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계발/문학

감자 이야기

하마사 2016. 6. 27. 18:15

엄영주 님이 카톡으로 보내주신 글을 공유한다.

감자에 얽힌 이야기를 재미있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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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강원도 횡성에서 평창에 이르는 길, 그리고 속사에서 이승복 기념관을 거쳐 운두령에 이르는 길 옆 밭에는 연보라색 감자꽃이 한창이다.

감자! 너는 남미 안데스 산맥에서 스페인 정복자들에 의해 구대륙 유럽으로 이주한 지 얼마 안돼 쌀, 밀, 옥수수에 이어 비곡류 식품인 덩이 줄기로 4번째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아직 네 고향 안데스를 가보지 못하고 이 글을 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떠드는 것이 요즘 세태니 이해 바란다.

 

1950년대 국민학교 시절 나는 감자와 많은 인연이 있다. 방과 후 왜 따주는 줄도 모르고 어른들의 명에 따라 감자꽃을 따 주었다. 당시 애들도 농사 일을 돕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학교에서도 일을 많이 시켰다. 하천에서 돌을 주어 신작로에 깔고 길가 화단 가꾸기에 동원되기도 했다. 잔디 씨도 채취하여 학교에 냈다. 학생인권조례가 없던 시절이다. 이뿐아니라 나의 가슴 왼편은 국가 정책을 알리는 작은 플래카드를 달고 다녔다. 반공, 방첩, 반일은 기본이고 '잊지말자 6.25' 불조심까지 홍보하였다. 이 정책기조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것 같다. 이에 대한 보상인지는 몰라도 가끔 악수하는 그림이 그려진 큰 통에서 우유가루를 노나 주었는데 담아갈 봉지가 없어 책보에 담아가곤 했다. 어떤 애는 안받아 갔다. 먹고 설사를 되게 한 애다. 하긴 한반도에 개국한 이래 우유를 마셨다는 기록은 발견하지 못하니 이방에서 온 우유에 설사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후에 이 우유들은 미국 잉여농산물 처리법 PL480에 의해 준 것이라 것을 알게되었다.

 

꽃은 식물의 생식기관이다. 나머지 잎, 줄기, 뿌리는 영양기관이다. 언젠가 꽃이 생식기관이라 하자 강의를 듣던 분이 식물에 무슨 생식기관이 있느냐고 질문해 당황한 적이 있다. 감자도 어린 시절에는 잎, 줄기, 뿌리를 우선 자라게 하는 영양기관의 성장에 힘쓰다 어느 시점이 되면 생식 성장으로 전환한다. 즉 양분(동화산물)의 배치 우선 순위가 바뀌게 된다. 꽃과 열매에 동화산물을 우선 보낸다. 그런데 감자는 열매의 씨로 번식하는 것이 아니니 괜한 동화산물을 소비한다. 꽃을 따는 것은 이것을 막아 덩이 줄기인 감자를 크게하려는 것이다. 감자를 캐다보면 잎, 줄기가 무성한 것이 정작 감자는 작은 게 달려 있는 것을 흔히 본다. 감자 밭에 감자 꽃이 많은 것을 보면 몰라서가 아니라 일손이 부족하고 애들에게 일 시키는 것도 어렵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은 흰감자가 대부분이고 씨알도 굵지만 1950년대만 해도 자주색 감자가 대부분이고 씨알도 작으며 껍질이 두꺼워 이를 벗기기가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구나 눈이 흰감자보다 깊이 박혀 있어 자주 감자는 다 까도 자주색 점이 박혀 있어 이를 제거하려면 더 힘들었다. 집집마다 감자까는 숟갈이 있는 데 대부분 가운데가 닳아 움푹 패이게 된다. 감자는 저녁 무렵에 저녁 보리밥에 두려 많이 까는 데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장마 때는 언제가 저녁 때인지 모른다. 시계가 동네에 1~2개 있을 때다. 나는 지붕에 하얀 박꽃이 피었나 본다. 박꽃이 피어 있으면 감자를 까기 시작했다. 박꽃은 저녁 때 피어 밤새 피어 있다. 달밤에 초가 지붕에 핀 박꽃은 정말 청초하다.

감자를 캐다가 호미에 찍혀 상처나거나 씨알이 작은 감자는 큰 독에 물과 함께 넣고 물쿠는데(썩히는데) 이 때 나는 냄새는 최상급이다. 가을 은행이 떨어져 과육이 썩을 때 나는 냄새를 훨씬 능가한다. 이렇게 썩힌 감자로부터 감자 전분을 채취하여 감자전, 감자떡을 해 먹었다.

