짧게 줄임말을 사용하여 자기들의 의사를 소통합니다. 저도 설교제목을 줄임말로 해보았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의 줄임말로 하기사행 교회라고 했습니다. 주보에 다 쓸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주심교회 파이브 비전 중에 세 번째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교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는 교회는 존재목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교회를 통해 기쁨을 얻고 영광을 받으셔야 합니다. 이 땅의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분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교회의 규모에 상관없습니다. 대형교회이든 개척교회이든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기쁨을 얻으셔야 합니다.

바울사도는 그런즉 우리는 몸으로 있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9) 고백했습니다. 주를 기쁘시게 하기 힘썼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보다 근심케 하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물론 이 세상의 교회는 불완전 합니다. 문제가 있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교회의 존재목적을 알고 신앙생활 해야 합니다. 주심교회가 앞으로 어떤 일을 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인지를 먼저 질문해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일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면 해서는 안 됩니다. 우선순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각인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말인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행동인지를 질문하면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어떻게 할 때 하나님이 기뻐하십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는

 

1. 생명 살리는 교회입니다.(생명구원)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로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사시면서 생명을 살리는 일을 하셨습니다. 질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귀신들려 정신적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 죄로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 삶의 목적을 몰라 방황하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회복하고 소생시키는 일을 하셨습니다.

주심교회는 영혼 구원하여 제자 삼는 교회를 지향합니다. 교회의 존재목적은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죄로 지옥에 갈 사람들을 예수님 믿게 하여 천국으로 인도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또한 성숙한 예수님의 제자로 살도록 하는 일을 해야 합니다.

유대주의는 율법에 매여 생명보다는 문구에 매여 변질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누가복음 6장에 보면 예수님이 안식일에 오른손 마른 사람의 손을 고쳐주셨습니다. 그 때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질문하십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하시고 환자를 고쳐주셨습니다. 안식일에 일하지 않고 예배드리는 것이 중요하지만 생명을 살리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생명이 죽어가는 데 안식일이라고 모른 체한다면 바른 교회와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피 값으로 사신 생명을 살리는 것이 가장 우선입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이렇게 질문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그 아들이나 소가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지 않겠느냐안식일의 율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생명 살리는 일임을 강조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생명 살리는 것이 사명임을 깨닫고 복음으로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헌신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아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의 영혼을 살리는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는 생명을 살리는 교회와 성도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는

2. 열매 맺는 교회입니다.(열매맺음)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14:18)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17절에 하나님의 나라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크게 둘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 즉 죽어서 가는 천국과 하나님이 통치하시는 주권이 강조된 현세적 하나님의 나라, 즉 교회가 있습니다. 교회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당시 교회는 음식을 먹고 마시는 문제로 갈등이 있었습니다. 속된 음식을 먹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가지고 갈등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것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교회는 사소하고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는 외적인 문제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을 누려야 합니다. 주님이 주시는 의를 입어 의인이 되고 의인으로 누리는 평강과 기쁨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의는 하나님과 인간사이의 조화를 이루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정의라고 표현하는 것이 이해가 빠릅니다.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순종하는 것이 의롭게 되는 수단이었습니다. 죄를 지으면 짐승의 피를 흘리는 제사를 통해 죄 사함을 받아야 했습니다.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그만큼 희생과 순종의 행위가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을 빠짐없이 지켜야 했습니다. 율법을 어기면 죽기까지 했습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인해 막혀진 담이 허물어지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의를 얻게 되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자기 의가 아닌 예수님의 의를 힘입어 의인이 되었습니다. 선한 행위를 통해 받은 의가 아니라 전적인 은혜로 주어진 의입니다. 의인이 되었다면 의인답게 당당하게 살아야 합니다. 죄에 매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주님 안에서 자유인이 되었습니다. 죄가 다시는 우리를 속박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고 살아야 합니다.

두 번째 맺히는 열매는 평안입니다. 세상이 줄 수 없는 참된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폭풍 속에서도 누릴 수 있는 평안함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경험할 수 있는 평안입니다. 바울사도가 로마로 갈 때 유라굴로 라는 광풍을 만났을 때 두려움과 공포 속에 있던 사람들에게 담대하게 여러분이여 안심하라고 외칠 수 있는 평강이 그리스도인의 평강입니다.

