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韓·美 훈장 11개 받고 전역, 전인범 前특전사령관

하마사 2016. 9. 10. 09:27

[WHY: 전현석 기자의 <觸> 韓·美 훈장 11개 받고 전역, 전인범 前특전사령관]
 

“특전사 허벅지 1㎝ 굵어졌다, 그게 내 자랑”

전인범(58) 전 특전사령관은 지난 7월 중장으로 전역하고 나서 더 유명해졌다.
전 장군에 대한 에피소드가 SNS를 통해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사단장때 전역 병사에게 먼저 경례한 일화는 그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다.


전인범(58) 전 특전사령관은 지난 7월 중장으로 전역하고 나서 더 유명해졌다. 1983년 10월 북한의 아웅산 폭탄 테러 당시 이기백 합참의장을 구해낸 부관 출신이기 때문이 아니다. 그가 지휘했던 장교와 부사관, 병사들이 전 장군에 대한 에피소드를 앞다퉈 페이스북에 올리고 이 내용들이 인터넷에 퍼져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이 부대를 방문한다고 하면 전 장군은 ‘오거나 말거나 평소대로 하라’고 지시했다” “제대 신고를 하러 가니 ‘군 생활하느라 고생했는데 줄 건 없고 투 스타 경례나 받고 가시오’하며 먼저 거수경례를 했다” 등의 이야기들이 사진과 함께 계속 올라온다. 한 커피 전문점 점원이 그를 알아보고 ‘우리 가게에서 커피 뽑아 갔다’고 트위터에 올릴 정도다. 지난달 20일 프로야구 두산과 NC 경기에는 시구자로 초청받기도 했다.



전인범 전 특전사령관은 현역 시절 고강도 훈련을 시키는 것으로 유명했지만, 부하들에게 항상 인기가 높았다. 전역 후에도 그의 페이스북은 그가 지휘했던 장교들과 부사관, 병사들이 남기는 사연과 인사말로 항상 붐빈다. 특전사 요원들에게는 ‘영원한 특전맨’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그는 “잘 입히고 먹이고 재우려고 노력했을 뿐 특별한 인기 비결은 없다”고 말했다. /오종찬 기자


그는 인터뷰 장소인 서울 한 호텔에 턱시도를 입고 나타났다. 왼쪽 가슴에는 그가 한국과 미국 정부로부터 받은 훈장들이 달려 있었다. 턱시도에 달기 위해 실제 훈장과 모양은 똑같고 크기만 줄여서 제작한 것이라고 했다. 그는 한·미로부터 훈장 11개를 받았는데, 이는 대한민국 장성 중 최다 수훈으로 알려져 있다.

“오는 10월부터 1년간 미국 브루킹스연구소와 존스홉킨스대 국제대학원에서 공부하는데, 각종 사교 모임에도 참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이번에 턱시도와 훈장을 맞췄습니다. 미국 군인들은 다 이렇게 합니다. 예비역 장군은 더 이상 제복을 입을 수 없으니까, 이렇게 군에 대한 명예를 보여주는 거죠.”


병사에게 먼저 경례하는 장군

전역 후 더 유명해진 장군
北 아웅산 폭탄 테러 당시
합참의장을 구한 이력…
그후 지휘했던 장교·병사들이
SNS에 에피소드 앞다퉈 올려

국회의원 ‘오시든지 마시든지’
정치인의 軍위문은 위문 아니야
부대 대청소하고 특식 만들고
올 때마다 병사들만 고생
나는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사단장 땐 전역 병사에 먼저 경례
고생했는데 줄 건 없으니 답례
정말 감사하고 미안하니까

―정말 ‘국회의원이 오든지 말든지 평소대로 하라’고 말했나.

“그렇게 얘기 안 했다.”

―그러면 뭐라고 했나.

“‘오시든지 마시든지’라고 했다(웃음). 정치인의 군부대 위문은 솔직히 위문이 아니다. 대청소하고, 특식 만들고, 브리핑 준비하고… 올 때마다 병사들이 고생한다. 나는 국회의원한테 있는 그대로 보여줬다. 장병들이 평소 먹는 음식 그대로 드렸고. ‘우리가 만날 먹는 건데 잡숴 보시고 문제 있는 건 개선해 주십시오’ 부탁했다.”

