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 실세가 감시·비판받는 것, 민주국가에서 당연한 현상일 뿐
건전한 비판을 대통령 흔들기와 혼돈하면 그게 민주주의 위기
대한민국이 君主政 아니라면 우병우 수석 물러나 수사받아야
봉건 왕조 시대에 왕은 나라님이었다. 나라 전체가 왕의 소유물이던 시절이다. 백성은 임금에게 적자(赤子), 즉 군주의 은혜를 기다리는 갓난아이에 불과했다. 영화 '덕혜옹주'가 묘사한 계몽 군주로서 고종과 덕혜옹주의 얼굴은 허구에 불과하다. 구한말 고종과 명성황후가 흥청망청 탕진한 왕실 전용 내탕금이 국가 예산의 대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 왕조 몰락에는 여러 원인이 있지만 가장 치명적인 것은 군주의 무능과 부패였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과 철저히 단절한 토대 위에 세워졌다. 왕의 절대 권력을 선언한 군주 주권제를 영원히 폐기하고 국민주권제를 정초한 것이 가장 중요한 변별점이다. 왕정에서 민주공화정으로 도약한 역사적 쾌거였다. 1919년 상해임시정부 헌법이 선포하고 1948년 제헌 헌법과 1987년 개정된 현행 헌법이 계승한 민주공화제는 나라의 근본 기틀이다. 국민주권에 입각한 민주공화정이야말로 대한민국의 국기(國基)인 것이다. 우리 근현대사는 진정한 민주공화정으로 나아가는 역사적 고투(苦鬪) 그 자체였다.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논란은 민주공화국의 틀을 흔드는 중대 사태다. 검찰 등 국가 사정기관을 총괄하는 우병우 수석의 불법·비리 가능성에 대한 탐사 보도는 언론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사회에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권력 실세일수록 언론과 시민사회의 감시와 비판 대상이 되는 게 민주주의 원리다. 이석수 특별감찰관의 수사 의뢰도 법치주의 시스템 위에서 정당하게 진행된 것으로 생각된다. 대통령도 사람인지라 특정 참모를 총애할 수는 있다. 하지만 대통령의 무한 신뢰가 특정인을 치외법권 지대에 올려놓은 상황은 법치주의를 위협한다. 국가의 공정성이 의심받는 우병우 사태야말로 최악의 국기 문란이 아닐 수 없다.
인류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제를 도입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은 전제 왕정을 단호히 거부했다. 독립전쟁의 영웅 조지 워싱턴은 황제로 즉위하라는 주위 권유를 일축하고 선출직 초대 대통령으로 국가에 봉사한 뒤 보통 시민으로 돌아갔다. 왕이 되기를 거부한 진짜 대통령이었다. 워싱턴이 미국의 국부(國父)로 존경받는 배경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은 카리스마적 정치 리더십이 유사(類似) 왕정의 부활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데 온 힘을 쏟았다. 대통령 권력을 견제하는 자유 언론과 강력한 의회, 타운홀 미팅 같은 풀뿌리 민주주의로 이루어진 미국식 공화정이 그 결과다.
존 F 케네디에서 버락 오바마까지 미국 대통령 10명이 명멸한 50여년 동안 백악관 출입 기자의 상징이었던 헬렌 토머스(Thomas·1920~2013)는 대통령 면전에서 직격탄을 날리기 일쑤였다. 어느 대통령도 그녀의 송곳 같은 공격을 피해 갈 수 없었다. 언론이 국민을 대신해 대통령에게 직접 질문을 던지면서 책임을 묻지 않으면 "대통령이 왕이 될 수도 있다"는 게 토머스의 변(辯)이었다. 자유 언론과 민주주의의 일체성을 웅변한 전설적 언론인의 탁견이다. 국정 운영에서 토론과 협의를 꺼리는 데다 기자회견도 거의 하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의 스타일을 예견한 것 같은 예리한 통찰이 아닐 수 없다.
'제왕적 대통령'은 대통령이 '선출된 군주'처럼 강대한 권력을 휘두르는 후진적 정치 풍토를 꼬집는 서술이다. 하지만 제왕적 대통령제는 원래 형용모순에 가까운 말이다. 프레지던트(President)는 결코 왕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어 president는 라틴어 praesidere에서 나왔는데 '앞'을 뜻하는 prae와 '앉다'를 의미하는 sedere의 결합이다. 문자 그대로 '앞에 앉은 사람'으로서 회의 사회자나 주재자를 지칭한다. 프레지던트라는 말 자체가 권력자가 일방통행식으로 지시하는 권위주의적 통치가 아니라 토론과 협의(協議)에 기초한 민주적 협치를 함축하는 개념이라는 사실이 의미심장하다.
권력의 핵인 청와대에 언론과 시민사회의 비판이 집중되는 건 민주 정부의 운명이다. 건전한 비판을 '대통령 흔들기'로 여기는 음모론처럼 민주주의 원리에 반(反)
하는 생각도 드물다. 적어도 우병우 민정수석이 현직에서 물러나 수사를 받는 게 법치주의의 최소 준칙이라는 데 대해서는 여야와 진보·보수를 넘어 의견이 일치한다. 정의로운 법이 지배하는 민주공화국에서는 그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 대통령 본인과 대통령의 총신(寵臣)도 예외가 될 수 없다. 대한민국은 군주정이 아닌 민주공화정이다. 대통령은 왕이 아니다.
-조선일보, 2016/8/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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