감자는 6.25전쟁 후 어려운 시기 구황 식물로 크게 기여한 작물이다. 일찌기 감자를 주식으로 한 나라가 있다. 유럽의 아일랜드는 1840년경 감자를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식량을 감자에 의존하였다고 한다. 감자는 당시 세금징수원이 오면 땅 속에 숨겨 세금을 면했다니 서민들에게 세금은 그때나 이때나 내기 싫은 것 같다.

아일랜드에 감자 재난이 1843~1844년에 닥쳤다. 곰팡이가 일으키는 감자잎 마름병이 유럽을 휩쓸었고 그 후 5년동안 모든 감자 농사가 파괴되었다고 한다. 100만명 이상이 굶어 주었고 또 100만명 이상이 미국으로 이주하였다니 또다른 민족 대이동이 아닌가. 이주자 후손 중에는 미국 대통령도 나왔다고 한다. 이 사건으로부터 배운 교훈이 있다. 흔히 농작물로 수확이 좋은 품종을 심기 마련인데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지금도 생각할 때이다. 종 다양성이 왜 중요한지 아일랜드 감자 재난이 말해 준다.

 

수확한지 시간이 흐른 감자는 눈에서 싹이 나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싹은 감자의 모든 눈에서 나지않고 감자의 한 쪽 끝에 있는 1~2개의 눈에서 나온다. 이를 끝눈우성 현상이다. 나는 이 현상을 생물학을 전공하고서야 알게되었다. 끝에 있는 눈이 싹이 트고 자라는데 우선권이 있고 곁눈은 생장이 억제 당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식물 호르몬 오옥신이 관여한다.

감자를 심기위해 씨감자를 만들 때 감자를 눈 부위별로 썰면 끝눈 우성 현상이 사라져 눈마다 눈마다 싹을 낼 수 있다. 눈별로 썰은 감자는 나무를 태운 재를 묻혀 밭에 심었다. 재는 양잿물을 내릴 때도 쓰는 데 이것이 씨 감자를 소독하는 것이다. 우리 선조들의 지혜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싹이 난 감자들은 빛을 받아 독성 물질인 솔라닌이 생긴 경우도 있을 수 있다. 한때 생감자를 갈아 먹는 건강법이 유행했는데 생각해볼 문제다.

 

아내는 카레라이스를 해주며 감자는 왜 안먹고 남기느냐고 묻는다. 사실 나는 어린 시절 감자를 많이 먹어서인지 감자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장에 가면 내 눈길은 감자에 머문다. 감자에 얽힌 얘기를 아내에게 해주지 않았다. 아들에게도 감자 때문에 고생한 얘기를 해주려 기회를 봤다. 나는 아들과 감자 산지 평창 스키장을 자주 간적이 있다. 공부는 안시키고 애하고 놀러만 다닌다는 말을 자주 들었던 때다. 감자떡, 감자전을 사주며 말을 꺼내보았는데 별 감동이 안가는 기색이다. 생각해 보면 어른들의 고생얘기를 감동하며 듣는 사람은 드문 것 같다.

 

감자는 문학작품의 제목으로 등장하였다. 김동인의 단편 감자다. 순박한 여자 주인공 복례가 망가져 가는 과정을 그린 단편인데 기억에 남는다. 감자로 왕서방과 인연을 맺는데 복례의 배꼽에 낀 때를 묘사한 부분은

사실보다 더 사실처럼 그려져 있다.

 

미국 옐로우 스톤 국립공원을 가는 길이다. 차가 중서부 아이다호주로 접어드니 자동차 번호판에 'FAMOUS POTATOES'라고 쓴 차들이 자주 눈에 띤다. 미국 자동차 번호판에는 그 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디자인 한 것이 이채롭다. 고향을 잃어버린 우리 번호판과는 다르다.

아이다호주는 미국 감자 생산량의 1/3을 차지하고 그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거대한 이동식 스프링쿨러가 물을 뿌려주는 감자 농장이 펼쳐진다. 우리는 감자 산지를 감자바우로 낮쳐 부르는데 여기는 딴판이다. 감자 피자까지 나와 있다. 감자 농사 흉년으로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 사람들이 심기 시작한지도 모르겠다.

그렇다 나는 지금까지 감자하면 가난, 산골 마을을 떠올렸다. 그런데 이제 감자는 프렌치 프라이, 스낵 등으로 변신하여 가치를 높이고 있다. 고급 레스토랑 스테이크 접시 옆에는 으례 감자가 자리하고 있다. 감자를 찌거나 구워 소금이나 사카린을 묻혀 먹던 내가 알던 감자에서 변신한지도 오래 된 듯 하다.

나의 어린 시절 배고픔을 달래주던 너를 그동안 경원시 한 내가 부끄럽다. 사람은 원래 그렇다 생각하고 다시한번 좋은 인연 맺고 지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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