―사단장 때 전역하는 병사들한테 경례해줬다고.

“정말 감사하고 미안하니까. 병사들 월급 많이 올랐다고 하는데 시급으로 따지면 300원이다. 회사에서 직원들한테 시급 300원 주면서 마음대로 부려 먹을 수 있나.”

―훈련 많이 시키는 장군으로 유명했는데도 장병들에게 인기가 높았다. 비결이 뭔가.

“장병들을 잘 입히고 먹이고 재우려고 노력했다. 보급품 제때 주고, 깨끗하고 쾌적한 환경에서 식사할 수 있도록 하고, 휴식을 보장해 줘야 한다는 의미다. 상급자가 하급자를 잘 챙기면 하급자가 알아서 상급자를 따르고 존경한다.”

―운전면허도 따게 해줬다고 들었다.

“사단장 시절 얘기다. 당시 운전면허 따려면 100만원 정도 들었는데, 한 운전면허 학원의 협조를 받아서 병사들이 30만원만 분납으로 내게 했다. 그때 운전면허 딴 장병이 410명이다. 안전 문제 등으로 반대하는 지휘관들도 많았는데 ‘면허가 있으면 미래 계획을 세울 수 있고, 그런 사람이 더 군 생활을 잘한다’고 설득했다.”

―부하들이 무조건 ‘하면 된다’고 하면 혼냈다고 들었다.

“군인은 흔히 ‘전시에 군에선 불합리한 일이 많이 생기니까 이에 대비하기 위해 평소 불합리한 것을 받아들이고 불합리한 방법으로 일을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잘못된 생각이다. 전쟁이 불합리하기 때문에 오히려 평상시 군부대는 가장 합리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영원한 특전맨’ 칭호 받아

/전인범 제공

전인범은 2013년 11월부터 2015년 4월까지 특전사령관으로 일했다. 그는 “군 생활 중 그때가 가장 보람 있었다”고 말했다. 그가 특전사령관 임기를 마쳤을 때 부하들이 ‘영원한 특전맨’이라면서 목말을 태워 환송하기도 했다.

―특전사에 대한 애정이 많은 것 같다.

“특전사 요원들을 볼 때면 가슴이 뭉클하다. 이들은 유사시 국가의 부름을 받고 적진에 들어가서 임무를 수행한다. 살아 돌아올 확률이 50%도 안 된다.”

―특전사령관 취임하고 기분이 어땠나.

“많이 실망했다.”

―왜 실망했나.

“훈련이 실전에 대비돼 있지 않았고 장비가 너무 열악했다. 그래서 다짐했다. 적진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도록 실전적인 훈련을 시키고, 장비는 어떻게든 좋은 걸 줘야 되겠다고.”

―실전적인 훈련이란 이를테면 어떤 것인가.

“사격량을 늘렸다. 특전사 요원은 일반 병사보다 3배 정도 총을 더 쏘는데, 이를 5배로 늘렸다. 또 전진하면서 사격할 때 총에 부착해서 탄피를 수거하는 탄피받이를 못 쓰게 했다.”

―부대 반응은.

1983년 10월 북한의 아웅산 폭탄 테러 때 이기백(왼쪽 원) 당시 합참의장을 구하기 위해 그의 부관이었던 전인범(오른쪽 원) 중위가 다가가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전인범 장군이 특전사령관 시절 소총 사격을 하는 모습. 그는 스스로 ‘밀덕’(밀리터리 마니아)이라고 자부한다. 중학교 때 플라스틱 모형으로 1939~1945년 사이 생산된 모든 독일군 차량을 만들었고, 함정 일부 모양만 보고도 배 종류를 알아맞혔다고 한다. /조선일보 DB·전인범 제공


“사고 나면 어떡하냐고 간부들이 난리가 났다. 사격 훈련시 총알 나눠준 만큼 탄피가 나와야 사고 방지할 수 있다는 게 우리 군의 기본 생각이니까. 탄피 하나 없어지면 전 부대원이 밤을 새워서라도 찾아야 하는 게 얼마나 비생산적인가.”