예수님이 평강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누가복음 7장에는 향유를 예수님의 발에 부은 여인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했을 때 그 동네에서 죄인으로 낙인찍힌 여인이 찾아와 예수님의 발 곁에서 울면서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은 죄사함의 은혜를 얻고 평안의 복을 받았습니다. 죄의식에 사로잡혀 평안을 잃고 살다가 죄에서 자유함을 얻었고 평안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 백성은 성령 안에 있는 이런 평안을 누립니다. 죄에서 해방된 영원한 평안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니는 중에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 평안을 누릴 수 있는 것은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이 이런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열매는 희락입니다. ‘희락은 기쁨이나 즐거움을 의미합니다. 교회와 성도는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으로 인해 주어지는 구원의 감격과 기쁨이 있어야 합니다. 영적인 환희가 있어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이 있지만 부활의 기쁨과 감격이 더 큽니다. 고난과 슬픔의 십자가는 결국 구원의 기쁨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결국 기독교는 고난을 통한 기쁨의 종교입니다. 고난의 과정을 거친 후에 끝은 기쁨과 환희입니다. 영원한 기쁨의 종교입니다. 기쁨의 원천은 주님 안에 있는 것이므로 아무도 빼앗아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나오는 사마리아 여인이 한 낯에 물을 길러 왔다가 예수님을 만나고 누리는 기쁨은 물동이를 버리고 동네로 들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아무도 없는 시간을 택하여 물을 길러 왔지만 예수님을 통해 영원한 생수를 경험한 여인은 물을 길러왔던 물동이를 버려둔 채로 동네로 들어가 자기를 조롱하고 멸시하는 동네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증거 했습니다. 이 여인을 통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기쁨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사도가 빌립보교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기를 원하노라고 축복했던 것처럼 의의 열매가 가득할 때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고 찬송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맺히는 삶의 열매들을 보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십니다.

(15:8) “너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는 내 제자가 되리라.” 우리가 열매를 많이 맺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5:22절에 나오는 성령의 열매인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와 같은 열매들은 성령의 능력으로 변화된 인격의 증거들입니다.

이런 열매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착한 행실로 나타납니다. (5:16)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착한 행실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합니다. 선행이 우리를 구원에 이르게 하지는 않습니다. 착한 행실로 구원받지 못합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것입니다. 하지만 은혜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합니다. 착한 행실로 빛의 자녀답게 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열매를 맺음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예화)

사도행전 10장에 로마 백부장 고넬료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를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10:2)

그는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많이라는 단어를 보면 다른 사람들보다 특히 많은 구제를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로마 군인들이나 관료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하여 식민지 백성들을 착취하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고넬료는 오히려 구제에 힘썼습니다. 식민지 백성인 유대인들이 점령군이었던 고넬료를 칭찬할 정도였습니다. 하루는 고넬료가 기도할 때 천사가 나타나서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했습니다. 천사의 말에 순종하여 베드로를 청하여 가족과 친척과 친구들이 성령을 받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고넬료는 착한 행실을 통해 유대인들을 감동시키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사람은 의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그 열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십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는

3. 하나님을 높여 드리는 교회입니다.(순종)

하나님을 높여 드릴 때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려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왕 사울이 버림받은 이유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높여드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 할 때 그들을 괴롭혔기 때문입니다.

(삼상 15:3) “지금 가서 아말렉을 쳐서 그들의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하되 남녀와 소아와 젖 먹는 아이와 우양과 낙타와 나귀를 죽이라 하셨나이다 하니 (삼상 15:8) 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의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삼상 15:9)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의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진 것과 어린 양과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하기를 즐겨 아니하고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진멸하니라.”

사울은 자기의 눈에 좋은 것을 남겨두었습니다. 가치 없고 하찮은 것은 모두 진멸했지만 좋은 것은 남겨두고 자기가 차지하려 했습니다. 여기서부터 사울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사울에게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말씀에 순종하지 않고 드리는 예배를 기뻐하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다고 했습니다. 자식이 부모님의 말씀을 거역하면서 좋은 것을 드려도 부모님의 마음이 기쁘지 않습니다. 효도는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부모님을 부모님으로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이 우선이듯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할 수 있습니다.

