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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졸업식서 "너무 좋은 직장 찾지 말라" 祝辭를 한… 김인권 여수애양병원 원장

하마사 2016. 9. 6. 16:40

[최보식이 만난 사람] "차라리 우리가 더 고생하면 되지,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지…"

[서울대 졸업식서 "너무 좋은 직장 찾지 말라" 祝辭를 한… 김인권 여수애양병원 원장]

"여기 와서 가장 마음에 든 건 '불쌍한 환자 있으면 재량껏 병원비 깎아주라'는 선교사 말씀, 감동적이었다"

"아내가 아이 업고 밥하던 장면 생생해… 지금 젊은 애들 보면 '아내가 저 나이에…' 짠해"

순천역(驛)에 내리니 비가 오고 있었다. 역에서 여수애양병원까지는 승용차로 30분쯤 걸렸다. 서울에서 보면 너무 멀리 떨어진 이 병원의 김인권(65) 명예원장이 며칠 전 서울대 후기 학위수여식에 초청받아 축사(祝辭)를 했다. "너무 좋은 직장을 찾지 말라"는 요지의 축사 내용도 화제가 됐다.

인공관절 수술의 명의(名醫)로 알려진 그는 올봄 정년을 맞았고 지금은 '계약직'으로 진료를 하고 있었다. 이날 오전 내가 방문했을 때는 7건의 인공관절 수술을 마친 뒤였다.

병원 내 선교사 동상 앞에서.
김인권 명예원장은“남들이 다 좋다고 하는 자리가 자신에게도 꼭 좋은 건 아니다”고 말했다. 병원 내 선교사 동상 앞에서. /최보식 기자

―서울대 졸업생들에게 "좋은 직장을 찾지 말라"고 했더군요?

"별로 좋지도 않은 여기에 저도 왔잖아요."

―맑은 공기에 바다가 보이는 풍경이 좋은데요.

"그래도 서울에 있으려고 하지, 여기에 있겠습니까. 저와 아무런 지연과 혈연, 학연도 없었습니다."

―좋은 직장이라는 게 어떤 겁니까?

"의사 같으면 다들 가고 싶어 하는 대학병원과 으리으리한 종합병원이지요. 하지만 남들이 좋다고 여기는 그런 직장들이 꼭 자신에게도 좋은 것만은 아닙니다. 경쟁이 치열해 자신의 가치를 지키는 게 쉽지 않아요. 서울대병원 등으로 간 내 의대 친구들을 보면 과장, 원장 등 높은 보직을 못 맡아 좌절하거나 상처를 받았어요."

―한편으로 그런 경쟁을 통해 자기 성장(成長)이 있는 거지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이런 데 와서 '도전'도 해볼 만하지 않나요. 내 적성을 살릴 수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 생각해보라는 거죠."

―어디에 가치를 두느냐에 따라 삶의 태도가 달라지지요.

"바로 그런 걸 생각하라는 겁니다. 서울에 올라갈 일도 없지만, 큰 병원에 있는 친구들을 만나면 환자 치료를 어떻게 하느냐에 대해선 얘기 안 하고 골프 나간 얘기만 해요. 왜 의사가 되려고 했는지, 우리가 의대를 다닐 때의 마음을 잃어버리고 있어요."

―그렇다고 원장님께서 여기서 무료 인술(仁術)을 베푸는 것은 아니지요?

"아니지요. 저도 영업을 해야 합니다."

―남들처럼 밥벌이로써 직업으로써 의사를 해왔는데, 왜 서울대 졸업식에 초청을 받을 만큼 주목을 받게 됐습니까?

"여기는 일반병원과는 약간 다릅니다. 선교사가 한센병 환자 치료를 위한 무료병원(1909년)으로 시작했습니다. 선교비로 운영해왔던 거죠. 그러다가 1985년 선교행정관이 철수했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의료 전통(傳統)은 남아 있습니다. 여기서는 돈 없어 치료를 못 받는 환자는 없습니다."

그는 공중보건의로 소록도 병원에서 3년 근무한 뒤 1983년 이 병원의 정형외과 과장으로 부임했다. 당시 서울대병원과 삼성병원, 서울아산병원에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제가 여기에 와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것이 '불쌍한 환자가 있으면 네 재량으로 병원비를 깎아주라'는 선교사의 말씀이었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입니까. 이는 의사가 꿈꾸는 겁니다. 우리가 서울대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할 때 정말 돈 없는 환자에게는 '몰래 도망가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행정 직원들이 알면 큰일나지만."