―그래도 대책을 세웠을 텐데.

“전진 사격 훈련시 1명이 뒤따라가게 했다. 탄피 주우라는 게 아니라 실제 몇 발 쏘는지 세라고 했다. 그러면 탄피 주울 필요가 없으니까.”

―체력 훈련 방식도 바꿨다고 들었다.

“특전사에 체계적인 체력 증진 프로그램이 없었다. 헬스장에서 각자 알아서 역기 들고, 가끔 축구하는 게 전부였다. 국회의원이나 기자들 오면 타이어 끌기 같은 시늉이나 하고. 그래서 특전사에서 35년 복무했고 체력 단련 관련해 박사 학위 받은 한 원사에게 12개 코스의 프로그램을 만들게 했다.”

“한국군 탁상공론에 빠져…
전쟁론보다 전투적 사고하라”

―효과가 있었나.

“특전사 요원 허벅지가 평균 1㎝ 커졌다. 체력 프로그램 시행 후 6개월 뒤 미군 특전사 요원들과 경기를 했는데, 수영 빼고 나머지 종목을 우리가 다 이겼다.”

―특전사 요원들에게 조준경이나 방탄조끼 등 사제 장비를 허용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사제 장비가 아니라 비인가 장비다. 또 우리나라에서만 비인가 장비지 외국 특수부대에선 이미 보편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장비들이다.”

―어찌 됐든 규정 위반 아닌가.

“부대원 중에 자기 돈 수백 만원을 들여서 사는 경우가 많았는데, 나는 그걸 열정으로 봤다. 해외 파병 등으로 모은 돈으로 자동차를 사거나 주식 투자를 할 수도 있었는데, 이들은 나라를 지키기 위해 장비를 샀다. 이걸 왜 못 쓰게 하나?”

―부대원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했다는 지적도 있다.

“이걸 가지고 위화감 운운하는 건 지극히 한국적인 사고다. 군이 좋은 장비를 대신 사주거나 돈을 주진 못할망정 위화감이 생기는 걸 막겠다고 자기 돈 주고 산 장비를 못 쓰게 하는 게 옳은가. 결국 특전사 요원의 수준을 하향 평준화하는 것이다.”

2014년 10월 7일 국방부 청사에서 열린 국방부 국정감사에 일반증인으로 출석한 전인범 특전사령관이 특전사 요원 훈련 도중 사망 사고와 관련한 의원들 질의에 답변하고 있는 모습. /전기병 기자

포로 극복 훈련 사고 아픔
두 중사가 목숨 잃어
지휘관인 내 책임…
특전사는 최악상황 대비
그래서 훈련은 계속돼야

박지만과 육사 동기
우연히 만나서
인사한 적 있지만
밥 한끼 같이 안 먹어

모병제엔 반대
예외없이 軍 입대해야
체력등급 1급 병사가
장교식당 음식 나르니
北이 한국군 우습게 봐


2014년 9월 특전사 포로 극복 훈련 도중 이유성 중사·조용준 중사가 질식해서 숨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안전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 것에 대한 비판이 잇따랐다. 전인범은 “20대 초반 그렇게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는 것에 대해 정말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며 “제가 지휘관으로서 지휘 책임이 분명히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다만 포로 극복 훈련은 계속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왜 계속해야 하나.

“적진에 들어가서 임무를 수행하는 특전사는 포로가 됐을 때 고문 등 극한 상황을 견디기 위한 훈련이 꼭 필요하다. 특전사에서도 이 같은 훈련이 있었는데 내실 있게 하지 않아서 사라졌었다. 이번에 재도입하는 과정에서 사고가 났다.”

―영화를 보고 훈련 장면을 따라 하다가 참사가 났다고 하던데.