이외에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만 세 가지로 말씀드립니다.

 

또한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뿐 아니라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이 불행하게 사는 것을 하나님은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죄로 인해 영원히 불행하게 살아야 할 우리를 위해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 까지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죄의 종, 마귀의 종으로 불행하게 살다가 영원히 지옥에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습니다.

믿는 자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합니다. 누구나 행복한 삶을 꿈꿉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행복은 좇으면 좇을수록 더 멀어지는 특징이 있습니다. 인생의 목적을 바로 알고 하루하루 잘 살아낼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이 쓴 글을 보았습니다. 인생에는 크게 두 부류가 있습니다. 소유추구의 삶과 존재추구의 삶입니다. 소유추구는 인생의 목표를 무엇을 소유하느냐에 둡니다. 더 성공하고, 더 많이 갖는 데 인생을 거는 것입니다. 이런 소유추구의 삶은 불만, 불안, 허무로 끝나고 맙니다. 얻지 못해 불만이거나 얻은 걸 잃을까 불안하거나 결국에는 다 잃어버리고 허무해하는 것입니다.

반면 존재추구는 인생의 목적을 어떤 존재가 되느냐에 둡니다. 나만의 사명을 발견하여 어느 때든지 그 길을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나에게 주어진 성공은 물론이고 닥치는 고난까지도 더 나은 존재됨을 향한 뜻있는 사건으로 이해합니다. 이 존재추구의 삶은 결코 헛되지 않으며 끝까지 평안과 감사를 유지하게 합니다. 그렇습니다. 소유를 추구하느냐? 아니면 존재를 추구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십니다. 10:10,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그 생명을 풍성히 얻게 하려고 오셨습니다.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쉼을 주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막 10: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말씀합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 생명을 행복하게 누리며 살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힘들게 지고 가는 그 짐을 받아주시고 대신 쉬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행복하게 살도록 우리를 섬기러 이 땅에 오셨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하게 살아야 합니다. 기쁘게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주심교회는 행복한 사람, 행복한 가정, 행복한 교회를 꿈꿉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행복해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행복하지 않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 행복은 거짓 행복입니다. 먼저 내가 행복해야 합니다. 가정이 행복해야 합니다. 그리고 교회가 행복해야 합니다. 교회 오면 행복해야 합니다. 억지로 봉사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하지 않게 봉사하면 자기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도 힘들게 합니다. 일과 봉사가 우선이 아닙니다. 먼저 행복한 마음이 우선입니다. 꽃꽂이가 아름답습니다. 김집사님이 어제 밤늦게까지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행복하게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이 무엇입니까? 거창한 것을 해야 행복이 아닙니다. 큰 성공을 거두고 많은 돈을 소유하는 것이 행복이 아닙니다. 명예가 있어야만 행복이 아닙니다. 감사를 감사로 알고 살면 행복합니다. 주시는 것에 감사하면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면 행복합니다. 주님이 우리를 섬겼듯이 우리도 남을 섬기면서 행복을 누려야 합니다. 섬김 받는 사람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며 행복을 누리는 것이 참된 행복입니다.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사람이 참된 행복자입니다.

(유머)

옛날 한 부자가 천국에 자기 재산을 가져가겠다며 하나님께 떼를 썼다고 합니다. 끈질기게 매달린 결과 가방 하나만큼이 허락되었습니다. 부자는 전 재산을 금괴로 바꿔 배낭에 담았습니다.

그런데 천국문에 이르자 문지기가 앞을 가로막았습니다. “그 가방에 뭐가 들었습니까.” 부자는 얼른 가방을 열어 금덩이를 보여주며 흐뭇해합니다. 그러자 문지기가 의아해하며 물었습니다. “아니, 천국 도로 포장재는 무얼 하려고 잔뜩 메고 왔습니까.”