―병원 원장을 직접 맡아보니 진료비를 적게 받고 병원 운영이 가능했습니까?

"선교사 정신을 지켜가며 병원을 운영하려면 우리가 일을 훨씬 많이 해야 합니다. 하루에 15~30건 수술을 한다고 하면, 다른 병원에서는 믿지 않습니다. 굳이 안 해도 되는 검사나 입원 날수도 줄입니다. 안 그러면 정부가 정해놓은 의료 수가(酬價)를 편법으로 올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과도한 횟수는 수술의 부실화를 낳지 않습니까?

"부실하게 해서는 안 되고, 효율적으로 합니다. 오래 많이 하면 잘하게 됩니다. 팀워크도 좋아 쓸데없는 공정을 줄입니다."

―수술 한 건당 시간은?

"다른 병원에서는 인공관절 수술을 잘한다는 의사도 한 시간 걸립니다. 저는 절개해서 자르고 인공관절을 집어넣고 시멘트로 붙이는 데 10~12분이면 됩니다. 꿰매는 건 조수가 합니다. 과거에 일본인 의사 친구가 와서 15분 만에 수술하는 걸 보고 놀라워했습니다. 그 친구가 다음에 왔을 때는 12분으로 줄였어요."

―수술을 많이 하면 인센티브가 있습니까?

"우린 그런 거 없습니다."

―명의(名醫)로 소문났으니 특진료를 받습니까?

"저는 병원에 서비스를 하러 왔습니다. 그래서 특진을 안 하겠다고 했어요. 정년을 한 뒤로는 제게 몰리는 환자를 줄이려고 특진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환자 수가 많이 줄지 않아, 많이 할 때는 하루 30건 넘게 수술합니다."

―종합병원에서는 명의로 소문난 의사에게 진료 받으려면 6개월~1년씩 기다려야 하는데.

"그걸 자랑하는 의사도 있습니다. 저는 환자가 원하는 날에 수술을 해줍니다. 오늘 와서 내일 해달라고 하면 그렇게 해줍니다."

―환자가 몰리면 그게 가능합니까?

"이 병원은 접근성이 안 좋아 버스가 한 시간에 한 대 있습니다. 옛날에는 손수레를 타고 오기도 했어요. 아픈 환자들에게 미안하지요. 심지어 강원도, 제주도, 울릉도에서 오는 환자들도 있습니다. 어렵게 온 이들을 내가 일이 많다고 되돌려 보낼 순 없습니다. 차라리 우리가 더 고생하면 되지, 이왕 하는 수술에 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지, 멀리 집까지 되돌아갔다가 어떻게 다시 오게 합니까."

서울대병원에서 레지던트를 하던 그는 1977년 소록도 무의촌 진료팀에 뽑혔다. 그를 아끼는 교수조차 '전염될 수 있으니 가지 마라'고 말렸다. 그도 두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명색이 크리스천 의사로서 환자를 피하는 것은 부끄러운 짓이라고 여겼다. 두 달간 소록도 체험은 삶의 행로에서 중요한 계기가 됐다. 3년 뒤 그는 군복무 대신 공중보건의로 소록도 근무를 자원했다.

"결혼한 지 1년쯤 됐을 때였어요. 서울 출신인 아내는 스물여섯 살에 멋모르고 여기까지 따라왔어요. 한 달 반 된 첫 아이가 그렇게 많이 울었어요. 아내가 아이를 업고 밥하던 장면이 생생해요. 지금 젊은 애들을 보면 '아내가 저 나이에 애를 낳고 여기에 들어왔구나'하는 생각이 나 짠해요."

―요즘 세대에서는 '당신 혼자 내려가고 주말마다 오라'고 했을 텐데요.

"그렇죠. 그때는 아내가 착했어요. 가족은 같이 살아야 가족이라는 생각도 있었고요. 지금은 아내가 매사에 선생님처럼 바가지를 긁고 자기 주장대로 하려고 합니다."

―지금 와서 그러는 부인은 정말 훌륭합니다. 저는 20년 전부터 겪고 있습니다.

"(웃음) 그런가요?"

―소록도 생활 3년은 어떠했습니까?