“특전사 지휘관과 교관을 모아 놓고 ‘브라보 투 제로’라는 영화를 봤다. 1990년대 영국 특수부대 작전을 현실감 있게 다룬 작품이다. 작전 투입 전에 비디오 유언장을 남기고, 야간에 헬기 투입시 고도 측정을 하는 법 등을 보고 저런 훈련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때 한 간부가 우리도 고문을 이겨낼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고 해서 승인했다. 어찌 됐든 내 책임이다.”

전역식에 미군 수뇌부 총출동

전인범의 전역식에는 이기백·정호용·김동진·김태영 전 국방장관 등 한국군 전·현직 주요 인사뿐만 아니라 빈센트 브룩스 한미연합사령관, 토머스 반달 미8군사령관, 시어도어 마틴 한미연합사단장 등이 참석했다. 한국군 대장도 아니고 중장 전역식에 주한 미군 수뇌부가 총출동한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전인범은 군내 대표적인 미국통으로 국방부 대미 정책과장, 한미연합사령부 작전참모차장, 유엔사령부 군사정전위원회 수석대표 등을 지냈다. 그는 전역식에서 미 특수전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미국 통합특수전사령부 훈장을 받았다. 한국 군인이 이 훈장을 받은 건 처음이다. 전인범은 또 미국 정부가 외국군에 주는 최고 등급의 훈장인 공로훈장(Legion of Merit)을 수훈했다. 그가 이처럼 주한 미군에 인기가 높은 이유에 대해 한국군 장성들은 “말이 통하니까”라고 답했다. 그는 한국군 장성 중 가장 영어를 잘하는 것으로 평가받는다.

―영어를 잘해서 미군한테 인기가 높다는데.

“나는 솔직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말인가.

“미군 앞에서 칭찬하고 뒤에서 욕하지 않았다. 욕할 게 있으면 면전에다 대고 직접 했다.”

/전인범 제공

―진짜 욕했나.

“한국어로 욕했다. ‘씨×’ 이렇게 욕한 적도 있다.”

―알아듣나.

“내가 2004년 이라크 다국적군 사령부에서 선거지원과장(대령)으로 7개월 동안 근무했을 때 내 밑에 미국·영국·호주군 중령과 소령을 데리고 일했다. 이들이 한국말 두 가지는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씨×’하고 ‘가자’였다.”

―그렇게 욕하는데 외국군이 좋아하나.

“미국이든 중국이든 강대국들이 우리가 밥 사주고 선물 주면 좋아할까? 천만에. 우리를 더 우습게 본다. 솔직하게 할 말 하고 인정할 건 인정하고, 그런 사람을 좋아하지.”

―친미파로 꼽히는데.

“굳이 따지자면 친이스라엘파다.”

―이유는.

“이스라엘한테 배울 점이 많다. 이스라엘군은 군내 소통이 잘 되고 군대 문화가 합리적이다. 상관은 적법한 명령만 내려야 하고, 부하는 적법한 명령만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군은 결과만 따지는데 이스라엘군은 과정을 중요시한다.”

전인범의 할아버지(전항석)는 유한양행 사장을 지냈고, 아버지(전주화)는 한의사, 어머니는 한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이자 1987년 사회민주당에서 한국 최초의 여성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홍숙자 여사다. 그가 영어를 잘하는 것도 초등학교 때 유엔대표부에 발령받은 어머니를 따라 미국에서 산 덕분이다.

―왜 군인의 길을 택했나.

“어렸을 때부터 꿈이 군인이었다. 어머니는 미국에서 한국에 돌아온 뒤 영어 까먹지 말라고 집에서 주로 주한미군방송(AFKN)을 보게 했다. 그때 ‘컴뱃(Combat)’이라는 전쟁 드라마가 방영됐는데, 거기서 나오는 샌더스 중사가 정말 멋있어 보였다.”

―집안에서 반대하지 않던가.

“어머니는 반대하지 않았다. 오히려 육사에 간다고 하니까 정말 좋아하셨다. 아버지는 반대했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우리 아버지는 4형제인데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군대에 안 갔다. 그래서 집안의 명예를 위해서라도 육사에 가려고 했다.”