이 땅에서 아무리 귀한 금이라도 천국에서는 도로포장재에 불과합니다. 천국의 행복은 이 땅의 행복과 비교할 수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천국과 교회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천국의 행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교회 오면 행복해야 합니다. 부담으로 믿음생활 하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행복하게 믿음 생활해야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을 행복하게 할 수 있고 전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8절입니다.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사도행전 2:47절입니다.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초대 예루살렘 교회 부흥의 비결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였습니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행복하게 하는 교회였습니다. 주심교회와 성도들이 암사동과 강동구, 서울시에서 칭송받는 교회와 성도들이 된다면 행복한 교회가 되고 저절로 부흥되는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는

1. 사랑하는 교회입니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질문했습니다.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22:3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22: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22: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22: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사랑할 때 행복합니다. 미워할 때 불행합니다. 사랑하면 사랑받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사랑받는 사람이 행복한 모습을 보면서 사랑하는 사람도 행복합니다. 사랑하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합니다. 먼저 가까운 사람부터 사랑해야 합니다. 가족을 사랑하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해야 합니다. 자녀는 부모를 사랑하고 공경해야 합니다.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 정말로 사랑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있습니다.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있을까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제보다는 오늘 조금 더 사랑해주는 것에서부터 행복은 시작됩니다. 내가 행복할 수 있고 다른 사람도 행복하게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손양원 목사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렇게 살라고 말씀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어제보다는 오늘 조금 더 사랑하고 오늘보다는 내일 조금 더 사랑하는 노력을 하자는 것입니다.

 

2. 섬기는 교회입니다.

섬김 받을 때 행복합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존중해주고 인정해 줄 때 행복합니다. 칭찬받을 때 행복합니다. 주심교회를 개척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칭찬해줄 때 행복했습니다. 힘들 것이라 하면서도 목사님은 잘 될거예요.’, ‘너는 잘 할거야하는 지인들과 친구들의 격려와 칭찬이 힘이 됩니다. 말로 섬기는 것도 귀합니다. 말로만 한다고 핀잔을 받더라도 말로만이라도 섬겨줄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다음으로는 진심으로 기도하고 섬겨주어야 합니다. 어떤 권사님은 저를 위해 새벽마다 기도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게 하신다고 했습니다. 말로만이 아니라 그분의 진심이 느껴졌습니다. 정말 감사했습니다. 기도로 섬겨주는 일은 너무나 귀합니다. 요즘 새벽기도회에 10명 이상이 나옵니다. 그분들에게 너무나 감사합니다. 다른 교회를 나가셔도 감사합니다. 주심교회를 위해 한마디라도 기도해 주시니까 말입니다.

그리고 행동으로 섬기는 것이 가장 귀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강도만난 사람의 비유에 나오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필요한 것을 공급하며 섬기는 섬김이 가장 귀한 섬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섬김 받을 때 행복할 수 있습니다. 주심교회는 섬기는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특히 새신자들이 가장 최고의 섬김을 받아야 합니다. 앞으로 새신자를 V.I.P.라고 부를 것입니다. 주심교회에서 가장 귀한 분들이기 때문입니다. 이분들을 위해 교회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주심교회는 섬김으로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섬김 받는 사람이 행복하면 섬기는 사람도 함께 행복합니다.

 

3. 꿈을 이루는 교회입니다.

꿈을 이루었을 때 행복합니다. 소원이 성취되었을 때 행복합니다. 저는 목사가 되는 것이 소원이었습니다. 어릴 때 꾸었던 꿈이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자신이 없어서 한 때 포기할까도 했습니다. 시골교회 목사님들의 생활을 가까이에서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 꿈이 성취되었습니다. 행복했습니다. 중간에 힘든 과정이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수없이 많은 아픔과 고통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회한 적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저의 꿈이었으니까요.

꿈을 이룰 때 행복합니다. 우리가 가진 꿈과 소원이 주심교회에서 이루어지면 행복합니다. 그런 꿈을 이루는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꿈을 이루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주심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시편 37:4절입니다.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그가 네 마음의 소원을 네게 이루어 주시리로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십니다.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는 은혜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하기사행 교회는 생명구원, 열매맺음, 순종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교회입니다. 사랑과 섬김과 꿈의 성취를 통해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를 위해 기도하고 헌신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