"살 만했어요. 처음엔 환자들의 얼굴만 보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그건 안 보입니다. 저는 환자들의 굽은 손을 펴주는 수술을 했어요. 당시 소록도 원장님이 군인 신분인 저를 한센병 환자의 재활 수술 기술을 익히도록 인도까지 보내줬습니다."

―'소록도 천사'라는 오스트리아 출신의 마리안느·마르가레트 수녀와도 같이 일했겠군요.

"그럼요. 당초 이분들은 '죽으면 화장해서 소록도에 뿌려달라'고 했지만 나이가 들면서 자신들이 짐이 된다고 여겨 2005년 돌아가신 겁니다. 오스트리아 고향에서 생활이 어렵다는 걸 듣고 얼마간 생활비를 보탰지만…."

김인권 여수애양병원 원장(오른쪽)

―저는 2002년 이분들을 취재하러 소록도에 간 적이 있습니다. 제가 들어가니 소문을 듣고 피해버렸어요. 창 틈으로 십자가가 걸린 빈 방만 보고 왔는데 사과 궤짝 크기의 장롱이 유일한 가구였습니다. 침대 머리맡에 '下心(하심)'이라고 적힌 한지(韓紙)가 붙어 있었던 게 기억납니다.

"이분들이 환갑 때 금반지를 해드리면서 '이건 절대 다른 사람에게 주지 마세요'라고 했어요. 이번에 '만해대상' 수상자로 선정돼 오셨을 때 만나니 그 반지는 끼고 있었어요."

―이분들은 '만해대상' 상금 전액을 남미 볼리비아에 직업학교를 짓는 데 내놓았다고 하더군요.

"그럴 겁니다. 다 줘버려요. 무소유의 삶입니다."

―소록도에서 공중보건의를 마친 뒤 왜 여수애양병원을 택했습니까? 서울대병원 등에서 제의가 있었는데.

"한센병 환자의 굽은 손을 펴는 수술을 할 사람이 저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떠나면 그 수술이 없어지는 거예요. 계속할 수 있는 병원이 이곳이었지요."

―한센병 환자를 치료하다가 어떻게 인공관절 수술로 유명해졌습니까?

"병에도 유행이 있어요. 처음에는 한센병과 소아마비 치료를 주로 했어요. 백신 보급으로 그런 환자가 급격히 줄어들었어요 인공관절 수술로 방향을 튼 것은 1990년대부터였어요. 미국 선교부를 통해 인공관절 12세트와 함께 최고의 기술을 전수받았어요. 그렇게 해서 소문이 난 겁니다."

―소록도 근무까지 포함해 36년인데, 너무 오래 한곳에 묶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습니까?

"매일 환자가 바뀌니 변화무쌍합니다. 세월이 금방 흘러갔어요."

―직업적 회의감이 든 적은 없었습니까? 늘 보람이 있을 수는 없으니까요.

"맑은 날과 흐린 날이 교차하지요. 하지만 제가 주위의 반대에도 가족을 끌고 내려왔는데 '괜히 그랬다'고 어떻게 얘기합니까. 제가 여기를 선택했는데…. 항상 잘했다고 말합니다."

―일종의 자기 확신을 심는 겁니까?

"그럼요. 직원 180명 앞에서도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습니다. 제가 열심히 일해야 먹고살 수 있어요. 하루는 아침에 산에 올라갔다가 넘어져 발목뼈가 부러졌습니다. 6주간 깁스를 한 상태로 제가 맡은 수술을 다 했습니다."

―정말 모범생 같은 삶이군요.

"저는 낙관적입니다. 넘어지면 넘어진 자리에서 쉬었다 가고, 최선 아니면 차선으로 합니다. 최선의 덫에 걸려 꼼짝 못하고, 그게 아니면 죽는 줄 아는 친구들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그와 헤어지면서 두 달 전 내가 쓴 칼럼의 한 대목을 떠올렸다. '세상에는 성인군자만 사는 게 아니고, 너무 도덕을 강요하면 인간 본성에서도 멀어진다. 내가 말하려는 것은 공동체 유지를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직업적 윤리와 자존심이다. 직무가 자신에게 요구하는 것을 지키는 것이다. 압력과 청탁 때문에 자신의 직무를 벗어났다고 변명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직업적 자존심만 있어도 사회는 지저분해지지 않는다.'

-조선일보, 최보식이 만난 사람, 2016/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