전인범 전 육군 중장(육군특수전사령관). /오종찬 기자

―육사 생도 때 별명이 ‘잔인범’이었다. 후배들 군기반장이었다는데.

“육사에 처음 들어갔을 때 적응을 잘 못했다. 너무나 불합리한 일이 많아서 이를 견디는 게 힘들었다. 그런데 나한테 불합리하게 대하는 선배들을 보면 고통을 받아본 경험이 없더라. 공부 잘하고 윗사람들이 귀여워하니까 기합을 받은 일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2학년 때부터 차별 없이 후배들 군기를 잡았다. 고통이 뭔지 알면 몰지각한 사람이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박근혜 대통령의 동생, 박지만과 육사(37기) 동기다. 박지만과 친했나.

“전혀 아니다. 어머니가 외교부 있을 때 육영수 여사의 통역을 종종 맡았다. 어머니가 ‘육 여사가 참 훌륭한 분인데, 아들 박지만이 육사 동기니까 잘 챙겨주라’고 당부한 적은 있다. 그런데 육사 때부터 박지만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고 내가 굳이 챙겨줄 필요가 없었다. 어느 자리에서 우연히 만나서 인사한 적은 있지만 밥 한 끼 같이 먹은 적이 없다.”

“한국군 탁상공론에 빠져 있어”

―생도 시절까지 포함해 40년 군 생활을 했다.

“시원섭섭하다. 자랑스러운 군복을 더 이상 입을 수 있는 기회가 없어서 섭섭하지만, 아무 생산적이지 못한 회의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아도 돼서 시원하다.”

―생산적이지 못한 회의라니.

“군이 탁상공론에 빠져 있다. ‘전쟁론’ 같은 형이상학적인 것만 알고 전투적 사고를 하는 군인들이 부족하다.”

―전투적 사고란 게 뭔가.

“전투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은 ‘사격과 기동으로 적에게 접근해 격멸한다’이다. 전투 환경에 맞게 작전 계획을 세우고 한정된 자원으로 어떤 무기를 가지고 싸울지 고민해야 한다. 표범처럼 날렵한 군대가 될 것인가, 코끼리같이 힘센 군대가 될 것인가 선택해야 한다. 표범이면서 코끼리일 수는 없는데 현재 군은 그게 가능한 것처럼 얘기한다.”

―정치권에선 모든 남자가 군대에 가는 징병제 대신 직업군인 체제인 모병제를 택해야 한다는 얘기도 나온다. 병력 자원이 줄어서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오종찬 기자

“나는 모병제 반대한다. 핵과 미사일로 무장한 북한과 맞서기 위해선 국민에게 상무(尙武) 정신이 필요하다. 군대 갈 사람이 없다고 하지만 예외 없이 모두 군대 가면 해결된다. 다리가 안 좋으면 PX병 하면 되지 왜 면제받나. 장교 식당에 가면 체력 등급 1급인 병사가 음식 나르고 있다. 신체 정신적으로 제일 뛰어난 병사들이 전방에서 나라 지키는 게 아니라 장군들 수발들고 있다. 이러니까 북한군이 한국군을 우습게 보고 미군 없으면 한방에 적화통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다.”

―한국군이 고쳐야 할 점은 뭔가.

“부하로부터 존경받는 군인, 지휘를 잘한 군인을 진급시켜야 한다. 그러면 우리 군이 훨씬 더 좋아질 것이다.”

―후배 장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나.

“군인은 진급할 때마다 ‘국가와 국민을 보호하기 위하여 헌법을 수호하고 어떠한 시련과 위험 속에서도 봉사와 헌신의 자세로 부여된 임무를 완수하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선서한다. 이대로만 하면 아무 문제 없다. 후배들이 스스로 되돌아보길 바란다.”

강아지 네 마리를 키우는 동물자유연대 회원인 그는 “앞으로 개와 고양이를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싶고 길 가다가 휴지 떨어져 있으면 주우면서 살겠다”고 했다.


-조선일보, 2016/9/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