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 속, 원룸 이웃들 깨우고 숨진 '義人' 안치범씨]
- 성우 시험보려 독립 두달만에…
취업 준비하며 장애학생 도와
CCTV엔 주민 4명과 나왔다가 또 홀로 건물 뛰어드는 모습도
아버지 "아들 목소리 듣고싶다"
- 목숨 빚진 이웃들 "고맙고 미안"
"새벽 초인종 소리에 잠깨 탈출"
빈소엔 黃총리 등 조문 줄이어
아들을 잃은 아버지는 비통한 감정을 드러낼 겨를이 없었다. 잠든 이웃을 구하려 불길에 뛰어들었다 숨진 '초인종 의인(義人)' 안치범(28)씨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서초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 9호실. 21일 아침 일찍부터 스물여덟 망자(亡者)를 추모하는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제대로 검은색 정장도 갖춰 입지 못한 고인의 친구들은 영정에 절을 하다가 그대로 주저앉아 통곡했다. 안씨의 아버지 안광명(62)씨는 죽은 아들의 친구와 후배들을 안고 "괜찮다. 다 괜찮다"며 다독거렸다. 먼저 간 아들을 가슴에 묻은 아버지는 조문객이 없을 때만 몰래 돌아서 눈물을 흘렸다.
안씨의 선행은 뒤늦게 알려졌다. 건물 내부에 폐쇄회로TV (CCTV)가 없었던 탓이다. 그러나 경찰 조사 과정에서 안씨가 목숨을 걸고 이웃들을 대피시켰다는 증거가 속속 나왔다. 안씨의 이웃들은 경찰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려 잠에서 깨 나올 수 있었다" "젊은 남성이 문을 두드리며 '나오세요'라고 외쳐 탈출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건물 외부에 설치된 CCTV에는 안씨가 건물로 들어간 뒤 주민 4명과 함께 나왔다가 다시 혼자서 건물로 뛰어들어가는 모습이 찍혔다.
안씨는 1남2녀 중 막내였다. 위로 누나만 둘이라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자라서 붙임성이 좋고 친구가 많았다고 유족은 전했다. 대학에서 외국어를 전공했지만 목소리가 우렁차 2년 전부터 성우가 되기로 진로를 정했다고 한다. 이번 화재사고는 방송사 성우시험을 본격적으로 준비하려고 학원 근처에 있는 원룸으로 독립한 지 두달만에 일어났다.
안씨는 취업 준비를 하면서도 꾸준히 봉사활동을 나갔다. 안씨의 아버지 휴대전화엔 지난여름 안씨가 장애인 학생들과 함께 나들이를 가서 찍은 셀카 사진들이 저장돼 있다. 마치 친한 친구랑 찍은 듯 하나같이 재미있는 얼굴 표정을 지은 사진들이다. 안씨의 아버지는 "치범이가 상암고등학교에서 공익근무요원으로 복무하며 장애인 학생들을 도왔다"며 "치범이한테 사진을 받기 전까지는 애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건 몰랐다"고 했다.
상암고를 졸업하고 연세대 사회학과에 재학 중인 성준용(20)씨는 이날 휠체어를 타고 빈소를 찾았다. 성씨의 어머니 이은영(62)씨는 "안 선생님(안치범씨)은 근육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대신해 시험 때마다 대필을 해주던 고마운 분"이라고 했다. 상암고는 22일 오전 안씨를 추모하는 묵념 행사를 열기로 했다.
안씨의 부모가 건강한 안씨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추석을 앞두고 군인이었던 할아버지가 묻힌 대전 국립현충원으로 지난 5일 성묘를 갔을 때였다. 안씨의 아버지는 "곧 있으면 추석이니 당연히 또 웃으며 보겠거니 했는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안씨의 아버지도 행정고시 출신 공무원으로 기획재정부에서 오래 근무하다 5년 전 퇴직했다. 그는 "처음엔 죽은 아들이 원 망스러웠지만 지금은 '잘했다 아들아'라고 말해주고 싶은 심정이다"라고 했다.
안씨는 평소 아버지와 노래방을 가면 가수 싸이의 '아버지'란 곡을 불렀다고 한다. '아버지 이제야 깨달아요/어찌 그렇게 사셨나요/더이상 쓸쓸해하지 마요'라는 가사가 담긴 곡이다. 성우가 된 아들의 목소리로 이 노래를 다시 듣고 싶었다는 아버지의 소원은 이루지 못할 꿈으로 남게 됐다.
잠든 이웃을 구하려 불길에 뛰어들었다 숨진 ‘초인종 의인(義人)’ 안치범(28)씨가 한국성우협회 명예회원이 된다.
사단법인 한국성우협회는 23일 “성우 지망생인 고인(故人)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명예회원으로 선정하겠다”고 밝혔다.
성우협회는 연말에 열리는 ‘2016 KBS 성우연기대상’ 시상식에서 안씨의 어머니에게 명예회원임을 인증하는 ‘명예성우’ 패를 전달할 예정이다.
강희선 KBS 성우극회 회장은 “고인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에 작은 위로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안치범씨는 지난 9일 오전 4시 20분쯤 서울 마포구에 있는 5층짜리 건물에 불이 났을 때 가장 먼저 건물에서 빠져나와 119에 신고를 한 뒤 잠든 이웃을 깨우기 위해 건물로 다시 뛰어들어갔다. 안씨가 초인종을 누르며 빠져나오라고 알린 덕분에 원룸 21개가 있는 이 건물에서 다른 사망자는 없었다. 안씨는 유독 가스에 질식해 11일 만에 세상을 떠났다.
-조선일보, 2016/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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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은 동거녀의 이별 통보에 격분한 어느 20대 남자가 홧김에 질러 3층에서 시작됐다. 안씨는 방마다 초인종을 누르고 소리를 질러 이웃들을 대피시켰다. 안씨 덕분에 원룸이 21개 있는 이 건물에서 다른 사망자는 없었다. 3층에서 불이 났으면 4~5층은 연기가 자욱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안씨는 5층까지 올라가 이웃들을 탈출시키느라 뛰어다니다 쓰러지고 말았다.
안씨는 성우 지망생이었다. 성우 학원에 다니려고 지난 6월 빌라 원룸으로 이사 왔다고 한다. 학원 원장이 "원장 자리 물려주겠다고 했는데"라고 할 만큼 성실한 청년이었다. 장애인 봉사활동도 하겠다고 신청했는데 안씨가 쓰러진 후 소식이 없자 봉사 담당자가 수소문 끝에 병원에 찾아와 눈물을 흘렸다.
세월호 선장과 선원들은 수백 명 학생을 가라앉는 배 속에 내팽개치고 자기들만 도망 나왔다. 세상 사람이 다 그런 건 아니지만, 곳곳에서 자기 이해타산만 따지는 사람을 수도 없이 보게 된다. 그런 속에서 안씨의 살신성인(殺身成仁)을 접하게 돼 더 가슴이 먹먹해진다. 꽃도 못 피워보고 스러진 고귀한 영혼은 세상 한 자락 비춰주는 불빛이 될 것이다.
-조선일보 사설, 2016/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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